1912년 종로구 신교동 땅에서 드러난 서울의 깊은 시간,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문화재 발굴의 이유
- 서울 HI
- 11월 29일
- 3분 분량
목차
1. 잊힌 동네 신교동의 문을 두드리다
2. 1912년 땅 문서를 펼치는 순간 시작된 낯선 전율
3. 대지 82필지가 말해주는 신교동의 삶의 결
4. 토지 기록 속 김씨 18필지, 이씨 13필지가 남긴 존재의 흔적
5. 일본인 5필지 소유가 말해주는 시대의 어두운 결
6. 오늘 서울의 문화재발굴과 지표조사가 중요한 진짜 이유
7. 성공 사례로 다시 확인되는 서울 발굴의 가치
8. 기록을 넘는 감동, 우리가 이어가야 할 이야기
본문
서울의 오래된 마을 이름 하나가 사람 마음을 이렇게 세게 잡아끄는 순간이 또 있을까.
그 이름은 신교동. 지금은 조용한 골목과 높은 담벼락이 이어지는 작은 동네일 뿐인데, 1912년의 땅 문서를 펼치는 순간 거기에는 놀라울 만큼 다양한 삶의 결이 얽혀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마치 시간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스치자 갑자기 균열이 열리고, 그 안에서 100년 전 사람들의 숨소리가 밀려오는 느낌. 이런 경험은 문화재발굴이나 유적발굴 같은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종이 한 장이 그 일을 대신해줄 때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마음을 어딘가 묵직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오래된 기록이 지루하다고 말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사실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그 속에 숨어 있다.

1912년 신교동 문서를 펼치고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건 82필지 전부가 대지였다는 사실이다. 논도 없고 밭도 없고 임야도 없이, 오롯이 ‘사람들이 살기 위해 만든 땅’으로 구성된 동네. 이 말을 천천히 곱씹으면 신교동이 어떤 동네였는지가 강렬하게 떠오른다. 도시 안에서 삶을 이어가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던 곳,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며 흔적을 남겼던 골목, 즉 도시의 본질이 가장 진하게 남아 있던 구역. 문화재발굴에서 흔히 말하는 ‘생활층’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친다. 땅 속에 쌓이는 것이 유물발굴의 대상이라면, 땅 위를 채우는 건 사람들의 삶이 만들어낸 켜들이다. 신교동은 땅 위와 땅 밑이 모두 강렬한 동네였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을 끄는 기록은 김씨 18필지, 이씨 13필지라는 숫자다. 단순히 필지 수로만 보면 많은 것 같지만, 이 숫자는 훨씬 큰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는 곧 한 동네 안에서 오랜 시간 자리 잡고 살아온 가문들의 존재를 뜻하고, 좁은 구역 안에서도 서로 다른 가족들이 세대를 이어 살아갔다는 신호다. 길이 이어지고 대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제사 준비가 한창이던 마루의 풍경까지 저 멀리 흐릿하게 떠오르는 느낌. 마치 당시 유적발굴 현장에서 토기 조각 하나를 발견했을 때, 그 조각이 누군가의 손에서 만들어져 집안에서 쓰였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깨닫는 그 감정과 비슷하다.

그런데, 신교동의 기록에는 또 다른 그림자가 남아 있고, 우리의 마음을 순간 멈추게 한다. 바로 일본인 소유의 5필지. 이 숫자는 단순한 소유 현황이 아니라, 1912년이라는 시대가 남긴 상처의 징표다. 조선인들의 삶의 터전 속에 스며들던 외세의 그림자. 집을 지키기 위해 버티던 사람들, 서서히 잠식되던 골목, 흔들리던 일상의 균열들. 문화재발굴조사장비로 땅을 한 삽 떴을 때 나오는 작은 흔적들처럼, 숫자 5필지에도 당시 사람들이 겪었을 긴장과 불안이 여전히 살아 있다. 그래서 이 기록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조여온다.

이런 사실을 마주할 때마다 오늘날 우리가 왜 문화재발굴, 유물발굴, 유적발굴을 하는지가 더 분명해진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금 형태를 갖추기까지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지켜왔는지 알아야 미래의 길이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서울의 지표조사나 시굴조사는 단순 절차가 아니라, 도시의 과거를 보호하기 위한 ‘기억의 첫 관문’이다. 그리고 문화재발굴과정은 그 기억을 더 깊고 단단하게 남기기 위한 정교한 작업이다. 땅은 잊지 않는다. 우리가 잊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발굴조사원과 유적발굴단은 서울 곳곳에서 시간을 읽고, 잊힌 사람들의 흔적을 다시 빛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서울에서는 이미 수많은 성공 사례들이 이를 증명해왔다. 지하 개발 전에 진행된 지표조사에서 예상치 못한 조선 후기 우물터가 발견되었던 사례, 주택 재건축 현장에서 조선시대 토기층과 인골이 발견되어 주변 환경이 완전히 재조명된 사례, 그리고 청계천 일대에서 확인된 유물발굴작업 이후 지역 전체의 역사성이 완전히 다른 빛으로 보이게 된 이야기들까지. 한 번 발굴에 성공하면 단순히 유물이 드러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가치가 확 바뀌고, 그 지역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까지 바뀌는 게 놀라운 지점이다. 그래서 신교동의 작은 땅 기록도 언젠가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거라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그렇게 다시,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려던 순간 마음이 울컥해진다. 1912년 신교동에 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남긴 자취가 100년 뒤 누군가의 가슴을 이렇게 흔들리게 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 순간 이미 시간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록을 읽지만 기록 또한 우리를 읽는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서울의 땅은 살아 있고, 우리의 기억은 그것을 붙잡는 실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하는 문화재발굴, 지표조사, 발굴조사, 유적발굴단의 모든 노력은 과거를 위한 일이면서 동시에 미래를 위한 가장 따뜻한 배려다.
사람이 남긴 흔적을 다시 만나는 일.
그 일은 결국, 사람을 다시 이해하는 일이다.
그 일은 결국,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느껴지는 건 설명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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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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