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숭인동의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로 다시 깨어난 시간의 흔적
- 서울 HI
- 11월 24일
- 4분 분량
목차
1장. 처음부터 강렬하게 끌리는 숭인동의 숨겨진 진짜 이야기
2장. 1912년 숭인동 땅을 펼쳐보니 드러난 놀라운 사실들
3장. 논과 밭, 대지와 사사지를 통해 읽어내는 옛 서울의 도시 구조
4장. 성씨별 토지 소유,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인 토지 등 잊어선 안 될 기록
5장.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재발굴의 실제 과정과 장비, 그리고 발굴조사원의 하루
6장. 숭인동 사례로 보는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의 흐름
7장. 성공적인 유적발굴단의 사례와 우리가 얻은 교훈
8장. 지금, 당신이 숭인동을 다시 보게 될 이유
9장. 마무리의 감동,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가 남긴 메시지
1장. 처음부터 강렬하게 끌리는 숭인동의 숨겨진 진짜 이야기
우리는 서울을 매일 걸어 다니지만, 그 발밑에 100년 전 사람들이 남긴 땅의 숨결이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고 산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지금은 활기찬 골목, 붐비는 생활권을 떠올리지만, 1912년으로 돌아가 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숭인동의 구조, 어떤 사람들이 살았고 어떤 땅이 펼쳐져 있었는지, 그리고 그 사이사이 남겨진 기록들이 오늘의 문화재발굴과 유물발굴작업의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이 글을 다 읽기도 전에 당신은 아마 이런 감정이 들 것이다.
왜 이제야 이런 정보를 알았을까.
왜 서울의 진짜 역사는 그동안 내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제부터 숭인동의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펼쳐보려 한다.

2장. 1912년 숭인동 땅을 펼쳐보니 드러난 놀라운 사실들
숭인동은 1912년 기준 319필지, 269,647㎡ 규모로 기록된다. 지금은 상가와 주거가 뒤섞이지만 당시엔 훨씬 더 자연과 가까운 구조였다.
논은 9필지 37,107㎡로,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넓이가 숭인동에 펼쳐져 있었다.
대지는 전체 필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218필지 46,522㎡로 당시 생활 중심지는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밭의 규모는 놀라운데, 88필지 172,413㎡에 이르렀다.
이 넓은 밭은 지금 우리가 보는 숭인동의 좁은 골목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사사지는 3필지 1,801㎡가 있었고, 임야는 단 하나의 필지지만 같은 면적 1,801㎡로 기록된다.
국유지는 18필지였고, 이곳에는 국가 운영과 공공 기능이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3장. 논과 밭, 대지와 사사지를 통해 읽어내는 옛 서울의 도시 구조
1912년의 논과 밭의 비율을 보면 숭인동은 단순한 도시 공간이 아니라 농경과 생활이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지역이었다.
밭이 172,413㎡로 가장 넓었다는 사실은 먹거리 공급의 근접성을 의미하고, 생활 중심지인 대지 또한 218필지로 상당했다.
이 조합은 현대의 도시와 달리, “생활과 생산이 동시에 이루어진 도시형 농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특징은 문화재발굴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유적발굴단이 추적해야 할 생활 흔적과 경작 흔적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화재발굴조사장비를 들고 현장에서 토층을 분석하는 발굴조사원들이 숭인동과 같은 지역을 조사할 때, 이 복합 구조는 흔적 판독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4장. 성씨별 토지 소유,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인 토지 등 잊어선 안 될 기록
1912년 숭인동을 보면 단순한 농촌·도시가 아니라 당시 사회구조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씨가 52필지, 김씨는 그 뒤를 이어 45필지를 가졌고, 박씨 28필지, 조씨와 최씨가 각각 12필지씩을 가지고 있었다.
토지의 흐름이 어느 가문에 집중되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하지만 더 중요한 기록이 있다.
14필지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였고, 일본인이 보유한 땅도 10필지나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숫자들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그 시대의 강제성, 경제 구조, 정치적 영향력이 숭인동까지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는 증거다.
이 기록은 오늘날 유물발굴작업을 통해 당시 건물 터, 기와 조각, 생활 쓰레기층 등을 발견했을 때 해석을 더 정확하게 해주는 열쇠가 된다.

5장.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재발굴의 실제 과정과 장비, 그리고 발굴조사원의 하루
문화재발굴은 단순히 땅을 파는 작업이 아니다.
지표조사로 시작해 지형을 읽고, 시굴조사로 토층을 확인한 뒤, 표본조사로 상세 지점을 선정하고, 최종 발굴조사에 들어가는 긴 흐름이 있다.
발굴조사원들은 하루 종일 토양을 자르고 호미와 브러시를 이용해 미세한 흔적을 찾는다.
유적발굴단은 GPS 측량기, 드론, 굴삭기, 토양분석기 같은 문화재발굴조사장비를 총동원한다.
숭인동처럼 조경·농경·생활유적이 혼재한 지역은 이런 과정 속에서 다양한 층위의 정보를 한꺼번에 제공한다.
이 때문에 서울의 발굴은 지방보다 훨씬 복잡하면서도 매우 의미 있다.
6장. 숭인동 사례로 보는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의 흐름
숭인동 같은 지역을 조사할 때는 가장 먼저 지표조사를 통해 표면 유물을 확인한다.
그다음 작은 구멍을 파서 토층을 확인하는 시굴조사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유물이나 구조 흔적이 확인되면 표본조사를 확대해 정확한 건물터나 유적의 경계를 파악한다.
마지막으로 전체 면적을 열고 유물발굴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과정 중 발굴조사원들은 잔존 기와, 토기 조각, 유리구슬, 생활 도구 등을 발견하며 각각의 유물이 어떤 시대의 흔적인지 판독한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은 이런 복잡한 환경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사례를 만들어왔다.
7장. 성공적인 유적발굴단의 사례와 우리가 얻은 교훈
서울 곳곳의 발굴사례를 보면 숭인동처럼 과거 토지 구조가 명확할수록 유적발굴 성공률이 높다.
예로, 종로의 한 지역에서 옛 골목길이 토층에서 발견되었고, 그 자료는 이후 도시정비 사업에 직접 활용되었다.
또 다른 사례에서는 조선 후기 생활유적이 대규모로 발견되며 도시문화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숭인동의 토지 기록은 앞으로의 발굴에서도 결정적 단서가 될 것이다.
8장. 지금, 당신이 숭인동을 다시 보게 될 이유
길을 걸을 때 보이는 평범한 골목도 100년 전에는 밭이었을 수 있다.
당신이 매일 다니는 길 아래에 누군가의 삶, 발자국, 도구가 묻혀 있을지 모른다.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문화유산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기록을 알고 관심을 갖는 일이다.

9장. 마무리의 감동,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가 남긴 메시지
숭인동의 1912년 기록은 단순한 옛 문서가 아니라 서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해주는 생생한 증언이다.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문화재발굴은 과거를 찾는 일이 아니라, 지금의 서울을 더 깊이 이해하고 미래를 더 정확히 설계하는 일이라는 것을.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는 오늘도 그 일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
시간 속에 묻힌 이야기를 다시 꺼내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일.
그리고 그런 일은 반드시 누군가는 해야 한다.
이 글이 당신에게 작은 울림이 되길 바란다.
서울의 땅은 말이 없지만, 결코 침묵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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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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