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봉익동의 땅과 사람들 — 서울의 시간 속으로 떠나는 문화유산 지표 조사 이야기
- 서울 HI
- 2025년 10월 9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1일
종로 한복판에 밭이 있었다 — 1912년 봉익동이 숨겨온 이야기
168필지의 기와집, 도시 한복판에 존재했던 밭 2필지, 그리고 이씨·김씨·박씨가 나눠 가진 마을의 권력 구조 —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봉익동의 시간
목차
1. 서울의 심장, 봉익동의 1912년 풍경
2. 168필지의 삶의 터전 — 집과 대지 이야기
3. 밭 2필지, 종로 한복판에 남아 있던 농업의 흔적
4. 이씨·김씨·박씨가 이끌던 마을의 권력 지도
5. 일본인과 중국인의 토지 — 변화의 물결이 스며들다
6. 문화유산 지표조사로 다시 읽는 봉익동
7. 서울 문화유산 발굴의 의미와 조사 단계
8. 봉익동 발굴 성공 사례와 경복궁 서측 프로젝트
9. 서울의 땅이 전하는 메시지
10. 마무리 — 시간의 흔적을 걷는다는 것
종로를 걷다 보면 늘 바쁘다. 사람도 많고 건물도 많고 차도 많다. 그런데 딱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 발아래 땅이다. 지금 네가 밟고 있는 이 종로 한복판, 100년 전엔 어떤 모습이었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냐. 1912년 봉익동은 기와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골목마다 아이들 뛰는 소리가 들리고, 놀랍게도 밭이 있던 동네였다. 종로에 밭이라고?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그게 시작일 뿐이다.
이 글은 1912년 봉익동 토지 기록을 통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왜 지금 이 시대에도 반드시 필요한지를 이야기한다. 읽다 보면 서울을 걷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장담한다.

1. 서울의 심장, 봉익동의 1912년 풍경
1912년 종로구 봉익동. 전체 면적은 약 34,294㎡, 지금 기준으로는 약 1만 370평 규모였다. 지금의 종로 중심가 한복판에 이만한 땅이 오롯이 사람들의 생활 공간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조선 시대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던 이 동네는 1912년에도 여전히 서울 생활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였다.
170필지
총 필지 수
34,294㎡
총 면적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준
근대화의 초입에 놓인 1912년의 봉익동은 전통과 변화가 충돌하는 복잡한 공간이었다. 조선식 기와집이 골목을 채우고 있는 한편,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이 동네 곳곳의 경계를 새로 긋고 있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 시기 자료를 특히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과 근대의 경계가 겹쳐지는 지층이 가장 풍부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2. 168필지의 삶의 터전 — 집과 대지 이야기
봉익동 전체 170필지 중 168필지, 32,340㎡가 대지였다. 전체의 약 98%가 사람들이 실제로 집을 짓고 살던 주거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낮은 기와집들이 골목을 따라 이어지고, 좁은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우물가에서 이웃들이 하루의 소식을 나누던 풍경이 168이라는 숫자 뒤에 가득 들어 있다.
168필지
대지 (주거용)
32,340㎡
대지 총면적
약 98%
전체 면적 비율
이 압도적인 대지 비율은 봉익동이 얼마나 촘촘한 주거 밀집 지역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순히 집의 수가 아니라, 집 하나하나에 가족의 역사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집엔 대대로 장사를 이어온 상인 가문이 살았을 것이고, 어떤 집엔 관직을 꿈꾸는 젊은 유생이 세를 들어 살았을 것이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구역은 건축 유구와 생활 유물이 가장 집중적으로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 핵심 발굴 대상 구역이다.
168필지 대지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조선 후기 건축 기단, 기와 파편, 생활 도기 등이 집중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 1순위 조사 구역에 해당한다. 발굴을 통해 당시 봉익동 주민들의 생활 문화를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

3. 밭 2필지, 종로 한복판에 남아 있던 농업의 흔적
이게 제일 충격적인 부분이다. 봉익동에는 2필지, 1,953㎡의 밭이 있었다. 지금의 종로 한복판을 생각하면 상상조차 어렵다. 빌딩과 도로가 빽빽한 이 자리에 불과 100년 전 누군가가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수확을 기다리던 밭이 있었다는 것이다.
밭 필지 수
2필지
도심 속 농경지
밭 면적
1,953㎡
약 590평 규모
이 밭은 단순한 농사터가 아니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귀한 공간이었고, 채소와 곡식이 이 땅에서 자라 주민들의 밥상에 올랐다. 남은 것은 인근 시장에서 팔렸을 것이다. 1912년 서울이 지금처럼 완전한 도시가 아니라, 농업의 흔적을 여전히 품고 있던 과도기적 공간이었음을 이 2필지가 가장 생생하게 증명한다.
"종로에 밭이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1912년 서울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과거 밭 지역은 농업 관련 유물, 토양 분석 시료, 수리 시설 흔적이 발견될 수 있는 특수 조사 구역으로 분류된다. 봉익동의 이 2필지도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당시 도시 농업의 실체를 밝히는 귀중한 단서가 될 수 있다.
4. 이씨·김씨·박씨가 이끌던 마을의 권력 지도
봉익동의 토지 소유 현황을 성씨별로 분석하면 이 동네의 권력 구조가 선명하게 보인다. 1912년 봉익동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진 성씨는 이씨로 36필지를 차지했다. 김씨가 32필지로 바로 뒤를 이었고, 박씨가 11필지를 보유했다.
순위 | 성씨 | 필지 수 | 비율 |
1위 | 이씨 | 36필지 | |
2위 | 김씨 | 32필지 | |
3위 | 박씨 | 11필지 |
이씨와 김씨가 합쳐서 68필지. 전체 170필지의 40%를 두 성씨가 나눠 가졌다. 이건 단순한 부동산 통계가 아니다. 마을에서 발언권이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의 의견이 동네 일에 반영됐는지를 보여주는 권력 지도다. 조선 후기부터 형성된 가문 중심 생활 구조가 1912년에도 여전히 살아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이 데이터는 발굴 구역별 예상 유물의 성격을 예측하는 데 활용된다. 이씨·김씨 집중 구역에서는 두 가문의 생활 방식과 시대적 취향이 반영된 유구와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5. 일본인과 중국인의 토지 — 변화의 물결이 스며들다
1912년 봉익동에는 일본인이 4필지, 중국인이 1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숫자만 보면 작아 보이지만, 이 시기를 기억해야 한다. 강제 병합으로부터 2년, 조선 땅에 일제의 행정 체계가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던 바로 그 시점이다.
일본인 소유
4필지
상업·거류지 기반 추정
중국인 소유
1필지
교역·상업 활동 추정
일본인 소유 4필지는 당시 서울 상권의 핵심 구역을 중심으로 부동산을 확보해 나가던 흐름의 일부였다. 이들의 소유지에서는 문화재 발굴 시 일본식 기와, 근대식 벽돌 구조물, 일본산 생활 도기 파편이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단순한 건축 유물이 아니라 문화 침투의 물질적 증거로 평가된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은 근대적 토지 관리라는 명목 아래 진행됐지만, 실제로는 일제가 조선 토지의 소유 구조를 파악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었다. 봉익동의 일본인 소유 4필지는 그 흐름의 시작점을 보여준다.
중국인 소유 1필지 역시 의미가 있다. 당시 종로 일대에는 조선과 교역하던 중국 상단과 연결된 무역상들이 활동했고, 봉익동에 중국인 소유 토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 동네가 이미 다층적인 문화와 경제가 교차하는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6. 문화유산 지표조사로 다시 읽는 봉익동
지표조사는 단순히 땅을 훑어보는 행위가 아니다. 토지의 구조, 생활 흔적, 건축 잔재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그 땅이 가진 역사적 잠재력을 평가하는 체계적인 과정이다. 봉익동처럼 주거 밀집도가 높고, 다양한 성씨 가문이 공존했으며, 외래 문화의 침투 흔적까지 남아 있는 지역은 지표조사의 가치가 특히 높다.
실제로 문화재 발굴 전문기관들은 1912년 토지대장 같은 초기 근대기 자료를 지표조사의 핵심 참고 문헌으로 활용한다. 어떤 용도로 쓰인 땅인지, 누가 소유했는지, 어떤 문화권의 사람들이 거주했는지를 알아야 그 아래에 어떤 유구와 유물이 있을지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seoulheritage.org가 서울 전역의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7. 서울 문화유산 발굴의 의미와 조사 단계
서울 도심 문화유산 발굴은 현대 도시 속에 숨어 있는 과거의 층위를 찾아내는 여정이다. 이 조사는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단계적으로 진행되며, 각 단계마다 그 이후 방향이 결정된다.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정밀발굴조사→보고서 작성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상 징후가 없으면 다음 단계 없이 공사가 진행될 수 있다. 반대로 유적 가능성이 확인되면 시굴조사로 이어지고, 중요 유구가 확인될 경우 정밀발굴조사가 진행된다. 이 체계가 제대로 작동할 때, 도시 개발과 역사 보존이 충돌하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다. 봉익동처럼 역사적 밀도가 높은 지역은 첫 단계인 지표조사부터 철저하게 진행하는 것이 결국 전체 사업의 리스크를 가장 효과적으로 줄이는 방법이다.
지표조사를 사전에 충분히 받아두면 공사 중 예기치 않은 유물 발견으로 인한 장기 공사 중단 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 모르고 맞닥뜨리는 것보다 알고 준비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 양면에서 모두 유리하다.
8. 봉익동 발굴 성공 사례와 경복궁 서측 프로젝트
봉익동 일대 재개발 과정에서 진행된 발굴조사는 이미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다. 20세기 초 주거지 흔적과 도로 구조가 확인됐고, 조선 후기 기와와 일제강점기 생활 유물이 같은 지층에서 함께 출토됐다. 두 시대의 흔적이 한 자리에서 나왔다는 것은 봉익동이 시대의 경계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는 증거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의 대표적 성공 사례인 경복궁 서측 발굴 프로젝트도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조사에서는 조선 시대 관청 터와 근대기 주거 흔적이 함께 발견되며 서울의 도시 변천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결과가 나왔다. 발굴이 개발의 걸림돌이 아니라 도시의 품격을 높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 프로젝트가 가장 잘 증명한다.

9. 서울의 땅이 전하는 메시지
1912년 봉익동의 기록을 들여다볼수록 한 가지가 선명해진다. 땅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168필지의 기와집, 2필지의 밭, 이씨와 김씨의 권력 구조, 일본인과 중국인의 침투 흔적. 이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무심코 걷는 종로 아래에 층층이 쌓여 있다.
문화유산 지표조사는 그 층을 하나씩 걷어내어 기억을 꺼내는 일이다. 이름도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살다 간 사람들을 역사 속으로 다시 불러오는 일이기도 하다. 재개발과 도시 정비가 계속되는 서울에서 이 과정이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걸어가는 종로의 길 위에는 100년 전 사람들의 발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땅의 이야기를 읽는 순간, 비로소 서울이라는 도시의 진짜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10. 마무리 — 시간의 흔적을 걷는다는 것
오늘 종로 봉익동 근처를 지나게 된다면, 잠깐 멈춰서 발아래를 한 번 내려다봐 줬으면 한다. 이씨 가문의 기와집 마당이었던 자리일 수도 있고, 김씨 가문 아이들이 뛰놀던 골목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도시 한복판에서 채소를 키우던 2필지 밭 중 한 귀퉁이였을 수도 있다.
168필지, 34,294㎡. 이 숫자 뒤에는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한 수백 명의 하루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짓고, 골목에서 이웃을 만나고, 밭에서 수확한 채소를 들고 시장을 향하던 그 사람들. 그들의 삶이 지금 이 땅 아래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은 그들에게 보내는 가장 조용하고 진지한 인사다.

🏛️
168필지 아래, 누군가의 하루가 잠들어 있다
종로 한복판에 밭이 있었고, 이씨와 김씨가 마을을 나눠 가졌고, 일본인의 필지가 그 사이를 파고들던 1912년의 봉익동. 그 복잡하고 생생한 시간이 지금도 땅 아래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는 그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가장 조용한 약속이다.
건축이나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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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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