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봉익동의 땅과 사람들 — 서울의 시간 속으로 떠나는 문화유산 지표 조사 이야기
- 서울 HI
- 10월 9일
- 4분 분량
목차
서울의 심장, 종로구 봉익동의 1912년 풍경
봉익동의 집과 대지 — 168필지의 삶의 터전
밭 2필지, 그 속에 담긴 일상의 숨결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이씨, 김씨, 박씨가 이끌던 마을
일본인과 중국인의 토지 소유 — 변화의 물결이 스며들다
1912년의 봉익동, 문화유산 지표 조사로 다시 읽다
오늘날 서울 문화유산 발굴의 의미와 조사 과정
봉익동에서 찾은 성공적 문화재 발굴 사례
서울의 땅이 전하는 메시지 — 우리의 뿌리를 다시 묻다
마무리하며 —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로 본 시간의 흔적

1.서울의 심장, 종로구 봉익동의 1912년 풍경
서울 한복판, 종로의 좁은 골목 사이를 걷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곳에는 100년 전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1912년,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의 종로구 봉익동은 오늘날의 화려한 서울 중심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 시절의 봉익동은 근대화의 초입에 있던 도시였고, 전통과 변화가 맞물린 복잡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 흔적은 지금도 문화유산 발굴 조사와 지표 조사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그 당시 봉익동의 전체 면적은 약 34,294㎡에 달했다. 하지만 그 땅 위에 존재하던 삶은 숫자 그 이상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서울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봉익동은 조선시대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던 생활 중심지였다. 문화재 조사자들의 눈으로 바라본 1912년의 봉익동은 마치 한 장의 오래된 지도가 살아 숨 쉬는 듯했다.
2.봉익동의 집과 대지 — 168필지의 삶의 터전
1912년 당시 봉익동에는 총 168필지, 32,340㎡의 대지가 있었다. 지금의 빌딩 숲 대신, 그때의 봉익동은 낮은 기와집과 한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장터의 북적임이 골목을 메웠다.
이 168필지는 단순히 집의 수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좁은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아낙네들은 우물가에서 물을 길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소식을 나누었다. 이런 생활상은 오늘날의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발견되는 도기 파편이나 기와 조각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3.밭 2필지, 그 속에 담긴 일상의 숨결
놀랍게도 봉익동에는 2필지, 약 1,953㎡의 밭이 존재했다. 지금의 종로 일대를 떠올리면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당시 이 밭은 도시 한복판의 귀한 자원이었다. 쌀과 채소를 심어 자급자족하던 생활이 가능했으며, 주민들에게는 소박하지만 귀중한 생계의 터전이었다.
지표 조사를 통해 밝혀진 이 밭의 흔적은 도시화 이전의 봉익동이 얼마나 다양한 삶의 형태를 품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러한 유적의 흔적을 통해 단순한 토지 용도 이상의 사회적 구조와 생활상을 복원하고 있다.
4.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이씨, 김씨, 박씨가 이끌던 마을
1912년 봉익동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성씨는 이씨였다. 무려 36필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뒤를 김씨가 32필지, 박씨가 11필지로 따랐다.
이 성씨 분포는 당시 마을의 구성과 세력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봉익동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서울 중심부의 상권과 관청, 서민의 생활공간이 복잡하게 얽힌 곳이었다. 문화재 조사에서는 이러한 토지 분포가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도시 변화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5.일본인과 중국인의 토지 소유 — 변화의 물결이 스며들다
1912년의 봉익동에는 일본인이 4필지, 중국인이 1필지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비록 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이 변화는 당시 서울에 스며들기 시작한 근대화와 외세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이들은 주로 상업 활동이나 거류지 기반의 소유 형태를 취했으며, 봉익동은 점차 다문화적 요소가 형성되는 공간으로 변화했다. 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나타난 일본식 기와나 생활 도구는 당시의 국제적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6.1912년의 봉익동, 문화유산 지표 조사로 다시 읽다
문화유산 지표 조사는 단순히 땅을 파는 행위가 아니다. 땅속에 묻힌 시간의 기록을 읽어내는 일이다. 봉익동의 1912년 자료는 서울의 도시 형성과정을 해석하는 핵심 단서로, 현재도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분석하고 있다.
지표 조사 단계에서는 토지의 구조, 생활 흔적, 건축 잔재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유적의 보존 가치를 평가한다. 봉익동의 경우, 주거지 흔적과 도로망, 조선 후기 건축양식의 변화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꼽힌다.
7.오늘날 서울 문화유산 발굴의 의미와 조사 과정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는 현대 도시 속에 숨어 있는 과거의 흔적을 찾아내는 여정이다. 발굴 과정은 사전 지표 조사 → 표본 조사 → 시굴 조사 → 본 발굴 조사로 이어진다.
이 조사들은 단순히 학문적 목적만이 아니라, 도시 개발과 역사 보존의 균형을 위한 필수 절차다.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 등지에서 진행된 여러 조사들은 서울의 정체성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성공적인 사례로는 경복궁 서측 문화유산 발굴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해당 조사에서는 조선시대 관청지와 근대기 주거 흔적이 함께 발견되어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성과는 봉익동의 문화유산 조사에도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8.봉익동에서 찾은 성공적 문화재 발굴 사례
최근 봉익동 일대의 재개발 과정에서 진행된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는 20세기 초 주거지 흔적과 도로 구조가 명확히 드러났다. 특히 조선 후기 기와와 일제강점기 생활 유물이 함께 출토되면서, 봉익동이 시대의 변화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발굴 기관 관계자들은 이를 “서울의 변천사를 압축한 시간의 단면”이라 표현했다. 이처럼 봉익동의 발굴 성과는 단순한 유물 수집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9.서울의 땅이 전하는 메시지 — 우리의 뿌리를 다시 묻다
100년 전의 봉익동이 남긴 170필지의 흔적은 오늘날 우리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땅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세대의 발자취가 켜켜이 쌓인 역사 그 자체다.
문화유산 지표 조사는 이러한 시간의 흔적을 읽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일이 아니라, 미래의 도시를 설계하기 위한 기반이기도 하다. 봉익동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서울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10.마무리하며 —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로 본 시간의 흔적
1912년 봉익동의 기록은 오늘날 우리에게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168필지의 대지, 2필지의 밭, 그리고 이씨와 김씨, 박씨가 함께 만들어낸 마을의 기억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서울의 문화유산 발굴 조사는 이러한 역사를 되살려 현재와 이어주는 다리다.
우리가 걸어가는 종로의 길 위에는 100년 전 사람들의 발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땅의 이야기를 읽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서울이라는 도시의 진짜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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