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명륜동3가, 땅 위에 남겨진 사람들의 삶과 기억
- 서울 HI
- 9월 28일
- 4분 분량
목차
명륜동3가의 역사적 뿌리와 문화적 배경
1912년의 토지 규모와 구조적 특징
주거지와 대지, 사람들의 생활상
사사지의 의미와 당시 사회의 종교적 흔적
밭과 농경지의 존재가 말해주는 도시의 이면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과 그 속에 담긴 권력 구조
국유지의 의미와 공동체적 활용
서울 문화재 발굴,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역사 탐구
1912년 명륜동3가와 오늘날의 서울 사회 비교
문화재 발굴 성공 사례와 보존의 가치
우리가 지켜야 할 미래의 명륜동3가
마무리와 울림
1912년, 지금의 종로구 명륜동3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새겨진 거대한 기록장이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걸어 다니는 명륜동3가 골목길은 카페와 전통 한옥이 뒤섞여 있고,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오가는 젊은 기운이 넘치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100여 년 전인 1912년 이곳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명륜동3가는 총 153필지, 99,488㎡의 땅이었고, 그 위에는 집과 밭, 사사지와 국유지가 혼재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주거지, 상업지, 공공지와 같은 다양한 용도가 공존한 셈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땅의 용도만 달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수백 명의 삶, 성씨 공동체의 결속, 시대적 배경 속에서의 선택과 희망이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1. 명륜동3가의 역사적 뿌리와 문화적 배경
명륜동은 성균관이라는 교육 기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성균관은 조선 시대 최고 학부로서, 단순한 학교 이상의 상징성을 지녔습니다. 그 주변의 마을, 즉 명륜동 일대는 유생과 학자, 관료들이 오가며 형성한 지식인의 마을이자 전통과 의례가 이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이런 뿌리 위에 1912년의 명륜동3가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 단순히 ‘주거지’라 부르기에는 그 속에 담긴 문화적, 역사적 의미가 훨씬 깊었습니다.
2. 1912년의 토지 규모와 구조적 특징
토지조사사업의 기록에 따르면 명륜동3가는 총 153필지, 99,488㎡의 면적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서울은 근대적 도시로 변모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토지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주거 공간이 넓게 자리한 가운데 밭이 존재했고, 사사지와 국유지가 함께 분포해 있던 모습은 서울이 여전히 전통적 생활과 농업적 흔적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3. 주거지와 대지, 사람들의 생활상
1912년 명륜동3가에는 80필지, 62,929㎡의 대지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집들이 모여 있던 생활의 중심지였습니다. 기와집이 빽빽하게 들어선 곳도 있었고, 일부는 소박한 초가로 꾸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담벼락 사이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장독대에서는 장맛이 배어 나왔을 풍경이 떠오릅니다.
대지는 단순히 ‘거주지’ 그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집은 가문의 터전이자 사회적 위상을 나타내는 상징이었기 때문에, 대지를 얼마나 넓게 소유했는지가 곧 지역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었습니다.
4. 사사지의 의미와 당시 사회의 종교적 흔적
명륜동3가에는 1필지, 191㎡의 사사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규모는 작았지만, 그 상징성은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사사지는 불교 사찰이나 제향을 위한 공간으로, 당시 공동체의 신앙과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이 작은 땅 위에서는 제사가 지내졌을 수도 있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공동의 안녕을 기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사지는 종교적 신앙을 넘어, 공동체가 서로 연결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5. 밭과 농경지의 존재가 말해주는 도시의 이면
도시라 해도 1912년의 서울은 여전히 농업과 긴밀히 연결된 공간이었습니다. 명륜동3가에는 72필지, 36,367㎡의 밭이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채소를 기르고 곡식을 재배하며 자급자족을 이어갔습니다. 농산물은 일부는 가족의 식탁으로, 일부는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생활 경제를 지탱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서울은 언제나 도시였다”라는 인식을 뒤흔듭니다. 당시 서울은 전통 농경과 근대 도시화가 공존하는 과도기적 공간이었습니다.
6.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과 그 속에 담긴 권력 구조
명륜동3가의 토지 소유 현황은 흥미롭습니다.
이씨: 56필지
김씨: 32필지
홍씨: 16필지
양씨: 14필지
오씨: 10필지
특정 성씨가 다수의 땅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지역 사회의 권력 구조와 연결됩니다. 이씨와 김씨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은 이들이 마을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토지 소유는 단순히 경제적 권리를 넘어 사회적 지위를 나타냈습니다. 즉, 명륜동3가의 풍경은 성씨별로 형성된 ‘작은 권력 지도’라 할 수 있었습니다.
7. 국유지의 의미와 공동체적 활용
명륜동3가에는 4필지의 국유지가 있었습니다.
이는 국가가 관리하거나 공공적인 목적으로 활용하던 땅으로, 도로, 관청, 공동 공간이 해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땅은 주민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유 자원이었기에, 공동체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습니다.
국유지의 존재는 당시 명륜동3가가 단순한 개인의 소유지 집합체가 아니라, 국가와 공동체가 함께 얽혀 있던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8. 서울 문화재 발굴,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역사 탐구
오늘날 우리가 문화재 발굴, 지표조사, 시굴조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바로 이런 기록을 실제 공간에서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명륜동3가는 성균관과 관련된 유교적 전통, 농업과 생활 흔적, 그리고 근대화의 변화가 모두 교차하는 공간입니다. 발굴 조사를 통해 당시 건축 터, 생활 유물, 제의적 흔적이 발견된다면, 이는 서울의 정체성을 복원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9. 1912년 명륜동3가와 오늘날의 서울 사회 비교
지금의 명륜동3가는 대학가와 전통이 어우러진 공간입니다. 하지만 1912년 이곳은 농업과 종교, 가문 공동체가 함께 존재하는 마을이었습니다.
당시의 서울은 지금처럼 아파트와 도로로 가득한 대도시가 아니라, 사람과 땅, 공동체가 긴밀히 연결된 유기적 공간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현대 서울의 뿌리가 됩니다.
10. 문화재 발굴 성공 사례와 보존의 가치
서울 곳곳에서 진행된 지표 조사와 발굴은 과거를 밝혀내는 중요한 성과를 남겼습니다. 예를 들어, 창덕궁 인근에서는 조선 시대 생활 도구와 건축 터가 발견되어 역사 연구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성균관 주변 발굴에서도 유생들의 생활 흔적이 담긴 기단석과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공 사례는 명륜동3가 역시 발굴을 통해 더욱 풍부한 이야기를 되찾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11. 우리가 지켜야 할 미래의 명륜동3가
1912년의 기록은 단순히 과거의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도시를 만들고, 어떤 문화를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힌트를 줍니다.
명륜동3가는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삶이 겹쳐 있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발굴과 보존을 통해 이곳의 이야기를 지켜야 하며, 더 나아가 서울 전체의 역사적 정체성을 후대에 전해야 합니다.
12. 마무리와 울림
오늘 명륜동3가를 걷는다면, 1912년의 풍경을 떠올려 보십시오. 좁은 골목마다 성씨별로 나뉜 집들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밭이 펼쳐지며, 작은 사사지에서 향내가 은은히 풍겨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모습은 단순히 오래된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서울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보이지 않는 풍경입니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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