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명륜동2가,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
최종 수정일: 4월 21일
성균관 바로 옆, 1912년 명륜동2가에 밭 65필지가 있었다는 사실
이씨 72필지·김씨 46필지·홍씨 17필지의 마을, 도시 한복판의 농경지, 그리고 일본인 4필지의 그림자 —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235필지의 기억
목차
1. 1912년, 서울의 땅은 어떻게 기록되었나
2. 235필지의 규모와 공간적 의미
3. 166필지 대지 — 삶이 자리 잡은 공간
4. 사사지 2필지 — 신앙과 의례의 터전
5. 임야 2필지 — 숨겨진 공간의 쓰임새
6. 밭 65필지 — 도심 속 농업의 흔적
7. 국유지 10필지 — 근대 행정의 흔적
8. 이씨·김씨·홍씨의 마을 권력 지도
9. 일본인 4필지 — 시대의 그림자
10. 문화재 조사와 발굴의 필요성
11. 왕십리 성공 사례와 우리가 배울 것
12. 마무리 — 과거의 기록이 주는 메시지
명륜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성균관대, 한옥 카페, 대학가 분위기가 먼저 떠오른다. 지금은 그런 동네다. 그런데 바로 그 명륜동, 딱 110년 전인 1912년에 밭이 65필지나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성균관 코앞에서 농사를 지었다. 조선 최고 교육기관 옆에서 흙을 만지며 먹고살았다. 이 반전 하나만으로도 1912년 명륜동2가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음이 증명된다.
235필지, 92,664㎡. 이 안에 집터, 밭, 산, 사당, 국유지, 그리고 일본인의 흔적까지 모두 담겨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 땅의 기억을 어떻게 꺼내는지, 지금부터 하나씩 들여다본다.

1. 1912년, 서울의 땅은 어떻게 기록되었나
1912년은 서울에게 특별한 해였다. 조선이 무너지고 2년이 지난 시점,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본격화하며 한반도 전체의 토지를 필지 단위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사업은 표면적으로는 근대적 토지 관리를 위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제가 조선의 토지 소유 구조를 파악하고 장기적인 수탈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이었다.
그 기록이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의 핵심 기초 자료가 된다는 사실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기록이 이제는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을 복원하는 도구가 되었다. 명륜동2가의 235필지 기록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2. 235필지의 규모와 공간적 의미
1912년 종로구 명륜동2가는 총 235필지, 92,664㎡의 면적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약 2만 8천 평 규모다. 성균관대 캠퍼스 바로 옆, 지금도 대학가 분위기가 물씬 나는 이 동네가 당시에는 대지, 밭, 임야, 사사지, 국유지가 뒤섞인 복합 공간이었다.
235필지
총 필지 수
92,664㎡
총 면적 (약 2만 8천 평)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준
대지 (주거)
166필지
38,615㎡
밭
65필지
47,881㎡
임야
2필지
4,588㎡
사사지
2필지
1,580㎡
국유지
10필지
행정·공공 기능
일본인 소유
4필지
식민지 침탈의 흔적
이 분포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밭 47,881㎡가 대지 38,615㎡보다 면적이 크다는 사실이다. 필지 수로는 대지가 많지만, 넓이로 보면 농경지가 더 넓었다. 명륜동2가가 얼마나 농업 중심 공간이었는지를 이 숫자 하나가 보여준다.
3. 166필지 대지 — 삶이 자리 잡은 공간
166필지, 38,615㎡의 대지. 이건 단순히 집의 수가 아니다. 아침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골목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담벼락 너머로 이웃의 소식이 오가던 그 공간 전체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좁은 골목을 따라 빽빽이 들어선 모습이 이 숫자 뒤에 있다.
성균관 인근이라는 지역 특성상 이 대지 구역에는 학자 가문과 관료 가문이 상당수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유교 교육의 본산 옆에서 글공부와 과거시험 준비를 하던 유생들의 기와집이 줄지어 있던 풍경이 떠오른다. 이 166필지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건축 기단, 온돌 유구, 생활 도기 등이 가장 집중적으로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 핵심 조사 구역이다.
166필지 대지 구역은 조선 후기 건축 유구와 생활 유물이 가장 풍부하게 잠들어 있을 구역이다. 성균관 인근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유교 문화와 관련된 유물, 묵서 도기, 서책 관련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도 있다.

4. 사사지 2필지 — 신앙과 의례의 터전
사사지 2필지, 1,580㎡. 규모는 작지만 이 두 필지가 가진 의미는 크다. 사사지는 절이나 사당 같은 종교적 시설의 터전이다. 성균관과 인접한 명륜동2가의 특성상, 이 사사지는 불교 사찰이 아닌 유교적 제향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고, 공동체가 함께 의례를 치르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사사지 구역은 제례 관련 도자기, 제기류, 건축 기단의 특수 구조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는 특수 조사 구역이다. 이 1,580㎡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의례가 이루어졌는지는 발굴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알 수 있다.
5. 임야 2필지 — 숨겨진 공간의 쓰임새
2필지, 4,588㎡의 임야. 명륜동2가가 평지와 밭만으로 이루어진 동네가 아니었음을 이 숫자가 말해준다. 작은 산자락이 동네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숲은 주민들에게 땔감을 제공하고, 약초 채취 공간이 되고, 어쩌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을 것이다. 도심 속 작은 숲이 가진 실용적 가치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임야는 종종 특정 가문이 대대로 관리하거나 마을 공동 소유 형태로 운영됐다. 이 4,588㎡의 숲이 누구의 소유였고 어떻게 관리됐는지는 지표조사를 통한 역사 문헌 분석으로 더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 있다.
6. 밭 65필지 — 도심 속 농업의 흔적
이게 이 글에서 가장 충격적인 숫자다. 65필지, 47,881㎡의 밭. 지금 명륜동은 카페와 식당, 대학 건물로 가득한 번화한 지역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1912년 당시 농경지가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65필지
밭 필지 수
47,881㎡
농경지 총면적
약 52%
전체 면적 비율
성균관 코앞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지지만, 이것이 1912년 서울의 실제 모습이다. 학자들이 글을 읽고 제자를 가르치던 성균관 담벼락 너머에서 누군가는 무를 뽑고 배추를 심으며 하루를 보냈다. 이 공존이 당시 서울의 진짜 얼굴이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밭 구역은 농업 관련 유물, 수리 시설 흔적, 토양 성분 분석 시료가 나오는 특수 조사 구역으로 분류된다.
"전체 면적의 52%가 밭이었던 명륜동2가. 유교 교육의 본산 옆에서 농부의 하루도 함께 이어지고 있었다."

7. 국유지 10필지 — 근대 행정의 흔적
명륜동2가에는 10필지의 국유지가 있었다. 다른 동네들에 비해 국유지 비중이 꽤 높은 편이다. 행정, 군사, 혹은 공공 기능을 위한 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근대적 행정 체계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1912년, 국유지의 존재는 국가 권력이 이 작은 동네 안에까지 물리적으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국유지 구역은 관청 관련 유구, 도로 구조, 배수 시설의 흔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주목 구역이다. 10필지라는 상대적으로 많은 국유지 필지는 성균관이라는 국가 교육 기관 인근이라는 특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8. 이씨·김씨·홍씨의 마을 권력 지도
1912년 명륜동2가의 토지 소유 현황을 성씨별로 보면 이 동네의 권력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씨가 72필지로 압도적 1위였고, 김씨가 46필지, 홍씨가 17필지, 안씨 13필지, 박씨 10필지 순이었다.
순위 | 성씨 | 필지 수 | 비율 |
1위 | 이씨 | 72필지 | |
2위 | 김씨 | 46필지 | |
3위 | 홍씨 | 17필지 | |
4위 | 안씨 | 13필지 | |
5위 | 박씨 | 10필지 |
이씨 72필지는 압도적이다. 명륜동2가 전체 235필지의 약 31%를 이씨 한 성씨가 차지했다. 이는 단순한 인구 분포가 아니라 이씨 가문이 이 동네에서 얼마나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성균관 인근이라는 특성상 이들 성씨는 학문과 관직에 연이 깊은 가문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홍씨 17필지도 눈에 띈다. 명륜동2가에서 홍씨가 상위권에 있다는 사실은 조선 후기 서울에서 홍씨 가문이 가졌던 영향력과 연결해서 읽을 수 있다. 이런 성씨별 데이터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각 구역 유물의 성격을 예측하는 핵심 자료가 된다.

9. 일본인 4필지 — 시대의 그림자
이씨·김씨·홍씨의 마을 한켠에 일본인 소유 4필지가 끼어 있었다. 1912년, 강제 병합 2년차. 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인들은 서울 도심 곳곳의 요충지를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명륜동2가의 4필지는 그 흐름의 일부였다.
일본인 소유 필지는 문화재 발굴 시 일본식 기와, 근대식 벽돌 구조물, 일본산 생활 도기 파편이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조선식 유물과 일본식 유물이 같은 지층에서 발견될 때, 그것은 단순한 건축 유물이 아니라 문화 충돌의 물질적 증거가 된다.
성균관 바로 옆에 일본인의 필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주는 상징적 무게가 있다. 조선 지식인의 정신적 본거지 근처에서 식민지의 현실이 조용히 땅 위에 새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4필지는 시작이었고,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이 숫자가 어떻게 변해갔는지는 역사가 이미 기록하고 있다.
10. 문화재 조사와 발굴의 필요성
명륜동2가의 이 모든 기록이 오늘날 우리에게 닿을 수 있는 건 문화재 지표조사 덕분이다. 개발과 보존이 충돌하는 서울에서,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과정이다.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정밀발굴조사→보고서 작성
seoulheritage.org는 바로 이 과정의 기초 자료를 서울 25개 구 전체에 걸쳐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1912년 명륜동2가의 235필지 기록이 이 아카이브 안에서 발굴조사의 출발점이 될 때, 이씨 가문의 기와집 기단과 밭에서 일구던 농부의 삶이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다.
11. 왕십리 성공 사례와 우리가 배울 것
문화재 발굴이 실제로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왕십리다. 아파트 개발이 진행되기 전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조선 시대 주거 유적이 확인됐고, 이 성과 덕분에 사라질 뻔한 역사적 흔적이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개발이 멈추지 않으면서도 역사가 기억되는 방식을 찾아낸 것이다.
명륜동2가도 같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씨·김씨·홍씨의 기와집 기단, 성균관 인근 유생들의 생활 흔적, 도시 한복판의 밭에서 출토될 수 있는 농업 관련 유물.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명륜동2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깊고 풍부한 이야기를 가진 공간이 될 수 있다.
왕십리 발굴 사례처럼 사전 지표조사가 철저히 이루어진 개발 현장에서는 공사 중 예기치 않은 유물 발견으로 인한 장기 중단 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시간과 비용 양면에서 모두 크다.
12. 마무리 — 과거의 기록이 주는 메시지
오늘 명륜동을 걷게 된다면, 잠깐 멈춰서 발아래 땅을 한 번 느껴봐 줬으면 한다. 이씨 가문의 기와집 마당이었던 자리일 수도 있고, 65필지 밭 중 한 뙈기였을 수도 있다. 국유지 위에 지어진 공공 시설의 터였을 수도 있고, 일본인의 4필지 중 한 귀퉁이였을 수도 있다.
235필지, 92,664㎡. 이 숫자 뒤에는 이름도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백 명의 하루가 있다. 글을 읽고, 밭을 갈고, 제사를 지내고, 시대의 변화에 불안을 느끼던 그 사람들. 그들의 삶이 지금 이 땅 아래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가장 조용하고 진지한 약속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는 일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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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바로 옆, 이씨 72필지와 밭 65필지가 공존하던 동네
235필지, 92,664㎡. 이씨·김씨·홍씨의 기와집, 전체의 52%를 차지한 농경지, 사사지와 국유지, 그리고 일본인 4필지의 그림자. 1912년 명륜동2가의 이 모든 기억이 지금도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가장 조용한 약속이다.
명륜동 근처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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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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