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동숭동의 풍경, 그 안에 담긴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
최종 수정일: 4월 21일
지금 네가 공연 보러 가는 그 대학로 — 1912년엔 밭이 54%였다
이씨 43필지·김씨 33필지·망씨 10필지의 마을, 공연장 대신 채소밭이 펼쳐지던 동숭동, 그리고 일본인 7필지의 그림자 —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1912년 대학로의 진짜 얼굴
목차
1. 동숭동의 첫인상 — 1912년 기록 속 마을 열기
2. 203필지의 규모와 공간 구조
3. 127필지 대지 — 집과 골목, 삶의 흔적
4. 112,231㎡의 밭 — 대학로 아래 잠든 농경지
5. 국유지 1필지 — 나라의 땅이 가진 의미
6. 이씨·김씨·망씨의 마을 권력 지도
7. 일본인 7필지 — 식민지 시대의 그림자
8.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꺼내는 것들
9. 성공 사례 — 종로 일대 발굴이 밝혀낸 것
10. 마무리 — 동숭동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대학로라는 이름을 들으면 뭐가 떠오르냐. 소극장, 버스킹, 주말마다 인파로 가득한 마로니에공원, 공연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은 골목들. 그게 지금의 동숭동 풍경이다. 그런데 딱 110년 전, 이 자리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공연장 대신 채소밭이 있고, 카페 자리엔 기와집이 있고, 마로니에공원 자리엔 어쩌면 이씨 가문의 넓은 대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1912년 종로구 동숭동. 203필지, 206,632㎡. 지금 이 땅이 예술의 메카가 되기까지 100년이 걸렸다. 그 100년 전 이야기를 문화재 지표조사의 눈으로 들여다본다.

1. 동숭동의 첫인상 — 1912년 기록 속 마을 열기
1912년 동숭동은 서울의 심장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와 농촌이 뒤섞인 전형적인 과도기적 공간이었다. 종로와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도 농사가 주된 생계였고, 집들은 골목을 따라 모여 있었으며, 나라의 땅과 개인의 땅이 공존했다.
203필지
총 필지 수
206,632㎡
총 면적 (약 6만 2천 평)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준
203필지라는 숫자는 이 동네 안에 203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필지에는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살았을 것이고, 어떤 필지에는 홀로 밭을 일구는 노인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필지에는 일본인이 막 이사 들어왔을 것이고, 어딘가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공공 공간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1912년 동숭동 기록 안에 잠들어 있다.
2. 203필지의 규모와 공간 구조
용도별로 들여다보면 1912년 동숭동의 성격이 한눈에 보인다. 주거지보다 농경지가 면적 기준으로 훨씬 크다는 사실이 이미 이 동네의 본질을 드러낸다.
밭
76필지
112,231㎡ — 전체의 약 54%
대지 (주거)
127필지
94,400㎡
국유지
1필지
공공·행정 기능
일본인 소유
7필지
식민지 침탈의 흔적
1912년 동숭동
채소밭 54%·기와집 골목·이씨 가문의 넓은 대지·이름 모를 농부의 하루
2025년 대학로
소극장·카페·마로니에공원·주말 버스킹·공연 포스터가 가득한 거리
이 두 풍경이 같은 땅 위에 겹쳐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이 두 시간의 경계를 파고드는 작업이다. 지금 공연장이 서 있는 자리 아래에 과거의 기와집 기단이 있을 수도 있고, 카페 테라스 아래에 밭이랑 흔적이 있을 수도 있다.
3. 127필지 대지 — 집과 골목, 삶의 흔적
127필지, 94,400㎡의 대지. 필지 수로는 전체의 63%를 차지하지만, 면적은 밭보다 작다. 집들이 상대적으로 좁은 공간에 빽빽이 모여 있었다는 뜻이다. 좁은 골목을 따라 기와집들이 이어지고, 담벼락 너머로 이웃의 소리가 들려오고, 골목 어귀에서 아이들이 뛰어놀던 그 풍경이 94,400㎡ 안에 담겨 있다.
동숭동은 지금 대학로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1912년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당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전신이 들어서기 전이다. 순수한 주거 생활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 127필지 대지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건축 기단, 온돌 유구, 생활 도기 등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 핵심 조사 구역이다.
127필지 대지 구역은 조선 후기 주거 유구와 생활 유물이 가장 집중적으로 잠들어 있는 구역이다. 현재 대학로 건물들 아래에 이 주거지의 흔적이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재개발 시 반드시 사전 지표조사가 필요하다.

4. 112,231㎡의 밭 — 대학로 아래 잠든 농경지
76필지, 112,231㎡. 지금 대학로를 가득 채운 극장과 카페, 음식점 자리의 54%가 1912년에는 밭이었다. 이 숫자 앞에서 잠깐 멈추게 된다. 지금 내가 공연을 보러 들어가는 그 소극장,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호미를 들고 밭을 갈고 있었다는 것이다.
76필지
밭 필지 수
112,231㎡
농경지 총면적
약 54%
전체 면적 비율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여름이면 물을 대고 가을이면 수확을 기다리던 그 밭들. 채소와 곡식이 자라 가족의 밥상에 오르고, 남은 것은 장터에서 팔려 생활비가 됐다. 지금 대학로에서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 발아래 그 농경지의 흔적이 아직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대학로 아스팔트 아래, 1912년 동숭동 농부의 하루가 층층이 쌓여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과거 밭 지역은 토양 성분 분석, 탄화 곡물, 농기구 잔편이 발견될 수 있는 특수 조사 구역이다. 112,231㎡라는 광대한 농경지는 당시 동숭동 주민들의 생활 경제를 복원하는 핵심 자료가 될 수 있다.

5. 국유지 1필지 — 나라의 땅이 가진 의미
1912년 동숭동에는 국유지가 단 1필지였다. 숫자는 작지만, 공공적 성격을 가진 공간이 이 작은 마을에도 존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행정 목적, 군사 목적, 혹은 공동 이용 시설이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문화재 발굴 시 국유지 구역에서는 관청 관련 유구, 도로 구조, 배수 시설 흔적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단 1필지지만, 이 구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발굴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밝혀진다. 그리고 그 답은 지금도 그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
6. 이씨·김씨·망씨의 마을 권력 지도
1912년 동숭동 토지를 성씨별로 보면 이 마을의 사회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씨가 43필지, 김씨가 33필지, 그리고 망씨가 10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순위 | 성씨 | 필지 수 | 비율 |
1위 | 이씨 | 43필지 | |
2위 | 김씨 | 33필지 | |
3위 | 망씨 | 10필지 |
이씨 43필지, 김씨 33필지. 이 두 성씨가 76필지로 전체 203필지의 약 37%를 차지했다. 다른 동네들에 비해 집중도가 낮다는 것은 동숭동이 특정 가문 중심이 아닌, 비교적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던 개방적인 마을이었음을 시사한다.
망씨 10필지가 눈에 띈다. 지금까지 살펴본 다른 종로구 동네들의 성씨 현황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성씨다. 동숭동에서 망씨가 상위 3위 안에 든다는 사실은 이 동네가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인구 구성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 성씨별 데이터는 각 구역의 예상 유물 성격을 예측하는 핵심 자료가 된다.

7. 일본인 7필지 — 식민지 시대의 그림자
이씨·김씨·망씨의 마을 한편에 일본인 소유 7필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1912년, 강제 병합 2년차. 일본인들이 서울 도심 주요 지역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던 시기다. 동숭동의 7필지는 그 흐름 안에 있었다.
일본인 7필지는 단순한 부동산 소유가 아니었다. 이 시기 일본인의 토지 소유는 이후 본격화될 토지 수탈과 식민지 도시 재편의 전조였다. 문화재 발굴 시 이 구역에서 일본식 기와, 근대식 벽돌 구조물, 일본산 생활 도기 파편이 출토된다면, 그것은 동숭동이 식민지 공간 변화의 현장이었음을 물질로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지금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 발아래, 그 7필지의 흔적이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수 있다. 예술의 거리라는 현재와 식민지 침탈의 흔적이라는 과거가 같은 땅 위에 겹쳐 있다는 사실이 발굴조사를 더욱 의미있게 만든다.
8.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꺼내는 것들
1912년 동숭동의 기록이 오늘날 우리에게 닿을 수 있는 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덕분이다. 대학로와 맞닿은 동숭동은 문화예술의 중심지라는 이미지와 동시에, 서울의 가장 오래된 주거지 구조 중 하나를 품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정밀발굴조사→보고서 작성
서울에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거나 기존 구조물이 철거될 때, 지표조사는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과정이다. seoulheritage.org는 동숭동을 포함한 서울 25개 구 전체의 역사 토지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1912년의 203필지 기록이 이 아카이브 안에서 발굴 전략의 출발점이 될 때, 이씨 가문의 기와집과 망씨의 밭이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다.
9. 성공 사례 — 종로 일대 발굴이 밝혀낸 것
동숭동 인근 종로 일대에서 진행된 발굴조사는 이미 여러 차례 놀라운 성과를 냈다. 조선 시대 주거지의 기단석과 도로 흔적이 확인되면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 공간이 구체적으로 복원됐다. 한양도성의 흔적이 드러나 지금도 시민들이 역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학자들은 출토된 유물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도구를 사용하고, 어떤 생활문화를 가졌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발굴이 단순한 유물 수집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하루를 복원하는 과정이라는 걸 이 성과들이 증명한다. 동숭동도 충분히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다.
종로 일대 발굴 성과처럼 체계적인 지표조사와 발굴이 이루어진 지역은 역사 교육·문화 관광 자원으로 재탄생한다. 예술의 거리 대학로에 역사 발굴의 성과가 더해진다면, 동숭동은 지금보다 훨씬 더 풍부한 이야기를 가진 공간이 될 수 있다.

10. 마무리 — 동숭동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오늘 대학로를 걷게 된다면, 길을 걷다 잠깐 멈춰서 발아래 땅을 한 번 느껴봐 줬으면 한다. 이씨 가문의 기와집 마당이었던 자리일 수도 있고, 76필지 밭 중 한 귀퉁이였을 수도 있다. 망씨의 집터였을 수도 있고, 일본인이 처음 발을 들여놓은 7필지 중 어딘가였을 수도 있다.
203필지, 206,632㎡. 이 숫자 뒤에는 이름도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백 명의 하루가 있다. 새벽에 일어나 밭으로 나가고, 골목에서 이웃을 만나고, 조선이 무너지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불안과 희망을 함께 품으며 살아가던 그 사람들. 그들의 삶이 지금 이 땅 아래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가장 조용한 약속이다. 공연이 끝난 후 대학로 골목을 걸어 나올 때, 그 땅 아래에 잠든 이야기를 한 번쯤 떠올려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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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아래, 1912년 농부의 밭이 잠들어 있다
203필지, 206,632㎡. 이씨 43필지·김씨 33필지·망씨 10필지의 마을, 전체의 54%를 차지한 채소밭, 국유지 1필지, 그리고 일본인 7필지의 그림자. 지금 대학로 공연장과 카페가 들어선 그 땅 아래에 1912년 동숭동 사람들의 하루가 고요히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약속이다.
동숭동 인근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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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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