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누상동, 그곳의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
최종 수정일: 4월 21일
166필지 중 김씨가 43필지 — 1912년 누상동, 서촌 언덕 위 마을의 권력 구조
북촌과 서촌의 경계에서 양반과 서민이 공존하던 마을. 김씨 43필지·이씨 24필지·최씨 14필지·박씨·장씨 각 10필지, 그리고 일본인 3필지의 그림자 —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누상동의 시간
목차
1. 1912년 누상동의 모습과 공간적 배경
2. 166필지가 보여주는 생활의 흔적
3. 국유지 5필지 — 시대적 맥락
4. 김씨 43필지 — 전체의 4분의 1을 장악한 가문
5. 이씨·최씨·박씨·장씨가 이루던 균형
6. 일본인 3필지 — 서촌까지 파고든 식민지의 그림자
7. 문화재 지표조사로 살아나는 마을 이야기
8. 마무리 — 웃음소리와 발자국이 겹겹이 쌓인 땅
서촌. 지금은 인왕산 자락의 감성 골목, 한옥 카페, 옛 화가들의 작업실 이야기로 유명한 동네다. 그런데 그 서촌의 언덕 위, 누상동(樓上洞)이라는 이름을 들여다보면 이미 뭔가 특별한 느낌이 온다. '누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처럼, 이 동네는 종로 일대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12년 누상동의 기록을 펼쳐보면 흥미로운 숫자가 나온다. 166필지 중 김씨 혼자 43필지를 가지고 있었다. 전체의 약 26%, 4분의 1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종로구 동네들 중에서도 단일 성씨가 이렇게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경우는 드물었다. 누상동의 김씨 가문은 이 마을에서 어떤 존재였을까. 그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1. 1912년 누상동의 모습과 공간적 배경
누상동은 북촌과 서촌의 경계에 자리 잡은 마을이었다. 조선 후기 양반가와 서민층이 공존하던 이 공간은 종로 일대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다. 28,340㎡의 면적에 166필지가 빼곡히 들어선 이 동네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기와집과 초가집이 이어지고 집집마다 작은 마당과 담장이 연결된 전형적인 조선 도성의 주거 경관을 갖추고 있었다.
166필지
총 필지 수
28,340㎡
총 면적 (약 8,570평)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준
북촌이 유력한 사대부 가문들의 마을이었다면, 서촌은 중인 계층과 역관, 화원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누상동은 그 경계에서 두 문화가 만나는 독특한 공간이었다. 조선 시대 화가 겸재 정선이 이 일대를 주제로 그림을 남겼다는 사실이 이 지역의 문화적 깊이를 보여준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지역 특성은 발굴 예상 유물의 성격을 예측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2. 166필지가 보여주는 생활의 흔적
166필지는 단순한 행정 숫자가 아니다. 한 필지에 한 가족이 살았다고 본다면 최소 166가구, 수백 명이 이 좁은 언덕 마을에서 함께 살아갔다는 뜻이다. 이른 아침 골목에 나와 인사를 나누고,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밥을 짓고, 저녁이면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던 그 풍경이 이 숫자 뒤에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주거 밀집 지역은 생활 유물이 가장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구역이다. 조선 후기 기와집의 기단석, 온돌 구조, 생활 도기, 담벼락의 흔적. 누상동의 166필지는 이런 유물들이 층층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은 구역이다. 특히 경사지에 위치한 주거지는 토층 보존 상태가 평지보다 양호한 경우가 많아 발굴 잠재력이 더욱 높다.
경사지 주거지인 누상동은 토사 퇴적 환경 덕분에 평지 주거지보다 유구 보존 상태가 상대적으로 양호할 수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경사지 주거 유적은 특별한 주목 구역으로 분류된다.
3. 국유지 5필지 — 시대적 맥락
166필지 중 5필지는 국유지였다. 이 5필지는 1912년 당시 일제가 조선 땅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재편하는 과정에서 국가 소유로 편입된 토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관청 관련 시설이나 도로 같은 기반 시설이 이 국유지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유지
5필지
행정·공공·도로 기능 추정
일본인 소유
3필지
식민지 초기 침투 흔적
언덕 위에 위치한 누상동에 국유지 5필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 동네가 단순한 주거지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언덕 위에서 종로를 내려다보는 지형적 특성상 군사적 혹은 행정적 목적의 시설이 위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발굴 시 이 5필지 구역은 행정 관련 유구가 발견될 수 있는 특수 주목 구역이다.
4. 김씨 43필지 — 전체의 4분의 1을 장악한 가문
누상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숫자가 바로 이것이다. 김씨 43필지. 166필지의 약 26%다.
26%
1912년 누상동 전체 필지 중 김씨 가문이 차지한 비율.
166필지 중 43필지가 김씨 소유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종로구 동네들에서 단일 성씨의 최고 비율은 대체로 20~25% 수준이었다. 그런데 누상동의 김씨는 26%를 차지했다. 이 말은 누상동 골목 어딘가를 걸으면 네 집 중 한 집은 김씨 가문의 집이었다는 뜻이다.
이 정도 비중의 토지를 한 성씨 가문이 보유한다는 건 단순한 재산 소유를 넘어 마을 공동체에서의 발언권과 직결된다. 마을의 크고 작은 결정에서 김씨 가문의 의견이 얼마나 큰 무게를 가졌을지, 누상동의 골목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이 숫자가 말해준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김씨 집중 구역은 가문의 생활 방식이 반영된 건축 유구와 유물이 집중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5. 이씨·최씨·박씨·장씨가 이루던 균형
김씨가 압도적 1위를 차지했지만, 나머지 성씨들도 각자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이씨 24필지, 최씨 14필지, 박씨와 장씨가 각각 10필지. 이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분포가 누상동의 공동체 구조를 형성했다.
김씨
43필지
이씨
24필지
최씨
14필지
박씨
10필지
장씨
10필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장씨 10필지. 지금까지 살펴본 종로구 다른 동네들에서 장씨가 상위 5위 안에 든 사례는 거의 없었다. 누상동에서 장씨 가문이 10필지를 보유하며 4위권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이 동네만의 독특한 인구 구성을 보여준다. 장씨 가문이 이 언덕 마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발굴조사를 통해 더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 있다.
혼인 관계나 문중 네트워크로 연결된 이 다섯 성씨들이 좁은 언덕 골목에서 서로의 담장을 맞대고 살았다. 그 공존의 방식이 어떠했는지가 이 동네의 문화재 발굴에서 가장 흥미로운 탐구 대상 중 하나다.
6. 일본인 3필지 — 서촌까지 파고든 식민지의 그림자
김씨·이씨·최씨·박씨·장씨의 마을 안에 일본인 소유 3필지가 있었다. 강제 병합 2년차인 1912년, 서촌의 언덕 마을까지 일본인의 토지가 파고들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인 소유 3필지는 단순한 거주 목적을 넘어 한국인의 전통 주거지 안으로 식민 권력이 침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3필지 구역에서는 문화재 발굴 시 일본식 건축 자재와 생활 유물이 조선식 유물과 같은 지층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이는 당시 두 문화의 충돌과 공존을 물질로 증명하는 자료가 된다.
조선인들의 주거 공간 안에 일본인 필지가 끼어든다는 것이 단순한 부동산 거래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점차 심화될 토지 수탈의 초기 단계가 있었다. 지금 누상동 골목 어딘가에 그 3필지의 흔적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

7. 문화재 지표조사로 살아나는 마을 이야기
1912년 누상동의 토지 기록을 읽는 것 자체가 문헌 지표조사의 한 과정이다. 누가 어디에 살았는지, 어느 성씨가 어떤 구역에 집중됐는지를 알면 그 아래에 무엇이 잠들어 있을지를 예측할 수 있다. seoulheritage.org는 바로 이런 데이터를 서울 전역에 걸쳐 체계적으로 구축해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정밀발굴조사→보고서 작성
누상동은 특히 서촌 문화의 특수성과 결합될 때 발굴 잠재력이 배가된다. 조선 후기 중인 문화권의 생활 도구, 화원들의 작업 흔적, 역관 가문의 다국적 교류 유물이 이 언덕 마을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림으로 남긴 그 풍경의 물질적 흔적을 발굴이 꺼낼 수 있다면, 그것은 한국 미술사와 문화사에서도 획기적인 성과가 될 것이다.
서촌 일대 발굴에서 중인 계층의 생활 유물이 출토된다면, 조선 후기 양반 문화 위주로 기술된 역사를 보완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누상동의 발굴은 역사의 빈자리를 채우는 작업이기도 하다.
8. 마무리 — 웃음소리와 발자국이 겹겹이 쌓인 땅
오늘 서촌 누상동 골목을 걷게 된다면, 언덕을 오르며 발아래 돌계단을 한 번 느껴봐 줬으면 한다. 김씨 가문의 넓은 기와집 담장이었을 수도 있고, 장씨 가문의 소박한 집 앞 골목이었을 수도 있다. 최씨와 박씨 가문이 나란히 담을 맞대던 자리였을 수도 있다.
166필지, 28,340㎡. 이 숫자 뒤에는 이름도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백 명의 하루가 있다. 종로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서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골목에서 이웃과 인사하고, 저녁이면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던 그 사람들. 오늘 우리가 걷는 서촌 골목에는 그들의 웃음소리와 발자국이 겹겹이 쌓여 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도심의 길 위에는, 100년 전 누상동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발자국이 겹겹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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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서 종로를 내려다보던 마을, 그 166필지의 기억
166필지, 28,340㎡. 김씨 43필지·이씨 24필지·최씨 14필지·박씨·장씨 각 10필지. 양반과 서민이 공존하던 서촌의 언덕 마을 누상동. 그 언덕 골목 어딘가에 겸재 정선이 그림으로 담은 그 풍경의 물질적 흔적이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가장 조용한 약속이다.
누상동 서촌 인근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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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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