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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누상동, 그곳의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

목차


  1. 1912년 누상동의 모습과 공간적 배경

  2. 집과 대지, 166필지가 보여주는 생활의 흔적

  3. 국유지 5필지가 가진 의미와 시대적 맥락

  4. 성씨별 소유 현황 – 김씨, 이씨, 최씨, 박씨, 장씨의 분포

  5.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그 상징성

  6. 누상동이 남긴 역사적 울림과 오늘의 가치


1912년 종로구 누상동, 서울의 중심에서 작은 마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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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지금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심이지만 1912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진다. 누상동이라는 이름은 종로의 언덕 위에 위치한 마을을 뜻했는데, 그 시절 이곳은 총 166필지, 28,340㎡ 규모의 작은 동네였다. 단순히 숫자로만 보면 차갑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안에는 당시 사람들의 삶, 소유 관계, 그리고 시대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당시 누상동에 집이 몇 채 있었는가 하는 질문은 단순히 건물의 개수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땅을 가졌는지, 어떤 성씨가 모여 살았는지, 나아가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사회적 풍경을 읽어내는 중요한 단서였다.



1. 1912년 누상동의 모습과 공간적 배경


누상동은 북촌과 서촌의 경계에 자리하며, 조선 후기 양반가와 서민층이 공존하던 공간이었다. 28,340㎡라는 면적은 오늘날 아파트 단지 몇 개와 맞먹는 크기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넓은 주거지가 분포한 셈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기와집과 초가집이 늘어서 있었고, 집집마다 작은 마당과 담장이 이어져 있었다.


이 마을의 전체 필지는 166개였는데, 필지 하나하나는 당시 가족 단위의 삶을 담고 있었다. 오늘날 아파트 호수처럼 각각의 필지는 한 가구의 생활 공간이자 재산이었다.



2. 집과 대지, 166필지가 보여주는 생활의 흔적


1912년 누상동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었다. 166필지는 당시 마을의 인구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자료였다. 보통 한 필지에 한 집 혹은 한 가족이 거주했다고 본다면, 최소 166가구 이상이 이곳에서 살아갔다는 뜻이다. 이는 곧 수백 명이 함께 모여 하나의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집들은 대부분 목조와 기와로 지어졌으며, 일부는 초가 형태였다. 누상동의 집들은 마을 골목을 따라 모여 있었고, 좁은 길을 따라 사람들이 오가며 서로의 삶을 나누는 풍경이 펼쳐졌을 것이다.



3. 국유지 5필지가 가진 의미와 시대적 맥락


166필지 중 5필지는 국유지였다. 단순히 ‘국유지’라는 표현은 지금의 공공용지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졌다. 당시 국유지는 일본 제국이 조선 땅을 조사하고 재편하면서 국가 소유로 편입한 토지를 뜻했다. 그곳에는 관청과 관련된 시설, 혹은 도로와 같은 기반 시설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작은 마을 안에 5필지의 국유지가 존재했다는 것은, 누상동이 단순한 주거지에 그치지 않고 행정적·정치적 의미를 가진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4. 성씨별 소유 현황 – 김씨, 이씨, 최씨, 박씨, 장씨의 분포


누상동의 또 다른 특징은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이었다.


김씨가 무려 43필지를 소유했는데, 이는 전체의 4분의 1에 달하는 규모였다. 김씨 가문이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다음으로 이씨가 24필지, 최씨가 14필지, 박씨와 장씨가 각각 10필지를 가졌다. 이는 특정 성씨가 독점적으로 지배하기보다는 여러 가문이 함께 거주하며 균형을 이룬 형태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성씨별로 땅을 나누어 가진 모습이 마치 작은 마을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혼이나 혼맥을 통해 서로 관계를 이어가며 마을의 질서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5.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그 상징성


1912년은 이미 한일강제병합 이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시기였다. 이때 누상동에는 일본인이 3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수치만 보면 미미해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일본인의 소유가 늘어나는 것은 단순한 부동산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의 전통적 거주지 속에 식민 권력이 침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인의 소유지는 점차 확대되었고, 이는 한국인들의 주거권과 재산권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6. 누상동이 남긴 역사적 울림과 오늘의 가치


오늘날 우리는 누상동의 166필지를 단순한 숫자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당시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깊게 새겨져 있다. 김씨, 이씨, 최씨, 박씨, 장씨 등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며 이루어낸 공동체, 그리고 국유지와 일본인 소유지가 드러내는 시대적 상황은 그 자체로 귀중한 역사 자료다.


이 자료는 단순히 한 동네의 기록을 넘어,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거울이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도심의 길 위에는, 100년 전 누상동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발자국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이다.




출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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