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내자동, 237필지에 담긴 사람과 땅의 이야기 – 서울 문화재 발굴조사의 숨은 기초
- 서울 HI
- 2025년 8월 13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1일
발굴 현장에서 주전자가 나왔다 — 1912년 김씨 가문 집터 아래의 반전
김씨 42필지·이씨 30필지의 마을, 국유지·법인·일본인이 섞인 237필지. 토지대장 한 장이 발굴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그 아래서 100년 전 누군가의 주전자가 나온 내자동 이야기
목차
1. 1912년, 내자동의 첫인상
2. 237필지 46,053㎡, 숫자가 말하는 풍경
3. 국유지 3필지·법인 1필지·일본인 2필지의 의미
4. 김씨 42필지 — 내자동을 이끌던 가문
5. 이씨·최씨·박씨·오씨가 이루던 균형
6. 토지대장이 발굴 지점을 결정하는 순간
7. 성공 사례 — 김씨 가문 집터에서 나온 조선의 부엌
8. 마무리 — 100년 전의 내자동이 오늘의 우리에게 남긴 것
종로 한복판, 지금은 빌딩과 골목길이 뒤섞인 내자동. 자동차 경적 소리가 가득한 이 거리를 걷다 보면, 113년 전에는 마차와 인력거 바퀴 소리가 이 골목을 채웠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이 동네 1910년대 김씨 가문이 소유했던 집터를 파내자, 주전자가 나왔다. 놋그릇이 나왔다. 먹과 벼루가 나왔다. 100년이 넘도록 땅속에 묻혀 있던 누군가의 하루가, 발굴 조사원의 붓 끝에서 세상으로 나왔다.
이 이야기는 237필지, 46,053㎡라는 기록에서 시작한다. 1912년 내자동 토지대장이 어떻게 100년 후 발굴의 출발점이 됐는지, 지금부터 들어가 보자.

1. 1912년, 내자동의 첫인상
1912년의 내자동을 상상해보자. 자동차 한 대 없는 골목, 기와지붕이 빽빽하게 이어지고, 장독대마다 계절마다 다른 냄새가 배어 나오던 동네. 종로 한복판이라고는 해도 지금의 번화함과는 전혀 다른, 사람 냄새 가득한 작은 마을이었다.
237필지, 46,053㎡. 이 숫자는 단순한 행정 기록이 아니다. 당시 서울의 사회 구조, 경제 상황, 그리고 사람들의 관계망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도다. 필지 하나하나에 주인의 이름과 그 집안의 사연이 담겨 있었다.
237필지
총 필지 수
46,053㎡
총 면적 (약 1만 3천 평)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준
2. 237필지 46,053㎡, 숫자가 말하는 풍경
237필지 안에 여러 용도의 땅들이 함께 존재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개인 소유 대지가 대부분이었지만, 국유지 3필지, 법인 1필지, 일본인 2필지가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이 복합적인 구성이 1912년 내자동의 실제 모습이었다.
국유지
3필지
관아·공공시설 추정
법인 소유
1필지
은행·회사·종교 추정
일본인 소유
2필지
식민지 초기 침투
특히 법인 소유 1필지가 흥미롭다. 1912년이라는 시기에 법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막 확립되던 때였다. 은행이었을 수도 있고, 근대적 회사였을 수도 있고, 종교 단체였을 수도 있다. 개인과 국가와 법인과 외국인이 한 동네 안에서 토지를 나눠 가졌다는 사실이 1912년 내자동이 이미 근대화의 물결 한가운데 있었음을 보여준다.

3. 국유지 3필지·법인 1필지·일본인 2필지의 의미
국유지 3필지는 행정 또는 공공 기능과 연결된 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관아, 경찰서, 창고, 혹은 우편 업무를 담당하는 건물의 터였을 수 있다. 내자동이 단순한 민가 밀집지가 아니라 국가 행정과 맞닿아 있던 공간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일본인 2필지는 강제 병합 2년차인 1912년의 기록이다. 수치상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이 2필지가 어떤 경로로 일본인 소유가 됐는지를 추적하면 당시 서울 도심의 토지 소유 구조 변화와 권력 관계가 드러난다. 문화재 발굴 시 이 구역에서 일본식 유물과 조선식 유물이 같은 지층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법인 1필지는 당시 서울에서 근대적 자본주의와 조직이 어떻게 공간 안으로 침투했는지를 보여준다. 개인도 국가도 아닌 '법인'이라는 새로운 소유 주체가 내자동에 등장했다는 사실이 이 동네가 당시 시대 변화의 최전선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4. 김씨 42필지 — 내자동을 이끌던 가문
내자동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가진 성씨는 김씨로 42필지를 보유했다. 237필지의 약 18%다. 앞서 살펴본 종로구 동네들과 비교하면 누상동의 김씨(26%)보다는 낮지만, 여전히 가장 강력한 토지 기반을 가진 가문이었다.
김씨
42필지
이씨
30필지
최씨
18필지
박씨
17필지
오씨
11필지
당시 서울 도심에서 땅을 보유한다는 건 경제력과 권력을 동시에 의미했다. 혼인이나 동맹을 통해 토지를 확장하는 경우가 많았고, 인접 필지를 여러 개 보유한 가문은 마을 내에서 일종의 '지역 유력자' 역할을 했다. 김씨 가문이 42필지를 갖고 있었다는 건 이 동네에서 가장 강한 발언권을 가진 집안이었음을 의미한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1912년 토지대장의 김씨 가문 집중 구역은 가장 우선적인 조사 대상이다. 여러 세대가 같은 자리에서 삶을 이어온 가문의 집터는 유물 층위가 풍부하게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5. 이씨·최씨·박씨·오씨가 이루던 균형
이씨 30필지, 최씨 18필지, 박씨 17필지, 오씨 11필지. 이 네 성씨가 함께 만들어내는 분포가 내자동의 공동체 구조를 형성했다. 오씨 11필지가 눈에 띈다. 지금까지 살펴본 종로구 동네들에서 오씨가 상위 5위 안에 든 경우는 드물었다. 내자동에서 오씨가 11필지를 보유하며 5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이 동네만의 독특한 인구 구성을 보여준다.
김씨·이씨·최씨·박씨·오씨 다섯 성씨를 합산하면 118필지로 전체 237필지의 약 50%다. 절반은 이 다섯 성씨가, 나머지 절반은 더 다양한 성씨들이 나눠 가진 구조였다. 특정 가문의 독점 없이 여러 가문이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는 도심형 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6. 토지대장이 발굴 지점을 결정하는 순간
1912년 내자동의 토지대장은 오늘날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어떻게 활용되는가. 이게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토지대장은 단순한 역사 자료가 아니다. 발굴 조사원들이 "여기에서 시작하라"는 지도를 건네는 문서다.
토지대장 분석→지표조사→시굴조사→정밀발굴→유물 보고
종로 일대의 한 시굴조사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1912년 토지대장을 근거로 조사 범위를 설정했고, 19세기 후반 주거지의 기초석과 백자 파편이 대거 출토됐다. 그리고 그 순간 조사원들이 느낀 감각이 있었다.
"문서 속 필지와 실제 유구의 위치가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 과거와 현재가 맞닿는 듯한 전율이 있었다."
— 종로 일대 시굴조사 현장 관계자
이 감각이 문화재 발굴조사의 본질이다. 100년 전의 기록과 지금의 땅이 정확히 겹치는 그 순간, 시간이 사라진다.
7. 성공 사례 — 김씨 가문 집터에서 나온 조선의 부엌
이 이야기가 이 글을 시작하게 만든 핵심 사례다. 종로구의 한 재개발 예정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진행됐다. 1912년 토지대장을 통해 특정된 이 부지는 김씨 가문이 소유했던 곳이었다. 그리고 발굴이 시작됐다.
조선 후기 생활 유물이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주전자, 놋그릇, 먹과 벼루, 도자기 조각.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부엌이었고, 누군가의 서재였고, 누군가의 하루였다. 발굴 조사원들은 이 유물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활 수준과 문화 양식을 구체적으로 복원했다.
이 발굴 성과로 개발 계획이 일부 조정됐다. 유적은 보존됐고, 일부는 박물관 전시로 이어졌다. 재개발이 역사와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는 방식을 이 사례가 보여줬다. 문화재 조사가 걸림돌이 아니라 기회가 됐다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다.

8. 마무리 — 100년 전의 내자동이 오늘의 우리에게 남긴 것
오늘 내자동 골목을 걷게 된다면, 발아래 땅을 한 번 느껴봐 줬으면 한다. 김씨 가문의 넓은 집터였을 수도 있고, 오씨 가문의 작은 마당이었을 수도 있다. 법인의 사무 공간이었을 수도 있고, 국유지 위에 지어진 공공 건물의 터였을 수도 있다.
237필지, 46,053㎡. 이 숫자 뒤에는 이름도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하루가 있다. 아침마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골목에서 이웃을 만나고, 저녁이면 놋그릇에 밥을 담아 가족이 둘러앉던 그 사람들. 그들의 주전자가 세상에 다시 나왔다. 그것이 문화재 발굴조사가 하는 일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곧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내자동의 땅과 사람, 그 속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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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 넘도록 땅속에 있던 누군가의 주전자가 세상으로 나왔다
237필지, 46,053㎡. 김씨·이씨·최씨·박씨·오씨의 마을, 국유지·법인·일본인이 섞인 내자동. 1912년 토지대장이 발굴 지점을 짚어내고, 그 아래에서 조선 사람의 부엌이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가장 조용한 약속이다.
내자동 종로 인근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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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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