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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내자동, 237필지에 담긴 사람과 땅의 이야기 – 서울 문화재 발굴조사의 숨은 기초

최종 수정일: 8월 16일

목차


  1. 1912년, 종로구 내자동의 첫인상

  2. 237필지 46,053㎡, 그 규모가 의미하는 것

  3.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과 그 뒷이야기

  4. 국유지 3필지와 국가의 흔적

  5. 법인 소유 1필지의 미스터리

  6. 일본인 소유 토지 2필지의 배경

  7. 서울지역 문화유산 조사와 연결되는 역사적 가치

  8. 현대 문화재지표조사에서 본 내자동의 의미

  9. 성공 사례: 발굴조사로 밝혀진 종로의 숨은 이야기

  10. 결론 – 100년 전의 땅, 오늘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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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내자동에는 누가 살았고, 그 땅은 누구의 것이었을까요?”


오늘날 내자동은 서울 종로 한복판에 자리한 번화한 골목길과 빌딩의 숲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113년 전, 이곳의 풍경은 전혀 달랐습니다. 자동차 경적 소리 대신 마차와 인력거 바퀴 소리가 들렸고, 골목에는 장독대와 기와지붕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죠.

그 시절 내자동은 237필지, 총면적 46,053㎡의 땅으로 구성된 주거지였습니다. 이 수치는 단순한 행정 기록 같지만, 사실은 당시 서울의 사회 구조, 경제 상황, 그리고 사람들의 관계망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도입니다.




237필지 46,053㎡, 숫자가 말하는 풍경


한 필지 한 필지에는 주인의 이름과 그 집안의 사연이 담겨 있었습니다. 김씨가 42필지, 이씨가 30필지, 최씨가 18필지, 박씨가 17필지, 오씨가 11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김씨가 내자동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졌다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서울 도심에서 땅을 보유한다는 건 곧 권력과 직결되었고, 혼인이나 동맹을 통해 토지를 확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씨와 최씨, 박씨, 오씨 역시 지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가문이었죠.




국유지 3필지, 국가의 발자취


그 가운데 3필지는 국유지였습니다. 작은 수치처럼 보이지만, 이는 내자동이 단순한 민가 밀집지가 아니라 국가의 행정 또는 공공 기능과도 맞닿아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당시 국유지는 관아, 경찰서, 창고, 혹은 우편 업무를 담당하는 건물의 터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법인 소유 1필지, 근대화의 조짐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법인 소유의 땅이 1필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912년이라는 시기를 생각해보면, ‘법인’이라는 개념이 막 확립되던 때였습니다. 이 땅은 은행, 회사, 혹은 종교단체 소유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내자동에도 이미 근대적 자본주의와 조직이 스며들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일본인 소유 2필지, 시대의 그림자


더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일본인 소유의 땅이 2필지 있었습니다. 수치상으로는 미미해 보이지만, 한일병합 직후인 1912년이라는 시점에서 이는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식민지 시기 서울의 토지 소유 구조 변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데이터입니다. 이 2필지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어떤 경로로 이 땅을 소유하게 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권력 관계가 드러납니다.




이 모든 기록이 오늘날 문화재 발굴조사의 기초가 된다


내자동의 1912년 토지대장은 단순한 역사 자료가 아닙니다. 오늘날 문화재 발굴조사나 지표조사를 진행할 때, 이러한 옛 토지 기록은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고 발굴 지점을 선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예를 들어, 종로 일대의 한 구역에서 진행된 시굴조사에서는 옛 토지대장을 근거로 조사 범위를 설정한 결과, 19세기 후반 주거지의 기초석과 백자 파편이 대거 출토되었습니다. 조사 당시 현장 관계자들은 “문서 속 필지와 실제 유구의 위치가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 과거와 현재가 맞닿는 듯한 전율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성공 사례 – 종로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조선 후기 생활상


몇 해 전, 종로구의 한 재개발 예정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과거 토지대장을 통해 특정된 부지는 1910년대 김씨 가문이 소유했던 곳이었고, 발굴 결과 조선 후기 생활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주전자, 놋그릇, 먹과 벼루, 도자기 조각 등이 그대로 묻혀 있었고,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활 수준과 문화 양식을 구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조사 덕분에 개발 계획이 일부 조정되어, 유적은 보존되고 일부는 박물관 전시로 이어졌습니다.




과거의 땅이 오늘의 유산이 되는 이유


1912년의 내자동을 살펴보면, 단순히 ‘누가 몇 필지를 소유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당시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 경제력, 권력 구조, 그리고 시대적 변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서울지역의 문화재 발굴조사, 표본조사, 지표조사는 바로 이런 기록에서 출발합니다. 내자동의 토지대장은 오늘날 연구자와 조사자들에게 “여기에서 시작하라”는 지도를 건네는 셈입니다.




결론 – 100년 전의 내자동, 100년 뒤의 우리에게 남긴 것


내자동의 237필지, 46,053㎡는 이제 과거의 한 장면이지만, 그 속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를 향해 말을 겁니다.

우리가 오늘 도심 속 땅을 파헤치며 발견하는 기와 조각, 목재 기둥, 백자 파편은 모두 이 오래된 토지 기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곧 미래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내자동의 땅과 사람, 그리고 그 속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서울의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출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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