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교북동의 지적도와 거주자 정보
- 서울 HI
- 6월 29일
- 3분 분량
목차
그 시절 교북동, 시간 속으로 걸어들어가다
1912년 종로구 교북동의 규모는 어땠을까?
집과 밭, 그리고 땅의 용도
김씨, 박씨, 누가 살았을까?
국유지가 말해주는 행정의 흔적
교북동의 이야기, 오늘날 문화재지표조사와 연결되다
서울에서 문화재 시굴·지표조사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과거가 남긴 유산을 찾아서: 성공사례와 교훈
결론: 시간의 층위를 걷는 일의 의미
그 시절 교북동, 시간 속으로 걸어들어가다
1912년의 종로구 교북동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그 시절의 땅과 이름, 그리고 흔적은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서울의 중심이라는 자리가 무색할 만큼 소박하고 정적인 삶의 흔적이 남아 있던 그 시절, 우리는 그곳을 통해 한국 도시사의 일면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누구의 집이었고, 어떤 밭이 있었으며, 그 땅을 누가 소유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는 일은 단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의 문화재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정당성과 중요성을 증명하는 매우 생생한 근거다.

1912년 종로구 교북동의 규모는 어땠을까?
1912년, 교북동은 총 125필지, 면적 35,514㎡에 달하는 작은 마을이었다. 오늘날 강남의 어느 한 구획보다 훨씬 작은 규모지만, 그 안에 담긴 삶과 이야기들은 결코 작지 않다.
그곳에는 수많은 집이 있었고, 작지만 중요한 농경지도 존재했다. 단순히 “서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살아 숨 쉬는 마을이었고, 지금의 도시 서울 속에서도 여전히 그 유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집과 밭, 그리고 땅의 용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집’이었다. 전체 125필지 중 121필지, 총 22,010㎡가 바로 거주를 위한 대지였다.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만큼 많은 가구가 교북동에서 실제로 살고 있었고, 마을로서의 기능이 매우 활발했음을 의미한다. 지금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뒤덮인 공간에, 그 옛날엔 흙과 기왓장, 나무 문이 있었던 셈이다.
한편, 밭으로 쓰인 땅도 있었다. 단 4필지였지만 면적은 무려 13,504㎡. 이는 곧 한 필지가 평균 3,376㎡에 달했다는 뜻이다. 이 정도 규모면 한 가족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선다.
그 밭이 정확히 어떤 작물을 길렀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서울 도심에 이런 넓은 농경지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상상력을 자극한다.
김씨, 박씨, 누가 살았을까?
교북동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성씨 분포다. 1912년 당시 김씨가 25필지를 소유했고, 박씨가 13필지를 차지했다.
그 외에도 이씨, 최씨 등 다양한 성씨가 있었다. 지금처럼 복잡한 아파트나 건물 임대가 아니라, 대부분이 직접 그 땅을 소유하고, 그곳에서 삶을 일구었던 시대였다.
각 성씨는 그 자체로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마을에서 김씨는 김씨대로, 박씨는 박씨대로 서로 돕고 갈등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 기록은 단순한 지적 현황이 아니다. 1912년의 사회 구성, 공동체 문화, 그리고 당시 서울의 인구 흐름을 짐작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다.
국유지가 말해주는 행정의 흔적
전체 125필지 중 6필지는 국유지였다. 당시 행정 체계 아래, 정부가 직접 관리하던 땅이 있었고, 이는 마을 안에서도 일정한 질서와 통제를 의미했다.
국유지가 위치한 자리는 대체로 행정시설이 있었거나, 공공 용도로 쓰인 곳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문화재지표조사나 발굴조사에서 국유지의 존재는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과거의 공공시설 흔적이 문화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교북동의 이야기, 오늘날 문화재지표조사와 연결되다
이제부터 이야기는 현재로 이어진다. 1912년의 교북동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단순한 추억 때문만이 아니다.
문화재지표조사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런 땅의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를 찾는 첫 번째 과정이다.
지표조사는 개발이 예정된 지역에서 문화재가 존재할 가능성을 조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굴조사는 그 가능성을 더 깊이 확인하기 위한 작은 발굴이다.
이런 조사를 통해 우리는 도시의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고, 문화유산을 보존할 수 있다. 즉, 1912년의 교북동을 아는 것은 곧 지금의 서울을 지키는 일과 맞닿아 있다.
서울에서 문화재 시굴·지표조사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최근 서울 도심 개발, 재개발, 리모델링 등 다양한 도시 정비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문화재조사다.
만약 여러분이 종로, 강북, 동대문, 성북, 중구 등에서 개발을 고민하고 있다면, 문화재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은 복잡할 수 있지만, 믿을 수 있는 기관과 전문가가 함께하면 훨씬 수월해진다. 예를 들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연구소는 이러한 조사에 특화된 전문 기관으로, 종로구 교북동과 같은 장소에서 이미 다수의 실적을 쌓았다.
과거가 남긴 유산을 찾아서: 성공사례와 교훈
실제로 종로구의 한 고택 리모델링 프로젝트에서는 지표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기와와 기초 석재가 발견됐다. 이 유물은 이후 문화재로 등록되었고, 프로젝트는 보존 중심으로 방향을 바꿨다.
결과적으로 프로젝트는 ‘역사와 공존하는 공간’이라는 콘셉트로 큰 호응을 얻었고, 현재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문화재조사는 단지 개발의 제약이 아닌,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열쇠가 될 수 있다.
결론: 시간의 층위를 걷는 일의 의미
1912년의 교북동을 들여다본 이 이야기는 단지 옛 땅의 면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살아있던 사람들, 삶의 방식, 공동체의 기억,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남긴 흔적을 본다.
그 흔적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발 밑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 그 시간을 이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시간을 조심스레 쌓는 것이다.
문화재지표조사와 발굴조사, 그 모든 과정은 과거를 지키며 미래를 여는 열쇠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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