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영등포구 양평동의 토지와 삶의 흔적, 그 생생한 기록
문화재 지표조사서울 문화유산 발굴
지금의 아파트 단지 아래,1912년 양평동의 밭이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영등포의 기억
"467필지, 1,839,089㎡. 그 대부분이 밭이었다. 지금 우리가 걷는 도로와 아파트 아래, 100년 전 농부의 손이 닿았던 흙이 그대로 잠들어 있다."
출처: seoulheritage.org키워드: 문화재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 서울문화재발굴기관
목 차
1912년 양평동의 풍경 — 467필지가 그리는 거대한 농촌
51필지의 집터가 말해주는 것 — 드문드문 살았던 사람들
393필지의 밭 — 삶의 리듬을 결정하던 땅
분묘지 3필지 — 조상과 신앙이 깃든 공간
잡종지 20필지 — 변화를 예고한 과도기의 흔적
국유지 74필지와 마을 공유지 1필지
성씨 분포와 토지 소유 구조 — 김씨, 이씨, 그리고 외부 세력
일본인 소유 11필지 — 식민지 시기의 그림자
1912년 기록이 지표조사에 주는 단서들
지표조사에서 발굴조사까지 — 양평동에 필요한 절차
서울 발굴 성공 사례 — 아파트 공사장에서 만난 과거
양평동의 과거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것
지금 양평동 아파트 단지의 지하주차장을 뚫던 그 굴착기가 100년 전 밭이었던 흙을 건드리고 있었다면, 우리는 그걸 알고 있었을까.
대부분은 모른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무지가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가장 큰 손실을 만들어낸다. 기록도 없이, 조사도 없이 흙과 함께 버려지는 100년 전의 흔적들. 토기 조각 하나, 기와 파편 하나가 그렇게 사라진다. 반대로, 문화재 지표조사를 제대로 수행한 현장에서는 그 흔적들이 도시의 역사로 살아남는다.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총 467필지, 1,839,089㎡. 이 숫자들이 오늘의 개발 현장에서 얼마나 중요한 나침반이 될 수 있는지를 지금부터 이야기하겠다. 숫자 뒤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SECTION 011912년 양평동의 풍경 — 467필지가 그리는 거대한 농촌
467필지, 1,839,089㎡. 지금의 영등포구 양평동이 이 규모를 들으면 얼마나 달랐을지 감이 잘 오지 않을 것이다. 비교를 해보자. 여의도 전체 면적이 약 8,400,000㎡이니, 1912년 양평동은 여의도의 약 5분의 1 크기를 온전히 하나의 농촌 마을로 담고 있었다는 뜻이다.
467필지전체 필지
1,839,089㎡
393필지밭
1,446,261㎡
51필지대지(집터)
54,720㎡
74필지국유지
공공·행정
20필지잡종지
301,406㎡
3필지분묘지
36,700㎡
이 숫자들 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밭의 압도적인 비중이다. 전체 467필지 중 393필지, 전체 면적의 무려 78%가 밭이었다. 집터는 51필지에 불과했다. 오늘날 고층 아파트와 상업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양평동이 불과 100년 전에는 거의 전부가 밭이었다는 이 사실은, 지금 이 땅 아래에 무엇이 잠들어 있을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단서다.
SECTION 0251필지의 집터가 말해주는 것 — 드문드문 살았던 사람들
51필지, 54,720㎡의 대지. 467필지 전체 중 집터가 차지하는 비율은 11%에 불과하다. 지금의 양평동처럼 건물이 빽빽한 도시를 상상하면 이 수치가 얼마나 충격적인지 실감된다. 100년 전 이곳은 사람이 드문드문 흩어져 살던 공간이었다.
그 드문드문 자리 잡은 집들을 상상해보라. 기와지붕과 초가지붕이 밭 사이사이에 점처럼 박혀 있고, 마을 단위로 형성된 작은 공동체가 농사와 제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풍경. 아이들은 밭두렁 사이를 뛰어다녔을 것이고, 어른들은 계절마다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나누며 살았을 것이다. 이 51필지의 집터 구역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살펴야 할 곳이다. 생활 유구의 밀도가 가장 높을 구역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것이 집터 유구다. 기와 조각, 토기와 도자기 파편, 온돌과 아궁이 구조, 우물 흔적이 바로 이 51필지 대지가 밀집한 구역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집터와 밭의 경계선이 시굴조사 트렌치 배치의 첫 번째 기준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SECTION 03393필지의 밭 — 삶의 리듬을 결정하던 땅
78%
1912년 양평동 전체 면적의 78%가 밭이었다. 393필지, 1,446,261㎡. 이 숫자 하나가 당시 이 동네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양평동은 밭의 마을이었다.
밭은 단순한 식량 생산 공간이 아니었다. 씨앗을 뿌리는 봄, 잡초를 매는 여름, 수확을 거두는 가을, 다음 해를 준비하는 겨울. 농업의 리듬이 마을 전체의 리듬이었다. 어느 집이 올해 무엇을 심었는지, 이웃과 어떤 농산물을 나누었는지가 마을 공동체의 기본 언어였다.
393필지라는 숫자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넓은 경작지는 그 자체로 유구의 보고다. 밭두렁의 경계선, 탄화된 씨앗, 농기구 파편, 배수로 흔적 같은 것들이 토양층 분석을 통해 확인될 수 있다. 특히 밭과 집터의 경계 구간, 그리고 밭과 잡종지가 만나는 지점에서 생활 유구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1,446,261㎡의 밭은 오늘의 양평동 지하에 가장 넓게 분포한 역사의 지층이다.

SECTION 04분묘지 3필지 — 조상과 신앙이 깃든 공간
양평동에는 3필지, 36,700㎡의 분묘지가 있었다. 이 숫자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분묘지는 단순한 장례 공간이 아니었다. 조상을 모시고,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정체성과 가문의 계보를 이어가는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제사철이 되면 멀리 떠난 후손들이 이 묘역으로 모여들었고, 그 주변에서 마을의 소식과 가족의 역사가 교환되었다.
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분묘지는 매우 예민하게 다루어지는 구역이다. 당시 사회 구조와 의례 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묘비 조각, 제기류, 부장품, 묘역의 배치 구조 같은 것들이 그 시대 사람들의 신앙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양평동의 36,700㎡ 분묘지는, 오늘날 이 구역이 개발된다면 반드시 사전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SECTION 05잡종지 20필지 — 변화를 예고한 과도기의 흔적
잡종지 20필지, 301,406㎡. 이 면적은 집터 전체(54,720㎡)의 약 5.5배에 달한다. 잡종지가 이렇게 넓었다는 것은 1912년의 양평동이 이미 단순한 농촌 마을을 넘어서 변화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는 신호다.
잡종지는 주거도 농업도 아닌 땅이다. 창고, 군용 시설 예정지, 소규모 공업 공간, 도로 예정 부지 등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1910년대 서울 외곽 지역의 잡종지는 종종 이후 공장지대나 군사 시설로 전환되곤 했다. 양평동이 훗날 영등포 공업 지대의 일부가 된 것을 생각하면, 이 20필지의 잡종지는 그 변화를 예고하는 전초 단계였을 가능성이 크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구역은 근대 산업 유산의 잔해가 나올 수 있는 구역으로 분류된다.
SECTION 06국유지 74필지와 마을 공유지 1필지
74필지의 국유지는 양평동 전체 467필지 중 약 16%를 차지한다. 이 땅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던 공공 부지였고, 도로, 행정 시설, 공공 경작지 등의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1912년이라는 시점을 감안하면, 이 국유지는 이미 총독부의 행정 권력이 양평동에 상당히 깊이 뻗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마을 소유지는 단 1필지였다. 마을 전체가 함께 이용하던 공유 공간이 고작 1필지에 불과했다는 것은, 전통적인 공동체 자산의 대부분이 이미 국유지나 개인 소유지로 분리되어 버렸음을 암시한다. 이 마을 공유지 1필지는 아마도 마을회관이나 공동 제의 공간, 혹은 함께 경작하던 공동 농지였을 것이다.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마을 공유지는 공동체의 집단 생활 유구가 집중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구역 중 하나다.

SECTION 07성씨 분포와 토지 소유 구조 — 김씨, 이씨, 그리고 외부 세력
토지를 누가 소유했는지는 그 동네가 어떤 공동체였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1912년 양평동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성씨는 김씨였다. 93필지로 단연 압도적이었고, 이씨 53필지, 송씨 34필지, 조씨 26필지가 뒤를 이었다.
김씨
93필지
이씨
53필지
송씨
34필지
조씨
26필지
국유지
74필지
일본인
11필지
김씨 93필지와 이씨 53필지를 합치면 146필지, 전체 개인 소유 토지의 상당 부분이 이 두 성씨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씨족 중심의 마을 구조가 뚜렷하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 성씨가 여러 필지를 연속으로 소유하고 대물림한 구역에서는 생활 유구의 연속성이 가장 잘 보존된다. 그 땅에서 아버지가 농사를 짓고 아들이 이어받았다면, 지층에는 수대에 걸친 생활의 흔적이 압축되어 쌓여 있기 때문이다.
SECTION 08일본인 소유 11필지 — 식민지 시기의 그림자
역사적 맥락 — 1910년 한일병합 이후의 토지 변동
1910년 한일병합 직후, 일본인들은 서울과 인근 지역의 토지를 적극적으로 매입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거래 형태를 띠었지만, 많은 경우 불평등한 협상과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양평동의 일본인 소유지 11필지는 이 과정의 직접적인 흔적이다. 이 필지들의 위치와 규모를 추적하면, 당시 일본인이 양평동에서 어느 지역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장했는지가 드러난다.
11필지는 전체 467필지 중 2.4%에 불과하지만, 이 숫자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가볍지 않다. 한일병합 후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에 이미 영등포 외곽의 농촌 마을까지 일본인 소유지가 파고들어 있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11필지의 위치를 고지도와 GIS 분석으로 특정하면, 일제강점기 초기 건축 방식이나 생활 물품의 흔적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 구역이 드러난다.
SECTION 091912년 기록이 지표조사에 주는 단서들
467필지의 기록이 지표조사 설계에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각 토지 유형별로 발굴 가능성과 조사 방향이 달라진다.
대지 구역 — 51필지
기와 조각, 토기 파편, 온돌 및 아궁이 구조, 우물 흔적이 집중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구역이다. 집터와 밭의 경계선이 시굴조사 트렌치 배치의 첫 번째 기준이 된다.
밭 구역 — 393필지
탄화된 씨앗, 농기구 파편, 밭두렁 경계 흔적, 배수로 구조가 토양층 분석으로 확인될 수 있다. 밭과 집터의 경계 구간이 생활 유구 집중 구역이다.
분묘지 구역 — 3필지
묘비 조각, 제기류, 부장품, 묘역 배치 구조가 당시 사회 구조와 의례 문화를 복원하는 핵심 자료가 된다. 이 구역에서는 발굴 전에 반드시 특별한 사전 조사 계획이 필요하다.
잡종지 구역 — 20필지
근대 산업 시설이나 군사 관련 구조물의 기초 잔해가 나올 수 있다. 훼손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경계부에 잔존 포켓이 남아 있을 수 있다.
국유지 및 일본인 소유 구역
근대 행정 시설의 기초 유구, 도로 관련 구조물, 일제강점기 초기 건축 방식의 흔적이 단서가 된다. 이 구역에서 조선 전통과 근대 건축이 충돌하는 층위가 나타날 수 있다.
SECTION 10지표조사에서 발굴조사까지 — 양평동에 필요한 절차
양평동 같은 지역은 특히 농경지와 분묘지가 많았던 만큼, 개발 전에 문화재 지표조사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법령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건설공사는 지표조사가 의무화되어 있고, 지표조사 결과에 따라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지표조사는 문헌 분석과 고지도 검토, GIS 공간 정보 분석, 현장 보행조사로 이루어진다. 이 단계에서 1912년 토지 기록이 직접적인 분석 자료로 활용된다. 어느 구역이 집터였는지, 어디가 분묘지였는지, 잡종지는 어느 방향으로 펼쳐져 있었는지가 트렌치 배치의 근거가 된다. 시굴조사에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면 발굴조사로 전환되고, 발굴 결과에 따라 현장 보존이나 설계 변경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을 계획 초기부터 문화재 발굴 기관과 함께 설계하면, 공사 중단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할 수 있다.

SECTION 11서울 발굴 성공 사례 — 아파트 공사장에서 만난 과거
서울 아파트 단지 공사 현장 — 구석기부터 조선까지의 발굴
서울에서 아파트 단지 공사 중 유물이 대거 발견된 사례가 실제로 있다. 구석기 유물부터 조선시대 분묘, 근대기의 생활 도구까지 다양한 층위의 유물이 보고되었다. 이 현장에서 주목할 것은 사전 지표조사가 충실하게 이루어진 덕분에 발굴 범위가 빠르게 특정되었고, 공사 지연 없이 인허가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발굴된 유물은 인근 역사관에 전시되어 지역 정체성을 강화하는 자산이 되었다. 이 사례는 양평동처럼 농경지와 분묘지가 많았던 지역에서 지표조사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다.
영등포 인근 근대 유산 발굴 — 공업화의 기억을 꺼내다
영등포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공업화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의 근대 산업 유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공장 기초 구조물, 철도 관련 시설 잔해, 일제강점기 노동자 생활 용품이 확인된 바 있다. 잡종지로 분류된 구역에서 이런 근대 산업 유구가 나온다는 사실은, 양평동의 20필지 잡종지가 유사한 발굴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역사는 먼 과거에만 있지 않다. 근대의 흔적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SECTION 12양평동의 과거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것
1912년의 양평동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고층 아파트 대신 밭이 있었고, 상업 건물 대신 집터가 드문드문 있었으며, 분묘지에서는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며 공동체의 끈을 이어갔다. 그 세계가 오늘의 양평동으로 변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흔적이 기록도 없이 사라졌을까.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사라짐을 막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행정 절차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오늘 우리가 양평동에서 아파트에 살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공원을 걷는 것은 과거를 기록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노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1912년
467필지의 농촌 마을. 393필지의 밭, 51필지의 집터, 3필지의 분묘지. 김씨와 이씨 가문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일본인이 조금씩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 해방
영등포 공업 지대의 확장과 함께 양평동도 변화했다. 밭은 공장 부지로, 집터는 공장 노동자의 주거지로 바뀌었다. 분묘지는 하나씩 사라졌다.
1970년대 이후
도시화가 가속되면서 아파트 단지와 상업 지구가 들어섰다. 1912년의 밭두렁과 집터의 흔적은 땅속으로 점점 깊이 묻혔다.
지금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그 묻힌 기억을 꺼낼 수 있다. 100년 전의 양평동을 만날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의 차가운 콘크리트 아래,100년 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씨앗을 심던 흙이 있다.그 흙이 기억하는 것들을우리가 기억해주지 않으면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문화재 지표조사는그 기억을 지켜내는 가장 작은, 그리고 가장 중요한 행동이다.
밭에서 시작된 도시의 기억을땅속에서 꺼내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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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참고: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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