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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은평구 수색동, 어떤 땅이었을까?

  • 2025년 4월 29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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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마을을 바꾸기 시작하던 그 날 — 1912년 은평구 수색동, 땅이 품은 사람들의 이야기

잠깐, 지금 서울 지하철 수색역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봐.


아파트, 편의점, 카페, 차들이 꽉 찬 도로.



그런데 딱 113년 전, 이 자리에는 벼가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벼 사이로 기차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수색동의 운명은 조용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게 바뀌었다.


그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한다.


목 차

1 1912년 수색동, 어떤 땅이었을까 — 395필지의 진실

2 논과 밭, 수색동 농부들의 생명줄 — 숫자 속에 담긴 땀

3 집과 마을, 초가집의 온기 — 대지 48필지의 이야기

4 철도용지, 수색동을 바꾼 운명의 한 줄 — 경의선과 사람들

5 산과 잡종지, 잊혀진 자연의 기억 — 임야와 공동 공간

6 수색동을 이끈 성씨들 — 김씨부터 윤씨까지

7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필요한 이유 — 땅 아래 잠든 역사

8 과거가 현재에게 건네는 말 —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1912년, 은평구 수색동은 395개의 필지가 모여 총 1,213,886㎡의 땅을 이루고 있었다. 축구장으로 환산하면 170개를 나란히 이어붙인 크기. 이 광활한 들판 위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계절을 따라 씨를 뿌리고, 기도하고, 아이들을 키웠다.

395필지

총 필지 수

1,213,886㎡

총 면적

151필지

논 (566,971㎡)

185필지

밭 (290,335㎡)

48필지

대지 (32,770㎡)

241,852㎡

철도용지 (1필지)


1. 1912년 수색동, 어떤 땅이었을까 — 395필지의 진실



1912년은 대한제국이 사라진 지 2년이 지난 해였다. 나라의 주권은 빼앗겼지만, 수색동 사람들의 하루는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해가 뜨면 논으로 나가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반복 속에서 395개의 필지가 마을의 뼈대를 이루고, 각각의 땅 위에서 각자의 삶이 조용히 흘러갔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의 1912년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수색동의 데이터는 특히 흥미롭다. 이 마을이 단순한 농촌 공동체를 넘어, 근대화의 물결에 가장 먼저 노출된 서울 변두리 마을이었다는 사실이 숫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에 바로 철도가 있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더 자세히 풀겠지만, 먼저 이 땅의 기본 구조를 이해하고 넘어가자.

46.7%

23.9%

철도용지

19.9%

임야

6.8%

대지

2.7%


2. 논과 밭, 수색동 농부들의 생명줄 — 숫자 속에 담긴 땀



수색동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땅은 다름 아닌 논이었다. 151필지, 566,971㎡. 이 수치가 얼마나 큰 규모인지 실감하려면 이 정도 비교가 필요하다. 여의도공원 전체 면적이 약 230,000㎡이니, 수색동의 논만 해도 여의도공원 2.5개를 합친 넓이다. 전체 면적의 46.7%가 논이었다는 사실은, 이 마을의 정체성이 철저하게 벼농사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봄이 오면 수색동 사람들은 모내기를 준비했다. 못자리를 만들고, 모를 키우고, 물이 충분히 잡힌 논에 한 줄 한 줄 심어나갔다. 이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웃과 이웃이 서로 일손을 빌려주는 품앗이가 없었다면 566,971㎡의 논을 경작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논은 그래서 단순한 농지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협력과 신뢰가 작동하는 공간이었다.

밭은 185필지, 290,335㎡로 논 다음으로 넓었다. 고추, 배추, 무, 콩, 참깨, 보리 — 계절마다 다른 작물이 자라나며 밭은 마을의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특히 수색동처럼 한강 지류와 가까운 지역에서는 토양이 비옥해 밭작물의 수확량이 높았을 가능성이 크다. 문화재 지표조사 전문가들이 이 지역에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비옥한 농경 환경이 만들어낸 장기적인 생활 유구 때문이다.

해가 뜨기 전 안개 속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한 농부가 허리를 굽혀 논을 매고 있었다. 그의 손이 닿은 흙이 지금 우리 발아래에 있다.


3. 집과 마을, 초가집의 온기 — 대지 48필지의 이야기



48필지, 32,770㎡. 이것이 수색동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간 집터의 규모다. 전체 면적의 2.7%에 불과하지만, 이 좁은 땅 위에서 마을의 모든 일상이 이루어졌다. 아침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세수를 하고, 된장찌개를 끓이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던 그 모든 장면이 바로 이 32,770㎡ 위에서 펼쳐졌다.

48필지를 단순 산술로 나누면 한 필지당 평균 약 680㎡, 약 200평 남짓이다. 집 한 채에 텃밭, 장독대, 헛간이 딸린 넉넉한 규모다. 마당에는 장독이 줄지어 서 있고, 처마 밑에는 고추와 호박이 빨갛고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저녁이면 남자들은 마루에 앉아 막걸리 한 사발을 기울이고, 아이들은 골목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 소리가 아직도 이 땅 어딘가에 메아리치고 있는 것 같다.

문화재 발굴조사의 관점에서 대지는 가장 풍부한 유구가 발견되는 공간이다. 온돌 구조물, 우물 흔적, 생활 도기, 동전, 종이 문서 잔편까지 —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 초기에 이르는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은 유물들이 이 대지 아래에 켜켜이 쌓여 있다. 수색동에서 문화재 시굴조사를 진행한다면, 이 48필지 대지 지역을 중심으로 조사 구역을 설정하는 것이 핵심 전략이 될 것이다.


4. 철도용지, 수색동을 바꾼 운명의 한 줄 — 경의선과 사람들



수색동 1912년 토지 기록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항목은 단 1필지지만 241,852㎡에 달하는 철도용지다. 전체 면적의 19.9%를 차지하는 이 거대한 단일 필지는, 다른 어떤 마을의 기록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이례적인 데이터다.

1906년 개통된 경의선은 서울에서 개성,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노선이었다. 그리고 그 경의선이 지나는 핵심 거점 중 하나가 바로 수색동이었다. 수색역이 생기고, 철도 관련 시설이 들어서면서 241,852㎡의 광활한 땅이 철도용지로 편입됐다. 이것은 단순한 토지 분류 변경이 아니었다. 수색동이 농촌 마을에서 근대 교통 거점으로 탈바꿈하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기차가 들어오면서 수색동 사람들의 세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울 도심까지 몇 시간이 걸리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농부들은 기차에 농산물을 싣고 더 먼 시장으로 나갈 수 있게 됐고, 수색동으로는 바깥 세상의 새로운 물건과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철도는 편리함과 동시에 변화, 그리고 그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압박을 가져왔다.

성공 사례 — 철도용지 문화재 발굴조사

실제로 서울 용산구 철도 부지 일대에서 진행된 문화재 발굴조사에서는 일제강점기 초기 철도 시설물 잔존 구조물과 함께 그 이전 시대의 생활 유구가 복합적으로 출토됐다. 철도용지는 단일 목적으로 조성된 공간이지만, 그 이전 시대의 역사를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수색동의 241,852㎡ 철도용지 역시, 경의선 개통 이전에 이 땅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흔적이 지층 깊은 곳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5. 산과 잡종지, 잊혀진 자연의 기억 — 임야와 공동 공간

수색동의 임야는 10필지, 81,957㎡였다. 마을을 감싸 안은 이 작은 산들은 단순히 나무가 자라는 곳이 아니었다. 마을 공동체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자원 창고였고, 동시에 제사를 지내고 조상의 묘를 모시는 신성한 공간이기도 했다. 봄에는 나물을 캐러, 가을에는 버섯을 따러, 겨울에는 땔감을 구하러 수색동 사람들이 수없이 오르내리던 그 산자락이 81,957㎡의 임야 기록 속에 담겨 있다.

잡종지도 눈여겨봐야 할 공간이다. 비록 필지 수와 면적이 기록에서 크게 두드러지지 않더라도, 잡종지는 논도 밭도 아닌 마을의 유연한 공간 — 소를 매어두는 목초지, 농기구를 쌓아두는 야적장, 마을 사람들이 모여 씨름판을 벌이던 놀이터 — 로 다양하게 활용됐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잡종지는 종종 가장 예상치 못한 유물이 출토되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일상의 경계에서 모든 것이 뒤섞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6. 수색동을 이끈 성씨들 — 김씨부터 윤씨까지

성씨

소유 필지 수

마을 내 역할

김씨 (金氏)

81필지 최다

수색동 최대 지주 집단

조씨 (趙氏)

43필지

제2 유력 세력

최씨 (崔氏)

40필지

제3 유력 세력

박씨 (朴氏)

24필지

중상위 지주

이씨 (李氏)

24필지

중상위 지주

신씨·한씨·유씨·정씨 外

10~17필지

중소 지주

송씨·윤씨

10필지 내외

소지주

81필지를 소유한 김씨 집안은 수색동의 명실상부한 큰 손이었다. 전국 어디서나 가장 흔한 성씨인 김씨가 이 마을에서도 압도적인 토지 소유량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81필지가 논인지 밭인지 대지인지에 따라 이 가문의 성격이 달라지겠지만, 어느 경우든 마을에서 이 집안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조씨 43필지, 최씨 40필지. 이 세 가문이 합산하면 164필지 — 전체 395필지의 41.5%를 차지한다. 수색동의 절반 가까운 땅이 이 세 성씨의 손 안에 있었던 셈이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혼인으로 연결되기도 하면서 마을의 질서를 만들어갔다.

박씨와 이씨가 각각 24필지로 동률을 이루고, 그 아래로 신씨, 한씨, 유씨, 정씨, 송씨, 윤씨가 10필지 안팎으로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다양한 성씨가 공존한다는 것은 수색동이 단일 씨족 마을이 아니라, 다양한 가문이 모여 형성한 개방적인 공동체였음을 시사한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성이 김씨, 조씨, 최씨라면? 어쩌면 당신의 증조할머니가 1912년 수색동의 논두렁을 맨발로 걸어 다녔을지도 모른다.


7.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필요한 이유 — 땅 아래 잠든 역사



문화재 지표조사란 개발 공사가 시작되기 전, 해당 부지에 역사적·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을 사전에 평가하는 절차다. 땅을 직접 파기 전에 문헌 기록, 지형 분석, 현장 답사를 통해 유적 존재 가능성을 먼저 판단한다. 그리고 지표조사에서 유적 가능성이 확인되면, 소규모 시굴조사를 통해 실제 지층을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수색동처럼 1912년 기록에서 논 566,971㎡, 밭 290,335㎡가 확인되는 지역은 문화재 지표조사의 우선 대상이 될 수 있다. 장기간 농경지로 사용된 땅은 하부에 그 이전 시대의 생활 유구가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논은 수분 함량이 높고 혐기성 환경이 유지되어 목제 유물이나 씨앗, 유기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원형 가까이 보존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수색동의 철도용지는 경의선 개통 이전의 역사를 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철도가 놓이기 전 이 땅은 무엇이었을까? 그 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문화재 발굴조사의 핵심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인 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역의 지역 조사 데이터를 공개하며, 발굴조사 비용·법적 절차·공사 일정 조율에 관한 상세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에 문의가 필요하다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를 참고하자. 시굴조사, 표본조사, 지표조사의 절차와 비용에 대한 FAQ가 상세히 정리되어 있으며, 은평구를 포함한 서울 전 지역의 1912년 지역조사 데이터도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8. 과거가 현재에게 건네는 말 —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2025년의 수색동과 1912년의 수색동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세상이다. 논은 아파트로, 밭은 도로로, 초가집은 상가로 바뀌었다. 경의선은 지금도 달리고 있지만, 그 선로 위를 달리는 기차는 증기기관차가 아니라 디지털 열차다.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땅을 일군 농부들의 이야기. 조씨 집안과 최씨 집안이 이웃해 살며 서로의 농사를 거들었던 품앗이의 기억. 경의선 기차를 처음 보고 두 눈을 크게 떴을 마을 아이들의 순간. 이런 것들이 지층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잠든 이야기를 깨우는 일이다.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땅을 파기 전에, 우리는 그 땅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 먼저 물어봐야 한다. 그것이 번거롭게 느껴지더라도, 한 번 사라지면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수색동의 1912년 이야기는 바로 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1912년 수색동의 논두렁을 걷던 농부는 자신이 밟는 이 흙이 100년 후에도 누군가의 발아래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오늘 모내기를 마치고, 저녁에 된장찌개 한 그릇 먹고, 아이들 곁에서 잠드는 것이 전부였다.


그 소박한 하루하루가 쌓여 지금의 수색동이 됐다. 아파트 기초 공사가 뚫고 들어가는 그 흙 속에는, 그 농부의 발자국이 아직 남아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그 발자국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것은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하려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본능이다. 수색동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읽은 당신이, 그 다음 이야기를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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