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1912년, 송파구 삼전동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 2025년 4월 27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4일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 서울 문화유산

밭 세 뙈기에서 시작된삼전동의 100년 이야기

1912년 송파구 삼전동 토지조사 기록으로 복원하는 한강변 마을의 기억그리고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가 이 땅에서 찾아낸 것들

서울 송파구 삼전동 2025년 기준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목차

  1. 삼전동이라는 이름의 비밀 — 밭 세 뙈기에서 시작된 마을

  2. 1912년 삼전동의 풍경 — 217필지, 1,228,835㎡의 규모

  3. 집이 있던 흔적 — 38필지 대지와 사람들의 보금자리

  4. 신성한 공간 — 사사지 1필지 449㎡의 이야기

  5. 잡종지의 비밀 — 8필지, 115,372㎡가 말해주는 것

  6. 삼전동의 진짜 주인공 — 밭 170필지, 1,098,980㎡의 삶

  7. 땅을 지킨 사람들 — 이씨, 김씨, 신씨, 염씨, 한씨, 강씨의 기록

  8.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가 이 땅에서 찾는 것

  9. 성공 사례 — 한강변 유적 발굴이 바꾼 역사의 지도

  10.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야기

당신이 삼전동을 걸을 때,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나요?

잠실대교 근처, 고층 아파트와 한강공원이 맞닿은 그 땅.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이 길이, 불과 113년 전에는 드넓은 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냥 밭이 아니다. '삼밭게'라고 불렸던, 세 뙈기의 밭에서 이름이 시작된 마을. 한강 물길을 끼고 봄이면 씨를 뿌리고, 가을이면 수확을 감사하며, 겨울이면 서로의 온기로 버텼을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이 땅 안에 묻혀 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 seoulheritage.org는 1912년 토지조사부라는 기록을 분석해 그 기억들을 하나씩 되살리고 있다. 오늘 이 글이 끝날 때쯤, 삼전동이라는 이름이 완전히 다르게 들릴 것이다. 지금 시작한다.



01

삼전동이라는 이름의 비밀 — 밭 세 뙈기에서 시작된 마을

삼전동(三田洞). 이름 자체가 이미 이야기다. '세 개의 밭'이라는 뜻. 조선시대 한강변에는 조수가 밀려와 농사를 짓기 어려운 땅이 많았는데, 이 마을에는 유독 물이 차오르지 않는 세 곳의 밭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삼밭게', 또는 '삼전도(三田渡)'라고 불렀다.

삼(麻)을 심었기 때문에 '마전포(麻田浦)'라는 이름도 있었고, 벌판에 장승을 세웠다고 해서 '장승골', '장승벌'이라고도 불렸다. 하나의 동네에 이렇게 많은 이름이 붙었다는 건, 그만큼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이야기해온 땅이라는 뜻이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는 더 묵직해진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임금 인조가 바로 이 삼전도 땅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굴욕의 기록이 새겨진 삼전도비가 아직도 석촌호수 근처에 서 있다. 이 한 뙈기의 땅이 품고 있는 역사의 무게가 이렇게나 무겁다.

그리고 1912년, 일제강점기의 토지조사부는 이 삼전동의 모습을 숫자로 꼼꼼히 기록해두었다. 문화재 지표조사 전문가들이 그 기록을 열어보기 전까지, 아무도 몰랐을 이야기들이 그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삼전도'는 조선 세종 21년(1439년)에 신설된 나루터로, 한강나루·노들나루와 함께 경강삼진(京江三津)의 하나였다. 서울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어 상인과 여행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02

1912년 삼전동의 풍경 — 217필지, 1,228,835㎡의 규모

217총 필지 수

1,228,835㎡전체 면적


(축구장 약 172개)

6개주요 성씨 가문

89.5%밭이 차지한


면적 비율

1912년 삼전동의 규모는 압도적이다. 217필지, 1,228,835㎡. 지금으로 치면 축구장 172개를 합쳐 놓은 넓이다. 오늘날 삼전동이 서울 안에서도 비교적 조용한 주거지역이라는 걸 생각하면, 당시의 광활함이 더욱 실감 난다.

seoulheritage.org의 분석에 따르면, 이 넓은 땅의 대부분은 농경지였다. 고층 아파트도, 상업 시설도, 지하철역도 없던 시절. 삼전동은 그냥 한강을 옆에 끼고 묵묵히 땅을 일구며 사는 마을이었다. 한강은 지금보다 훨씬 원시적인 모습으로 흘러내렸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마을 사람들의 삶도 함께 물들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밭(田)

170

1,098,980

대지(垈)

38

14,033

잡종지

8

115,372

사사지(寺社地)

1

449

표에서 바로 눈에 들어오는 건 밭의 압도적인 비중이다. 전체 면적의 89.5%가 밭. 이 숫자가 말해주는 건 명확하다. 1912년 삼전동은 거의 전부가 농업으로 살아가던 마을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광활한 밭 위에서 이씨, 김씨, 신씨 등 여섯 성씨의 가문이 대를 이어 삶을 이어갔다는 것.



03

집이 있던 흔적 — 38필지 대지와 사람들의 보금자리

1912년 삼전동에는 38필지, 14,033㎡의 대지가 있었다. 217필지 중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은 겨우 38곳. 전체 면적으로 보면 1.1%에 불과하다. 그만큼 이 마을은 '사는 곳'보다 '일하는 곳'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컸다.

38필지의 집들은 아마도 서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을 것이다. 초가지붕 아래 좁은 마루에서 저녁 바람을 맞으며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은 흙길을 맨발로 뛰어다니고, 아궁이에서 장작이 타는 냄새가 골목을 가득 채웠을 그 밤. 38필지라는 숫자 안에는 수십 가족의 하루하루가 담겨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이 대지 구역은 특히 중요하다. 생활터전이었던 만큼, 땅 속 깊이 생활유물이 층층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도기 조각, 기와 편, 옛 우물터, 아궁이 흔적, 심지어 주춧돌까지 — 발굴조사 현장에서 이런 유물들이 발견되는 건 생각보다 드문 일이 아니다. 집이 있었던 자리는 가장 생생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04

신성한 공간 — 사사지 1필지 449㎡의 이야기

1912년 삼전동에는 사사지(寺社地)가 딱 1필지, 449㎡ 있었다. 절이나 사당 같은 신성한 공간을 위한 땅이다. 규모는 작다. 하지만 마을 안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묵직한 의미를 갖는다.

삼전동 사람들은 이 사사지에 들러 무엇을 빌었을까. 봄비가 제때 내리기를. 수확이 풍성하기를. 한강이 넘치지 않기를. 가족 중 아픈 이가 빨리 낫기를. 그리고 어린아이가 무사히 자라기를. 기도의 내용은 시대를 막론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사지는 마을의 불안과 희망이 가장 솔직하게 모이던 장소였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사사지 터를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종교적 공간 주변에서는 제기류, 향로 파편, 기와 편, 소형 불상 파편 같은 유물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서울의 다른 지역 시굴조사에서도 사사지 추정 구역에서 건물 기초 흔적과 종교 관련 유물이 함께 출토된 사례가 있었다. 449㎡라는 숫자가 작아 보여도, 이 땅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다.

사사지(寺社地)는 절 또는 신사의 터를 뜻한다.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사사지 기록은 종교 유구 존재 여부를 판단하는 핵심 단서다. 주변에서 기와 편, 제기류, 석재 구조물이 함께 발견될 경우 시굴조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05

잡종지의 비밀 — 8필지, 115,372㎡가 말해주는 것



1912년 삼전동에서 흥미로운 항목이 하나 있다. 바로 잡종지. 8필지에 면적이 무려 115,372㎡. 전체 면적의 9.4%를 차지하는 이 땅은 '특정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땅'으로 분류된다.

잡종지는 쉽게 말해 '애매한 땅'이다. 논도 밭도 아니고, 집을 지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림도 아닌 땅. 하지만 이런 땅이 115,372㎡나 존재했다는 건 단순히 비어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강변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이 잡종지는 계절에 따라 범람했다가 물이 빠지기를 반복하는 저습지나 모래사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런 저습지와 하천변 퇴적층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특히 눈여겨보는 구역이다. 한강변의 퇴적층 안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이 층층이 쌓여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송파구 일대 한강변 발굴에서는 백제시대 토기부터 조선시대 생활용품까지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사례가 있다. 이 '잡종지'라 불린 땅이 어쩌면 가장 오래된 기억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06

삼전동의 진짜 주인공 — 밭 170필지, 1,098,980㎡의 삶



1912년 삼전동의 진짜 주인공은 밭이었다. 170필지, 1,098,980㎡. 전체 면적의 약 90%. 이 숫자를 눈앞에 펼쳐놓으면, 그 시절 삼전동이 얼마나 거대한 농촌이었는지가 실감 난다.

삼전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밭 세 뙈기'에서 왔듯이, 이 마을의 정체성은 온전히 밭 위에서 세워졌다. 봄이면 씨앗을 묻고, 여름이면 잡초를 뽑고, 가을이면 허리를 숙여 수확하고, 겨울이면 내년 농사를 준비하며. 이 마을 사람들의 한 해는 밭의 계절과 완전히 일치했다.

특히 삼전동의 밭은 한강변이라는 입지 덕분에 수분이 풍부하고 비옥했을 것이다. 강변의 충적토는 오래전부터 농사에 유리한 땅으로 알려져 있고, 홍수가 지나간 뒤 강이 두고 간 기름진 흙은 농부들에게 선물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비옥한 땅 위에서 나온 수확물들이 한강 뱃길을 통해 서울 도성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대규모 경작지 구역은 매우 중요한 조사 대상이다. 오랫동안 경작된 땅의 표층 아래에는 경작 이전의 생활 흔적이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행위 자체가 역설적으로 더 아래 지층의 유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07

땅을 지킨 사람들 — 이씨, 김씨, 신씨, 염씨, 한씨, 강씨의 기록

1912년 토지조사부에는 땅의 규모뿐 아니라 그 땅을 소유한 사람들의 이름도 기록돼 있다. 그 이름들을 따라가면, 삼전동을 지킨 여섯 성씨 가문이 나타난다.

성씨

보유 필지 수

비고

이씨(李氏)

61

가장 많은 토지 보유

김씨(金氏)

29

2위

신씨(申氏)

27

3위

염씨(廉氏)

17

4위

한씨(韓氏)

15

5위

강씨(姜氏)

10

6위

이씨가 61필지로 압도적인 1위다. 이건 단순히 땅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씨 가문이 삼전동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마을 대소사를 이끌고, 이웃과의 갈등을 중재하고, 어려운 해에는 곡식을 나누었을 그 집안. 61필지 위에는 한 가문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함께 새겨져 있다.

염씨는 어떨까. 17필지. 흔하지 않은 성씨가 삼전동 땅의 일부를 오랫동안 지켜왔다는 것은 이 가문이 이 마을에 뿌리를 매우 깊이 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강씨는 10필지. 규모는 작지만, 그 10개의 땅 위에서 강씨 집안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계절을 보냈을지는 숫자로 헤아릴 수 없다.

이 여섯 성씨의 이름은 오늘날 문화재 발굴조사에서도 의미 있는 단서가 된다. 특정 가문이 오랫동안 소유하고 경작한 땅은 더 깊은 생활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고, 가문의 분묘나 제례 공간이 인근에 존재했을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08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가 이 땅에서 찾는 것



삼전동처럼 오랜 역사를 품은 한강변 마을에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 땅이 가진 지층 구조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강 범람원 위에 형성된 삼전동의 땅은 시대별 퇴적층이 비교적 선명하게 쌓여 있다. 표층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오래된 시대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이 땅을 파기 전에 먼저 살펴보는 작업이다. 연구자들이 현장을 걷고, 지표면에 드러난 유물 흔적을 기록하고, 1912년 토지조사부 같은 문헌 자료와 항공사진을 교차 분석한다. 삼전동의 경우, 170필지의 광대한 밭과 사사지, 그리고 한강변 잡종지는 각각 다른 성격의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지표조사 단계부터 꼼꼼한 구역 분류가 필요하다.

지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필요한 경우 표본조사(전체 면적의 2% 이내)가 이루어지고, 유물이 확인되면 시굴조사(10% 이내)로 이어진다. 그리고 유구(遺構)의 규모가 크거나 역사적 중요성이 높다고 판단되면 국가유산청의 허가를 받아 정밀발굴조사가 진행된다. 이 전체 과정이 한 지역의 개발과 역사 보존을 동시에 이끌어가는 방법이다.

삼전도비가 서있는 땅에서, 그 아래 어딘가에는 조선시대 이전의 기억들도 잠들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인근 석촌동과 풍납동 일대의 발굴에서는 백제시대 유적들이 속속 발견되며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는 수준의 성과가 나오고 있다. 삼전동이 그 다음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정밀발굴조사. 이 단계적 프로세스는 역사를 가장 안전하게 꺼내는 방법이자, 개발과 보존이 공존하는 유일한 길이다.


09

성공 사례 — 한강변 유적 발굴이 바꾼 역사의 지도

삼전동과 인접한 지역에서 실제로 문화재 발굴조사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사례를 보면, 이 땅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실감 나게 와닿는다.

성공 사례 ①

풍납토성 —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시작된 역사의 재발견

1997년, 송파구 풍납동 아파트 재건축 공사 현장에서 백제 토기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이후 진행된 본격 발굴조사에서 한성백제 시기의 생활면과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며, 이 일대가 백제 왕성이었음을 뒷받침하는 핵심 증거들이 드러났다. 건설 공사 전에 시굴조사만 제대로 이루어졌더라면 파괴되었을 역사가 훨씬 줄었을 것이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중요성을 온 나라에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성공 사례 ②

용산구 한남동 — 1912년 기록이 발굴조사의 나침반이 된 경우

seoulheritage.org의 분석에 따르면, 1912년 한남동에는 23필지의 분묘지와 1필지의 사사지가 기록돼 있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기와 편, 도자기 파편, 묘비 파편, 제기류 등이 실제로 확인됐다. 1912년 토지조사부 한 장이 100년 후 발굴조사의 방향을 결정한 것이다. 삼전동의 사사지와 광대한 밭 기록이 앞으로의 지표조사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충분히 기대해볼 수 있는 이유다.

이 사례들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하나다. 땅 위에 무언가를 짓기 전, 그 땅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 먼저 물어봐야 한다는 것.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질문을 던지는 첫 번째 행위이고, 발굴조사는 그 대답을 직접 손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10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야기



이제 삼전동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오늘날의 삼전동은 1912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한강공원에는 자전거와 러닝화가 넘치고, 잠실대교 위로 차가 쉬지 않고 달린다. 밭 170필지는 사라진 지 오래고, 사사지도 지도에서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아래는 달라진 게 없다. 이씨 집안이 대대로 일구던 그 땅은 지금도 삼전동 어딘가에 있다. 마을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던 사사지의 흔적이 여전히 흙 속에 잠들어 있다. 봄이면 씨앗을 심고 가을이면 감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직 아무도 파보지 않은 지층 아래에 고요히 기다리고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기다림에 응답하는 일이다. 삽을 들고 땅을 파는 게 아니라, 귀를 기울여 땅이 하는 말을 듣는 행위다. 1912년의 기록 한 장이 그 첫 번째 귀 기울임이고, 지표조사는 그 이야기를 더 깊이 듣기 위한 두 번째 발걸음이다.

만약 지금 삼전동 인근에서 개발이나 공사를 계획하고 있다면, 문화재 지표조사를 먼저 의뢰해보기를 강력히 권한다. 단순한 법적 절차가 아니라, 이 땅이 들려주려는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땅 아래에서 삼전도비보다 더 오래된, 이름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어떻게 시작하나요?

서울 지역 문화유산 발굴조사 · 지표조사 · 시굴조사에 대한 정보와국비지원 발굴 신청 방법은 seoulheritage.org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기초조사 자료도 함께 제공하고 있습니다.

삼전동의 밭 170필지 위에서, 누군가는 오늘도 아이를 키우고 있다.그 아이의 발 아래에, 100년 전 누군가의 씨앗이 잠들어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고,기억하는 땅은 영원히 살아 숨 쉰다."

이씨, 김씨, 신씨, 염씨, 한씨, 강씨.그들의 이름은 기록 속에 남아 있다.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땅 속에 있다.우리가 귀를 기울이면, 그들은 여전히 말을 걸어온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주세요.서울의 숨겨진 이야기들은 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조사문화재 발굴 기관시굴조사표본조사삼전동 역사송파구 삼전동1912년 토지조사삼전도한강변 유적seoulheritage서울 문화유산국비지원 발굴

댓글

별점 5점 중 0점을 주었습니다.
등록된 평점 없음

평점 추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