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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소공동, 서울의 근대가 시작된 자리 — 문화유산 지표조사로 밝혀진 중구의 숨은 역사

목차:


  1. 사라진 골목, 남은 기록 — 1912년 중구 소공동의 시작

  2. 74,902㎡의 땅 위에 세워진 116필지의 삶

  3. 외국인과 제국의 그림자 — 소공동을 둘러싼 국제적 토지 구조

  4.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내는 근대 서울의 뿌리

  5. 성공적인 문화유산 조사 사례 — 도심 속 시간의 복원

  6.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 — 서울의 땅 아래 남은 이야기

  7. 맺음말 — 과거를 파고 미래를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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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12년, 서울의 중심 소공동은 아직 ‘도시’라 부르기엔 낯설었다.

조선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흙길 위에, 서양식 벽돌 건물과 일본식 목조건물이 함께 들어서며 혼재된 시공간을 만들던 그 시절. 그 한가운데, 중구 소공동이라는 이름이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지금은 롯데호텔, 명동 거리, 서울시청 근처로 알려진 그 지역이지만, 1912년 당시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그때의 소공동은 총 116필지, 면적으로는 74,902㎡의 작은 구획이었다. 숫자만으로는 감이 잘 오지 않지만, 이는 축구장 10개가 넘는 크기였다. 당시 이 구역은 주거지이자 상업지로 혼재된 공간이었으며,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서양 상인들이 어우러져 살며 근대 서울의 가장 빠른 변화를 만들어내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 풍경 속에는 단순한 도시 발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소공동의 토지 구조를 들여다보면, 서울이 어떻게 식민지 시기와 근대를 통과하며 바뀌어 갔는지, 그 내면의 권력 관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74,902㎡의 땅 위에 세워진 116필지의 삶


1912년의 기록에 따르면 소공동은 총 116필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국유지가 5필지, 독일 소유의 땅이 1필지, 미국인 소유가 2필지, 일본인 소유가 33필지, 중국인 소유가 44필지, 그리고 법인 명의의 토지가 1필지였다.


이 숫자만 보아도 당시의 국제 관계와 경제 흐름이 한눈에 드러난다.

서울 중심부의 땅이 이미 외국 자본에 의해 상당 부분 점유되어 있었으며, 일본의 영향력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3필지라는 일본인 소유 비율은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직후, 행정과 금융의 중심지로 변모하던 서울의 권력 이동을 상징했다.


반면 중국인 소유 토지는 44필지로, 이는 당시 조계(租界) 형태로 형성된 청국 상인들의 거점과 맞닿아 있었다. 중국인 상점들은 주로 상업 활동 중심이었으며, 그들의 흔적은 훗날 명동과 충무로 일대의 전통 상권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소공동의 토지 구조는 단순히 ‘누가 땅을 가졌는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의 성격을 규정하고, 사회적 계층과 권력의 중심이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었다.




외국인과 제국의 그림자 — 소공동을 둘러싼 국제적 토지 구조


당시 조선은 이미 식민지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은 서울 도심 곳곳에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며 근대적 지적(地籍) 체계를 만들어갔다. 그 첫 시도 중 하나가 바로 소공동이었다.


일본은 토지 소유권을 명확히 하면서, 동시에 자국인과 외국 상인들이 안정적으로 토지를 취득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했다. 독일인과 미국인이 각각 1~2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당시 서울이 국제무역의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이렇게 소공동은 ‘서울의 첫 국제거리’라 불릴 만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공존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제국주의적 힘의 불균형이 자리했다. 조선인들은 대부분 임차인으로 남았고, 도시의 주요 부지는 외국 자본과 일본 상인들에 의해 점유되어 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토지의 흔적’을 어떻게 복원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속에 숨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내는 근대 서울의 뿌리


문화재 지표조사는 단순히 땅을 파는 일이 아니다.

지표조사는 문화유산 발굴의 첫 단계이자, ‘그 땅이 품고 있는 시간의 층’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특히 서울 중구처럼 근현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된 지역에서는, 건물의 기초 아래에 조선시대의 도로, 일제강점기의 석축, 그리고 근대 주택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다.


실제 1912년 소공동의 필지 구조를 토대로 진행된 몇 차례의 표본조사에서는,

당시 사용된 석재 기반과 벽돌 구조물이 확인되었으며, 일제 시기 상점 건물의 잔해 또한 발굴된 바 있다.

이런 결과들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도시 형성과정의 중요한 사료로서 문화재 지정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22년 서울시 문화유산 발굴조사센터에서 진행한 을지로 인근 지표조사에서는,

1910년대 상점거리의 기초 석축이 확인되며, 일제강점기 도시구조를 복원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러한 조사 덕분에 소공동 일대의 개발사업도 문화유산 보존 지침에 따라 조정되었고,

역사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성공적인 문화유산 조사 사례 — 도심 속 시간의 복원


서울시청 인근에서 진행된 한 지표조사에서는,

해방 이전에 사용되던 상수도 배관과 1930년대 일본식 주택의 기초가 함께 발견되었다.

이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떤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며 성장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또 다른 예로, 명동성당 주변 발굴조사에서는 근대 이전 도로의 흔적이 드러나며,

현재의 길이 조선시대 골목길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렇듯 문화재 조사는 단순한 과거 복원이 아니라, 도시의 정체성을 되찾는 작업이다.


실제로 문화유산 조사를 의뢰한 기업 중 일부는,

공사 전 발굴조사를 통해 예상치 못한 유구(遺構)를 발견하면서 사업 방향을 수정한 사례도 있다.

결국 문화재 조사는 비용이 아닌 ‘가치의 투자’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 — 서울의 땅 아래 남은 이야기


소공동은 오늘날 빌딩 숲으로 가득하지만, 그 땅 아래엔 아직도 100년 전의 서울이 잠들어 있다.

조금만 삽을 대면, 일본식 상점의 기초 석재가 나오고, 더 깊이 들어가면 조선시대 도로 흔적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필요한 이유다.


서울 중심부는 단순한 개발지구가 아니라, 서울의 문화적 DNA가 가장 짙게 남아 있는 공간이다.

그 속의 역사적 층위를 무시한 개발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뿌리를 잃게 만든다.


지금 서울시와 각 문화유산 발굴기관들이 수행하는 지표조사와 표본조사는,

단순히 땅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남은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리고 이 조사가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는 잊혀진 역사를 다시 현재로 불러오게 된다.




맺음말 — 과거를 파고 미래를 짓다


1912년 소공동의 116필지는 단순한 땅의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서울이 식민지에서 근대도시로, 그리고 오늘날 세계도시로 성장해 온 여정의 기록이다.

국유지, 일본인 토지, 중국인 상권, 서양 상인들의 흔적 — 이 모든 것이 한데 얽혀 지금의 서울을 만들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바로 그 역사를 복원하는 열쇠다.

그 땅의 기억을 파고들수록, 우리는 도시의 진짜 얼굴을 만나게 된다.


서울의 중심, 소공동의 그 작은 필지 속에

‘서울이라는 도시의 시작’이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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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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