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성북구 장위동의 숨겨진 이야기: 땅과 사람의 기록
- 2025년 4월 26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4일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 서울 문화유산
장위산 아래 논과 밭,100년 전 장위동의 이야기
1912년 성북구 장위동 토지조사 기록으로 복원하는 조선 마을의 숨결해평 윤씨의 땅, 연못의 기억, 그리고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의 현재
📍 서울 성북구 장위동📅 2025년 기준🔍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목차
장위동이라는 이름의 무게 — 고려 명신부터 조선 이조판서까지
1912년 장위동의 풍경 — 269필지, 880,519㎡의 기록
논과 밭, 장위동의 생명줄 — 127필지 논, 95필지 밭
집과 무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터전
산과 연못, 장위동이 품었던 자연의 비밀
해평 윤씨와 이씨, 김씨 — 이 땅을 지킨 성씨들의 기록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가 장위동에서 찾는 것
성공 사례 — 기록 하나가 바꾼 발굴조사의 방향
장위동의 과거, 우리의 미래로
재개발 포클레인이 땅을 파기 전에, 누가 먼저 그 땅에 귀를 기울였나?
서울 성북구 장위동. 지금은 뉴타운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이 동네가, 1912년에는 논과 밭이 펼쳐진 고요한 농촌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 나아가, 이 땅이 고려시대부터 이름이 전해져 내려온 유서 깊은 마을이라는 것도.
조선 말 이조판서 윤용구가 이 땅을 너무나 사랑해 자신의 호를 '장위산인(獐位山人)'이라 불렀던 곳. 조선 왕실 복온공주의 재사(齋舍)가 지금의 북서울꿈의숲 자리에 있었던 곳. 그리고 1912년에는 269필지, 880,519㎡의 너른 땅 위에 사람들의 삶이 켜켜이 쌓여 있던 곳.
이 글은 그 땅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다. 포클레인보다 먼저, 삽보다 먼저, 귀를 기울이는 방법으로. 문화재 지표조사가 왜 중요한지, 발굴조사가 무엇을 찾아내는지, 그리고 1912년 장위동의 기록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는지. 지금부터 함께 걸어 들어가 보자.

01
장위동이라는 이름의 무게 — 고려 명신부터 조선 이조판서까지
장위동(長位洞). '높은 관직'이라는 뜻을 가진 이 이름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 전 이 마을에 이름난 명신(名臣)이 살았기 때문에 '높은 위(位)'를 써서 장위(長位)라 부르게 됐다는 설이 있고, 한편으로는 마을 뒷산 이름 '장위산(獐位山, 노루가 사는 산)'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전해진다.
두 가지 설 모두 이 마을이 예사롭지 않은 역사의 무게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이조판서를 지낸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이 땅에 살았다. 그의 호 중 하나가 바로 '장위산인(獐位山人)'. 장위동을, 장위산을 너무나 사랑해서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은 것이다. 이 윤용구가 바로 1912년 토지조사부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졌던 윤씨 가문, 장위동 해평 윤씨의 중심 인물이다.
또 지금의 북서울꿈의숲 자리에는 조선 23대 왕 순조의 딸 복온공주와 부마 창녕위 김병주의 재사(齋舍)인 창녕위궁 재사가 있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한일합병 후 김병주의 손자 김석진이 일본의 남작 작위를 거절하고 순국자결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장위동 사람들은 이 일대를 오랫동안 '공주릉'이라 불렀다.
그리고 1912년. 토지조사부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이 마을은 이미 수백 년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다섯 개의 자연마을 — 웃말, 아랫말, 명덕굴, 간대마을, 활량리 — 이 하나의 장위동을 이루고, 그 땅 위에서 269필지의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장위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의 동북쪽 끝자락에 있던 마을이었다. 성문 밖 10리 안에 속하는 땅으로, 조선 초부터 한성부의 관할 아래 놓여 있었다. 도성 경계의 마을이라는 지리적 특성이 이 땅의 역사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02
1912년 장위동의 풍경 — 269필지, 880,519㎡의 기록
269총 필지 수
880,519㎡전체 면적
(축구장 약 123개)
7개주요 성씨 가문
50.7%논이 차지한
면적 비율
seoulheritage.org의 분석을 바탕으로 1912년 장위동의 전모를 살펴보면, 이 마을이 얼마나 다양한 삶의 켜를 가지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269필지, 880,519㎡. 지금의 장위동이 재개발로 크게 바뀌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 숫자가 얼마나 소중한 역사적 기준점인지 느껴진다.
땅의 구성을 보면 논이 가장 넓다. 127필지, 446,279㎡로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그 다음은 밭 95필지, 309,710㎡. 두 가지 농경지만 합쳐도 전체 면적의 85%에 달한다. 장위동은 철저하게 농업으로 살아가는 마을이었다.
지목 | 필지 수 | 면적(㎡) |
논(畓) | 127 | 446,279 |
밭(田) | 95 | 309,710 |
대지(垈) | 36 | 107,659 |
임야(林野) | 9 | 14,026 |
연못(池) | 1 | 1,028 |
분묘지(墳墓地) | 1 | 1,814 |
그런데 숫자 너머에는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대지 36필지가 있는데 면적은 107,659㎡로 꽤 넓다. 이 말은 집 한 채가 차지하는 공간이 비교적 넉넉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연못 1필지, 분묘지 1필지. 면적은 작지만 이 두 공간이 마을 안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03
논과 밭, 장위동의 생명줄 — 127필지 논, 95필지 밭
1912년 장위동을 이해하는 열쇠는 논(畓)이다. 127필지에 446,279㎡. 전체 면적의 절반이 넘는 이 논들은 마을 사람들의 배를 채우는 쌀을 만들어냈다. 논 사이로 물길이 흘러들고, 모내기철이면 마을 전체가 허리를 숙여 모를 옮겨 심었을 그 풍경. 장위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물이 우이천으로 이어지며 논을 적셨을 것이다.
밭은 95필지, 309,710㎡로 논 다음이다. 조선시대부터 장위동에서는 벼농사와 함께 조, 수수, 고추 같은 작물을 키웠다는 기록이 있다. 고추 한 줄기, 수수 한 이삭이 각 가정의 식탁에 올라가고, 남은 건 장을 담그거나 이웃과 나눴을 것이다. 논과 밭이 합쳐 750,000㎡에 가까운 농경지를 이루고 있었다는 건, 이 마을이 얼마나 강건한 자급자족 공동체였는지를 보여준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대규모 논 지역은 단순한 농지가 아니다. 논둑 구조물의 잔재, 수로 시설, 물을 가두던 보(洑)의 흔적이 지층 속에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로동 등 비슷한 조건의 1912년 논 지역을 대상으로 한 지표조사에서 수로 관련 석재 구조물과 기와 편이 함께 발견된 사례가 있다. 1912년 토지조사부의 논 127필지 기록은, 문화재 발굴 기관이 어디를 먼저 살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첫 번째 지도다.
1912년의 지목 정보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어느 구역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핵심 가이드다. 논 지역에서는 수로와 논둑 구조물을, 밭 지역에서는 농기구와 생활유물을 먼저 주목한다. 장위동의 127필지 논은 그 자체로 중요한 조사 방향표다.
04
집과 무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터전

장위동에는 대지(垈)가 36필지, 107,659㎡ 있었다. 논과 밭의 규모에 비하면 작아 보이지만, 필지당 면적을 계산하면 3,000㎡에 가깝다. 집 한 채가 그만큼의 공간을 품고 있었다는 뜻이다. 마당이 있고, 텃밭이 있고, 창고가 있고, 우물이 있는 — 그런 여유로운 집들이 장위산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윤씨 가문처럼 조선 말 이조판서를 배출한 대가(大家)가 이 마을에 있었음을 생각하면, 일부 대지는 지금의 한옥 규모를 훨씬 넘는 당당한 집터였을 것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 가문의 집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가 분리된 복합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안에서 정치와 학문, 일상이 함께 이루어졌다.
그리고 분묘지(墳墓地). 1필지, 1,814㎡. 마을 안에 존재했던 조상의 무덤. 명절이면 가족들이 이 무덤 앞에 모여 제물을 차리고, 살아있는 자들이 먼저 간 이들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분묘지는 단순한 묘지가 아니다. 마을 공동체의 기억이 저장된 가장 오래된 아카이브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분묘지 기록은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이 터 주변에서는 도자기 조각, 묘비 파편, 제기류, 관(棺) 관련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분묘지 인근에서 조선시대 생활 문화의 흔적이 복합적으로 발견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장위동의 분묘지 1필지는 작은 숫자지만, 발굴조사 계획을 세울 때 절대 건너뛸 수 없는 지점이다.
05
산과 연못, 장위동이 품었던 자연의 비밀
장위동의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두 공간이 있다. 임야(林野)와 연못(池)이다. 임야는 9필지, 14,026㎡. 장위산 자락의 숲이었을 이 산림지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땔감을 주고, 약초를 주고, 그늘을 줬다. 조선시대부터 이 산 아래에 마을이 형성됐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장위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마을의 중심축이었다.
그리고 연못. 1필지, 1,028㎡. 이 작은 숫자가 사실 굉장히 중요하다. 마을 안에 연못이 있다는 건 수리 시설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의미다. 논농사에 물을 댈 때, 연못은 저수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여름이면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겨울이면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미끄럼을 탔을 그 공간이 마을의 일상 한복판에 있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연못터는 특별한 조사 대상이다. 연못 바닥 퇴적층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유기물과 생활 쓰레기, 때로는 유물이 함께 쌓인다. 목재 구조물, 도기 조각, 씨앗 흔적, 동물 뼈 등이 산소 차단 상태에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비슷한 조건의 다른 지역 연못터 조사에서 고려~조선시대 생활유물이 출토된 사례도 있다. 장위동의 연못 1필지, 1,028㎡라는 기록은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흥미로운 단서다.
연못터는 문화재 발굴조사의 보물창고다. 물에 잠긴 퇴적층은 산소 공급이 차단되어 유기물이 썩지 않는다. 목재 구조물, 씨앗, 직물 조각, 생활도구가 수백 년이 지나도 형태를 유지하는 경우가 있다. 장위동 연못 1필지는 규모는 작지만, 발굴조사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지점 중 하나다.

06
해평 윤씨와 이씨, 김씨 — 이 땅을 지킨 성씨들의 기록
1912년 장위동 토지조사부를 들여다보면, 이 땅을 실제로 소유하고 살아간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성씨별로 집계하면 윤씨(尹氏) 84필지, 이씨(李氏) 31필지, 최씨(崔氏) 26필지, 한씨(韓氏) 24필지, 김씨(金氏) 19필지, 우씨(禹氏) 14필지, 전씨(全氏) 12필지 순서다.
성씨 | 보유 필지 수 | 비고 |
윤씨(尹氏) | 84 | 압도적 1위 — 해평 윤씨 |
이씨(李氏) | 31 | 2위 |
최씨(崔氏) | 26 | 3위 |
한씨(韓氏) | 24 | 4위 |
김씨(金氏) | 19 | 5위 |
우씨(禹氏) | 14 | 6위 |
전씨(全氏) | 12 | 7위 |
윤씨가 84필지로 압도적이다. 이 윤씨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다. 성북 마을아카이브의 기록에 따르면, 장위동의 윤씨는 해평 윤씨(海平 尹氏) 가문으로, 남녕위 윤의선(尹宜善, 1823~1887)과 그의 조카 장위산인 윤용구(尹用求, 1853~1939)로 대표된다. 윤의선 대에서 시작해 3~4대에 걸쳐 이 땅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조판서를 지낸 윤용구는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잃은 슬픔으로 두문불출하며 장위동 집에서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장위산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묵을 갈던 그 공간이, 1912년 토지조사부에는 그냥 '대지 몇 필지'로 기록되어 있다. 숫자 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걸,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다시 만날 수 있다.
이씨와 최씨는 각각 31, 26필지로 마을의 중간 층을 형성했을 것이다. 우씨와 전씨는 상대적으로 소규모지만, 그 땅 위에서 이어진 삶의 이야기는 다른 가문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 이 모든 이름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장위동의 DNA이고 역사다.
07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가 장위동에서 찾는 것

장위동은 지금 대규모 재개발이 한창이다. 뉴타운 사업이 진행되면서 오래된 집들이 하나씩 허물어지고, 새 건물을 위해 굴착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바로 이 시점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가장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지표면의 유물 흔적, 지형 변화, 문헌 기록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이다. 1912년 장위동 토지조사부는 이 작업의 핵심 기초 자료가 된다. 127필지의 논에서는 수로와 논둑 구조물을, 1필지의 분묘지에서는 분묘 관련 유물을, 1필지의 연못터에서는 수리 시설 구조물과 유기물을 기대할 수 있다. 윤씨 대가가 있었던 대지 구역에서는 조선 후기 사대부 가문의 생활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지표조사 이후 유물 존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구역은 표본조사(전체 면적의 2% 이내 굴착), 그 다음 시굴조사(10% 이내 굴착)로 이어진다. 유구(遺構)나 유물이 확인되면 국가유산청의 허가를 받아 정밀발굴조사가 진행된다. 이 전체 과정이 장위동이라는 땅과 정직하게 대화하는 방법이다.
재개발 포클레인이 먼저 땅을 파버리면 그 기억은 영원히 사라진다. 하지만 문화재 지표조사가 먼저 그 땅에 귀를 기울인다면, 장위산인 윤용구가 바라보던 장위산의 풍경도, 이름 모를 농부가 일구던 논의 흔적도, 마을 아이들이 첨벙거리던 연못의 기억도 — 우리 곁에 남을 수 있다.
08
성공 사례 — 기록 하나가 바꾼 발굴조사의 방향
비슷한 상황에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실제 사례를 보면 장위동의 의미가 더 선명해진다.
성공 사례 ①
구로동 — 1912년 연못 기록이 이끈 수리 시설 유구 발견
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구로동 토지조사부에는 연못 6필지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진행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연구자들은 연못터 지형 변화와 지표면 흔적을 확인했다. 표본조사 단계로 이어지면서 수리 시설 관련 석재 구조물과 생활유물이 함께 확인됐다. 단순한 숫자 하나가 조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 사례다. 장위동의 연못 1필지 기록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성공 사례 ②
용산구 한남동 — 분묘지 기록에서 시작된 유물 확인
1912년 한남동에는 23필지의 분묘지가 기록되어 있었다. seoulheritage.org의 분석을 바탕으로 진행된 지표조사에서 기와 편, 도자기 조각, 묘비 파편, 제기류가 실제로 확인됐다. 분묘지라는 지목 하나가 조사의 핵심 단서가 됐다. 장위동의 분묘지 1필지 역시 발굴조사 계획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이유다.
두 사례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것이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완전히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이미 기록 속에 있던 정보를 땅 위에서, 그리고 땅 속에서 확인하는 과정이다. 1912년 장위동 토지조사부라는 기록이 그 시작이고, 오늘의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그 실마리를 이어가는 것이다.
09
장위동의 과거, 우리의 미래로

장위동은 지금 빠르게 바뀌고 있다.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오래된 골목이 사라지고, 기억을 담은 담벼락이 무너진다. 하지만 땅은 기억한다. 269필지 위에서 살았던 윤씨, 이씨, 최씨, 한씨, 김씨, 우씨, 전씨 — 그 모든 이름들이 지층 속 어딘가에 흔적을 남겼다.
장위산을 사랑해 스스로를 '장위산인'이라 부른 윤용구의 이야기, 복온공주를 위해 세워진 재사가 지금의 꿈의숲이 된 이야기, 마을 아이들이 연못에서 물장구를 치던 이야기. 이 모든 게 장위동이라는 땅의 켜 안에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켜를 조심스럽게 들춰보는 일이다. 억지로 열어젖히는 게 아니라, 땅이 들려주려는 이야기를 천천히 듣는 행위. 서울 성북구 장위동이라는 평범해 보이는 주거지가 사실은 얼마나 풍부한 역사의 보고인지를, 우리는 1912년의 기록 하나를 통해 다시 알게 된다.
다음에 장위동을 지나갈 때, 그 땅 아래를 한번 생각해보자. 포클레인이 아직 닿지 않은 그 아래 어딘가에, 100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직 잠들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는 한, 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어떻게 시작하나요?
서울 지역 문화유산 발굴조사 · 지표조사 · 시굴조사에 대한 정보와1912년 토지조사 기반 기초조사 자료는 seoulheritage.org에서 확인하세요.국비지원 발굴 신청 방법도 함께 안내해 드립니다.
장위산을 바라보며 붓을 들었던 윤용구.논에서 모를 심으며 하루를 열었던 이름 모를 농부.연못가에서 물장구를 치던 아이.
"우리가 걷는 이 땅 아래에는,사랑하고 일하고 기도했던모든 이들의 시간이 묻혀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우리가 귀를 기울이는 한, 장위동은 계속 말을 건넨다.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말을 듣는 첫 번째 귀 기울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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