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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초구 염곡동, 너도 나도 궁금한 그 시절 땅 이야기!

  • 2025년 4월 11일
  •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5일

서울 문화유산 · 문화재 발굴조사

서초구 염곡동 땅 아래, 600년 집성촌이 잠들어 있다 — 1912년 토지 기록과 문화재 발굴조사가 밝히는 숨겨진 역사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리서치팀 · 서초구 염곡동 지역조사 ·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시굴조사

지금 당신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그 골목,그 아래에 600년 역사가 숨을 죽이고 있다.

서초구 염곡동.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동네 이름조차 낯설게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 땅이 신라 진골의 피를 이은 창녕조씨 가문이 600년 넘게 터를 잡고 살아온 서울 최대의 집성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1912년 토지 기록이 남긴 숫자들, 논 119필지, 밭 165필지, 집터 87필지, 그리고 무덤 2필지. 이 기록 하나하나가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염곡동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을 것이다.




목 차

1. 염곡동, 그 이름에 담긴 600년의 무게

2. 1912년 염곡동 토지 전체 통계 — 숫자로 읽는 땅의 얼굴

3. 논과 밭의 풍경 — 농촌 염곡동의 생생한 삶

4. 집터와 무덤, 연못이 말해주는 것

5. 조씨 186필지의 압도적 지배 — 성씨별 토지 분포

6.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이 땅에서 찾을 수 있는 것

7. 실제 발굴 성공 사례 — 서울 땅속에서 되살아난 기억들

8. 염곡동을 새로운 눈으로 걷는다는 것


01

염곡동, 그 이름에 담긴 600년의 무게

염곡(廉谷). 한자 뜻을 풀면 '청렴한 골짜기'다. 세속의 이익을 멀리하고 강직하게 살아온 선비들이 모여 살던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서울 서초구의 한 법정동 이름으로만 남아 있지만, 이 이름 속에는 무려 600년이 넘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염곡동은 신라 진골의 혈통을 이어온 창녕조씨 충정공파가 조선 세종 원년인 1418년 전후부터 집단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곳이다. 그 이후 약 600년 동안 창녕조씨 문중과 전주이씨 후손들이 90여 가구 규모의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서울에서 가장 큰 집성촌으로 꼽혔던 이곳은, 마을 전체가 돌담으로 이어지고 감나무가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지금 염곡동 어딘가에 아직 수령 58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그 나무는 창녕조씨 문중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던 시절부터 마을을 지켜봐 온 살아있는 증인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100년 전 서울의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도시 아래 잠든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그 작업의 핵심 자료가 바로 1912년 토지조사부다. 1912년 일제가 토지조사령을 공포하며 전국의 토지를 공식 문서화한 이 기록은, 당시 땅의 용도와 면적, 소유자 정보를 담고 있어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초 자료가 된다.

염곡동 내곡동 주민센터와 파출소가 자리한 염곡동 180-2번지 331㎡는 원래 창녕조씨 충정공파 염곡문중의 땅이었다. 1998년 정부에 무상으로 기증된 이 토지는, 600년 집성촌의 역사가 지금도 현실에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600년 집성촌. 그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이 살고, 농사짓고, 조상을 모시고, 이웃과 어울려 살았던 이 땅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남아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가 그 무언가를 꺼내 기록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1912년의 숫자들을 들여다볼 시간이다.




02

1912년 염곡동 토지 전체 통계 — 숫자로 읽는 땅의 얼굴

1912년 서초구 염곡동의 토지 기록을 살펴보면, 총 377필지에 646,389㎡의 토지가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19만 5천 평에 달하는 규모다. 넓고 평탄한 논이 펼쳐지고, 구릉지에는 밭이 이어지고, 마을 곳곳에 집터가 흩어져 있던 전형적인 조선 후기 농촌 마을의 풍경이었다.

377

총 필지 수

64만㎡

총 면적

119필지

논 (답)

165필지

밭 (전)

87필지

집터 (대지)

2필지

무덤 (분묘)

지목별로 분류하면 그림이 더 선명해진다. 논이 119필지, 328,103㎡로 전체 면적의 약 50.8%를 차지했다. 밭은 165필지이지만 면적은 25,080㎡로, 필지 수는 많아도 하나하나의 규모가 논보다 작았다는 뜻이다. 집터는 87필지, 60,820㎡였고, 산(임야)이 3필지, 4,357㎡, 무덤이 2필지, 2,042㎡, 연못인 지소가 1필지, 264㎡로 기록되어 있다.

논 (답)

50.8%

밭 (전)

3.9%

집터

9.4%

산·기타

기타

이 숫자들을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읽으면 훨씬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논이 집중된 구역에서는 수로와 논둑 구조물의 잔재가, 밭 지대에서는 농기구 파편과 토기류가, 집터 구역에서는 온돌 흔적과 우물, 건물지 유구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무덤이 있었던 구역은 분묘 관련 유물과 제기류가 출토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발굴 대상이다. 1912년의 지목 기록은 단순한 행정 자료가 아니라 문화재 발굴조사의 정밀한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이다.

646,389㎡라는 넓은 면적에 논, 밭, 집터, 무덤, 연못이 모두 포함된 염곡동은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에서 '복합 생활 유형 지역'으로 분류된다. 서로 다른 지목이 혼재할수록 다양한 시대와 성격의 유물이 함께 출토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03

논과 밭의 풍경 — 농촌 염곡동의 생생한 삶



1912년 염곡동의 가장 큰 특징은 논이 전체 면적의 절반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119필지, 328,103㎡의 논. 이는 성수1가처럼 논이 없었던 동네와 대비되는 뚜렷한 차이점이다. 염곡동은 구룡산과 청계산 사이의 완만한 골짜기 지형 덕분에 물길이 자연스럽게 흘러 논농사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봄이면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었고, 가을이면 벼를 베어 거두며 한 해의 풍요를 감사했을 것이다.

밭은 165필지로 논보다 필지 수는 많지만 면적은 25,080㎡로 훨씬 작았다. 이는 각 집 주변의 텃밭이나 구릉지의 소규모 경작지를 나타내는 수치다. 고구마, 무, 배추, 콩 같은 작물을 가꾸며 식탁을 채웠을 그 작은 밭들은, 지금 기억 속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땅속에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주목할 점은 염곡동이 구룡산과 청계산 자락에 기대어 있는 지형이라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제를 지냈다는 570년 느티나무 아래 공터는 지금도 언남공원으로 남아 있다. 이 공간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 600년 마을 공동체의 제의 공간이었고, 문화재 지표조사의 관점에서는 다양한 의례 관련 유물이 발견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이기도 하다.

논과 밭이 어우러진 1912년 염곡동의 농업 경관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그 세계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문화재 발굴조사는 사라진 줄 알았던 그 시간이 땅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반복해서 증명하고 있다.


04

집터와 무덤, 연못이 말해주는 것

87필지, 60,820㎡의 집터. 이 숫자를 단순히 나눠보면 한 필지당 평균 약 700㎡, 약 211평 정도다. 지금 기준으로도 꽤 넓은 주거지다. 600년 집성촌 창녕조씨 문중의 본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규모 있는 기와집들이 넓은 마당을 두고 이어졌을 것이다. 대문을 나서면 돌담이 이어지고, 감나무가 담장을 타고 올라가며, 마당에서는 닭 울음소리가 들렸을 풍경이 눈에 선하다.




무덤이 2필지, 2,042㎡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도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조선시대에 집성촌은 마을 근처에 선산(先山)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창녕조씨 문중의 선조들이 모셔진 묘역이 마을과 함께 존재했다는 것은, 이 구역에서 분묘 관련 유물, 즉 묘비 파편, 제기류, 도자기 조각 등이 출토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의미다. 실제로 한남동의 발굴조사 기초 연구에서 비슷한 분묘지 기록을 토대로 조사를 진행한 결과 도자기 조각과 제기류가 실제로 확인된 사례가 있다.

연못인 지소는 1필지, 264㎡로 규모는 작지만 마을 공동체에서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물을 긷고,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고, 더운 여름날 발을 담그던 공동의 생활 공간이었을 이 연못 터에는 수리 시설 관련 구조물이 지표 아래에 남아 있을 수 있다. 구로동의 지표조사에서 연못 터 구역의 수리 시설 구조물이 확인된 사례처럼, 작은 연못 하나도 발굴조사에서 중요한 유구가 될 수 있다.

산(임야)으로 기록된 3필지, 4,357㎡는 마을을 감싸는 구릉지의 작은 숲이었을 것이다. 이런 임야 지대는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베고 땔감을 모으던 공간이기도 했고, 제의를 치르거나 아이들이 뛰어놀던 공간이기도 했다. 집터, 무덤, 연못, 임야가 고루 갖추어진 염곡동의 1912년 지목 구성은, 이 마을이 600년 동안 얼마나 자급자족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05

조씨 186필지의 압도적 지배 — 성씨별 토지 분포

1912년 염곡동 토지 기록에서 가장 극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이 바로 성씨별 필지 분포다. 600년 집성촌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숫자로 완벽하게 증명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순위

성씨

필지 수

특징

1

조씨 (曺/趙)

186필지

전체의 약 49.3% 압도적 1위

2

이씨 (李)

54필지

전주이씨 집성촌 관련

3

김씨 (金)

47필지

 

4~

기타 성씨

90필지

다양한 성씨 분포

조씨가 186필지. 전체 377필지 중 무려 49.3%다. 사실상 염곡동 토지의 절반을 조씨 문중이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600년간 이 땅에 뿌리내려 온 창녕조씨 충정공파 문중의 세거(世居) 역사가 토지 기록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이씨가 54필지로 2위를 차지한 것도 역사적 맥락과 일치한다. 염곡동은 창녕조씨와 함께 전주이씨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곳이었다. 두 집안이 수백 년간 이웃으로 살아온 생활 공동체의 역사가 이 숫자 안에 담겨 있다.

조씨 186필지라는 압도적 집중도는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정 가문이 수백 년간 특정 구역을 소유하고 그 땅에서 생활했다는 것은, 해당 구역의 지층에 그 가문과 연관된 생활 유구가 집중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건물지, 우물, 축대, 그리고 가문과 관련된 유물들이 조씨 문중이 집중적으로 토지를 보유했던 구역의 지표 아래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종로구 훈정동 분석에서도 특정 집안 중심의 취락 구조가 발굴조사 보고서에서 '취락 구조 해석'의 핵심 근거로 활용된 바 있다.

조씨 186필지는 단순한 통계 수치가 아니다. 600년 집성촌의 역사가 토지 기록으로 고스란히 남은 것이다. 이 구역에서의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는 조선시대 양반 집성촌의 생활 유구를 발견할 가능성이 서울 내 다른 어떤 지역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06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이 땅에서 찾을 수 있는 것

염곡동의 1912년 기록을 토대로, 문화재 발굴조사가 실제로 이 땅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는지를 단계적으로 살펴보자. 문화재 조사는 지표조사에서 시작해 표본조사, 시굴조사, 본격 발굴조사로 단계적으로 이어진다. 각 단계마다 1912년의 지목 기록이 중요한 가이드 역할을 한다.

지표조사 단계에서는 땅 위에서 관찰할 수 있는 흔적들을 먼저 파악한다. 옛 경계석, 집터 흔적, 무덤이나 연못의 지형 변화 등이 지표면에서 확인될 수 있다. 염곡동의 경우 119필지에 달했던 논 구역에서는 수로 흔적, 논둑의 잔재가, 165필지의 밭 지대에서는 옛 경작 흔적이 지표면 조사만으로도 일부 확인될 수 있다.

표본조사와 시굴조사 단계에서는 일정한 간격으로 좁고 긴 구덩이를 파내려 가며 지층 구성과 유물 존재 여부를 확인한다. 600년 집성촌이었던 염곡동에서는 조선시대 기와편, 분청사기 및 백자 조각, 온돌 구조물, 우물, 축대 잔재 등이 시굴조사 단계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조씨 문중이 186필지를 집중 보유했던 구역은 시굴 대상 구역 설정에서 우선순위가 높다.

무덤이 기록된 2필지, 2,042㎡ 구역은 발굴조사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분묘 유존 지역은 묘비 파편, 제기류, 부장 유물이 지표 아래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 도심 개발 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이런 분묘 관련 유구는, 조선시대 집성촌 가문의 생활상과 상장례 문화를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지표조사에서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단계적 문화재 조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를 찾는 여정이다. 염곡동처럼 600년 집성촌의 역사를 가진 지역은 서울 내에서도 발굴 잠재력이 가장 높은 구역 중 하나에 속한다. 도시화로 지표면이 덮여도, 땅속 문화층은 사라지지 않는다.

연못인 지소가 있었던 1필지, 264㎡ 구역에서도 수리 시설 관련 유구가 확인될 수 있다. 마을 공동 연못 주변은 주민들의 생활 동선이 집중되는 공간이어서 다양한 생활 유물이 함께 출토되는 경향이 있다. 1912년의 토지 기록이 이처럼 구체적인 발굴 예측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07

실제 발굴 성공 사례 — 서울 땅속에서 되살아난 기억들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사례를 통해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의 가치를 확인해 보자. 서울 곳곳에서 1912년 토지 기록을 기반으로 진행된 조사들이 어떤 결과를 냈는지, 구체적인 성공 사례들이 있다.

성공 사례 01 · 용산구 한남동 — 분묘지 기록이 이끈 발굴

1912년 한남동 기록에는 23필지, 18,958㎡의 분묘지와 1필지의 사사지(사찰 터)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실시된 문화재 시굴조사와 표본조사에서 도자기 조각, 묘비 파편, 제기류가 실제로 출토됐다. 1912년 토지조사부의 분묘지 기록이 발굴 방향을 결정짓는 핵심 단서가 된 것이다. 염곡동에도 2필지의 분묘 기록이 있다. 같은 방식의 접근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기대가 된다.

성공 사례 02 · 종로구 행촌동 — 주거 밀집 기록이 이끈 생활 유구 발견

행촌동은 1912년 기록에서 주거 밀집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지역이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행촌동 데이터를 종로구 조사의 핵심 사례로 분류한 이 지역에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생활 유구가 풍부하게 확인됐다. 집터가 밀집된 구역일수록 온돌 흔적, 우물, 건물지 잔재가 집중되는 패턴이 확인된 것이다. 염곡동의 87필지 집터 구역도 같은 패턴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성공 사례 03 · 마포구 서교동 — 도시화된 땅에서도 삼국시대 유물이

홍대 앞으로 알려진 서교동은 서울에서도 가장 빠르게 도시화된 지역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실시된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건물지, 조선 전기 도자기, 심지어 삼국시대 토기까지 출토됐다. 1912년 서교동의 토지 기록이 조사 방향을 결정하는 기초 자료가 됐고, 도시화된 땅이라도 발굴조사의 가치가 충분함을 입증한 대표 사례가 됐다. 600년 집성촌이었던 염곡동은 이보다 훨씬 더 풍부한 발굴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성공 사례 04 · 종로구 훈정동 — 사사지 기록이 이끈 복합 유구 발견

훈정동은 사사지(사찰 터) 1필지가 동 전체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매우 특이한 구조였다. 이 기록을 기반으로 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에서 우물, 담장 흔적, 기와편, 소규모 건물지가 함께 확인됐다. 종교 유구와 생활 유구가 복합적으로 발견된 이 사례는 지목 기록이 발굴 유형 예측에 얼마나 정확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특정 유형의 토지 기록과 발굴 결과 사이의 상관관계는 훈정동 사례를 통해 명확히 검증됐다.

이 네 가지 사례가 공통으로 증명하는 것은 명확하다. 1912년 토지 기록의 정밀한 분석과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가 결합될 때, 우리는 도시 아래 잠든 역사를 가장 효과적으로 복원할 수 있다. 염곡동은 이 모든 조건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갖춘 지역 중 하나다.


08

염곡동을 새로운 눈으로 걷는다는 것




이제 다시 염곡동으로 돌아가 보자. 경부고속도로 양재IC 옆, 평범한 주거 지역처럼 보이는 이 동네를 걸을 때 이제는 조금 다른 눈이 생겼을 것이다. 언남공원 한쪽에 서 있는 580년 느티나무 두 그루를 바라볼 때, 그 나무가 창녕조씨 문중이 처음 이 땅에 뿌리를 내리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자리를 지켜왔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그 나무 아래에서 마을 사람들은 풍년을 빌며 제를 올렸다. 조씨 집안 어르신들이 손자의 손을 잡고 그늘 아래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이씨 집안 새댁이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던 자리에,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서 있다. 하지만 그 삶의 흔적은 아스팔트 아래 사라지지 않고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바로 그 잠든 기억을 깨우는 작업이다.

1912년 377필지, 646,389㎡의 기록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단순한 면적 수치가 아니다. 조씨 186필지가 말해주는 600년 집성촌의 굳건함, 119필지 논이 말해주는 풍요로운 농경의 기억, 2필지 무덤이 말해주는 조상 공경의 문화, 1필지 연못이 말해주는 마을 공동체의 온기. 이 모든 이야기들이 지금도 염곡동 땅속에 살아있다.

만약 염곡동 일대에 개발 계획이 있거나, 이 땅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싶다면,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발굴조사 비용 및 예산 FAQ, 법적·행정 절차 안내, 공사 일정 FAQ 등 실용적인 정보를 체계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발굴조사를 의뢰하는 것은 단순히 땅속을 확인하는 게 아니다. 600년을 이어온 이 땅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이다.

우리가 이 땅의 옛 이야기를 꺼내보는 이유는 단순한 추억 찾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뿌리를 알아야, 미래를 더 잘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에서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 의뢰 및 관련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염곡동 발굴조사·지표조사 문의하기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에 관한 비용 안내, 법적 절차, 공사 일정 FAQ를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확인하세요.

"580년 느티나무는 기억하고 있다.우리가 잊어버린 그 시간을, 그 사람들을."

염곡동 언남공원의 느티나무 앞에 서보길 권한다. 수령 580년이라는 숫자가 처음에는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싹을 틔웠던 1440년대, 창녕조씨 충정공파 선조들이 이 골짜기에 처음 씨앗을 뿌리던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를 지켜온 나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나무 아래에서 풍년을 빌던 기도, 아이들의 웃음소리, 어른들의 이야기 소리가 아직도 그 껍질 속에 스며 있을 것만 같다. 문화재 발굴조사는 그 나무가 기억하는 시간을 땅속에서 다시 꺼내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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