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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중구 다동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다

  • 2025년 7월 30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1일

서울 중구 다동 · 문화재 발굴조사 블로그


1912년 다동 골목,당신 발 아래 잠든192개의 이야기


김씨 48필지, 이씨 30필지, 그 위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이지금도 땅 속에 고스란히 숨어 있다

당신이 오늘 걷는 다동 골목,그 아래 흙 속에는 100년 전 누군가의 집터가 잠들어 있다.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당신도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목 차

  1. 1912년 다동 192필지 — 숫자로 읽는 골목의 초상

  2. 김씨 48필지, 이씨 30필지 — 성씨가 그려준 다동의 지도

  3. 일본인 7필지가 의미하는 것 — 공간 속 또 다른 시선

  4. 문화재 지표조사, 탐정처럼 땅을 읽는다

  5. 시굴조사와 표본조사 — 흙층 속으로 한 발 더

  6. 발굴조사 성공 사례 — 도심에서 역사를 건진 순간들

  7. 문화재 발굴 기관에 의뢰하는 방법

  8. 다동의 기억을 미래로 잇는 일




11912년 다동 192필지 — 숫자로 읽는 골목의 초상

숫자는 때로 풍경보다 더 생생하다. 1912년 서울 한복판, 중구 다동. 이 작은 동네의 전체 필지는 192개, 총면적은 50,942㎡였다. 그 중 실제 사람이 살던 대지는 192필지로 30,433㎡에 달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축구장 네 개를 약간 넘는 크기의 땅 위에, 무려 192가구의 삶이 빼곡하게 얽혀 있었던 셈이다.

다동은 조선 시대부터 한양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동네였다. 종로와 을지로 사이, 청계천을 끼고 있던 이곳은 상업과 주거가 뒤섞인 활기찬 공간이었다. 1912년 토지조사부가 기록한 이 숫자들은 그 활기의 밀도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평균 필지 면적이 158㎡ 남짓이니, 집 하나하나가 얼마나 촘촘하게 붙어 있었는지 상상이 된다.

192

총 필지 수

50,942㎡

총 면적

30,433㎡

대지 면적

7필지

일본인 소유

이 기록이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기초 자료인지,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 100년 전 토지 기록은 현재 땅 속에 어떤 구조물과 유물이 묻혀 있을지를 예측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seoulheritage.org)이 1912년 토지조사부를 연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2김씨 48필지, 이씨 30필지 — 성씨가 그려준 다동의 지도


다동의 토지 소유 구조를 성씨별로 들여다보면, 이 동네의 권력 지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김씨가 48필지로 압도적 1위였고, 이씨가 30필지, 조씨 14필지, 박씨 12필지가 뒤를 이었다. 이 숫자들은 단순한 부동산 데이터가 아니다. 당시 다동 사회에서 누가 중심에 있었는지, 어느 집안이 지역 커뮤니티를 이끌었는지를 보여주는 사회적 지도다.

김씨

48필지

이씨

30필지

조씨

14필지

박씨

12필지

일본인

7필지

김씨 집안 48필지를 상상해보자.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김씨 집이 줄지어 있었을 것이다. 대가족 구조였을 수도 있고, 친척들이 이웃해 살았을 수도 있다. 이씨 30필지는 또 다른 구역에 모여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씨와 박씨는 골목 안쪽 소규모 집단을 이루었겠지. 이렇게 성씨별로 모여 사는 전통은 조선 시대 동족 마을 문화의 연장선이었다.

이 성씨 지도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특정 성씨 집단이 거주했던 구역에는 그 집안의 건축 양식, 생활 도구, 제사 용품 등이 집중적으로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조사원이 그 구역을 집중적으로 탐색하면 더 의미 있는 유물을 발굴해낼 수 있다. 100년 전 성씨 기록이 오늘의 발굴 전략을 세우는 나침반이 되는 것이다.

"집터는 사라져도 삶의 흔적은 남는다. 기와 한 조각, 장독 파편 하나에도 그 집에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3일본인 7필지가 의미하는 것 — 공간 속 또 다른 시선

192필지 가운데 일본인 소유가 7필지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대조를 만든다. 명동1가의 32필지(약 40%)와 비교하면, 다동은 여전히 한국인 중심의 거주 공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인 7필지는 전체의 약 3.6%에 불과했다. 다동은 근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조선 전통 사회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7필지가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일본인 소유 구역에는 당시 유행하던 서양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건축 양식이 적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석조 기초, 일본식 기와, 서양 타일 — 이런 건축 재료들은 전통 한옥과 전혀 다른 물성을 갖고 있어, 시굴조사에서 흙층을 걷어낼 때 즉각 구분이 가능하다. 다동에서도 깊은 흙층 어딘가에 이 두 세계의 경계가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문화재 발굴 기관이 일제강점기 도심 지역을 조사할 때 가장 흥미로운 순간 중 하나가 바로 이 층위의 전환을 목격하는 것이다. 흙을 걷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전통 기와에서 일본식 벽돌로 바뀌는 경계가 나타난다. 그 경계 하나가 시대의 전환점이다.


4문화재 지표조사, 탐정처럼 땅을 읽는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한마디로 설명하면 '땅 위에 남은 단서 읽기'다. 하지만 이 단순한 정의 뒤에는 놀라울 정도로 정밀한 작업이 숨어 있다. 전문 조사원은 현장을 걷기 전에 먼저 1912년 토지조사부, 조선 시대 지적도, 일제강점기 지형도, 항공 사진 등 수십 종의 문헌을 검토한다. 다동처럼 역사적 기록이 풍부한 지역일수록 이 사전 연구 단계가 발굴의 성패를 가른다.

현장에 도착하면 조사원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기록한다. 담장 아래 드러난 기와 조각, 도로 공사 과정에서 노출된 석재 기초, 오래된 우물 흔적, 지표면의 미묘한 높낮이 차이까지. 다동 골목을 걸을 때 발에 밟히는 자갈 하나가 조선 시대 마당 바닥재일 수 있고, 담장 옆에 덩그러니 남은 돌 하나가 한옥 기둥 받침석일 수 있다. 지표조사는 그런 단서들을 놓치지 않는 작업이다.

1

문헌 및 고지도 분석

1912년 토지조사부, 조선 시대 지적도, 일제강점기 지형도 등을 교차 분석해 해당 지역의 역사적 용도와 건축물 위치를 파악한다. 다동의 경우 192필지 기록이 핵심 자료가 된다.

2

현장 지표 조사 및 기록

전문 조사원이 현장을 직접 걷고, 지표에 드러난 유물 파편, 건축 잔재, 지형 변화를 체계적으로 기록한다. 사진 촬영과 GPS 위치 기록이 병행된다.

3

보고서 작성 및 행정 절차

조사 결과를 종합한 지표조사 보고서를 작성해 관할 시·도지사와 국가유산청장에게 제출한다. 이 보고서가 이후 시굴조사 여부와 방향을 결정하는 공식 문서가 된다.

법적으로 사업 면적이 3만㎡ 이상인 건설공사는 착공 전 지표조사가 의무다. 다동 전체 면적 50,942㎡는 이 기준을 훨씬 넘는다. 이 구역에서 대규모 개발이 진행될 경우, 지표조사는 선택이 아닌 법적 의무다. 그리고 그 조사 결과에 따라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로 이어질 수 있다.


5시굴조사와 표본조사 — 흙층 속으로 한 발 더


지표조사에서 유물 가능성이 확인되면 다음 단계는 표본조사 또는 시굴조사다. 표본조사는 전체 조사 면적의 2% 이내를 소규모로 파보는 것이다. 다동 50,942㎡에 적용하면 약 1,019㎡ 이내에서 샘플을 채취하는 셈이다. 이 작은 구멍들이 땅 아래 어떤 역사가 숨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창문 역할을 한다.

시굴조사는 더 넓다. 유존지역 면적의 10~20% 범위에서 부분 발굴을 실시해 유적의 성격과 분포 범위를 파악한다. 이 단계에서 다동 골목 아래 흙층이 어떻게 쌓여 있는지가 드러난다. 가장 위층에는 현대 콘크리트와 배관, 그 아래에는 1970~80년대 도시 개발 흔적, 더 내려가면 일제강점기 건축 자재,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서 조선 시대 생활 도구들이 나타난다. 지층 하나하나가 곧 시대의 기록이다.

시굴조사에서 유적이 확인되지 않으면 공사를 그대로 진행할 수 있다. 반대로 유적이 나오면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밀발굴조사 허가를 신청해야 한다. 이 과정이 건설 일정에 영향을 미치므로, 공사 계획 단계부터 문화재 발굴 기관과 충분히 협의해두는 것이 현명하다.


6발굴조사 성공 사례 — 도심에서 역사를 건진 순간들

서울 도심 발굴조사의 성과는 박물관 유리 케이스 안에만 갇혀 있지 않다. 발굴이 끝난 현장이 시민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고, 도시 재생 프로젝트의 핵심 콘텐츠가 되고, 지역 정체성을 되살리는 씨앗이 된 사례들이 있다.

성공 사례 01

종로구 한옥 보존지구 발굴 — 조선 기와와 담장 터의 귀환

종로구 한옥 보존지구 인근 공사 현장에서 진행된 시굴조사에서 조선 시대 기와 조각과 담장 기초 터가 발견됐다. 단순한 파편으로 보였던 기와가 전문 분석 결과 조선 중기 제작 방식으로 확인됐고, 일부는 무형문화재 복원 작업의 참고 자료로 활용됐다. 과거의 건축 기술이 현재의 전통 복원에 직접 기여한 사례다.

성공 사례 02

중구 충무로 일대 시굴조사 — 일제강점기 건축 기반의 재발견

중구 충무로 인근 재개발 현장의 시굴조사에서 1910~1930년대 건축 양식의 석재 기초 구조물이 발견됐다. 문화유산 가치를 인정받아 일부가 원위치 보존됐고, 재개발 건물 설계에 그 흔적을 노출하는 방식으로 통합됐다. 새 건물 1층 바닥에 유리를 깔아 옛 건축 기초를 시민들이 직접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같은 공간 안에 공존하는 도시 설계의 좋은 모델이 됐다.

성공 사례 03

청계천 복원 사업 연계 발굴 — 600년 수도 생활사의 복원

청계천 복원 공사 과정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조선 시대 수로 구조물, 생활 도구, 동전 등이 대거 출토됐다. 이 자료들은 조선 시대 서울 시민의 일상생활을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청계천 문화관의 전시 콘텐츠로 활용됐다. 다동과 인접한 청계천의 이 사례는, 다동 지하에도 그 못지않은 역사 자원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7문화재 발굴 기관에 의뢰하는 방법


문화재 발굴조사는 국가유산청에 등록된 전문 매장유산 조사기관만이 수행할 수 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자치구 각각의 역사 기록을 연구하며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자료와 정보를 제공한다. 다동 같은 도심 핵심 지역에서 조사를 의뢰하고 싶다면 절차는 다음과 같다.

1

조사기관 선정 및 요청

국가유산청에 등록된 매장유산 조사기관에 현장 설명과 과업 범위를 정해 조사를 요청한다. 조사기관은 계획서를 제출하고 구체적인 일정과 비용을 협의한다.

2

국가유산청 신청 및 심의

건설공사 시행자가 국가유산청에 사업을 신청하고,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조사 허가가 나면 조사가 시작된다. 소규모 발굴조사는 국비 지원 제도를 활용할 수 있어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다.

3

조사 진행 및 보고서 제출

조사 완료 후 정밀한 보고서를 국가유산청에 제출한다. 그 결과에 따라 유적 보존 조치 또는 공사 진행 여부가 결정된다. 전체 과정이 투명하게 기록으로 남는다.

2024년 기준 국비지원 소규모 발굴조사 총사업비는 약 192억 원에 달한다. 국가가 이 규모의 예산을 문화유산 보호에 투입하고 있다는 것은, 발굴조사가 단순한 학술 활동이 아닌 국가 핵심 정책임을 의미한다. 국비 지원을 받으면 사업자의 경제적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으니, 조사 의뢰 전에 반드시 확인해보길 권한다.


8다동의 기억을 미래로 잇는 일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 어딘가에서 포클레인이 땅을 뚫고 있다. 그 삽 끝이 닿는 흙 속에 1912년 다동 김씨 할아버지의 집터가 있을 수도 있다. 이씨 아주머니가 매일 아침 열었던 대문 기둥 받침석이 묻혀 있을 수도 있다. 조씨 집안 아이들이 뛰어놀던 마당 바닥이 그대로 잠들어 있을 수도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사라짐을 막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동시에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것을 넘어, 도시에 두께를 더하는 작업이다. 우리가 사는 동네가 얼마나 오랜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를 알게 될 때, 그 공간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다동 골목을 걸을 때 발 아래 흙이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20대, 30대인 당신에게 특히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 동네가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는 감각, 일상의 공간이 어디까지 역사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인식 —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 문제다.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카페 사진 한 장이 아니라, 그 카페가 서 있는 땅이 100년 전 누군가의 삶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게 도시를 진짜로 사랑하는 방식 아닐까.


다동 골목의 흙 속에는아직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다.

김씨 48필지, 이씨 30필지, 조씨 14필지.그들의 삶이 남긴 기와 조각 하나, 담장 터 하나가지금도 당신 발 아래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은 화려한 유물을 꺼내는 일이 아니다.잊혀진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다.그리고 그 이름들이 모여 지금의 서울이 됐다.

이 글이 당신 마음 한 켠을 흔들었다면, 주변에 공유해줘.우리가 기억할수록, 더 많은 역사가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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