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전체 123,251필지 · 277,227,048㎡의 숨겨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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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지표조사 · 시굴조사
지금 당신이 사는 이 서울,110년 전엔 어떤 모습이었을까?
1912년 서울 전체 123,251필지 · 277,227,048㎡의 숨겨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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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서울 지도를 열어보라. 그 화면 속 땅 한 조각 한 조각, 110년 전엔 전부 다른 이름의 주인이 있었다.
당신이 매일 출근하는 그 골목,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그 자리, 지하철을 기다리는 그 플랫폼 아래 — 거기엔 논물이 흘렀고, 조상의 무덤이 있었으며, 열강의 외국인들이 땅 문서를 쥐고 있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잊혀진 기억을 꺼내는 작업이다. 지금부터 1912년 서울의 진짜 모습을 함께 들여다보자.
목차
11912년 서울의 전체 규모 — 어마어마한 그 숫자들
2논과 밭, 그리고 도시 — 농촌이었던 서울
3무덤과 사찰과 철도 — 죽음과 신앙과 근대화가 공존하던 땅
4성씨별 토지 소유 — 서울을 지배한 성씨들의 서열
5국유지·왕실·동양척식주식회사 — 권력의 지도
6외국인 소유지 — 서울에 침투한 열강들의 발자국
7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왜 지금도 이 기록이 중요한가

01 · 기초 통계
1912년 서울의 전체 규모 — 어마어마한 그 숫자들
1912년, 서울에는 총 123,251필지의 땅이 등록되어 있었다. 면적으로 환산하면 277,227,048㎡, 약 2억 7,700만 제곱미터에 달한다. 현재의 서울시 면적이 약 605㎢, 즉 6억 500만 제곱미터임을 감안하면, 당시 행정 구역상 서울의 범위는 지금의 절반 이하였다. 하지만 그 절반의 땅 속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이 방대한 토지 기록을 분석하는 이유는 단순히 숫자를 정리하기 위함이 아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 모두 이 110년 전 기록에서 출발한다. 어디에 무덤이 있었는지, 어디에 사찰이 있었는지, 어떤 성씨의 집단 소유지가 있었는지 — 이 모든 것이 현재의 문화재 보호 구역 설정과 발굴 우선순위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총 필지 수
123,251
필지
총 면적
277,227,048
㎡
논 필지
25,326
필지
밭 필지
45,294
필지
대지(집) 필지
47,185
필지
임야 필지
2,333
필지
02 · 농경지 분석
논과 밭, 그리고 도시 — 농촌이었던 서울

1912년 서울에서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했던 지목은 단연 밭이었다. 45,294필지에 면적은 무려 110,860,013㎡였다. 전체 면적의 약 40%에 달하는 수치다. 논은 25,326필지에 97,936,701㎡였다. 논과 밭을 합산하면 70,620필지, 208,796,714㎡로 서울 전체 면적의 75%가 넘는 땅이 순수한 농경지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조선의 도읍이었던 서울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 외곽은 완전한 농촌 지대였다. 지금의 강남, 강서, 노원, 도봉 일대는 드넓은 논밭으로 펼쳐져 있었고, 조선 사람들은 그 땅을 일구며 살았다. 대지, 즉 집이 들어선 필지는 47,185필지였지만 면적은 24,755,593㎡로 전체의 약 8.9%에 불과했다. 1912년의 서울은 도시가 아니라 농촌이었다.
밭 면적 110,860,013㎡는 현재 여의도 면적(약 2.9㎢)의 약 38배에 해당한다. 그 광활한 밭이 모두 지금의 서울 땅 어딘가에 존재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이런 농경 지대 아래 숨어있는 유구(遺構)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03 · 특수 지목
무덤과 사찰과 철도 — 죽음과 신앙과 근대화가 공존하던 땅
농경지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잡종지다. 1,535필지에 22,120,291㎡로 전체 면적의 약 8%를 차지했다. 잡종지는 특정 용도로 분류되지 않는 다목적 토지를 가리키며, 창고나 집하장, 시장 부지 등이 포함된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복잡한 경제 구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무덤, 즉 분묘지는 1,133필지에 2,588,616㎡였다. 축구 경기장 360개 규모의 묘지가 서울 곳곳에 퍼져 있었다는 뜻이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분묘지는 특히 중요하다. 묘지 주변에는 청동기, 도기, 부장품 등의 유물이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사지, 즉 사찰과 신사 부지는 124필지에 417,839㎡로 비교적 넓은 면적을 차지했다. 이는 당시 서울 안팎에 불교 사찰과 무속 신앙 관련 시설이 상당수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분묘지(무덤)
1,133
필지 / 2,588,616㎡
사사지
124
필지 / 417,839㎡
철도용지
17
필지 / 2,663,770㎡
수도용지
15
필지 / 256,186㎡
연못(지소)
94
필지 / 234,371㎡
공원
1
필지 / 11,018㎡
가장 흥미로운 숫자 중 하나는 철도용지다. 단 17필지에 불과하지만 그 면적은 2,663,770㎡에 달한다. 필지당 평균 면적이 약 156,692㎡, 즉 156헥타르에 가깝다. 당시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등 근대 철도가 넓은 선형 부지를 관통하며 서울을 가르고 있었다는 증거다. 수도용지 15필지(256,186㎡)는 1908년 뚝도수원지 준공으로 시작된 서울 근대 상수도 시설의 흔적이다. 그리고 공원은 단 1필지, 11,018㎡뿐이었다. 지금 서울의 어느 대공원 하나의 크기도 안 된다. 1912년 서울에서 도시 공원은 사치였다.

04 · 성씨별 토지 분포
성씨별 토지 소유 — 서울을 지배한 성씨들의 서열
이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들어가 보자. 1912년 서울의 땅은 도대체 누가 쥐고 있었을까.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을 보면 당시 조선 사회의 권력 지형이 그대로 드러난다. 다음 수치들을 보는 순간, 당신은 분명 입이 벌어질 것이다.
박씨
65,540필지
김씨
21,112필지
이씨
19,730필지
최씨
5,190필지
조씨
3,567필지
정씨
3,302필지
윤씨
2,779필지
유씨
1,910필지
한씨
2,527필지
임씨
2,021필지
강씨
1,996필지
놀랍게도 1위는 박씨로 무려 65,540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2위 김씨(21,112필지), 3위 이씨(19,730필지)를 합산한 것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많다. 박씨가 서울 전체 필지의 약 53%를 차지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조선 왕실 성씨인 전주 이씨, 그리고 신라 이래 전통적 명문 성씨인 박씨가 수백 년에 걸쳐 축적한 토지가 집중된 결과다.
김씨와 이씨를 합산하면 40,842필지로 전체의 약 33%에 달한다. 즉 박씨, 김씨, 이씨 세 성씨만으로 서울 전체 필지의 약 86%를 보유하고 있었다. 나머지 14%를 수십 개의 성씨, 국유지, 법인, 외국인 소유지가 나눠 가진 셈이다.
이 성씨별 집중 분포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박씨 집성촌이나 김씨 문중 소유지에는 재실, 사당, 장례 관련 시설의 흔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문화재 지표조사 기관들은 이런 성씨 집중 지역을 우선 조사 대상으로 선정한다.
05 · 권력의 지도
국유지·왕실·동양척식주식회사 — 권력의 지도

1912년 서울의 토지 기록은 국가 권력의 배분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유지는 7,883필지였다. 이 땅들은 조선 왕실과 관청이 관리하던 토지가 대일본제국 정부로 귀속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들이다. 병합 2년 만에 이미 7천 필지 이상의 서울 땅이 식민 정부 소유로 전환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창덕궁 소유의 토지는 188필지였다. 1910년 강제 병합 이후에도 조선 왕실의 일부 재산은 이왕가(李王家) 명의로 유지되었으며, 창덕궁은 그 상징적 거점이었다. 188필지라는 수치는 왕실이 여전히 상징적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한계도 드러낸다.
가장 눈여겨볼 주체는 동양척식주식회사다. 3,804필지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제가 설립한 국책 수탈 기관으로,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일본으로 이전시키는 핵심 수단이었다. 설립 불과 4년 만에 서울에서만 3,804필지를 손에 넣었다는 것은 그 속도와 규모가 얼마나 가공할 수준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국유지
7,883
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3,804
필지
창덕궁
188
필지
법인
682
필지
공유지
143
필지
마을 공동
304
필지
성공 사례 —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지 발굴
서울 서대문구 일대 재개발 사업 과정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해당 구역이 1912년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토지와 겹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시굴조사를 병행하자 일제 초기 건물 기초와 조선 후기 생활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성과는 단순한 식민지 건물 흔적을 넘어 조선인의 일상이 수탈 이전에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06 · 열강의 발자국
외국인 소유지 — 서울에 침투한 열강들의 발자국

1912년 서울의 토지 기록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외국인 소유지의 국적 다양성이다.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영국인, 러시아인, 덴마크인,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 그야말로 제국주의 열강의 축소판이 1912년 서울 땅 위에 펼쳐져 있었다.
일본
5,904필지
중국
363필지
미국
124필지
프랑스
186필지
독일
27필지
영국
13필지
러시아
5필지
덴마크
3필지
그리스
2필지
압도적 1위는 일본인으로 5,904필지를 소유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3,804필지와 합산하면 일본 관련 토지가 약 9,700필지에 달한다. 이는 전체 필지의 약 7.9%지만, 핵심 지역에 집중된 소유 구조를 감안하면 실질적 지배력은 수치 이상이었다. 중국인은 363필지로 2위였다. 역사적으로 한양에는 많은 중국인 상인들이 거주하며 활동했고,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프랑스인 186필지는 주목할 만하다. 당시 서울에 체류하던 천주교 선교사들이 명동 일대와 마포 등지에 선교 부지와 학교 부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인 124필지도 마찬가지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개신교 선교 기관들의 부지가 이 안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인 2필지 — 도대체 그들은 누구였을까. 그 이름 없는 2필지는 지금도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07 · 현재와의 연결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왜 지금도 이 기록이 중요한가

여기까지 읽어온 당신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 모든 숫자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답은 명확하다. 서울에서 땅을 파는 모든 행위 — 아파트 신축, 지하철 공사, 도로 확장 — 는 이 110년 전 기록과 직결되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개발 예정지에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을 사전에 검토하는 법적 의무 절차다. 1912년 기록에서 무덤이 집중된 지역, 사사지가 있던 자리,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던 구역을 확인하면 시굴조사의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시굴조사에서 유물 가능성이 확인되면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그리고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박물관에 영구 보존된다. 이 모든 과정의 첫 단추가 바로 1912년 토지 기록이다.
성공 사례 — 서울 외국인 소유지 발굴
서울 중구 명동 일대 지하 개발 공사 직전, 문화재 지표조사 팀이 1912년 기록에서 프랑스인 소유 사사지 부지와 조선 후기 관아 건물 위치를 확인했다. 이를 근거로 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19세기 말 조선 선교회가 사용하던 벽돌 기초와 한식 기와 층위가 교차하는 복합 문화층이 발견되었다. 이 발굴 성과는 조선 말기 근대 이행기의 건축 혼재 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기록되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seoulheritage.org)은 이 방대한 토지 기록을 구별, 동별로 세분화하여 지속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1912년의 기록은 단순한 과거의 행정 문서가 아니라, 현재 서울 지하에 잠들어 있는 역사를 불러내는 살아있는 지도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가 수행될 때마다 그 지도의 한 부분이 현실로 드러난다.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서울의 어딘가, 당신이 매일 지나치는 그 골목 아래, 개발이 진행 중인 그 공사장 밑에 — 아직 발견되지 않은 역사의 조각이 잠들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일이 문화재 발굴조사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언제나 1912년의 기록이다.
서울의 땅은 기억한다.우리가 잊어도, 땅은 잊지 않는다.
123,251필지의 기록 속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 — 논을 갈던 박씨 집안의 농부, 조상 무덤 앞에서 절하던 이씨 문중의 자손, 낯선 땅에서 선교를 꿈꾸던 프랑스 신부, 그리고 이름도 남기지 못한 그리스인 두 사람. 그들의 삶이 땅속에 남아있다.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고 보호할 때, 서울은 비로소 진짜 자신의 역사를 되찾는다. 오늘 이 글을 읽은 당신도, 그 기억을 이어가는 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란다.
더 궁금한 게 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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