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대문구 연희동, 그 시절의 이름을 묻다
- 서울 HI
- 6월 24일
- 3분 분량
목차
“연희동, 그 시절의 이름을 묻다” – 시작하며
논과 밭, 서울 한복판에 펼쳐진 전원
집이 아닌 땅이 더 많았던 동네
잊힌 무덤과 단 하나의 산
잡종지, 이름만 이상한 특별한 땅
이씨, 김씨, 장씨… 연희동의 주인들
나라의 땅, 회사의 땅, 외국인의 땅
1912년 연희동의 지도가 말해주는 것들
지금 우리가 걷는 길 위에
마무리하며 – 문화유산 속의 일상

“지금 우리가 걷는 그 길, 1912년에는 논이었다”
서울 한복판, 카페와 빌라가 즐비한 연희동 골목을 걷다 보면 누구도 이곳이 한때 드넓은 논과 밭이었던 시절을 떠올리긴 어렵다.
그런데,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장의 고지도처럼, 그 시절의 연희동은 마치 농촌 풍경 속에서 서울을 멀리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논과 밭, 서울 속 시골을 이루다
1912년의 연희동은 전체 518필지, 1,333,959㎡의 땅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논과 밭의 면적이다.
논은 무려 159필지에 달했고, 전체 면적은 612,842㎡. 지금의 연희동 한복판이 전부 논이었던 셈이다.
밭은 더 많았다. 282필지, 585,715㎡. 논과 밭이 합쳐지면 거의 1,200,000㎡에 가까웠다.
상상해보라. 지금의 연희동 골목골목마다 벼가 자라고, 고추가 말라가고, 소가 밭을 가는 풍경을.
이런 전원적 풍경이, 100년 전 서울의 일상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집은 많지 않았다, 땅이 주인이던 시절
그 많은 땅 중, 주택이 들어서 있던 ‘대지’는 고작 67필지에 50,932㎡에 불과했다.
이는 전체 면적의 약 3.8%에 해당하는 작은 비율이다.
그만큼 당시 연희동은 사람보다는 땅, 농사와 토지가 중심이 되는 공간이었다.
지금은 고급 주택가로 유명한 이곳이 그 시절엔 들판과 논두렁으로 가득했다는 사실, 묘하게 낭만적이다.
무덤과 산, 잊힌 존재들
연희동엔 무덤도 있었다. 총 3필지, 3,279㎡의 분묘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 작은 숫자가 말해주는 건, 이곳이 누군가의 삶의 끝자락이기도 했다는 것.
또 하나 흥미로운 건, 당시 연희동 전체에서 ‘산’이라 불릴 수 있는 임야는 단 한 필지, 436㎡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대부분 평지였고, 그 위에 논과 밭이 펼쳐졌다는 의미다.
잡종지, 특별한 이름의 특별한 땅
당시 기록에서 ‘잡종지’로 분류된 곳도 있었다. 총 5필지에 79,811㎡.
잡종지란, 말 그대로 쓰임이 명확하지 않거나 여러 용도로 쓰일 수 있는 땅을 말한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공터나 공동 우물, 또는 마을 길 같은 곳이었을 수 있다.
묘하게도 이 잡종지의 면적은 대지보다 훨씬 컸다.
사람보다 땅이 더 많았던 시대, 마을이 아직 명확히 정리되지 않았던 그때의 흔적이다.
이씨, 김씨, 장씨… 연희동을 이루던 사람들
이 많은 땅들 위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
1912년의 기록에 따르면, 이씨가 102개 필지를 소유했고, 김씨와 장씨는 각각 77개씩의 필지를 갖고 있었다.
이어 최씨(39필지), 오씨(35필지), 박씨(29필지), 유씨(10필지) 등의 성씨가 등장한다.
이들은 당시 연희동의 주인이자, 실질적인 주민이기도 했다.
지금의 주민등록번호도 없던 시절, 토지대장 속 성씨는 마을의 얼굴이자 정체성이었다.
나라의 땅, 외국인의 땅, 회사의 땅
놀라운 사실이 있다.
연희동엔 단순히 개인 소유의 땅만 있었던 게 아니다.
16필지는 국유지였고, 32필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였다.
동척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토지를 수탈하던 대표적인 회사였다.
그 외에도 18필지는 프랑스인 소유였다. 서대문 안쪽에 프랑스인 소유의 땅이라니, 꽤 낯설지 않은가?
당시 연희동은 조선과 일본, 유럽의 자본이 교차하는 묘한 접점이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진 연희동의 개방성과도 닿아 있다.
지금 우리가 걷는 길 위에
우리가 지금 걷는 연희동의 골목은, 누군가의 논밭이었고, 또 누군가의 무덤이었으며, 누군가의 삶이 깃든 공간이었다.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넘어, 지금의 삶과 연결된 역사다.
이곳을 단지 ‘카페 골목’으로만 보는 건 아쉬운 일이다.
이 동네의 오래된 이름, 오래된 길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흔적을 딛고 살아가고 있다.
마무리하며 – 문화유산 속의 일상
1912년의 연희동은 ‘서울’이라기보단 ‘농촌’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안에도 다양한 땅의 용도,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권력 관계가 존재했다.
이제 연희동을 걸을 때, 그 안에 숨겨진 시간의 켜를 떠올려보자.
우리 발 아래는 단지 길이 아니라, 누군가의 논이었고 밭이었으며, 아주 오래된 삶의 자취가 서려 있는 문화유산이다.
출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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