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1912년 강남구 삼성동?! 타임머신 타고 논밭 뷰 맛집 시절로 GO! (ft. 이씨 집안 대세?)

  • 2025년 4월 2일
  •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9일

문화재 발굴조사 · 강남 역사

코엑스 땅 아래, 100년 전 누군가의 밭이 묻혀 있다.

강남은 태어날 때부터 화려했을까? 진짜 강남의 첫 얼굴을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부터 그 얼굴을 꺼내볼게.

1912년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땅 아래 잠든 100년의 비밀 —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로 되살아나는 서울의 숨겨진 뿌리

seoulheritage.org 기반 분석 | 문화재 발굴기관 ·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강남구 문화유산


목차

1. 강남은 원래부터 강남이 아니었다 — 삼성동의 진짜 첫 얼굴

2. 1912년 삼성동 토지 통계 — 축구장 200개 땅에 숨겨진 숫자들

3. 전체 면적의 75%가 밭이었다 — 상상 초월 농경지 삼성동

4. 논, 임야, 무덤까지 — 다섯 가지 얼굴을 가진 땅의 이야기

5. 잡종지·지소·사사지 — 낯선 지목 뒤에 숨겨진 삶의 흔적

6. 이씨 32필지, 허씨 16필지 — 삼성동을 주름잡던 가문들

7.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발굴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

8. 실제 성공 사례 — 1912년 기록이 강남 일대 발굴을 바꾼 이야기

9. 지금 삼성동 땅을 개발한다면 — 문화재 발굴기관 의뢰 실전 가이드

10. 마무리 — 가장 화려한 동네가 품은 가장 조용한 기억


1.강남은 원래부터 강남이 아니었다 — 삼성동의 진짜 첫 얼굴

삼성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뭐가 떠올라? 코엑스, 아셈타워, 봉은사, 테헤란로의 고층 빌딩 숲, 그리고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오피스 빌딩들. 지금의 삼성동은 대한민국 경제의 심장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곳이야.

근데 잠깐 멈춰봐. 그 화려함이 언제부터였는지 생각해본 적 있어? 강남 개발이 본격화된 건 1970년대야. 그러니까 고작 50년 전까지만 해도 삼성동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어. 1912년 기록을 보면 그 얼굴이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른지가 바로 드러나.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면서 서울 전역의 땅이 공식 문서에 기록됐어. 그 문서가 지금도 남아 있어. 삼성동 역시 그해 처음으로 공식적인 토지 지도 위에 올라왔어. 그리고 그 지도 위의 삼성동은 우리가 상상하는 강남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이 1912년 기록을 정밀 분석하면서 서울 25개 구 전체의 역사 지형을 복원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어. 삼성동 데이터도 그 작업의 일부야. 100년 전 땅의 모습이 지금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초 자료가 되거든. 자, 그럼 1912년 삼성동으로 들어가볼게.



2.1912년 삼성동 토지 통계 — 축구장 200개 땅에 숨겨진 숫자들

숫자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 역사에서도 그대로야. 1912년 삼성동 토지조사 기록을 정리하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동네의 모습이 숫자 속에서 살아나.

1912년 강남구 삼성동 토지 통계 요약 (seoulheritage.org 기반)

전체 면적1,423,546㎡

밭 (전)97필지 / 1,072,738㎡ (전체의 약 75%)

임야 (산)8필지 / 172,737㎡

논 (수전)19필지 / 94,020㎡

대지 (집터)31필지 / 42,337㎡

묘지 (무덤)1필지 / 2,109㎡

잡종지1필지 / 45,848㎡

지소 (연못)1필지 / 3,038㎡

사사지4필지 / 10,717㎡

주요 소유 성씨 1위이씨 32필지

주요 소유 성씨 2위허씨 16필지

1,423,546㎡. 축구장 하나가 약 7,140㎡이니, 삼성동 전체 면적은 축구장 약 200개를 합쳐놓은 크기야. 지금 코엑스 전시장 면적이 약 36,000㎡인 걸 감안하면, 1912년 삼성동은 코엑스 약 40개를 나란히 놓아도 될 만큼 넓은 땅이야.

그리고 그 광활한 땅의 75%가 밭이었어. 지금 삼성동에 초고층 빌딩이 올라선 자리, 테헤란로 대로변, 코엑스 광장 어딘가가 100년 전에는 그냥 밭이었다는 거야. 호미를 든 손과 흙 묻은 발이 오갔던 그 공간이 지금은 정장 차림 직장인들이 빠르게 지나치는 거리가 됐어. 이 반전이 얼마나 극적인지가 숫자 하나에 담겨 있어.

이 통계는 문화재 발굴조사 전문가들에게 단순한 역사 자료가 아니야. 1912년 지목 정보는 지금 어느 구역을 집중 조사해야 하는지, 어떤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지를 예측하는 핵심 지도야. 97필지의 밭, 19필지의 논, 31필지의 집터가 각각 다른 종류의 유물 출토 가능성을 품고 있어. 이 데이터를 알고 땅을 파는 것과 모르고 파는 것은 발굴 효율에서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아.


3.전체 면적의 75%가 밭이었다 — 상상 초월 농경지 삼성동

97필지, 1,072,738㎡의 밭. 이게 어느 정도냐면, 삼성동 전체 면적에서 임야와 논을 빼고 나면 거의 대부분이 밭이라는 뜻이야. 지금 삼성동에서 "밭" 하면 상상이 안 되지. 근데 그게 현실이었어.

당시 삼성동 밭에서는 무엇이 자랐을까?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강 남쪽 지역의 전형적인 밭작물은 배추, 무, 콩, 참깨, 들깨, 고추 같은 것들이었어. 한강변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충적토가 쌓인 비옥한 땅이 작물 재배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줬어. 그 땅에서 자란 채소가 한양 도성 안의 시장으로 팔려 나갔을 거야.

지금 코엑스 근처 아셈타워가 올라선 자리가 어쩌면 배추밭이었을지도 몰라. 테헤란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두 빌딩 사이 공간이 한때 고추밭이었을 수도 있어. 그 아스팔트 아래에 밭고랑의 흔적, 농기구의 잔재, 씨앗을 담아두던 옹기 조각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과거 밭이었던 구역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이야. 밭은 사람의 손이 매일 닿는 공간이야. 농기구가 부서지면 버려지고, 씨앗을 담던 그릇이 깨지면 흙속으로 스며들어. 그 흔적들이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문화층을 형성해. 75%가 밭이었던 삼성동 땅 아래에는 그만큼 넓은 면적에 걸쳐 생활 흔적이 분포했을 가능성이 있어.



4.논, 임야, 무덤까지 — 다섯 가지 얼굴을 가진 땅의 이야기

삼성동의 1912년 기록에서 밭 다음으로 눈에 띄는 건 임야야. 8필지, 172,737㎡. 지금 삼성동에서 숲을 찾으려면 봉은사 경내 정도밖에 없는데, 당시에는 전체 면적의 12%가 넘는 땅이 울창한 산이었어. 그 산에서 마을 사람들은 땔감을 구하고, 약초를 캐고, 겨울을 버틸 나무를 해왔을 거야. 지금 우리가 봉은사 소나무 그늘 아래를 걸을 때 느끼는 그 고요함이, 사실은 100년 전 삼성동 전체에 드리워져 있었던 풍경이야.

논은 19필지, 94,020㎡. 한강에서 가까운 위치라 물이 풍부했던 삼성동은 논농사에도 적합한 땅이었어. 봄에 모를 내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황금빛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는 풍경. 지금 도로 아래 어딘가에 그 논의 물길이 흔적으로 남아 있을지도 몰라. 실제로 서울 여러 지역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하다가 옛 논의 수로 구조물이 발견된 사례가 있어.

그리고 무덤. 1필지, 2,109㎡. 지금의 삼성동에서 무덤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아. 근데 당시에는 마을 주변 산기슭에 가족 묘를 모시는 게 일상이었어. 삼성동의 그 묘지 1필지는 어느 가문의 조상이 잠든 곳이었을 거야. 제삿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절을 올리고, 음식을 나누던 그 공간이 지금은 어딘가의 도로나 건물 기초 아래에 잠들어 있을 수 있어.

밭 — 97필지 / 1,072,738㎡

전체의 약 75%. 배추·고추·콩 등 밭작물 중심. 농기구·생활 도구 출토 가능성 높은 구역.

임야 — 8필지 / 172,737㎡

전체의 약 12%. 땔감·약초 채취 생활권. 산기슭 사찰 관련 유물 출토 가능성.

논 — 19필지 / 94,020㎡

한강 인접 충적토 활용. 수로·논둑 구조물 잔재 출토 기대 구역.

묘지 — 1필지 / 2,109㎡

분묘 관련 유물·부장품 출토 가능성 집중 구역. 시굴조사 우선 대상.

이 네 가지 지목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각각 다른 의미를 가져. 어느 지목이었느냐에 따라 어떤 유물을 기대할 수 있는지, 어느 토층을 집중적으로 살펴야 하는지가 달라지거든. 1912년 기록은 그래서 지금도 현장에서 살아있는 자료로 쓰여.


5.잡종지·지소·사사지 — 낯선 지목 뒤에 숨겨진 삶의 흔적

1912년 토지 기록에는 논, 밭, 집터 외에도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낯선 지목들이 등장해. 잡종지, 지소, 사사지. 처음 보면 낯설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당시 삶의 결이 느껴지는 단어들이야.

잡종지는 1필지, 45,848㎡야. 삼성동 전체 면적에서 꽤 넓은 편이야. 잡종지란 논이나 밭, 집터 같은 명확한 용도로 분류하기 어려운 땅을 말해. 당시에는 가축을 키우는 공간이 되거나, 마을 공동 작업장으로 쓰이거나, 임시 저장 시설이 들어서는 경우가 많았어. 이런 복합 용도 공간에서는 다양한 생활 흔적이 섞여 출토되는 경우가 있어서,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의외의 발견이 나오는 구역이기도 해.

지소는 1필지, 3,038㎡. 지소는 연못이나 웅덩이를 뜻해. 마을에서 연못은 단순한 수경 시설이 아니야. 농업용 저수, 빨래터,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 그리고 물고기를 키우는 어류 양식 공간이기도 했어. 이런 연못이 있었다는 건 당시 마을이 물 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는 뜻이야. 연못 주변에서는 도자기나 어업 도구 관련 유물이 나오는 사례가 있어.

사사지는 4필지, 10,717㎡. 사사지는 사찰이나 개인 소유의 특수 용도 토지를 가리켜. 4필지나 된다는 건 삼성동에 사찰 관련 공간이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의미야. 봉은사가 삼성동에 위치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 사사지 중 일부가 봉은사와 연관된 부지였을 가능성도 충분해. 사찰 관련 구역에서는 기와 조각, 불교 관련 금속 유물, 석재 구조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아.

이 세 가지 낯선 지목이 알려주는 건 결국 삼성동이 단순한 농경 마을 이상이었다는 거야. 연못을 관리하고, 복합 공용 공간을 운영하고, 사찰과 연계된 공간까지 갖춘 꽤 다층적인 생활 공동체였던 거야. 그 복잡한 층위가 지금 땅 아래에 그대로 잠들어 있어.



6.이씨 32필지, 허씨 16필지 — 삼성동을 주름잡던 가문들

1912년 토지 기록에서 가장 사람 냄새가 나는 부분이 성씨 분포야. 삼성동에서 가장 많은 필지를 소유한 가문은 이씨로, 무려 32필지를 가지고 있었어. 전체 필지 수에서 단일 성씨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거야. 그 뒤를 허씨가 16필지로 따르고 있어.

이씨 32필지라는 숫자를 보면서 지금의 삼성그룹 이씨와 연결 짓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어. 근데 토지 기록에서 이씨는 워낙 다양한 본관이 있어서 특정 가문을 지목하기가 어려워. 다만 당시 삼성동 일대에서 이씨 가문이 마을의 중심 세력이었다는 건 분명해. 32필지를 가진 가문이 마을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지 상상해봐. 마을 공동 작업을 조율하고, 명절마다 이웃과 음식을 나누고, 가뭄이 들면 우물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일들이 그 가문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거야.

"토지대장을 통해 발굴 예상 지역의 과거 지목과 소유주 정보를 파악하고, 유물 출토 가능성이 높은 지점을 예측할 수 있다. 과거 대지였던 곳에서는 집터나 생활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고, 묘지였던 곳에서는 묘 관련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 seoulheritage.org 반포동 조사 기록

허씨 16필지도 흥미로워. 허씨는 지금도 비교적 드문 성씨인데, 1912년 삼성동에서 두 번째로 많은 필지를 가진 가문이었어. 이씨와 허씨, 두 가문이 삼성동의 핵심 토지를 나누어 가지며 마을의 이중 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거야. 두 가문의 집터가 어느 방향에 위치했느냐에 따라 마을의 동선과 생활 공간 배치가 달라졌을 거야.

이 성씨 분포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단서가 돼. 대규모 집성촌이 형성된 구역에는 여러 세대가 쌓아올린 생활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아. 이씨 가문 집터 주변을 집중 조사하면 그 가문이 수 대에 걸쳐 사용한 도구와 그릇, 건축 자재를 확인할 수 있는 거야.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삼성동에 뿌리를 둔 이씨나 허씨 후손이 있어? 100년 전 조상이 이 땅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어. 족보 한 번 꺼내볼 시간이야.


7.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 발굴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

역사 이야기를 넘어서 지금 실제로 필요한 정보를 이야기할 때가 됐어. 삼성동처럼 광활했던 농경지가 지금은 고층 빌딩 숲이 된 지역에서 개발이 이루어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야.

우리나라 매장유산 보호 관련 법령에 따르면, 일정 규모 이상의 건설 공사 전에는 반드시 공인된 문화재 조사 기관을 통해 지표조사를 시행해야 해. 이걸 빠뜨리거나 무시하면 공사 중 유물이 발견됐을 때 법적 책임을 피하기 어렵고, 심한 경우 공사 자체가 장기 중단되는 상황이 생겨.

문화재 조사 4단계 흐름 (국가유산청·seoulheritage.org 기준)

1단계 — 지표조사지표면 육안 조사 + 1912년 역사 기록 대조 분석

2단계 — 표본조사조사 면적의 2% 이내 표본 굴착으로 유적 존재 여부 파악

3단계 — 시굴조사조사 면적의 10% 이내 집중 굴착으로 토층·유물 확인

4단계 — 본발굴조사중요 문화층 확인 시 국가유산청 허가 후 전면 발굴 진행

1단계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지표면에서 눈에 보이는 유적·유물의 흔적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단계야. 이때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이 핵심 참고 자료가 돼. "이 구역이 100년 전에 논이었는지, 집터였는지, 묘지였는지"를 알면 어느 방향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가 바로 잡혀.

2단계 표본조사는 조사 대상 면적의 2% 이내에서 소규모 굴착을 통해 유적이 있는지를 표본적으로 확인하는 거야. 유적이 확인되지 않으면 공사 진행 승인이 나고, 확인되면 국가유산청에 발굴 허가를 신청하게 돼.

3단계 시굴조사는 조사 면적의 10% 이내에서 더 집중적인 굴착을 통해 토층 구조와 유물의 분포를 파악하는 단계야. 그리고 4단계 본발굴은 시굴에서 중요한 문화층이 확인될 때 전체 구역을 대상으로 본격 발굴을 진행하는 단계야.

삼성동처럼 밭 75%, 논, 임야, 묘지, 지소까지 다양한 지목이 섞인 지역은 각 구역마다 출토 가능성이 있는 유물의 종류가 달라. 그래서 1912년 기록을 바탕으로 정밀하게 조사 구역을 설계하는 게 특히 중요한 지역이야.



8.실제 성공 사례 — 1912년 기록이 강남 일대 발굴을 바꾼 이야기

이론보다 실제가 더 설득력이 있어. 강남 일대와 서울 전역에서 1912년 토지 기록이 현장 발굴에 어떤 차이를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을 살펴볼게.

사례 1 — 서초구 반포동: 이씨 193필지가 알려준 집터 문화층

1912년 반포동 기록에는 이씨 193필지, 석씨 163필지, 박씨 141필지 등 다양한 성씨가 대규모로 분포해 있었어. seoulheritage.org가 이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집터가 집중된 구역을 사전에 특정했어. 실제 발굴조사에서 해당 구역의 대지 36필지 주변에서 생활 도구와 집터 흔적이 연속으로 확인됐어. 1912년 기록이 없었다면 전체 면적 2,730,795㎡를 균일하게 조사해야 했을 거야. 조사 기간과 비용 절감 효과가 압도적이었던 사례야.

사례 2 — 서울 종로구 공평동: 1912년 집터 기록이 조선시대 금속활자 발굴로 이어지다

서울 종로구 공평구역 발굴조사는 1912년 토지 기록과 고지도를 교차 분석한 결과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례야. 조사 전 역사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주거 밀집 지역과 관청 인접 구역을 사전에 파악했어. 실제 발굴에서는 7개의 문화층에서 건물지, 공동 우물, 옛 도로 구조가 확인됐고, 조선시대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주전 등 귀중한 금속 유물이 출토됐어. 역사 기록 분석이 없었다면 놓쳤을 발견이야.

사례 3 — 서울 구로동: 지소 6필지 예측이 실제 연못 구조물로 확인

구로동 1912년 기록에 연못(지소) 6필지가 포함돼 있었어. seoulheritage.org가 이 지점을 시굴조사 우선 대상으로 설정했어. 실제 조사에서 해당 구역에서 연못과 관련된 수리 시설 구조물과 도자기 조각이 함께 확인됐어. 지목 정보 하나가 수리 시설의 위치를 정확히 예측하는 단서가 됐어.

이 세 사례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건 명확해. 1912년 기록이 정밀할수록, 지금의 발굴조사는 더 정확하고 효율적이 돼. 삼성동의 97필지 밭, 19필지 논, 1필지 묘지, 4필지 사사지라는 정보도 마찬가지야. 이 데이터가 현장에서 발굴 지도가 되는 순간, 삼성동 땅속의 기억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어.



9.지금 삼성동 땅을 개발한다면 — 문화재 발굴기관 의뢰 실전 가이드

삼성동은 지금도 끊임없이 개발이 이루어지는 지역이야. 새 빌딩이 올라가고, 도로가 확장되고, 지하 공사가 이어지고 있어. 이 지역에서 개발을 계획 중인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실질적인 정보를 정리해줄게.

먼저 규모를 확인해야 해. 연면적 2만 제곱미터 이상이거나, 부지 면적이 일정 규모를 초과하는 건설 공사는 착공 전에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를 시행해야 해. 규모가 이에 미치지 않더라도 사업 부지가 역사 기록상 문화재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면 자발적으로 조사를 진행하는 게 안전해.

다음으로 국가유산청이 지정한 공인 문화재 조사 기관에 지표조사를 의뢰해야 해. 이때 seoulheritage.org 같은 곳에서 제공하는 1912년 역사 지적 데이터를 사전에 확인하면, 조사 기관과 더 정밀한 조사 계획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돼. 삼성동이라면 밭 97필지의 분포 구역, 지소와 사사지의 위치, 묘지 필지의 추정 구역을 미리 파악하고 조사에 임하는 거야.

조사가 끝나면 보고서가 나와. 보고서에 "유물 없음" 판정이 나오면 공사를 진행할 수 있어. 유물이 발견되면 국가유산청과 협의해서 다음 단계를 밟게 돼.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는 거야. 조사 절차를 빠뜨리고 공사를 강행했다가 나중에 유물이 나와서 공사가 수년간 멈춘 사례들이 서울에서 실제로 발생했어. 사전 조사가 결국 시간과 비용 모두를 아끼는 길이야.

삼성동은 밭 75%, 다양한 지목이 혼재하는 지역이야. 발굴 가능성의 스펙트럼이 넓고, 출토 유물의 종류도 다양할 수 있어. 전문 문화재 발굴기관의 사전 분석이 특히 중요한 지역이야. 서두르지 말고, 제대로 알고 시작하는 게 진짜 빠른 길이야.


10.마무리 — 가장 화려한 동네가 품은 가장 조용한 기억

이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제 삼성동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 거야. 코엑스 광장을 걸을 때, 아셈타워를 올려다볼 때, 봉은사 입구를 지나칠 때, 딱 한 번만 발아래를 생각해줘.

여기, 이씨 32필지가 있었어. 허씨 16필지도 있었어. 그들이 매일 아침 일어나 밭에 나가고, 물을 길어오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갔어.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야. 토지 기록에 성씨만 남아 있을 뿐이야. 근데 그 성씨 하나, 그 필지 숫자 하나가, 그 사람이 바로 여기 있었다는 증거야.

1,423,546㎡의 땅 위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기억이 지금 그 땅 아래에 잠들어 있어.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그 기억을 꺼내는 일이야. 도자기 조각 하나, 농기구의 잔해 하나, 우물 기초석 하나가 모여서 그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는 걸 다시 증명해.

강남이 화려해질수록, 그 땅 아래 조용히 잠든 기억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해져. 가장 번화한 도시의 땅 아래에 가장 조용한 역사가 숨어 있다는 것. 그게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진 가장 놀라운 반전이야.

삼성동을 지날 때마다, 그 아스팔트 아래 누군가 살았다는 걸 기억해줘. 그 작은 기억이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작은 예의야.

강남은 처음부터 강남이 아니었다.


밭이 있었고, 논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들의 기억이 지금도


그 땅 아래 숨 쉬고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 · 지표조사 · 시굴조사 더 알아보기

서울 25개 구 1912년 역사 지적 데이터 전체 조회 → seoulheritage.org

이 글이 유익했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역사는 나눌수록 더 오래 살아남으니까.

문화재발굴 · 문화재발굴기관 · 문화재지표조사 · 발굴조사 · 시굴조사 · 지표조사 · 서울문화유산 · 강남발굴 · 삼성동역사 · 1912년서울 · seoulheritage · 표본조사 · 강남구지표조사 · 도시유적 · 코엑스역사 · 삼성동지표조사 · 매장문화재조사 · 강남문화유산 · 이씨가문 · 허씨가문

댓글

별점 5점 중 0점을 주었습니다.
등록된 평점 없음

평점 추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