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마포구 하중동,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 2025년 9월 8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마포구 역사
마포 하중동, 98필지가 품은 1912년의 온기집터와 밭과 공동체의 기억이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건다
마포구 하중동 · 98필지 · 28,978㎡ · 문화재 발굴조사의 현장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10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당신이 지금 서 있는 마포구 하중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오늘날의 마포는 고층 아파트와 카페 거리, 도로가 가득한 도시적 공간입니다. 그러나 1912년, 하중동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98필지의 땅 위에 수십 가구의 가족들이 모여 살았고, 밭에서 곡식을 길렀으며, 마을 공동의 땅에서 함께 제를 올리던 곳이었습니다. 땅의 면적과 필지 수, 그리고 성씨들의 이름이 담긴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숫자 너머에 살아 숨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당신이 매일 지나치는 마포의 땅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겁니다.
목차
1912년 하중동의 전체 규모와 면적 — 작지만 알찬 마을
집과 대지의 분포 — 75%가 사람 사는 땅이었다
밭과 농업 공간 — 마포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흙
하중동의 성씨와 토지 소유 구조 — 이름이 곧 권력이던 시절
마을 공동체의 땅 — 소유지 1필지가 품은 공동체의 정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 — 하중동이 왜 지금 중요한가
성공 사례 — 발굴이 되살려낸 서울의 기억들
오늘의 하중동과 1912년의 기억을 잇는 법
마무리 — 기록 속에 살아 있는 하중동 사람들의 삶

SECTION 01
1912년 하중동의 전체 규모와 면적 — 작지만 알찬 마을
마포구 하중동. 지금은 한강을 끼고 아파트와 상업시설이 빼곡히 들어선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하중동은 총 98필지, 전체 면적 28,978㎡의 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28,978㎡.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중형 아파트 단지 하나 정도 크기입니다. 결코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면적 안에 수십 가구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었습니다. 집터와 밭이 뒤섞이고, 마을 공동의 땅이 있고, 성씨 다른 가문들이 이웃해 살아가던 공동체가 바로 이 숫자 안에 있었습니다.
이 기록이 오늘날 문화재 발굴 기관들에게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목과 필지의 경계, 소유자의 이름 하나하나가 지표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를 예측하게 해주는 가장 정밀한 나침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은 바로 이런 기록에서 시작됩니다.
98총 필지 수
28,978㎡총 면적
67대지 필지 수
31밭 필지 수
22김씨 소유 필지
1마을 공동 소유지
SECTION 02
집과 대지의 분포 — 75%가 사람 사는 땅이었다
하중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숫자는 바로 이것입니다. 전체 98필지 중 무려 67필지, 21,814㎡가 대지였습니다. 전체 면적의 약 75%가 사람이 살던 터전이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지역의 1912년 기록과 비교하면 이례적으로 높은 수치입니다. 구로동이나 노량진동처럼 논밭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동네와는 달리, 하중동은 이미 1912년에 주거 밀집 지역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67필지라는 숫자는 단순한 집의 수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각각의 가족이 있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있었으며, 새벽마다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가 있었습니다. 초가지붕의 집, 마당 한편 장독대, 문 앞 감나무 한 그루. 67개의 집터에서 67개의 다른 삶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 1912년 하중동의 어느 아침
새벽닭이 울면 아낙네가 먼저 일어나 부엌에 불을 지핍니다. 밥 짓는 냄새가 마당을 가득 채우면, 아이들이 하나둘 눈을 비비며 일어납니다. 옆집 김씨 아저씨는 벌써 밭으로 나갔고, 건너편 박씨 할머니는 장독대를 살핍니다. 67채의 집에서 이런 아침이 동시에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아파트가 서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이 67필지의 대지는 매우 중요한 조사 대상입니다. 집터에는 주춧돌과 기초석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고, 우물터, 아궁이 잔재, 생활 도구 파편들이 지표 아래에 보존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 구역에서 이루어진다면 당시 하중동의 주거 문화와 생활상을 복원하는 귀중한 자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SECTION 03
밭과 농업 공간 — 마포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흙
대지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밭이었습니다. 31필지, 7,163㎡. 전체 면적의 약 25%가 경작지였습니다. 면적으로 보면 약 2,100평. 오늘날 기준으로는 작은 규모처럼 느껴지지만, 당시 수십 가구가 자급자족하기에 충분한 생계 기반이었습니다.
이 밭에서는 무엇이 자랐을까요. 마포 지역은 한강과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 시장 접근성이 좋았습니다. 따라서 단순한 자급용 농업을 넘어, 채소와 곡물을 마포 시장이나 용강 쪽으로 내다 팔아 현금 소득을 올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배추, 무, 고추, 감자 같은 작물이 이 31필지의 밭을 가득 채웠을 것이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온 마을이 함께 김장 준비에 나섰을 겁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현장에서 농경지 기록은 특히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토양 단면 분석을 통해 밭두렁 경계선, 농경 층위, 씨앗 잔존물 등이 확인되고, 이는 당시 작물 재배 방식과 토지 이용 패턴을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됩니다. 하중동의 31필지 밭 기록은 그 조사의 출발점입니다.
하중동이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농업 마을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집에서 먹을 것을 직접 길러내고, 여분의 수확물로 이웃과 나누고 시장에 내다 파는 생활. 그 순환 속에 하중동 공동체의 경제가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SECTION 04
하중동의 성씨와 토지 소유 구조 — 이름이 곧 권력이던 시절
1912년 하중동의 토지 기록에는 구체적인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김씨로, 22필지를 소유하며 하중동 전체 필지의 약 22%를 차지했습니다. 그다음은 박씨로 11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성씨만 합쳐도 33필지, 전체의 3분의 1 이상입니다.
성씨 | 소유 필지 수 | 비중 |
김씨 | 22필지 | 전체의 약 22% |
박씨 | 11필지 | 전체의 약 11% |
기타 성씨 | 나머지 필지 | 다수 가문 분산 소유 |
마을 공동 소유 | 1필지 | 공동체 공유 |
김씨 22필지라는 숫자는 단순한 재산 목록이 아닙니다. 마을 회의에서의 발언권, 공동 행사에서의 주도권, 혼사와 제사에서의 영향력. 땅이 많다는 것은 곧 마을 안에서 그만큼의 사회적 위치를 의미했습니다. 김씨 가문이 하중동의 중심을 잡고 있었다면, 박씨 가문은 그 옆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65필지가 다양한 성씨들에게 분산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하중동이 특정 가문이 독점하는 단일 씨족 마을이 아니라, 여러 혈연 공동체가 공존하며 이루어진 복합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다양성이 오히려 마을을 더 풍요롭고 역동적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름이 새겨진 비석, 기물, 도자기가 출토될 때 이 성씨 기록은 누구의 유물인지를 추적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됩니다. 1912년의 토지 기록과 발굴된 유물이 만나는 순간, 이름 없던 파편이 특정 가족의 이야기를 품은 유산으로 거듭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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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05
마을 공동체의 땅 — 소유지 1필지가 품은 공동체의 정신
하중동의 98필지 중 단 1필지가 마을 공동 소유였습니다. 숫자만 보면 아주 작습니다. 그러나 이 1필지가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개인이 아닌 마을 전체가 함께 소유하고 관리하던 이 땅은, 하중동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이 마을 소유지는 어떤 용도였을까요. 가장 유력한 가능성은 마을 제당 터, 두레와 품앗이가 이루어지던 공동 작업 공간, 혹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치르던 마을 마당이었을 것입니다. 명절이면 모두가 이 공간에 모였고, 가뭄이 들면 함께 기우제를 지내고, 풍년이 들면 함께 잔치를 벌였을 것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었던 시절, 마을이 함께 나누던 공간. 그 1필지 안에 하중동 사람들의 연대와 협력, 웃음과 눈물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이런 공동 공간은 오랜 기간 다양한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켜켜이 쌓인 고고학적 보고가 될 수 있습니다. 제기류, 토기 파편, 공동 시설의 잔재가 지표 아래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SECTION 06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 — 하중동이 왜 지금 중요한가
오늘날 마포구는 서울에서도 개발 압력이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입니다. 한강변 재개발, 주거지 신축, 도로 확장이 쉼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문화재 지표조사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하중동의 경우, 67필지의 대지와 31필지의 밭이 개발 구역과 겹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집터에 남아 있을 주춧돌과 기초석, 밭에 남아 있을 농경 층위, 마을 공동 소유지에 남아 있을 제당 흔적. 이 모든 것이 굴착 공사 한 번에 영원히 사라질 수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개발 공사에 앞서 전문 조사 기관이 지표면과 주변 환경을 체계적으로 살피는 과정입니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표본조사(면적의 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발굴조사 순으로 단계적으로 진행되며, 중요한 유적은 사적이나 기념물로 지정됩니다. 하중동의 1912년 기록은 이 모든 과정의 첫 번째 참고 문헌이 됩니다.
마포는 조선 시대부터 한강 수운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하중동의 지표 아래에는 단순한 생활 유물을 넘어, 마포나루와 연결된 상업·교통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 문화재 발굴 기관들의 역할입니다.
SECTION 07
성공 사례 — 발굴이 되살려낸 서울의 기억들
하중동의 가능성이 실제로 어떻게 펼쳐질 수 있는지, 서울에서 이미 이루어진 발굴 성과들이 보여줍니다.
성공 사례 01 — 조선 초기 가옥터와 생활도구의 발견
서울 모 지역 재개발 전 지표조사에서 조선 초기의 가옥터와 우물, 생활도구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조사로 해당 구역 일부가 문화유산 보호구역으로 전환되었고, 도시계획이 수정되었습니다. 집터 기록과 발굴 유물이 맞물리며 당시 가옥 구조와 주민들의 생활 방식이 복원된 이 사례는, 하중동의 67필지 대지 기록이 품고 있는 가능성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성공 사례 02 — 인사동 금속활자, 기록이 실물이 된 역사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조선 전기 16세기 층의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주전 등 금속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철저히 선행되었기에 가능했던 발견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없었다면 이 유물들은 영원히 땅속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발굴 이후 이 지역의 역사적 가치가 재평가되었고, 주변 지역 전체의 보존 계획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공 사례 03 — 마을 공동 공간에서 출토된 제기류
서울 어느 지역의 문화재 시굴조사에서 과거 마을 공동 소유지로 기록된 구역을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한 결과, 도자기 조각과 제기류, 소형 토기 등이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던 공간이 남긴 흔적이었습니다. 이 사례는 하중동의 마을 공동 소유지 1필지에서도 유사한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공동체의 기억은 언제나 그 땅에 새겨집니다.

SECTION 08
오늘의 하중동과 1912년의 기억을 잇는 법
100년 전의 하중동과 지금의 마포구를 나란히 놓아보면 놀라운 대비가 펼쳐집니다.
1912년 하중동
흙길과 초가집, 기와집이 67필지 위에 모여 있었습니다. 31필지의 밭에서 채소가 자랐고, 마을 공동 소유지에서 계절마다 제를 올렸습니다. 김씨와 박씨 가문이 마을의 중심을 잡고, 다양한 성씨들이 이웃해 살아가던 살아있는 공동체였습니다.
지금의 마포구
고층 아파트와 카페, 도로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땅의 용도는 바뀌었지만, 지표 아래에는 아직 그 기억들이 남아 있습니다. 주춧돌 하나, 기와 조각 하나가 그 연결의 증거입니다.
이 간극을 연결하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입니다. 단순히 땅을 파는 것이 아니라, 1912년의 기록과 지표 아래의 흔적을 대조하며 당시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복원된 이야기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하중동이 단순한 주거 개발 구역이 아니라 '역사와 삶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20·30대 여러분, 지금 마포구 어딘가에서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발아래 땅을 한번 내려다보세요. 1912년 하중동의 김씨 아저씨가 일구던 밭, 박씨 아주머니가 장독대를 닦던 대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웃고 울던 공동 소유지. 그 모든 것이 지금 당신의 발 아래, 고요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SECTION 09
마무리 — 기록 속에 살아 있는 하중동 사람들의 삶
1912년 마포구 하중동은 총 98필지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수십 가구의 삶과 농업, 그리고 공동체의 이야기가 빼곡히 담겨 있었습니다. 67필지의 집터에서 시작된 하루, 31필지의 밭에서 이어진 노동, 그리고 마을 공동 소유지에서 함께 나눈 기쁨과 슬픔.
김씨 22필지, 박씨 11필지. 그 이름들은 이제 기록에만 남아 있지만, 그들이 살던 땅은 아직 우리 발 아래에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땅에게 다시 목소리를 돌려주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오늘날 하중동은 서울의 중심지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발전은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 위에 쌓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100년 전의 기록이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땅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잊지 말라고.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하라고.

"98필지의 작은 마을이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
1912년 하중동의 67채 집터에서 밥을 짓던 사람들, 31필지의 밭을 일구며 생계를 이어가던 농부들, 마을 공동 소유지에서 함께 제를 올리던 이웃들. 그 모든 삶이 지금 우리가 걷는 마포의 땅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김씨 가문의 22필지, 박씨 가문의 11필지. 이름은 사라졌지만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첫 삽이 내려지는 순간, 그 흔적들은 다시 세상으로 나옵니다.
발굴은 과거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하중동의 기억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중동의 98필지는 오늘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그 땅의 이야기를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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