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마포구 토정동의 땅과 사람들 – 땅의 기록 속에 담긴 역사
- 2025년 9월 4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마포구 토정동 역사
마포 토정동, 134필지가 간직한 1912년의 비밀한강변 마을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말을 건다
마포구 토정동 · 134필지 · 35,748㎡ · 문화재 발굴조사의 현장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그 자리, 100년 전에는 이씨와 김씨가 어깨를 맞대며 살던 마을이었습니다.
마포구 토정동. 지금은 한강변 아파트와 도로가 가득한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총 134필지, 35,748㎡의 땅 위에 수십 가구의 삶이 촘촘하게 얽혀 있었고, 그 안에는 마을 공동의 땅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그리고 한강을 생활 기반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당신이 무심코 지나치던 토정동의 땅이 완전히 다른 목소리로 당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할 겁니다.
목차
토정동의 전체 규모와 공간 구성 — 한강을 품은 작은 마을
집과 대지의 분포 — 125필지가 말하는 삶의 터전
잡종지와 밭 — 생활과 생계의 균형을 찾던 땅
국유지의 존재와 의미 — 공공과 사적의 경계
토정동을 지켜온 성씨들 — 땅으로 읽는 마을 공동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민지 땅의 변화
마을과 법인의 소유지 — 공동체와 제도의 흔적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과거의 기록
성공 사례 — 발굴이 되살린 서울의 기억들
마무리 — 땅의 역사 속에서 배우는 것

SECTION 01
토정동의 전체 규모와 공간 구성 — 한강을 품은 작은 마을
마포구 토정동. 지금은 한강변 재개발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토정동은 총 134필지, 면적 35,748㎡의 땅이었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중형 아파트 단지 하나 남짓한 크기입니다.
숫자만 보면 작은 마을 같지만, 이 134필지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토정동은 한강을 마주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 덕분에 교통과 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포나루에서 가까운 이 마을에서는 강을 이용한 물류와 상업 활동이 일상의 일부였을 것이고, 그것이 이 마을이 농촌과 도시 사이의 독특한 성격을 갖게 된 이유였습니다.
이 기록이 오늘날 문화재 발굴 기관들에게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토지의 용도와 소유자, 필지 경계 하나하나가 지표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를 예측하게 해주는 나침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첫 번째 출발점은 언제나 이런 역사 기록에서 시작됩니다.
134총 필지 수
35,748㎡총 면적
125대지 필지 수
8밭 필지 수
24이씨 소유 필지
1동척 소유 필지
SECTION 02
집과 대지의 분포 — 125필지가 말하는 삶의 터전
토정동의 1912년 기록에서 가장 압도적인 숫자는 바로 이것입니다. 전체 134필지 중 무려 125필지, 28,492㎡가 대지였습니다. 전체 필지의 93%가 집터였다는 뜻입니다. 이 비율은 앞서 살펴본 다른 서울 지역 마을들과 비교해도 눈에 띄게 높습니다.
이것은 토정동이 농촌 마을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논밭 중심의 순수 농촌이 아니라, 주거 공간과 생활 공간이 결합된 도시 근교형 마을에 가까웠습니다. 한양과 가깝고 한강과 연결된 교통 요충지로서, 이 마을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만큼이나 강을 이용해 생계를 잇는 어부, 상인, 노동자들이 함께 살았을 것입니다.
상상해보세요 — 1912년 토정동의 한강변 아침새벽 안개가 걷히면 마포나루 쪽에서 뱃소리가 들려옵니다. 짐을 실은 나룻배가 강을 건너고, 한쪽에서는 아낙네들이 빨래를 두드립니다. 125채의 집에서 동시에 아침이 시작됩니다. 밥 짓는 연기, 아이들 깨우는 소리, 이씨 댁과 김씨 댁이 문 앞에서 인사를 나눕니다. 지금 그 자리에 아파트가 서 있습니다.
125필지의 대지는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조사 대상입니다. 집터에는 주춧돌, 기초석, 우물터, 아궁이 잔재, 생활 도구 파편이 지표 아래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한강변 마을이라는 특성상 강과 연결된 수리 시설, 나루터 관련 구조물이 잔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이 125필지의 대지 구역이 가장 먼저 주목받아야 할 지점입니다.

SECTION 03
잡종지와 밭 — 생활과 생계의 균형을 찾던 땅
125필지의 대지 외에도 주목해야 할 땅들이 있습니다. 밭이 8필지, 6,575㎡였고, 잡종지가 1필지, 680㎡였습니다. 면적으로 보면 대지에 비해 작지만, 이 땅들이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8필지의 밭은 토정동 주민들이 여전히 농사를 통해 자급자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에서 살아가던 이 마을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한강을 통한 상업 활동에 참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밭에서 채소와 곡물을 길러 식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삶. 그것이 1912년 토정동의 현실이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현장에서 밭의 기록은 농경 층위와 밭두렁 경계선, 씨앗 잔존물을 추적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토정동의 8필지 밭 구역에서는 당시 재배 작물과 토지 이용 방식을 복원하는 고고학적 단서가 출토될 수 있습니다. 잡종지 1필지는 창고 터, 공동 작업장, 혹은 임시 경작지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어 다양한 생활 유물이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잡종지는 말 그대로 여러 용도가 혼재하는 땅이었습니다. 창고를 지어두기도 하고, 공동 작업 공간으로 쓰기도 하고, 계절에 따라 임시 경작지가 되기도 했던 이 1필지는 마을의 유연성과 생활력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계획대로만 살 수 없었던 시절, 이 땅은 마을의 필요에 따라 모습을 바꾸며 존재했을 것입니다.
SECTION 04
국유지의 존재와 의미 — 공공과 사적의 경계
토정동에는 국유지 4필지가 있었습니다. 개인 소유지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 마을에서 국유지 4필지의 존재는 작아 보이지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국유지들은 어떤 용도였을까요. 가장 유력한 가능성은 한강변 도로나 제방 관련 부지, 관청 시설, 혹은 공공 수리 시설과 연관된 땅이었을 것입니다. 한강을 끼고 있는 토정동의 특성상, 물을 다스리는 시설이 국가 관리 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홍수가 잦은 한강변 마을에서 제방과 수로는 생존과 직결된 기반 시설이었으니까요.
국유지의 존재는 또 다른 사실을 알려줍니다. 당시 토정동 주민들은 단순히 개인 소유지에서만 생활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관리하는 공공 영역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국가가 하나의 마을 안에서 서로 맞닿아 있었던 복잡한 구조가 이 4필지 안에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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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05
토정동을 지켜온 성씨들 — 땅으로 읽는 마을 공동체
134필지의 땅을 누가 소유하고 있었는지를 들여다보면, 토정동이라는 마을의 사회적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가장 많은 필지를 소유한 것은 이씨로 24필지, 그다음은 김씨 23필지였습니다. 두 가문의 차이가 단 1필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이씨24필지
전체의 약 18%
최대 보유 가문
김씨23필지
전체의 약 17%
두 번째 규모
기타 성씨나머지 87필지
다양한 가문
분산 소유
공공·법인국유지 4필지
마을 1필지
법인 1필지
이씨와 김씨가 각각 비슷한 규모로 마을에서 영향력을 나누고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을 암시합니다. 어느 한 가문이 독점적으로 마을을 지배하는 구조가 아니라, 두 가문이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는 구조였을 것입니다. 마을 공동 행사를 이끌거나, 분쟁을 중재하거나, 공동 작업을 조율하는 역할을 이 두 가문이 번갈아 혹은 협력해서 맡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머지 87필지가 다양한 성씨들에게 분산되어 있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토정동은 이씨와 김씨 중심이면서도, 다양한 혈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복합 공동체였습니다. 그 다양성이 이 마을을 더 역동적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성씨 기록은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유물의 소유자를 추적하는 핵심 단서가 됩니다. 이씨 가문의 24필지, 김씨 가문의 23필지에서 출토되는 생활 도구, 기와 조각, 도자기 파편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특정 가족의 삶을 증언하는 유산이 됩니다. 1912년의 토지 기록과 발굴 유물이 만나는 순간, 이름 없던 파편이 역사가 됩니다.

SECTION 06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민지 땅의 변화
토정동의 134필지 기록에서 가장 무거운 이름이 등장합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단 1필지. 숫자는 작습니다. 그러나 그 1필지가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역사적 맥락 —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마포
1908년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체계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인 식민지 수탈 기관이었습니다. 1912년은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된 직후로, 동척의 손이 서울 곳곳으로 뻗어나가던 시기였습니다. 한강변 교통 요충지였던 토정동에 동척의 필지가 존재했다는 것은, 이 마을이 이미 식민지 경제 구조 안에 편입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단 1필지라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합정동의 1필지, 하중동의 없음, 이태원동의 36필지. 지역마다 다른 숫자들이 식민지 수탈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얼마나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토정동의 그 1필지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땅의 원래 주인은 어떻게 됐는지를 추적하는 것도 문화재 발굴조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입니다.
일제강점기 건물지의 잔재, 당시 사용된 건축 자재나 생활용품이 그 1필지 아래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아픈 역사일수록 더 정확하게 기록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와 정직하게 마주하는 방식입니다.
SECTION 07
마을과 법인의 소유지 — 공동체와 제도의 흔적
토정동 134필지 중에는 마을 공동 소유지 1필지와 법인 소유지 1필지도 있었습니다. 숫자는 작지만, 이 두 필지는 당시 토정동의 사회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마을 소유지 1필지는 공동체 활동을 위한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레와 품앗이가 이루어지던 공동 작업터, 마을 제당, 혹은 주민들이 함께 모이는 마을 마당이었을 것입니다. 이씨와 김씨 두 가문이 균형을 이루던 이 마을에서, 공동 소유지는 가문의 경계를 넘어 모두가 함께 쓰는 중립적인 공간으로서 마을 공동체의 상징이었습니다.
법인 소유지 1필지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종교단체, 학교, 혹은 상업 기관이 이 마을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강변의 교통 요충지였던 토정동에 법인이 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이 마을이 단순한 주거지를 넘어 어떤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마을 공동 소유지와 법인 소유지는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오랜 기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용하던 공동 공간에는 켜켜이 쌓인 생활 흔적이 남아 있고, 법인 건물 터에는 당시의 건축 양식과 사용 도구가 보존될 수 있습니다. 이 두 필지는 향후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우선 확인해야 할 지점입니다.
SECTION 08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과거의 기록
1912년 토정동의 토지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진행하는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와 직접적으로 이어집니다. 당시의 필지 구조와 토지 소유 상황을 아는 것은 서울 지역 문화유적 발굴의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됩니다.
특히 토정동처럼 도시 근교의 오래된 마을이면서 한강변에 위치한 곳은 개발 과정에서 문화재 흔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125필지의 대지 아래에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초기의 건물지 유구가, 8필지의 밭 아래에는 농경 층위가, 국유지 구역에는 공공 시설의 잔재가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강과 연결된 수로 시설과 나루터 관련 구조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표본조사(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발굴조사 순으로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토정동의 134필지 기록은 이 모든 단계에서 '어디를 먼저 살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첫 번째 지도입니다.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 조사가 선행된다면, 우리는 토정동이 품고 있는 기억을 온전히 되살릴 수 있습니다.
마포구는 한강변 개발 압력이 높은 지역 중 하나입니다. 재개발과 신축 공사가 이어질수록, 토정동의 지표 아래에 잠든 기억들은 위협받습니다. 지금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SECTION 09
성공 사례 — 발굴이 되살린 서울의 기억들
토정동의 가능성이 어떻게 현실이 될 수 있는지, 이미 서울에서 이루어진 발굴 성과들이 보여줍니다.
성공 사례 01 — 인사동 금속활자, 기록이 실물로 돌아오다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의 정밀발굴조사에서 조선 전기 16세기 층의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주전 등 금속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철저히 선행되었기에 가능한 성과였습니다. 이 발굴은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조선 전기 인쇄 기술과 과학 기기를 실물로 증명한 최초의 사례로, 해당 지역의 역사적 가치를 완전히 재평가하게 만들었습니다.
성공 사례 02 — 한강변 마을 집터 발굴과 생활사 복원
서울 한강변 인근 지역에서 진행된 문화재 시굴조사에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건물지 유구가 연속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주춧돌, 아궁이 잔재, 생활용 도자기, 옹기 파편이 출토되었고, 이를 통해 당시 한강변 마을 주민들의 주거 구조와 생활 방식이 복원되었습니다. 토정동의 125필지 대지 기록은 이와 거의 동일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공 사례 03 — 조선시대 집터에서 마을 구조 복원
서울 모 지역 재개발 전 지표조사에서 조선 초기 가옥터와 우물, 생활 도구들이 발견되어 해당 구역 일부가 문화유산 보호구역으로 전환되었습니다. 1912년의 지목 기록과 성씨 소유 현황이 발굴 유물과 맞물리며 당시 마을의 전체 구조가 복원된 사례입니다. 기록과 발굴이 만날 때 역사는 가장 온전하게 되살아납니다.

SECTION 10
마무리 — 땅의 역사 속에서 배우는 것
1912년 마포구 토정동의 토지 기록은 단순한 수치가 아닙니다. 125필지의 집터에서 시작된 하루, 8필지의 밭에서 이어진 노동, 마을 공동 소유지에서 나눈 이야기, 그리고 국유지와 동척 필지가 드러내는 시대의 무게. 이 모든 것이 토정동이라는 공간의 진짜 얼굴입니다.
집터에서 농지까지, 국유지에서 동척의 필지까지. 이 134필지는 마을이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권력의 구조 속에 놓여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한강을 앞에 두고 살아가던 이씨와 김씨 가문의 사람들, 공동 소유지에서 함께 제를 올리던 마을 사람들. 그들의 삶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땅 아래에 잠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마주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닙니다. 그 속에 살아 숨쉬던 사람들의 삶과 목소리입니다. 토정동의 기록은 그 목소리를 100년 후 우리에게 전해주는 소중한 매개체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는 한, 그 삶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134필지의 기억이 한강을 건너지금 당신에게 닿습니다"
이씨 가문의 24필지, 김씨 가문의 23필지. 한강을 마주하고 어깨를 맞대며 살던 두 가문의 집터가 지금 우리 발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마을 공동 소유지에서 함께 웃고 울던 기억, 잡종지에서 손을 모아 일하던 풍경, 그리고 동척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전 이 땅이 품고 있던 온기. 그 모든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은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전문가만의 일이 아닙니다. 관심을 갖는 것, 기록을 읽는 것, 그리고 개발보다 조사가 먼저라고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토정동의 134필지는 오늘도 한강 너머로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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