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마포구 토정동의 땅과 사람들 – 땅의 기록 속에 담긴 역사
- 서울 HI
- 9월 4일
- 3분 분량
목차
서론 – 땅이 말해주는 100년 전 마포의 풍경
토정동의 전체 규모와 공간 구성
집과 대지의 분포 – 삶의 터전이 된 마을의 흔적
잡종지와 밭 – 생활과 생계의 균형
국유지의 존재와 의미
토정동을 지켜온 성씨들 – 땅을 통해 본 마을 공동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민지 땅의 변화
마을과 법인의 소유지 – 공동체와 제도의 흔적
오늘의 문화재 조사와 연결되는 과거의 기록
결론 – 땅의 역사 속에서 배우는 것

100년 전 마포구 토정동은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서울 한강변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1912년, 조선 말과 일제 강점기의 경계에서 기록된 땅의 분포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삶과 시대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토정동은 단순히 땅의 구획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공동체, 그리고 시대의 권력 관계까지 보여주는 하나의 거대한 생활사 자료였습니다.
1912년의 기록에 따르면, 토정동은 총 134필지, 35,748㎡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숫자만 보아도 작은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삶의 층위가 들어 있었습니다.
토정동의 전체 규모와 공간 구성
1912년 토정동은 필지 수로 보아 크지 않은 마을이었지만, 한강을 마주하고 있어 교통과 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총 134필지 중 상당수가 대지로 분포되어 있었으며, 이는 이미 주거지로서의 성격이 강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특히 대지가 28,492㎡에 달했다는 점은 토정동 사람들이 집을 중심으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했음을 알려줍니다.
집과 대지의 분포 – 삶의 터전이 된 마을의 흔적
1912년 기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125필지, 28,492㎡의 대지였습니다. 이는 마을 주민들의 주거지가 얼마나 밀집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즉, 토정동은 농사만 짓는 농촌 마을이라기보다는 주거 공간과 생활 공간이 결합된 ‘도시 근교형 마을’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한양에서 가까운 위치였기 때문에 생활 기반이 농사와 도시 활동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잡종지와 밭 – 생활과 생계의 균형
집터 외에도 눈여겨볼 점은 잡종지 1필지(680㎡)와 밭 8필지(6,575㎡)입니다. 잡종지는 마을에서 다목적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며, 창고, 공동 작업 공간, 혹은 임시 경작지로 쓰였을 수 있습니다.
밭의 면적은 전체 토지 중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이곳 주민들이 여전히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을 유지했음을 말해줍니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당시의 생활상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국유지의 존재와 의미
토정동에는 국유지 4필지가 있었습니다. 국유지는 관청의 관리, 도로, 하천 주변 부지 등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당시 국가가 토지 관리에 개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마을 주민들이 단순히 개인 소유지에서만 생활한 것이 아니라, 공공 영역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토정동을 지켜온 성씨들 – 땅을 통해 본 마을 공동체
1912년 토정동에 살던 사람들 중 이씨(24필지), 김씨(23필지)가 가장 많은 땅을 소유했습니다. 이는 특정 성씨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마을의 땅 소유 관계는 단순한 재산 문제를 넘어서, 공동체의 구조와 전통을 반영합니다. 같은 성씨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협력과 연대가 강화되었고, 이것이 곧 마을 운영의 근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민지 땅의 변화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땅 1필지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조선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로, 이들의 땅 소유는 식민지 경제 구조가 마포 지역까지 침투했음을 보여줍니다. 작은 필지였지만, 이는 지역 사회가 이미 식민지적 변화 속에 놓여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마을과 법인의 소유지 – 공동체와 제도의 흔적
토정동에는 마을 소유의 땅 1필지와 법인 소유의 땅 1필지도 있었습니다.
마을 소유지는 공동체 활동을 위한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법인 소유지는 종교단체나 학교, 혹은 기타 단체가 운영하는 기반 시설이었을 수 있습니다. 이는 토정동이 단순한 주거지 이상의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오늘의 문화재 조사와 연결되는 과거의 기록
이러한 1912년의 땅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진행하는 문화재 지표 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와 직접적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토정동의 필지 구조와 토지 소유 상황을 아는 것은 현재 서울 지역 문화유적 발굴의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됩니다. 특히, 토정동처럼 도시 근교의 오래된 마을은 개발 과정에서 문화재 흔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런 자료는 발굴과 보존의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결론 – 땅의 역사 속에서 배우는 것
1912년 마포구 토정동의 땅 기록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시대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집터에서 농지까지, 국유지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필지까지. 이 모든 것은 마을이 단순히 ‘거주 공간’이 아닌, 시대의 흐름과 권력의 구조 속에 놓여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문화재 조사를 통해 마주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그 속에 살아 숨 쉬던 사람들의 삶과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토정동의 기록은 그 목소리를 100년 후 우리에게 전해주는 소중한 매개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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