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마포구 창전동, 그 땅의 기억을 따라가다
- 2025년 8월 30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마포구 창전동 역사
마포 창전동, 436필지가 품은 1912년의 기억논·밭·무덤·집터가 말하는 문화재 지표조사의 모든 것
마포구 창전동 · 436필지 · 210,995㎡ · 문화재 발굴조사의 현장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지금 창전동 골목을 걷다 보면 높은 아파트와 복잡한 도로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시간을 딱 113년만 되돌리면, 그 풍경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1912년 창전동은 436필지, 210,995㎡의 땅 위에 논과 밭, 무덤, 집터가 켜켜이 쌓인 살아있는 공동체였습니다. 김씨 98필지와 이씨 58필지가 마을의 중심을 잡고, 작은 사찰 터가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던 곳. 그러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도 이미 이 마을에 닿아 있었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당신이 매일 걷는 창전동의 골목이 완전히 다른 목소리로 당신에게 이야기를 건네기 시작할 겁니다.
목차
1912년 창전동, 436필지의 전체 풍경
논과 밭 —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땅
대지와 집터 — 308필지가 말하는 마을의 형성
분묘지와 무덤 — 기억을 간직한 5,566㎡의 땅
잡종지와 국유지 — 도시화의 첫 조짐
성씨별 토지 소유 — 마을을 구성한 아홉 가문의 이야기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 소유지 — 식민지의 그림자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창전동의 과거
성공 사례 — 발굴이 되살린 서울의 기억들
마무리 — 땅에 새겨진 시간의 기록을 읽다

SECTION 01
1912년 창전동, 436필지의 전체 풍경
마포구 창전동. 지금은 홍대와 합정 사이에서 조용한 주거지로 자리 잡은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창전동은 총 436필지, 면적 210,995㎡의 땅이었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약 6만 4천 평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이 숫자들이 처음엔 그냥 통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436개의 필지 하나하나에 사람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으며, 삶이 있었습니다. 논에서는 벼가 자랐고, 119필지의 밭에서는 콩과 보리와 채소가 자랐습니다. 308필지의 집터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단 1필지의 분묘지에는 조상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 기록이 오늘날 문화재 발굴 기관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목의 용도와 소유자 정보가 지표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를 예측하게 해주는 가장 정밀한 나침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첫 발걸음은 언제나 이런 역사 기록에서 시작됩니다.
436총 필지 수
210,995㎡총 면적
308대지 필지 수
119밭 필지 수
98김씨 소유 필지
3동척·일본인 필지
SECTION 02
논과 밭 —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땅
1912년 창전동의 농경지 기록에서 흥미로운 대비가 드러납니다. 논은 단 2필지, 9,514㎡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밭은 119필지, 104,446㎡로 전체 면적의 절반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이 차이는 창전동의 지형적·사회적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논보다 밭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은 창전동이 물이 풍부한 저지대보다는 상대적으로 고지대나 구릉지에 가까운 지형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물이 적게 필요한 밭농사가 중심이 된 것입니다. 콩, 조, 보리, 감자, 채소. 119필지의 밭에서 이 모든 작물이 계절마다 자라나 창전동 사람들의 밥상을 채웠습니다.
상상해보세요 — 1912년 창전동의 가을 수확철황금빛 들판은 아니지만, 119필지의 밭 여기저기서 콩깍지가 터지고 고추가 빨갛게 익어갑니다. 김씨 댁 아낙네는 무를 뽑고, 이씨 할아버지는 보리 이삭을 거둡니다. 수확한 작물은 일부를 마포나루 장터로 내다 팔고, 나머지는 겨울을 대비해 저장합니다. 논 2필지에서 거둔 쌀은 특히 귀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436필지의 이 작은 마을에서 밭은 생존의 기반이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밭 구역은 중요한 조사 대상입니다. 농경 층위와 밭두렁 경계선, 씨앗 잔존물, 수로 흔적이 지표 아래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창전동 사람들이 어떤 작물을 어떻게 재배했는지를 과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들입니다.

SECTION 03
대지와 집터 — 308필지가 말하는 마을의 형성
창전동 436필지 중 308필지, 91,283㎡가 대지였습니다. 전체 필지의 70%가 넘는 압도적인 비중입니다. 이 숫자는 창전동이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이미 주거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서울 서쪽 한강변에 위치한 창전동은 교통과 상업 활동의 요지였습니다. 마포나루와 가깝고 도성으로 연결되는 길목에 있어, 상인과 노동자, 농부가 어우러지는 복합적인 생활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308필지의 집터에서는 그 모든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이 펼쳐졌습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308필지의 대지는 가장 중요한 조사 구역입니다. 주춧돌, 기초석, 우물터, 아궁이 잔재, 생활 도구 파편이 지표 아래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집터 흔적이나 생활용품이 발굴된다면, 단순한 자료가 아니라 창전동 사람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타임캡슐이 될 것입니다. 특히 교통 요충지였던 창전동의 특성상, 상업 활동과 관련된 저장 시설이나 거래 도구가 출토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308채의 집. 하나하나에 가족이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문을 열고 나와 밭으로 가고, 나루터로 가고, 장터로 가던 사람들. 문화재 발굴조사는 바로 그 문을 다시 두드리는 작업입니다.
SECTION 04
분묘지와 무덤 — 기억을 간직한 5,566㎡의 땅
창전동의 436필지 중 단 1필지, 5,566㎡가 분묘지였습니다. 숫자는 작지만, 이 한 필지가 담고 있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5,566㎡, 약 1,700평에 달하는 이 공간은 창전동 사람들이 조상을 기리고 죽음을 기억하는 신성한 터전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분묘지는 단순한 매장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명절이면 온 가족이 모여 제를 올리고, 기일이면 정갈하게 음식을 차려 조상의 혼을 달랬습니다. 분묘지 주변의 풀을 베고 묘비를 닦는 일은 자손의 도리이자 마을 공동체의 의무였습니다. 이 1필지는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교감하던 공간이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분묘지는 특히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단순히 유골만이 아니라 부장품, 묘제 형식, 석물, 묘비 파편, 제기류가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유물들은 그 시대의 신앙과 장례 풍습, 사회적 지위를 이해하는 핵심 자료가 됩니다. 창전동의 1필지 분묘지는 향후 시굴조사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지점 중 하나입니다.
오늘날 이 분묘지가 있던 자리에 무엇이 들어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표 아래에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 문화재 발굴의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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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05
잡종지와 국유지 — 도시화의 첫 조짐
창전동의 기록에는 잡종지 6필지, 185㎡와 국유지 2필지가 있었습니다. 면적은 작지만, 이 필지들이 담고 있는 의미는 당시 창전동이 처해 있던 시대적 맥락을 보여줍니다.
잡종지 6필지는 특정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때로는 마을 공동 작업 공간이 되었다가, 때로는 임시 창고 터로, 또 때로는 길목이나 공터로 쓰이던 유연한 공간이었습니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창전동의 땅 이용 방식이 변화하는 과도기적 모습이 이 잡종지들에 담겨 있습니다.
국유지 2필지는 더욱 복합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1912년은 일본 통감부 체제 아래 조선의 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던 시기였습니다. 국유지의 존재는 공공시설이나 행정기관의 기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식민지 지배 권력이 이 마을 안에도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SECTION 06
성씨별 토지 소유 — 마을을 구성한 아홉 가문의 이야기
1912년 창전동의 토지 기록에서 가장 생생하게 마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성씨별 소유 현황입니다. 무려 아홉 개의 성씨가 이름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김씨98필지최대 보유
이씨58필지두 번째
박씨35필지세 번째
정씨30필지네 번째
최씨28필지다섯 번째
조씨23필지여섯 번째
고씨17필지일곱 번째
윤씨13필지여덟 번째
심씨11필지아홉 번째
아홉 개의 성씨. 이 숫자가 창전동에 대해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마을이 특정 씨족이 독점하는 단일 혈연 공동체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김씨가 98필지로 압도적 1위였지만, 이씨·박씨·정씨·최씨·조씨·고씨·윤씨·심씨가 각자의 자리를 갖고 마을을 함께 이루었습니다. 다양한 가문이 어우러진 이 구조는 창전동을 더욱 풍요롭고 역동적인 공동체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김씨 98필지, 이씨 58필지. 이 두 가문만 합쳐도 436필지의 약 36%를 차지합니다. 마을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결정에서 이 두 가문의 목소리는 특히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홉 개 성씨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어느 한 가문만의 마을이 아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 아홉 성씨의 기록은 출토된 유물의 소유자를 추적하는 결정적 단서가 됩니다. 비석 파편, 도자기, 생활 도구에 새겨진 이름이나 문양이 이 성씨 기록과 맞물릴 때, 발굴된 물건은 특정 가족의 이야기를 품은 유산으로 거듭납니다.
SECTION 07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 소유지 — 식민지의 그림자
창전동의 436필지 기록에서 가장 무거운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 2필지, 일본인 소유지 1필지, 그리고 법인 소유지 1필지. 숫자는 작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역사적 맥락 —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창전동
1908년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체계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인 식민지 기관이었습니다. 창전동처럼 규모가 작은 마을에서도 동척의 흔적이 2필지나 남아 있다는 것은, 식민지 지배가 서울의 구석구석까지 얼마나 촘촘하게 침투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촌동 48필지, 이태원동 36필지에 비하면 적은 수이지만,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식민지 수탈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3필지의 땅 위에서 원래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명분으로 땅이 넘어갔을까요. 그 과정을 복원하는 것도 문화재 발굴조사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입니다. 아픈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정직하게 기록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역사와 마주하는 올바른 방식입니다.
일제강점기의 건물지 잔재, 당시 반입된 건축 자재, 토지 경계를 표시하던 구조물들이 이 필지들 아래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 구역에서 이루어진다면, 식민지 시대 창전동의 변화 과정을 실물로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SECTION 08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창전동의 과거
1912년 창전동의 토지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진행하는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와 직접적으로 이어집니다. 436필지의 지목과 소유자 정보는 지표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를 예측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입니다.
마포구는 서울에서도 재개발 압력이 높은 지역 중 하나입니다. 창전동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래된 건물이 허물어지고 새 건축물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308필지의 대지 아래 집터 유구와 119필지의 밭 아래 농경 층위, 그리고 단 1필지의 분묘지에 잠든 기억들이 위협받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개발 공사에 앞서 전문 문화재 발굴 기관이 지표면을 체계적으로 살피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조사 결과에 따라 표본조사(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발굴조사가 순서대로 이어집니다. 창전동의 436필지 기록은 이 모든 단계를 이끄는 첫 번째 지도입니다.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에 조사가 선행된다면, 창전동이 품고 있는 기억들을 온전히 되살릴 수 있습니다.
국유지 2필지의 위치, 동척 소유 2필지의 용도, 법인 소유지의 성격을 추적하는 작업도 중요합니다. 이 필지들이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는지를 알면, 당시 창전동의 공간 구조와 권력 관계를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습니다.
SECTION 09
성공 사례 — 발굴이 되살린 서울의 기억들
창전동의 가능성이 어떻게 현실이 될 수 있는지, 이미 서울에서 이루어진 발굴 성과들이 보여줍니다.
성공 사례 01 — 마포구 상암동 백제 주거지 발굴
마포구 상암동 발굴 현장에서 백제 시대 주거지가 발견되어 도시 개발 과정에서 역사적 가치가 드러난 사례가 있습니다. 창전동과 같은 마포구에서, 개발 이전의 체계적인 지표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직접 보여준 성공 사례입니다. 이 발굴로 해당 지역의 역사가 수천 년 더 거슬러 올라갔고, 지역 주민들의 정체성 인식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성공 사례 02 — 인사동 금속활자, 기록이 실물로 돌아오다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조선 전기 16세기 층의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주전 등 금속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선행되었기에 가능한 성과였습니다. 창전동의 분묘지와 대지 기록은 이와 유사한 발굴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성공 사례 03 — 재개발 부지에서 조선 초기 가옥터 발견
서울 모 지역 재개발 전 지표조사에서 조선 초기 가옥터와 우물, 생활 도구들이 발견되어 해당 구역 일부가 문화유산 보호구역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창전동의 308필지 대지 기록이 보여주는 밀집 주거지는 이와 동일한 발굴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지표조사 없이 개발이 진행된다면, 창전동의 그 이야기는 영영 사라질 수 있습니다.

SECTION 10
마무리 — 땅에 새겨진 시간의 기록을 읽다
1912년 마포구 창전동은 단순한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119필지의 밭에서 자라는 작물, 308필지의 집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단 1필지의 분묘지에 잠든 조상들, 그리고 아홉 성씨가 어우러진 공동체. 이 모든 것이 창전동이라는 땅의 진짜 얼굴이었습니다.
논과 밭, 무덤과 집터, 국유지에서 동척의 필지까지. 이 436필지는 마을이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권력의 구조 속에 놓여 있었음을 생생하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마주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닙니다. 그 속에 살아 숨쉬던 사람들의 삶과 목소리입니다.
땅 속에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수많은 기억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깨워내는 일이 우리의 책임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창전동의 436필지가 우리에게 그 일을 시작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436필지의 기억이지금 당신에게 말을 건다"
김씨 98필지의 넓은 밭, 이씨 58필지의 집터, 단 1필지 분묘지에 잠든 이름 모를 조상들. 아홉 가문이 어우러져 이루던 창전동의 공동체. 그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골목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동척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전, 이 마을은 평화로운 삶이 있었습니다. 그 삶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하는 일입니다.
관심을 갖는 것, 기록을 읽는 것, 개발이 시작되기 전에 조사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창전동의 436필지는 오늘도당신의 발 아래에서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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