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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마포구 용강동,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

  • 2025년 8월 20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마포구 용강동 역사

마포 용강동, 496필지가 품은 1912년의 기억한강변 농촌과 도시의 경계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말하다

마포구 용강동 · 496필지 · 228,291㎡ · 문화재 발굴조사의 현장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지금 용강동 한강변의 빌딩숲 아래, 100년 전에는 밭에서 곡식이 자라고 마포포구에서 배가 오가던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포구 용강동. 지금은 한강변 아파트와 상업지구가 가득한 현대적인 공간이지만, 1912년 이 땅은 전혀 다른 풍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496필지, 228,291㎡의 넓은 땅 위에 김씨·이씨·고씨·박씨·최씨를 비롯한 다양한 성씨들이 모여 살았고, 밭에서 채소를 기르고, 마포포구를 통해 세상과 교류하던 활기찬 마을이었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당신이 오가던 용강동의 거리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목차

  1. 한강변의 경계 — 1912년 용강동의 전체 풍경

  2. 447필지의 대지 — 마을의 규모와 사람들의 삶

  3. 38필지의 밭 — 한강 물을 끌어쓰던 농업의 터전

  4. 사사지와 잡종지 — 마을의 정신과 일상을 담은 특수한 땅

  5. 다양한 성씨들 — 용강동을 이룬 공동체의 얼굴

  6. 국유지·마을공동지·법인 소유지 — 공공과 근대화의 흔적

  7. 일본인 소유 2필지 — 시대의 그림자가 닿다

  8. 마포포구와 용강동 — 교류의 중심지였던 한강변

  9.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용강동의 과거

  10. 마무리 — 한강변의 빌딩숲 아래 잠든 기억



SECTION 01

한강변의 경계 — 1912년 용강동의 전체 풍경

마포구 용강동. 지금은 마포대교 인근의 한강변 아파트와 빌딩숲이 가득한 이곳이, 1912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용강동은 총 496필지, 228,291㎡의 광활한 땅이었습니다.

496필지.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어느 마을보다도 많은 필지 수입니다. 합정동(352필지), 창전동(436필지)을 넘어서는 이 규모는 용강동이 1912년에 이미 상당히 발달한 마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한강과 마포포구를 끼고 있는 지리적 특성 덕분에 농업과 상업, 주거가 한데 어우러진 복합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496필지를 들여다보면 놀라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전체 228,291㎡ 중 밭이 차지하는 면적이 119,375㎡로 전체의 52%에 달합니다. 절반이 넘는 땅이 농경지였다는 것은, 지금의 용강동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496총 필지 수

228,291㎡총 면적

447대지 필지 수

38밭 필지 수

77김씨 소유 필지

2일본인 소유 필지


SECTION 02

447필지의 대지 — 마을의 규모와 사람들의 삶

용강동 496필지 중 447필지, 99,048㎡가 대지였습니다. 전체 필지의 90%에 달하는 이 압도적인 비율은 용강동이 얼마나 주거 밀집 지역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시리즈에서 원효로4가(92%), 원효로3가(92%), 토정동(93%)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용강동은 농경지의 면적은 크지만, 집터의 필지 수도 어느 마을 못지않게 많았던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447채의 집.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울려 좁은 골목을 이루고, 집집마다 마당에 장독대가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한강과 가까운 용강동에서는 강바람이 골목골목을 누비고, 장날이면 마포포구에서 들어온 물건들이 거래되는 활기가 넘쳤을 것입니다. 447필지 하나하나가 각각 다른 삶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447필지의 대지는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이 시리즈에서 단연 가장 많은 수의 집터 유구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구역입니다. 기와 조각, 백자 파편, 생활 도구, 건물 기초 구조물이 지표 아래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마포포구와 연결된 지리적 특성상, 상업 활동과 관련된 도구나 교역품의 흔적이 출토될 수도 있습니다.



SECTION 03

38필지의 밭 — 한강 물을 끌어쓰던 농업의 터전

447필지의 집터와 함께 용강동을 이룬 것은 38필지, 119,375㎡의 밭이었습니다. 면적으로만 보면 이 시리즈에서 이촌동의 829,702㎡, 홍은동의 288,751㎡에 이어 세 번째로 넓은 밭 면적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절대 면적이 아닙니다. 용강동에서 밭이 전체 면적의 52%를 차지한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상상해보세요 — 1912년 용강동의 봄 파종한강에서 흘러오는 바람이 밭두렁을 스칩니다. 김씨 가문의 아낙네가 이랑을 만들고, 이씨 할아버지는 씨앗을 심습니다. 한강이 코앞인 덕분에 물 대기가 수월해, 다른 동네 밭보다 땅이 기름집니다. 보리와 콩, 배추와 무. 이 119,375㎡의 밭에서 나온 작물이 마포포구 장터를 채웠습니다.

한강에서 물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용강동의 지리적 이점은 농업에도 그대로 적용됐습니다. 다른 내륙 마을들에 비해 관개가 쉬웠고, 그 덕분에 채소와 곡물의 품질도 좋았을 것입니다. 수확된 작물은 마포포구를 통해 서울 도심과 한강 상류·하류로 유통되었을 것입니다. 용강동의 밭은 단순한 자급자족 공간이 아니라, 마포 경제 네트워크의 일부였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38필지의 밭 구역에서는 농경 층위, 밭두렁 경계석, 수로 흔적, 씨앗 탄화물이 출토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강과 가까운 위치 특성상 관개 시설 관련 구조물의 잔재도 발굴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밭 구역의 시굴조사는 1912년 마포 일대 농업 문화와 한강 수계 활용 방식을 복원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SECTION 04

사사지와 잡종지 — 마을의 정신과 일상을 담은 특수한 땅

용강동의 496필지 중에는 두 가지 특수한 용도의 땅이 있었습니다. 사사지 1필지, 234㎡와 잡종지 10필지, 9,633㎡입니다.

사사지 234㎡. 규모는 작지만 이 공간이 가진 의미는 큽니다. 마을 어딘가에 작은 사찰이나 불교 관련 시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농사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찾아가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리던 곳,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고 풍년이 들면 감사의 제를 올리던 마을의 정신적 중심지였을 것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사사지가 기록된 마을들(이촌동 1필지, 창전동 1필지, 원효로3가 1필지)과 비교할 때, 용강동도 이 계보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잡종지 10필지, 9,633㎡는 용도가 유동적인 땅이었습니다. 공동 작업장, 임시 창고, 마을 빈터, 혹은 아직 용도가 결정되지 않은 개발 예정지였을 수 있습니다. 용강동처럼 상업과 농업이 공존하는 활발한 마을에서 이런 다목적 공간의 필요는 크지 않았을까요. 마포포구에서 들어온 물건을 임시로 보관하거나, 거래를 위해 모이는 장터로 쓰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 ◆ —


SECTION 05

다양한 성씨들 — 용강동을 이룬 공동체의 얼굴

1912년 용강동의 토지 기록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성씨의 다양성입니다. 김씨와 이씨가 중심을 잡고 있었지만, 그 뒤를 이어 고씨, 박씨, 최씨는 물론 유씨, 양씨, 한씨, 강씨, 임씨, 장씨, 조씨, 신씨, 노씨, 서씨 등이 각각 10필지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김씨77필지최대 보유

이씨67필지두 번째

고씨27필지세 번째

박씨26필지네 번째

최씨23필지다섯 번째

기타10필지+유·양·한·강·임 등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마을들 중 용강동은 가장 다양한 성씨 구성을 보여줍니다. 창전동의 아홉 성씨, 이촌동의 다섯 성씨보다 훨씬 많은 성씨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는 용강동이 마포포구라는 상업 거점과 가까운 덕분에 다양한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음을 시사합니다. 혈연 중심의 씨족 마을이 아니라, 경제적 활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살던 개방적인 공동체였습니다.

용강동의 성씨 다양성은 문화재 발굴에서 더욱 다채로운 생활 유물의 출토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다양한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 각자의 생활 문화를 가져왔을 것이고, 그 흔적들이 지표 아래에 다층적으로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성씨 기록과 발굴 유물이 맞물릴 때, 용강동 공동체의 복잡하고 풍요로운 사회상이 복원될 것입니다.


SECTION 06

국유지·마을공동지·법인 소유지 — 공공과 근대화의 흔적

용강동 496필지에는 개인 소유지 외에도 다양한 주체들의 땅이 있었습니다. 국유지 10필지, 마을 공동 소유지 4필지, 법인 소유지 2필지가 그것입니다.

국유지 10필지는 도로 관련 부지, 하천 주변 공유 공간, 혹은 관청 시설이었을 것입니다. 마포구는 조선 시대부터 관청의 관심이 높은 지역이었고, 한강변 수운 관리를 위한 공공 시설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마을 공동 소유지 4필지는 주민들이 함께 사용하던 공간으로, 공동 우물, 마을 회합 장소, 공동 제사 터 등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법인 소유지 2필지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포포구와 가까운 용강동에 법인 소유지가 있었다는 것은, 상업적 기업 활동이 이미 이 마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근대적 제도와 기업 활동이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과도기의 모습입니다.


SECTION 07

일본인 소유 2필지 — 시대의 그림자가 닿다

용강동의 496필지 기록에서 식민지의 흔적이 등장합니다. 일본인 소유지 2필지. 합정동의 1필지, 토정동의 1필지, 현저동의 기록에서처럼, 용강동도 식민지의 그림자를 완전히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역사적 맥락 — 용강동의 일본인 소유지

이 시리즈에서 비교해 보면, 용강동의 일본인 소유지 2필지는 원효로3가(54필지), 이촌동(48필지), 이태원동(36필지+동척 36필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이것은 1912년 시점에서 용강동이 아직 일본의 대규모 토지 잠식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마포포구라는 상업 거점과 가까운 용강동이 식민지 경제 구조 안에 편입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입니다. 단 2필지지만, 그 안에는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질 변화의 씨앗이 담겨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건물지의 잔재, 당시 반입된 건축 자재나 생활용품이 이 2필지 아래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아픈 역사의 흔적도 발굴하고 기록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역사와 정직하게 마주하는 방식입니다.


SECTION 08

마포포구와 용강동 — 교류의 중심지였던 한강변

용강동을 이야기할 때 마포포구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조선 시대 마포포구는 서울로 들어오는 물자의 핵심 관문이었습니다. 서해에서 올라오는 해산물,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곡식과 특산물, 한강 상류에서 내려오는 목재. 이 모든 것이 마포포구를 통해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용강동은 바로 그 마포포구와 인접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496필지의 땅 위에서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도 동시에 포구의 상업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리적 이점 덕분이었습니다. 김씨와 이씨 가문의 일부는 포구에서 상업 활동을 하며 생계를 이었을 것이고, 고씨와 박씨 가문은 밭에서 채소를 길러 포구 장터에 내다 팔았을 것입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마포포구와 인접한 용강동은 수운과 상업 활동 관련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역에 사용된 도량형 도구, 선박 관련 부품, 다양한 지역의 도자기 파편이 발굴될 수 있습니다. 이런 유물들은 용강동이 단순한 주거·농경 마을이 아니라 서울의 물류 네트워크에 연결된 교류의 거점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SECTION 09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용강동의 과거

1912년 용강동의 496필지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진행하는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와 직접적으로 이어집니다. 마포구는 서울에서도 재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용강동의 447필지 대지 아래에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기에 이르는 생활 유구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38필지의 밭 아래에는 농경 층위와 수리 시설 흔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용강동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마포포구와 인접한 구역의 상업 유물, 447필지 대지의 생활 유구, 38필지 밭의 농경 층위를 우선 확인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표본조사(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발굴조사의 단계적 접근을 통해, 한강변 교역 마을로서의 용강동 역사를 온전히 복원할 수 있습니다.

성공 사례 01 — 강동구 선사시대 유적 발굴

서울 강동구 아파트 공사 과정에서 지표조사를 통해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발굴을 통해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드러났고, 지역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포포구와 인접한 용강동도 선사시대부터 한강변 인류 활동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체계적인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예상치 못한 귀중한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성공 사례 02 — 인사동 금속활자 발굴, 지표조사의 중요성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선행된 덕분에 조선 전기 금속활자가 발굴되었습니다. 용강동의 447필지 대지도 이와 유사하게, 체계적인 지표조사가 선행된다면 조선 후기 마포 상업 문화의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개발 전 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SECTION 10

마무리 — 한강변의 빌딩숲 아래 잠든 기억

1912년 마포구 용강동은 496필지, 228,291㎡의 땅 위에서 농업과 상업, 주거가 어우러진 활기찬 마을이었습니다. 김씨 77필지와 이씨 67필지가 중심을 잡고, 고씨·박씨·최씨는 물론 수많은 성씨들이 어울려 살며 마포포구의 상업 에너지를 함께 누렸습니다. 38필지의 밭에서는 한강 물을 끌어 곡식을 기르고, 사사지에서는 기도를 올리며, 잡종지에서는 함께 일을 나누었습니다.

지금 한강변의 빌딩숲 사이를 걷다 보면, 그 아래 어딘가에 1912년 용강동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447필지의 집터, 38필지의 밭, 마포포구를 오가던 사람들의 발자국.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기억을 땅 위로 불러내는 작업입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한층 깊고 풍요로운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바로 우리 발 아래 잠든 역사를 기억할 때입니다. 용강동의 496필지는 오늘도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합니다.




"496필지의 기억이한강을 바라보며 당신을 기다린다"

김씨 77필지의 집터, 이씨 67필지의 골목, 고씨와 박씨와 최씨, 그리고 수많은 성씨들이 어울려 살던 그 마을. 38필지의 밭에서 자라던 곡식, 마포포구에서 들어오던 물자의 소리, 사사지에서 피어오르던 향 연기. 그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걷는 한강변 거리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단 2필지의 일본인 소유지가 드리우던 그림자보다, 496필지를 채웠던 사람들의 삶이 더 오래 이 땅을 기억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첫 삽은 언제나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그 기억의 사슬에 이 글이 새로운 고리 하나를 더했기를 바랍니다.

용강동의 496필지는 오늘도한강 너머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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