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마포구 용강동,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
- 서울 HI
- 8월 20일
- 3분 분량
목차
서울의 변두리였던 마포구 용강동, 그 시작
1912년 용강동의 면적과 땅의 분포
집과 대지의 규모, 사람들이 살아간 공간
사사지와 잡종지, 특수한 땅의 의미
밭의 넓이와 농업 중심의 생활상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과 마을 구성원들
국유지, 마을 공동지, 법인 소유지의 특징
일본인 소유 토지, 시대의 그림자
용강동이 남긴 흔적과 오늘날의 의미
서울 문화재 조사와 발굴의 필요성
서울 마포구 용강동의 1912년 풍경은 지금과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지금은 한강변의 빌딩숲과 아파트 단지가 자리한 곳이지만, 100년 전 이곳은 농토와 마을 터가 어우러진 전형적인 농촌과 도시의 경계지대였다. 당시의 땅 분포와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옛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의 역사적 뿌리를 확인할 수 있다.
1. 서울의 변두리였던 마포구 용강동, 그 시작
1912년, 용강동은 총 496필지, 228,291㎡의 면적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의 용강동이 교통과 문화, 주거가 집중된 핵심 지역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당시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소박했다.
서울 중심부와 가까우면서도 한강변이라는 지리적 특성 덕분에 농업과 생활 공간이 공존했으며, 마포포구와의 연결성 때문에 경제적 교류도 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2. 1912년 용강동의 면적과 땅의 분포
당시 용강동의 토지 용도를 보면 그 사회의 생활상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
대지(집터): 447필지, 99,048㎡
사사지(사찰 소유지): 1필지, 234㎡
잡종지(다용도 토지): 10필지, 9,633㎡
밭: 38필지, 119,375㎡
이 기록만 보아도 주거지와 농경지가 공존하는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이 농업에 쓰였다는 점에서, 당시 용강동은 도시보다는 농촌의 성격이 강했다.
3. 집과 대지의 규모, 사람들이 살아간 공간
447필지, 약 10만㎡의 대지는 곧 마을의 규모를 의미했다. 이를 통해 당시 용강동이 단순히 농사만 짓는 곳이 아니라, 제법 규모 있는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좁은 골목과 흙길을 따라 사람들이 오가고, 집집마다 기와와 초가가 어울려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아파트 단지가 당시에는 흙냄새와 연기가 섞인 작은 마을 풍경이었음을 상상하면 묘한 감정이 든다.
4. 사사지와 잡종지, 특수한 땅의 의미
1필지 234㎡의 사사지가 있었다는 것은, 당시 용강동에 작은 사찰이나 불교 관련 시설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마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또한 10필지 9,633㎡의 잡종지는 용도가 명확하지 않은 땅으로, 공동 작업장이나 임시 창고, 혹은 방치된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역시 당시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5. 밭의 넓이와 농업 중심의 생활상
38필지 119,375㎡의 밭은 당시 용강동이 농업에 크게 의존했음을 보여준다. 이 넓이는 대지보다도 큰 규모로, 주민들이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강에서 쉽게 물을 끌어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곡식이나 채소를 재배하기 좋은 환경이었을 것이다. 마포가 단순히 상업의 중심이 아니라 농업과 도시 생활이 맞닿아 있던 독특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6.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과 마을 구성원들
1912년 용강동에 살던 사람들을 성씨별로 나누어 보면 당시 공동체의 구조가 드러난다.
김씨 77필지
이씨 67필지
고씨 27필지
박씨 26필지
최씨 23필지
유씨, 양씨, 한씨, 강씨, 임씨, 장씨, 조씨, 신씨, 노씨, 서씨 등이 각각 10필지 이상 보유
이 기록은 곧 당시 마을 내에서 특정 성씨가 중심을 이루고, 다양한 성씨가 함께 어울려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금의 서울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섞여 살지만, 당시에는 혈연과 촌락 중심의 유대감이 강했을 것이다.
7. 국유지, 마을 공동지, 법인 소유지의 특징
용강동에는 10필지의 국유지가 있었고, 4필지는 마을 공동 소유였다. 이는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공간, 예를 들어 마을 길이나 공동 우물터 같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2필지의 법인 소유지가 있었다는 점은, 당시 이미 근대적 제도와 기업 활동이 용강동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8. 일본인 소유 토지, 시대의 그림자
1912년은 일제강점기의 한가운데였다. 용강동에도 일본인 소유의 땅이 2필지 존재했다. 작은 수치이지만, 이는 당시 조선 사회 전반에 스며들던 식민지적 구조와 경제적 침탈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런 기록은 단순한 땅의 소유 현황을 넘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적 교훈을 담고 있다.
9. 용강동이 남긴 흔적과 오늘날의 의미
100여 년 전 용강동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의 과거이자, 문화유산 발굴과 조사의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땅은 단순히 경제적 자산이 아니라, 그 속에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 곳곳에서는 발굴 조사 과정에서 선사시대 유적이나 조선시대 생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는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도시 공간이 단순한 현대 문명이 아니라, 수백 년간 이어진 역사적 층위 위에 세워졌음을 보여준다.
10. 서울 문화재 조사와 발굴의 필요성
오늘날 서울에서 재개발이나 건축을 진행하려면, 반드시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우리 땅 속에 묻혀 있는 역사와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성공적인 사례로는 서울 강동구의 아파트 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이 있다. 당시 발굴을 통해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드러났고, 이는 지역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포구 용강동 역시 재개발 과정에서 이런 가능성을 품고 있는 지역이다.
결국 1912년의 용강동 기록은 단순한 과거의 통계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삶의 기반이 되는 역사적 자산이다.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우리는 땅 속에 묻힌 기억을 되살리고, 그것을 후대에 전할 수 있다. 한강변의 빌딩숲 사이에서 과거의 농토와 마을 공동체를 떠올리는 순간, 서울이라는 도시가 한층 깊고 풍요로운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다가온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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