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마포구 성산동의 토지 이용 현황과 문화유산 가치
- 2025년 7월 24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1일
마포구 성산동 1912년 토지 기록과 문화재 지표조사 블로그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기관마포구 역사동양척식주식회사홍대 역사
홍대 앞 그 땅, 571필지 위에 논과 무덤이 공존했다— 마포구 성산동 1912년의 놀라운 기록
571필지 1,660,352㎡의 광활한 농경 공동체 — 김씨 134필지와 동척 43필지가 같은 땅에 있었던 이야기, 그리고 문화재 지표조사가 그 층위를 꺼내는 방법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seoulheritage.org·읽는 시간 약 14분
"지금 홍대 앞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있다면,
그 건물 아래 1912년에는 논이나 밭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 땅 43필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갖고 있었다.
571필지 안에 농부의 삶과 식민 수탈이 동시에 있었다."
마포구 성산동. 지금은 홍대 인근의 조용한 주거지이자 연남동 골목과 이어지는 트렌디한 동네다. 하지만 1912년, 이 땅은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571필지, 1,660,352㎡. 축구장 약 232개를 합친 면적에 논과 밭, 집터와 무덤, 그리고 산이 어우러진 거대한 농경 마을이었다.
이 글은 성산동 1912년 토지 기록을 한 층씩 들춰가며, 그 땅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리고 왜 지금 이 땅에 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한지를 이야기한다.
목차 — 이 글의 흐름
1. 성산동, 홍대 앞이 농촌이었던 시절
2. 논 174필지, 밭 303필지 — 이 동네는 거대한 농경 공동체였다
3. 대지 65필지와 무덤 8필지 — 삶과 죽음이 같은 마을에
4. 임야와 잡종지 — 자연과 생활이 얽힌 공간
5. 김씨 134필지 — 이 마을에서 가장 큰 가문
6. 동척 43필지 — 성산동에서 가장 무거운 숫자
7. 문화재 지표조사, 이 복잡한 땅을 읽는 방법
8.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이 순서가 모든 것이다
9. 성공 사례 — 서울 마포 일대에서 역사가 돌아온 순간들10. 성산동 땅의 기억을 지키는 사람
1. 성산동, 홍대 앞이 농촌이었던 시절
성산동이라는 이름은 이 마을 뒤에 있는 산, 성산(城山)에서 유래했다. 마을을 감싼 산 하나가 이름이 됐다는 것 자체가, 이 동네가 얼마나 자연과 가까운 공간이었는지를 말해준다. 1912년, 성산동은 총 571필지로 구성된 광활한 마을이었다.
지금 성산동을 걷다 보면 상암동 방면 아파트 단지들과 홍대 인근 카페 거리가 만나는 경계 지역이라는 느낌이 든다. 한쪽은 조용한 주거지, 한쪽은 활기찬 상권. 그런데 1912년에는 그 모든 자리에 논과 밭이 있었다. 봄이면 모내기를 하고, 가을이면 벼를 베던 풍경이 지금의 카페 거리 자리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논밭 사이 어딘가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성산동 1912년 기록의 가장 중요한 두 축, 농경 공동체와 식민 수탈이 같은 땅 위에 공존하고 있었다.
571필지
총 필지 수
1,660,352㎡
총 면적
303필지
밭
174필지
논
43필지
동척 소유
134필지
김씨 소유

2. 논 174필지, 밭 303필지 — 이 동네는 거대한 농경 공동체였다
논 174필지, 788,413㎡. 밭 303필지, 740,120㎡. 이 두 숫자를 합치면 전체 1,660,352㎡의 93%가 넘는다. 성산동은 사실상 논과 밭으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농경 공동체였다.
흥미로운 것은 논과 밭의 비율이다. 필지 수는 밭(303)이 논(174)보다 많지만, 면적은 논(788,413㎡)이 밭(740,120㎡)보다 약간 더 크다. 즉 논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이 밭보다 훨씬 넓었다는 뜻이다. 성산 주변 물이 풍부한 저지대에 넓은 논이, 구릉 지역에 작은 밭들이 촘촘히 조성되어 있었던 그림이 그려진다.
이 광활한 농경지가 문화재 지표조사의 관점에서 가진 의미는 크다. 수백 년간 사람의 손이 닿은 논과 밭에는 농기구 잔재, 수리시설 흔적, 밭두렁 구조물, 그리고 농부들이 쉬어가던 작은 구조물들이 지표 아래에 남아있을 수 있다. 성산동 서교동 인근에서는 실제로 조선시대 건물지와 조선 전기 도자기, 심지어 삼국시대 토기까지 출토된 사례가 있다.
밭
303필지 / 740,120㎡
논
174필지 / 788,413㎡
대지
65필지 / 52,747㎡
분묘지
8필지 / 20,267㎡
임야
6필지 / 39,378㎡
잡종지
15필지 / 19,424㎡

3. 대지 65필지와 무덤 8필지 — 삶과 죽음이 같은 마을에
대지 65필지, 52,747㎡. 집이 있는 땅이 65필지였다. 571필지 중 11%에 불과하다. 나머지 89%는 논과 밭, 무덤, 산이었다. 성산동은 집보다 농경지가 압도적으로 많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분묘지 8필지, 20,267㎡. 집 65필지 옆에 무덤 8필지가 있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조상의 무덤 가까이에 살았고, 계절마다 제사를 지내러 무덤을 찾았다.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은 공동체의 문화가 이 8필지 안에 담겨 있다. 분묘지 구역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부장품, 묘비 석재, 제의 용기 발굴 가능성이 높은 중요 조사 대상이다.
"65필지의 집과 8필지의 무덤이 같은 마을 안에 있었다.
살아서 논을 갈고, 죽어서 산기슭에 묻히는.
그 삶의 완결된 순환이 성산동 땅 위에 새겨져 있었다."
4. 임야와 잡종지 — 자연과 생활이 얽힌 공간
임야 6필지, 39,378㎡. 성산이라는 이름을 준 그 산의 일부가 이 임야 구역이었을 것이다. 나무와 풀이 우거진 이 산자락은 마을 사람들에게 연료와 건축 자재, 그리고 채집의 공간이었다. 임야 구역에서는 오래된 나무 뿌리층 아래 기와 조각이나 토기 편이 보존될 수 있다.
잡종지 15필지, 19,424㎡. 행정적으로 명확히 분류되지 않은 다양한 용도의 땅이었다. 창고, 임시 주거 공간, 작업장, 마을 공동 시설. 어떤 용도였든 잡종지는 가장 다양한 생활 흔적이 남아있을 수 있는 구역이다. 서교동 인근에서 발굴된 삼국시대 토기처럼, 예상치 못한 발견이 이루어지는 곳도 바로 이런 잡종지 구역이다.

5. 김씨 134필지 — 이 마을에서 가장 큰 가문
성산동 토지 소유자 분포. 김씨가 134필지로 압도적 1위였다. 전체 571필지의 23%를 김씨 단일 가문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씨 61필지, 최씨 60필지가 그 뒤를 따랐고, 조씨 32필지, 안씨, 박씨, 정씨, 윤씨, 노씨, 홍씨, 지씨, 손씨 등 다양한 성씨들이 기록되어 있다.
김씨 134필지. 이 수치는 놀랍다. 성산동에서 김씨 가문이 차지하던 공간적 비중과 공동체 내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단번에 보여준다. 김씨가 집중된 구역에는 가문의 생활 유구, 종중 관련 시설, 무덤 등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다양한 성씨들의 공존도 성산동의 특징이다. 10개 이상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는 건, 성산동이 단일 가문 중심이 아니라 여러 공동체가 모여 이룬 복합적 마을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다양성은 각 성씨의 생활 방식과 문화가 서로 다른 형태로 유적에 남겨져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김씨
134필지
전체의 23%
이씨
61필지
최씨
60필지
조씨
32필지
동척
43필지
식민 수탈 기관
국유지
33필지
공공 관리
6. 동척 43필지 — 성산동에서 가장 무거운 숫자
571필지 중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43필지. 이 숫자가 이 글에서 가장 무겁다. 동척은 1908년 일제가 조선의 비옥한 농경지를 수탈하기 위해 설립한 식민 기업이었다. 성산동처럼 논과 밭이 풍부한 지역은 동척의 주요 타깃이 되었다.
43필지. 전체의 7.5%에 해당하는 땅이 조선인 농민들의 손을 떠나 식민 기관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땅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원래 주인이었던 조선 농민들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은 것 이상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동척 43필지 — 성산동에서의 토지 수탈 규모
성산동의 동척 소유 43필지는 마포구 서교동의 동척 토지와 함께 이 지역 전체에 걸친 식민지 농경지 수탈의 규모를 보여준다. 동척 소유지 구역에서는 당시 농업 관리 시설, 수탈 관련 경계 구조물, 일제강점기 토지 측량 관련 흔적들이 지표 아래에 남아있을 수 있다. 서교동 인근 지표조사에서도 동척 관련 역사 흔적이 확인된 사례들이 있다.
국유지도 33필지로 집계되었다. 동척 43필지와 합치면 76필지, 전체의 13%가 조선인 개인의 손에 있지 않았다. 성산동의 농경 공동체가 외부 세력에 의해 얼마나 잠식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다.

7. 문화재 지표조사, 이 복잡한 땅을 읽는 방법
논 174필지, 밭 303필지, 무덤 8필지, 김씨 134필지, 동척 43필지. 이 모든 요소가 뒤섞인 성산동 같은 땅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는 어떻게 접근할까.
첫 단계는 기록 분석이다. 1912년 토지 대장처럼 당시의 지목과 소유자 정보를 분석해 구역별로 어떤 유형의 유적이 있을지를 예측한다. 김씨가 집중된 구역, 분묘지 구역, 동척 소유 구역, 잡종지 구역. 각각 다른 성격의 유적이 나올 수 있는 구역들이다.
그 다음은 현장 답사다. 지표면에 드러난 기와 조각, 석재 잔편, 지형의 미세한 변화를 관찰하면서 기록과 대조한다. 성산동처럼 논과 밭이 광활하게 펼쳐진 지역에서는 토양층의 변화만으로도 과거 농경지와 비농경지의 경계를 파악할 수 있다. 서교동 인근에서 삼국시대 토기까지 나온 사례를 보면, 성산동의 논밭 아래에 어떤 시대의 흔적이 있을지 미리 단정할 수 없다.
8.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이 순서가 모든 것이다
STEP 1
지표조사
문헌·현장 분석
비파괴 방식
STEP 2
표본조사
면적 2% 이내
탐색 발굴
STEP 3
시굴조사
10~20% 범위
예비 발굴
STEP 4
정밀 발굴
면 단위 전면
발굴·기록
성산동처럼 571필지라는 큰 규모의 다양한 역사 구조를 가진 지역에서 이 순서가 더욱 중요하다. 논 유적과 밭 유적이 다르고, 분묘지 유적과 동척 관련 유적이 다르다. 각 구역의 성격에 맞는 발굴 방식을 적용하려면 지표조사로 전체 그림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상암동 개발, 홍대 인근 재개발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지금, 성산동 일대의 개발에서 이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 번 파괴된 유적은 돌아오지 않는다.
9. 성공 사례 — 서울 마포 일대에서 역사가 돌아온 순간들
성공 사례 01
마포구 서교동 인근 — 삼국시대 토기까지 나왔다
성산동과 인접한 서교동 인근 발굴 현장에서 조선시대 건물지와 조선 전기 도자기가 출토되었고, 더 깊은 층에서는 삼국시대 토기까지 발견된 사례가 있다. 지금은 트렌디한 상권으로 가득한 이 지역 땅 아래에 이렇게 다양한 역사 층위가 쌓여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성산동의 논밭 아래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어떤 시대의 흔적이 나올지 알 수 없다.
성공 사례 02
은평구 불광동 — 예상치 못한 곳에서 조선시대 생활유구가
은평구 불광동 개발지에서 진행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별다른 유구가 없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시굴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생활유구가 확인되었다. 결국 해당 유적은 보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개발계획이 일부 조정되었고, 관련 유물들이 수습되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성산동처럼 예상을 뒤엎는 발견이 어디서든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성공 사례 03
종로구 인사동 — 금속활자, 절차를 지킨 자에게 나타났다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체계적인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거쳐 7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16세기 층에서 한글·한자 혼용 금속활자와 일성정시의가 출토되었다. 이 발견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 하나, 순서를 지켰기 때문이다. 성산동의 571필지도 그 순서를 지킬 때 어떤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10. 성산동 땅의 기억을 지키는 사람
홍대 앞을 걷다가, 연남동 골목을 지나다가, 성산동 주택가를 산책하다가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자. 내가 걷고 있는 이 길 아래에 1912년 김씨 가문의 논이 있었을 수 있다. 동척이 관리하던 밭이 있었을 수 있다. 마을 어귀 어딘가에 조선시대 무덤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 지표조사의 역할이다. 성산동처럼 571필지라는 광활한 면적, 복잡한 소유 구조, 다양한 성씨 공동체가 있었던 땅일수록 그 아래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지 알 수 없다. 개발이 시작되기 전에, 포클레인이 땅을 파기 전에, 전문가가 먼저 이 땅을 읽어야 한다.
서울 전 지역의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에 의뢰할 수 있다. 마포구를 포함한 서울 전 지역의 조사를 담당하며, 조사 설계부터 보고서 작성, 인허가 절차까지 전 과정을 지원한다.
571필지 위에서 살아갔던 그 많은 이름들. 김씨, 이씨, 최씨, 조씨, 그리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성씨들. 그들이 이 땅에 남긴 흔적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이 도시를 진짜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홍대 앞 그 골목, 성산동 그 주택가 아래에
571필지 위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흔적이 있습니다.
논을 갈던 손, 무덤을 돌보던 발걸음,
그리고 동척이 빼앗아간 그 땅의 기억까지.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과거를 위한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도시를 더 깊이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 이해를 시작하는 사람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의뢰
마포구를 포함한 서울 전 지역 — 지표조사부터 발굴, 보고서 작성, 인허가 절차까지 전 과정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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