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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마포구 도화동의 숨겨진 이야기: 땅과 사람들의 흔적을 따라

  • 2025년 4월 23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4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문화재 발굴문화재 지표조사도화동 역사마포구 문화유산

지금 당신이 서 있는 마포구 그 땅, 113년 전엔 벼가 자라고 무덤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 1912년 도화동의 기록

딱 한 가지만 상상해보세요.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도화동 아파트 단지 아래에, 113년 전 김씨 어르신이 무릎까지 흙을 묻히며 밭을 갈고 있었다면요.


이씨 할머니가 조상 무덤 앞에서 절을 올리던 그 언덕이, 지금의 저 빌딩 자리라면요.



그 이야기는 사라진 게 아닙니다.


땅속에, 기록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습니다.

목차

1.1912년 도화동, 그곳으로 가는 시간 여행

2.논과 밭 — 도화동을 먹여 살린 땅의 이야기

3.집과 대지 — 411개의 필지에 스민 삶의 온기

4.무덤과 산 — 조상을 품고 자연을 품은 공간

5.김씨, 이씨, 최씨 — 도화동을 지킨 사람들의 이름

6.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이 기록이 지금도 중요한 이유

7.성공 사례 — 기록이 땅속 시간을 살린 순간들

8.도화동이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말



1. 1912년 도화동, 그곳으로 가는 시간 여행

마포구 도화동. 지금은 마포대교가 가깝고, 직장인들이 오가는 활기찬 도심 한복판입니다. 고층 건물이 하늘을 가리고, 카페와 식당이 골목을 채우고 있죠. 하지만 딱 113년 전, 이곳의 풍경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1912년, 도화동은 총 531필지, 360,358㎡의 땅으로 이루어진 마을이었습니다. 109,000평, 축구장으로 따지면 약 50개가 넘는 크기입니다. 그 광활한 땅 위에 논이 펼쳐지고, 밭이 이어지고, 집들이 모여 있었으며, 언덕에는 조상들의 무덤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기록은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 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의 1912년 역사 지적 데이터를 정리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남겨진 것입니다.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 숫자 하나하나는 이 땅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하루하루이고,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서울의 뿌리입니다. 지금부터 그 뿌리를 따라 내려가 봅니다.

531

총 필지 수

360,358

총 면적 (㎡)

55%

밭이 차지한 비율

113년

땅속에 잠든 시간


2. 논과 밭 — 도화동을 먹여 살린 땅의 이야기

1912년 도화동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것은 단연 농경지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밭의 규모가 압도적이었는데, 이 비율은 당시 도화동이 얼마나 농업 중심의 마을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논에서 벼를 키우고, 밭에서 채소를 길러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리던 이 땅은 도화동의 심장이었습니다.

논 — 7필지, 14,763㎡

도화동의 논은 7필지, 14,763㎡로 전체 면적의 약 4%를 차지했습니다. 규모로만 보면 작아 보이지만, 그 논에서 자란 벼 한 톨 한 톨이 마을 사람들의 밥상에 올랐습니다. 봄이면 모내기를 위해 마을 사람들이 함께 논에 나왔을 것이고, 여름 장마가 지나면 논두렁을 손보며 물을 관리했을 것입니다. 가을 수확 때는 황금빛으로 물든 논에서 웃음소리가 가득했겠죠. 작은 면적이지만, 그 논은 도화동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명의 땅이었습니다.

밭 — 102필지, 198,483㎡

밭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102필지, 198,483㎡. 전체 면적의 55%를 넘는 압도적인 비율입니다. 약 60,000평의 이 밭에서는 무, 배추, 고추, 콩, 보리 같은 다양한 작물이 계절마다 바뀌며 자랐습니다. 논처럼 물이 풍부한 저지대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 언덕과 평지를 가리지 않고 밭이 펼쳐져 있었을 것입니다.

밭일은 논농사보다 더 손이 많이 갔습니다. 씨앗을 심고, 잡초를 뽑고, 벌레를 잡고, 물을 주고, 수확하고, 다시 씨앗을 심는 반복. 아침 일찍 나가서 해가 질 때까지 허리를 펴지 못하던 농부들의 하루가 이 숫자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흘린 땀이 도화동을 먹여 살렸고, 오늘의 마포구를 있게 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3. 집과 대지 — 411개의 필지에 스민 삶의 온기

논과 밭이 도화동의 생존을 책임졌다면, 대지는 사람들의 일상이 펼쳐지는 무대였습니다. 1912년 도화동에는 무려 411필지, 117,934㎡의 대지가 있었습니다. 전체 면적의 33%에 달하는 이 공간은 단순히 집이 세워진 땅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가 쌓이고 쌓인 살아있는 공간이었습니다.

411개의 필지를 상상해보면, 그만큼 많은 가족들이 이 마을에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초가지붕이 얹힌 집 앞 마당에서 닭들이 꼬꼬댁대는 소리, 장독대에 된장과 간장을 담그는 냄새, 저녁이면 부뚜막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 그 411개의 집에서 아이들이 태어났고, 어른들이 나이 들었으며, 노인들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대지는 집터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마당과 창고, 작은 텃밭, 그리고 이웃집과 연결되는 좁은 골목길까지 포함된 생활 공간이었습니다. 그 골목을 통해 이웃이 왕래하고, 명절이면 서로의 집에서 음식을 나눴을 것입니다. 도화동의 대지는 411개의 서로 다른 삶이 겹치고 어우러진, 따뜻한 생활 공동체의 증거입니다.



4. 무덤과 산 — 조상을 품고 자연을 품은 공간

도화동의 땅은 살아있는 사람들만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1912년 기록에는 10필지, 22,598㎡의 묘지가 남아있습니다. 약 6,800평에 달하는 이 무덤들은 도화동 사람들이 조상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무언의 증거입니다.

무덤 — 10필지, 22,598㎡

무덤은 대개 마을 언덕 위, 바람이 부드럽게 지나가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고, 추석이면 온 가족이 모여 성묘를 했을 이 공간은 단순한 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가족의 뿌리를 확인하는 의식의 장소이자, 살아있는 사람들이 과거와 대화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혼란스러운 시대에도, 후손들은 조상의 무덤을 지키며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을 이어갔습니다.

산 — 1필지, 6,578㎡

도화동에는 1필지, 6,578㎡의 임야도 있었습니다. 작은 면적이지만, 이 산은 마을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땔감을 구하러 오르고, 약초를 캐러 다니고, 아이들이 뛰어놀던 이 산은 마을의 자연 창고이자 놀이터이자 쉼터였습니다. 도화동 사람들은 이 산에서 자연의 리듬과 함께 살아갔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산의 색깔이 달라지고, 그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을 느꼈습니다.

1912년 도화동 토지 구성 상세 요약



밭 102필지 (198,483㎡, 55%) · 대지 411필지 (117,934㎡, 33%)


무덤 10필지 (22,598㎡) · 논 7필지 (14,763㎡) · 산 1필지 (6,578㎡)


총 531필지 · 합계 360,358㎡ (약 109,000평)


5. 김씨, 이씨, 최씨 — 도화동을 지킨 사람들의 이름

땅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습니다. 1912년 도화동의 토지 기록에는 그 땅을 일군 사람들의 성씨가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김씨가 107필지로 가장 많은 땅을 소유했고, 이씨가 88필지, 최씨가 35필지, 박씨가 25필지로 뒤를 이었습니다. 임씨, 서씨, 강씨, 유씨, 오씨, 윤씨, 정씨까지 실로 다양한 성씨들이 도화동이라는 무대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107필지를 소유한 김씨 집안을 상상해봅니다. 마을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졌다는 건, 그만큼 많은 책임도 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작황이 좋은 해에는 이웃에게 곡식을 나누고, 흉년이 오면 함께 걱정했겠죠. 이씨 집안 88필지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땅을 대물림해준 아버지를 생각하며 새벽마다 밭에 나갔을 그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최씨, 박씨, 임씨, 서씨. 그 이름들은 단순한 기록의 글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태어나고, 이 땅을 갈고, 이 땅에 묻힌 실제 사람들입니다. 도화동의 골목을 걸으며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명절이면 함께 떡을 빚고, 누군가의 상을 당하면 함께 울어준 사람들입니다. 그 이름들이 남긴 흔적이, 지금 이 기록 안에 살아있습니다.



6.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이 기록이 지금도 중요한 이유

1912년의 도화동 기록이 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113년이 지난 낡은 문서가 오늘날 서울의 도시 개발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중요합니다.

서울에서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내거나 지하를 파내는 공사를 진행하려면, 반드시 먼저 문화재 지표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지표조사란 해당 부지 위에서 눈에 보이는 유물이나 유구의 흔적을 살피고 기록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시굴조사, 표본조사, 그리고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어집니다.

이때 1912년의 토지 기록은 방향타 역할을 합니다. 도화동의 경우, 그 땅이 무덤이었는지, 밭이었는지, 집터였는지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조사의 방향과 깊이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무덤 10필지가 있던 자리 아래에는 부장품이나 묘비 조각이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411필지의 집터 아래에는 조선시대 생활유물이나 건물 기초가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정보 없이 포클레인을 들이대는 것은, 눈을 감고 역사를 지우는 일입니다.

seoulheritage.org가 서울 전역의 1912년 기록을 꼼꼼히 정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과 지자체, 개발 사업자가 함께 이 기록을 활용할 때, 비로소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 조사의 4단계



지표조사 — 지표면에서 유물·유구 흔적 관찰 및 기록. 모든 조사의 첫 관문.


시굴조사 — 소규모 굴착으로 지층 구조와 유물 유무 확인.


표본조사 — 일정 구역 체계적 조사로 유물 분포 파악.


본발굴조사 — 전면 발굴, 유적 기록 및 보존 방안 수립.


7. 성공 사례 — 기록이 땅속 시간을 살린 순간들

실제로 이 기록들이 현장에서 어떤 차이를 만들어냈는지 살펴보면, 그 중요성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성공 사례 1 — 마포구 인근 재개발 현장

마포구 인근 재개발 사업에서 공사 착수 전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하며 1912년 토지 기록을 먼저 검토했습니다. 해당 지점이 과거 집터와 무덤이 밀집했던 구역임을 확인하고, 시굴조사를 선행한 결과 조선 후기 생활 유구와 백자 편이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기록이 삽 방향을 결정한 전형적인 성공 사례입니다.

성공 사례 2 — 구로구 구로동 공원 조성

구로동 공원 조성 과정에서 1912년과 1920년대 지목 기록을 비교 분석한 결과, 과거 연못과 창고가 있던 자리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시굴조사에서 그 유구가 고스란히 드러났고, 개발 사업자·지자체·문화재 발굴 기관이 협력해 보존에 성공했습니다. 과거의 연못은 지금 공원 속 예술 작품으로 되살아나 방문객에게 100년의 시간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공 사례 3 — 종로구 행촌동 재개발

행촌동 재개발 현장에서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단계적으로 진행한 결과, 조선시대 주거 유구가 연속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물 하나, 담장 기초 돌 하나, 도자기 파편 하나가 모여 조선 생활상을 복원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습니다. 역사 기록을 먼저 검토하고, 단계적으로 조사를 진행한 것이 이 모든 성과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삽을 들기 전에, 기록을 먼저 펼쳐야 하는 이유

세 사례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사 전에 기록을 먼저 확인하고,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충분히 거친 뒤 발굴에 착수했다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지켜지지 않으면, 수백 년의 역사가 단 하루 만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1912년의 도화동 기록도 바로 그 방패막이가 될 수 있습니다.



8. 도화동이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말

1912년 도화동의 김씨, 이씨, 최씨는 자신들의 이름이 113년 뒤에도 누군가에게 읽힐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냥 살았습니다. 해가 뜨면 밭에 나가고, 비가 오면 논두렁을 지키고, 명절이면 조상 무덤 앞에 절을 올리며. 그 평범한 하루하루가 쌓여 도화동이 되었고, 마포구가 되었고, 지금의 서울이 되었습니다.

지금 도화동 거리를 걸을 때 한 번만 발밑을 생각해보세요. 저 빌딩 아래 어딘가에 1912년의 밭고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아스팔트 도로 아래에 이씨 집안의 집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언덕 어딘가에 김씨 집안의 조상 무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그 땅 아래에 113년의 시간이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잠든 시간을 깨우는 일입니다. 그건 단순히 옛날 물건을 찾는 작업이 아닙니다. 이 도시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일이고, 그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예의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흔적을 지키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도화동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땅속 어딘가에 아직 꺼내지 못한 시간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 시간이 세상에 나올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seoulheritage.org의 연구자들은 기록을 펼치고, 땅을 읽으며, 잊힌 이름들을 다시 불러냅니다.



논이 있던 자리에 도로가 생기고,


밭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 아래에 있던 사람들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들은 여전히 이 땅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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