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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동작구 본동의 땅과 사람들, 그리고 문화재 발굴로 이어지는 기억의 기록

목차


  1. 서두 – 시간의 문을 열고 1912년 본동으로

  2. 본동의 집과 대지, 삶이 피어났던 75필지

  3. 수도용지 47,715㎡, 서울의 생명줄

  4. 산과 임야 24,753㎡, 본동의 푸른 지붕

  5. 49,358㎡의 밭, 생존과 공동체의 근간

  6. 국유지 1필지, 국가의 존재를 드러내다

  7.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이씨, 윤씨, 김씨가 만든 마을의 질서

  8. 일본인 소유의 5필지, 강제적 변화의 그림자

  9. 본동에서 보는 서울의 성장과 사회적 맥락

  10.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로 연결되는 과거의 기록

  11. 성공 사례 – 서울에서 발견된 문화재와 본동의 가능성

  12. 마무리 – 과거가 현재와 만날 때, 미래로 이어지는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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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동작구 본동의 땅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서울의 중심지 중 하나인 동작구 본동. 지금은 빼곡한 아파트와 도로, 그리고 상업시설들이 들어서 있지만 1912년 당시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총 133필지, 153,726㎡라는 넓은 땅 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고, 농사를 지으며, 시대의 흐름에 흔들리고 있었다. 단순한 면적의 수치가 아니라, 이 땅에는 사람들의 삶과 국가의 흔적, 그리고 시대적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당시 본동에는 75필지, 31,897㎡ 규모의 집과 대지가 있었다. 지금의 아파트 단지와 달리, 좁은 골목길을 따라 작은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을 것이다. 대문을 열면 바로 밭으로 이어지고, 이웃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공간.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나누며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1필지, 무려 47,715㎡에 달하는 수도용지다. 당시 서울의 수돗물 공급 체계는 매우 중요한 국가적 과제였는데, 본동은 그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도시 인프라의 중심지 역할을 한 셈이다. 수도용지가 존재했다는 것은 단순히 물을 제공하는 기능을 넘어, 본동이 서울의 근대화 과정에 중요한 기여를 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중요한 공간은 임야다. 총 6필지, 24,753㎡ 규모의 산은 본동 주민들에게 쉼터이자 생활 자원이었다. 땔감을 얻고, 약초를 캐고, 아이들은 숲속에서 뛰놀았다. 이 작은 숲과 산은 단순히 자연이 아니라, 공동체의 숨결을 이어주는 공간이었다.


본동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밭이었다. 51필지, 49,358㎡에 달하는 밭은 주민들의 생존 기반이었다. 봄에는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는 김을 매며, 가을에는 수확을 맞이했다. 이 밭에서 나는 곡식과 채소는 가족의 식탁을 채우고, 일부는 장터로 나가 물물교환을 통해 또 다른 삶의 자원을 가져왔다. 밭은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끈이었다.


이 가운데 국유지가 단 1필지 존재했다는 기록도 흥미롭다. 작은 면적일지라도 이는 국가가 본동 내에서 일정한 권리를 갖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행정적 통제의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또한 본동의 토지는 성씨별로 나뉘어 있었다. 이씨가 24필지, 윤씨가 23필지, 김씨가 21필지를 보유하며 마을 내 주요 세력을 형성했다. 토지를 소유한 성씨는 단순히 땅만 가진 것이 아니라, 마을 의사결정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즉, 본동의 토지 구조는 곧 사회적 질서를 의미했다.


그러나 본동의 기록에는 불편한 진실도 함께 자리한다. 일본인들이 5필지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의 서막이 본격화되던 시기,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는 작은 수치로 보일지라도 이후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불씨였다. 본동 역시 이 거대한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처럼 1912년 본동의 기록은 단순한 땅의 분류가 아니라, 당시 사회 구조와 주민들의 삶, 국가의 정책, 그리고 외세의 침투까지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로 이어지는 이야기


오늘날 우리가 이런 기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때문이다.


지표조사는 눈에 보이는 유적과 흔적을 조사하는 단계로, 과거의 삶을 파악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발굴조사는 땅속 깊은 곳까지 파헤쳐 실체를 밝혀내는 작업이다. 본동의 기록은 이러한 조사에서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된다. 예를 들어, 1912년에 밭이 집중적으로 있었던 구역에서는 당시의 농업 도구, 생활 도자기, 토기 등이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또, 수도용지 주변에서는 수도 시설의 흔적이나 근대적 건축 유구가 나올 수 있다.


서울 곳곳에서 진행된 문화재 발굴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예컨대,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 발굴에서는 삼국시대 한성백제의 흔적이 드러났고, 종로 일대 발굴에서는 조선시대 생활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이처럼 기록과 발굴이 만날 때 비로소 역사는 살아난다. 본동 역시 언젠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그 땅 속에 잠든 기억을 드러낼 것이다.




성공 사례와 본동의 가능성


서울 도심에서 발굴된 한 사례를 보자. 한 건설 현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기와 조각은 지표조사를 통해 조선 후기의 건물터임이 밝혀졌고, 이는 해당 지역을 보존구역으로 지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문화재 조사는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자산을 지키는 중요한 일이다. 본동 또한 기록에 따르면 다양한 생활 터전이 얽혀 있었기 때문에, 발굴이 진행된다면 뜻밖의 역사적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




결론적으로, 1912년 동작구 본동의 기록은 단순한 땅의 분류표가 아니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의 삶의 방식, 사회 구조, 국가의 역할, 그리고 시대적 아픔이 응축된 작은 역사책이다. 지금의 아파트 숲과 도로 위에 서 있지만, 그 땅 아래에는 여전히 1912년의 본동이 숨 쉬고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바로 그 숨결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과거를 발굴하고 현재와 연결할 때, 우리는 비로소 미래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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