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동작구 본동의 땅과 사람들, 그리고 문화재 발굴로 이어지는 기억의 기록
- 2025년 9월 30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7일
문화재 지표조사서울 문화유산 발굴
수돗물이 흐르던 그 땅 아래,1912년 본동의 기억— 문화재 지표조사로 깨우는 동작구의 역사
"133필지, 153,726㎡. 이씨·윤씨·김씨 가문의 집터와 밭, 그리고 서울의 생명줄이었던 수도용지 47,715㎡. 1912년 본동의 땅은 한 장의 지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책이었다."
출처: seoulheritage.org키워드: 문화재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 서울문화재발굴기관
목 차
시간의 문을 열고 1912년 본동으로 — 왜 이 기록인가
133필지가 그리는 풍경 — 전체 규모와 도시적 맥락
75필지의 집터 — 골목길과 공동체의 온기
수도용지 47,715㎡ — 서울 근대화의 생명줄
임야 24,753㎡ — 본동의 푸른 지붕과 삶의 자원
51필지의 밭 — 생존과 공동체를 이어준 농경지
국유지 1필지 — 작지만 강력한 국가의 존재감
이씨·윤씨·김씨 — 토지 소유 구조가 보여주는 마을의 질서
일본인 소유 5필지 — 강제적 변화의 그림자
1912년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주는 단서들
서울 발굴 성공 사례 — 기와 조각 하나가 역사를 바꾸다
과거가 현재와 만날 때 — 맺음말
당신이 지금 동작구에서 틀어 쓰는 수돗물의 기원이 1912년 본동의 한 필지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수도용지 1필지, 47,715㎡. 이것이 1912년 본동 토지 기록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숫자다. 지금의 아파트 단지와 도로, 상업 시설이 빼곡히 들어선 동작구 본동이 100년 전에는 서울의 수도 공급 체계를 떠받치는 핵심 거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133필지 153,726㎡의 땅 위에서 이씨와 윤씨, 김씨 가문이 마을을 일구고 살았으며, 51필지의 밭에서 농사를 지었고, 6필지의 임야에서 땔감을 얻었다. 그리고 그 한편에 일본인이 소유한 5필지가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 숫자들을 왜 지금 다시 꺼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오늘 본동에서 개발이 이루어질 때, 그 땅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를 가장 정밀하게 예측하게 해주는 자료가 바로 이 1912년 기록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발굴조사는 이 기록에서 시작된다.

SECTION 01시간의 문을 열고 1912년 본동으로 — 왜 이 기록인가
1912년이라는 해를 다시 떠올려보자.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된 지 2년, 조선 전역의 토지가 일본의 주도로 측량되고 재편되던 시기다. 그 과정에서 생산된 토지조사사업의 기록이 지금 우리가 들여다보는 본동의 자료다. 단순한 행정 문서처럼 보이는 이 기록 안에는 당시 사람들의 삶, 국가의 정책, 외세의 침투가 층층이 쌓여 있다.
동작구 본동은 지금 서울의 중심 주거지역 중 하나다. 하지만 1912년의 본동은 집보다 밭이 많고, 산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서울 시내 수도 공급의 한 축을 담당하던 특수한 공간이었다. 이 독특한 구성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본동을 다른 어느 동네보다 복합적이고 흥미로운 조사 대상으로 만든다.
"1912년 동작구 본동의 기록은 단순한 땅의 분류가 아니라, 당시 사회 구조와 주민들의 삶, 국가의 정책, 그리고 외세의 침투까지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 seoulheritage.org
SECTION 02133필지가 그리는 풍경 — 전체 규모와 도시적 맥락
1912년 본동의 전체 규모는 133필지, 153,726㎡였다. 앞서 살펴본 양평동의 467필지나 한남동의 750필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지만, 구성의 다양성은 놀랍도록 풍부하다. 대지, 수도용지, 임야, 밭, 국유지가 한 공간에 공존하면서 각각 전혀 다른 역할을 했다.
133필지전체 필지
153,726㎡
75필지대지(집터)
31,897㎡
51필지밭
49,358㎡
6필지임야
24,753㎡
1필지수도용지
47,715㎡
1필지국유지
행정·공공
이 구성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수도용지다. 고작 1필지인데 면적이 47,715㎡로 전체의 31%를 차지한다. 단 하나의 필지가 본동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용지가 얼마나 특수한 목적으로 조성되었는지를 말해준다. 수도용지의 존재는 본동이 다른 동네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며,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구역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다.
SECTION 0375필지의 집터 — 골목길과 공동체의 온기
75필지, 31,897㎡의 대지. 133필지 중 절반 이상이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던 터전이었다. 지금의 아파트 단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을 것이다. 대문을 열면 바로 이웃의 마당이 보이고, 저녁이 되면 각 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을 것이다.
75필지라는 집터 밀도는 본동이 상당히 인구가 조밀한 마을이었음을 보여준다. 전체 133필지 중 56%가 대지였다는 것은, 이 동네가 농업 중심이라기보다 주거 공동체의 성격이 강했음을 의미한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75필지 구역은 생활 유구가 가장 집중적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높은 핵심 구역이다. 기와 조각, 토기 파편, 온돌과 아궁이 구조, 우물 흔적, 소형 저장 구덩이 같은 것들이 이 구역에서 나올 수 있다.

SECTION 04수도용지 47,715㎡ — 서울 근대화의 생명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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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1필지가 전체 면적의 31%를 차지하다
수도용지 1필지, 47,715㎡. 이 숫자 하나가 1912년 본동을 다른 모든 동네와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만든다. 서울의 근대적 수도 공급 체계에서 본동이 담당한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를 이 한 필지가 고스란히 증명한다.
근대적 상수도 시스템이 서울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08년이었다. 뚝섬에 정수장이 건설되고 서울 곳곳에 수도관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인프라 사업에서 본동의 수도용지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저수조나 배수 시설, 수도 관련 구조물의 부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수도용지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갖는 의미는 독특하다. 전통적인 생활 유구가 아닌 근대 도시 인프라의 잔해가 나올 수 있는 구역이기 때문이다. 콘크리트나 벽돌 구조물의 기초, 금속 배관의 흔적, 근대 건축 방식의 잔해가 토층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조선 전통 생활 유구와 근대 인프라가 같은 땅에서 교차하는 이 복합적인 층위가 본동 발굴 조사를 가장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다.
수도용지 주변 구역에서는 단순한 매장문화재가 아닌 근대 산업 유산의 관점에서도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조선 후기의 생활 유구 위에 근대 수도 시설이 겹쳐진 층위는 서울의 근대화 과정을 가장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 될 수 있다.
SECTION 05임야 24,753㎡ — 본동의 푸른 지붕과 삶의 자원
6필지, 24,753㎡의 임야는 본동 주민들에게 단순한 자연이 아니었다. 땔감을 얻는 곳이었고, 약초를 캐는 곳이었으며, 아이들이 뛰놀던 놀이터였다. 봄이 되면 나물을 뜯으러 올라갔고, 가을에는 도토리와 밤을 주웠다. 비가 올 때는 마을을 지켜주는 방패막이 되었고, 겨울에는 눈이 쌓여 마을의 경계를 부드럽게 감쌌다. 이 작은 숲과 산이 없었다면, 본동의 생활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임야 구역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분묘 유구와 제의 관련 시설이 집중될 가능성이 높은 구역으로 분류된다. 산자락을 따라 자리 잡은 묘역,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당집의 흔적, 나무를 심고 관리하던 공간의 경계 표시 같은 것들이 단서로 나타날 수 있다. 24,753㎡의 임야가 어느 방향으로 뻗어 있었는지를 고지도와 GIS 분석으로 재구성하면, 발굴 조사에서 이 구역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다.
SECTION 0651필지의 밭 — 생존과 공동체를 이어준 농경지
51필지, 49,358㎡의 밭. 집터(31,897㎡)보다 넓은 면적이 밭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본동 주민들의 생활이 여전히 농업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 김을 매며, 가을에 수확을 거두는 농업의 리듬이 마을의 달력이었다.
밭은 단순히 식량 생산지가 아니었다. 이웃과 수확을 나누는 공간이었고, 계절마다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협동의 장이었으며, 시장에 내다 팔아 생활을 영위하는 경제의 기반이었다. 이 51필지의 밭이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집터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파악하면 시굴조사의 트렌치 배치가 훨씬 정밀해진다. 밭과 집터의 경계 구간은 생활 유구가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SECTION 07국유지 1필지 — 작지만 강력한 국가의 존재감
국유지는 단 1필지였다. 133필지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 필지가 갖는 의미는 가볍지 않다. 1912년이라는 시점의 국유지는 총독부가 직접 관리하는 땅이었다. 단 1필지라도 국가의 행정 권력이 본동 안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국유지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기록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위치와 면적을 다른 자료와 교차 분석하면 추정이 가능하다. 도로 부지였을 수도 있고, 행정 시설의 예정지였을 수도 있으며, 수도용지와 연결된 공공 인프라의 일부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 1필지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SECTION 08이씨·윤씨·김씨 — 토지 소유 구조가 보여주는 마을의 질서
토지를 소유한 사람의 이름은 그 동네가 어떤 공동체였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1912년 본동에서는 이씨가 24필지, 윤씨가 23필지, 김씨가 21필지를 소유했다. 세 성씨가 거의 비슷한 규모로 마을 토지를 나눠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본동이 특정 가문의 독점적 지배가 아닌 세 성씨가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는 마을이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인 소유24필지이씨 가문
마을 핵심 세력
한국인 소유23필지윤씨 가문
토착 공동체
한국인 소유21필지김씨 가문
토착 공동체
국유지1필지총독부 관리
행정·공공
일본인 소유5필지침투 시작
식민 경제
세 성씨가 각각 20필지 안팎의 토지를 균형 있게 보유했다는 구조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어느 한 가문이 독점하지 않고 여러 성씨가 섞여 있는 구역에서는 다양한 생활 방식의 층위가 나타날 수 있다. 건축 방식, 사용된 토기의 종류, 음식 문화의 흔적 등이 성씨별로 미세하게 달랐을 수 있고, 이 차이가 발굴 현장에서 하나의 흥미로운 패턴을 만들어낸다.
SECTION 09일본인 소유 5필지 — 강제적 변화의 그림자
역사적 맥락 — 1910년 한일병합 직후의 토지 변동
한일병합 후 불과 2년이 지난 1912년, 이미 본동에 일본인 소유 토지가 5필지나 존재하고 있었다. 133필지 중 3.8%에 해당하는 이 수치는 숫자로는 작아 보이지만, 동작구처럼 서울 외곽의 소규모 주거 마을에까지 일본인의 토지 매입이 진행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식민지 경제 침투의 속도와 범위를 보여준다. 이 5필지가 어느 위치에 분포했는지, 어떤 용도로 활용되었는지를 추적하면 당시 일본인의 본동 내 활동 양상이 드러날 수 있다.
이씨, 윤씨, 김씨 가문이 세대를 이어 일군 마을 안에 일본인의 소유지가 파고든 모습은, 당시 본동 주민들에게 얼마나 낯설고 불안한 변화였을지를 짐작하게 한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5필지의 위치를 특정하면, 일제강점기 초기 건축 방식이나 생활 유물의 흔적이 집중될 구역이 드러날 수 있다. 전통 한국식 건축과 근대 일본식 건축이 인접해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그 경계가 발굴 현장에서 뚜렷한 층위 변화로 나타날 수 있다.
SECTION 101912년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주는 단서들
133필지의 기록이 지표조사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살펴보자. 본동은 수도용지라는 독특한 요소 때문에 다른 동네보다 더 복합적인 조사 설계가 요구된다.
대지 75필지 구역 — 생활 유구 집중 구역
기와 조각, 토기 파편, 온돌 및 아궁이 구조, 우물 흔적이 집중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씨·윤씨·김씨의 연속 필지 구간에서 생활 층위의 연속성이 가장 잘 보존되었을 것이다.
수도용지 1필지 구역 — 근대 인프라 유구
콘크리트·벽돌 구조물 기초, 금속 배관 흔적, 근대 건축 방식의 잔해가 나올 수 있다. 전통 생활 유구와 근대 인프라가 교차하는 복합 층위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임야 6필지 주변 — 분묘 유구와 제의 시설
산자락을 따라 자리 잡은 묘역, 마을 제의 공간의 흔적, 묘비 조각과 제기류가 확인될 수 있다. 임야 경계선과 대지 경계선이 만나는 구간이 우선 조사 대상이다.
밭 51필지와 대지의 경계 — 생활 유구 집중 구간
탄화된 씨앗, 농기구 파편, 밭두렁 경계 흔적이 토양층 분석으로 확인될 수 있다. 밭과 집터의 경계 구간이 시굴조사 트렌치 배치의 첫 번째 기준이 된다.
일본인 소유 5필지 구역 — 근대 건축 층위
일제강점기 초기 건축 방식의 기초 잔해, 일본식 생활 물품 파편이 나올 수 있다. 전통 한국식과 근대 일본식 건축이 인접한 층위 구조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SECTION 11서울 발굴 성공 사례 — 기와 조각 하나가 역사를 바꾸다
종로 일대 발굴 — 기와 조각에서 보존구역으로
서울 도심의 한 건설 현장에서 공사 중 발견된 기와 조각이 지표조사를 촉발했고, 그 결과 조선 후기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이 발견은 해당 지역을 보존구역으로 지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발굴된 건물터는 역사 해설 공간으로 통합되어 지역 정체성을 강화하는 자산이 되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단 하나다. 기와 조각 하나가 도시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만드는 것이 사전 문화재 지표조사다.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발굴 — 삼국시대 한성백제의 귀환
풍납토성 발굴은 서울 도심에서 삼국시대 한성백제의 흔적이 얼마나 풍부하게 남아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시작된 이 발굴은 결국 서울 역사의 시계를 수백 년 더 거슬러 올려놓았다. 본동의 수도용지와 집터, 임야가 교차하는 복합적인 구성은 이런 예상치 못한 발견의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땅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서울이 있다.
이 두 사례가 공통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사전 지표조사가 충실하게 이루어진 현장은 발굴 결과가 더 정밀하고, 역사 자산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으며, 결과적으로 도시의 품격을 높인다는 것이다. 본동에서 개발이 이루어질 때 이 교훈이 반드시 적용되어야 한다.
SECTION 12과거가 현재와 만날 때 — 맺음말
1912년 동작구 본동의 기록은 단순한 토지 대장이 아니다. 이씨와 윤씨, 김씨 가문이 골목길을 공유하며 살았던 75필지의 집터가 있었고, 51필지의 밭에서 계절마다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나눴으며, 6필지의 임야에서 땔감을 구하고 아이들이 뛰놀았다. 그리고 1필지의 수도용지가 서울 전체의 생명줄 역할을 묵묵히 담당하고 있었다.
그 위에 일본인의 소유지 5필지가 조용히 자리 잡기 시작했고, 1필지의 국유지가 총독부의 존재를 알렸다. 이 모든 층위가 지금 본동의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잠든 기억을 조심스럽게 깨우는 작업이다. 과거를 발굴하고 현재와 연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도시가 어디서 왔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해 위에서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지금 동작구 어딘가에서 틀어 쓰는 수돗물이1912년 본동의 그 47,715㎡ 위를 지나온 것처럼,우리의 오늘은 알게 모르게100년 전 누군가의 삶 위에 서 있다.그 사실을 아는 것,그리고 그 기억을 지켜내는 것.그것이 문화재 지표조사가 우리에게 부탁하는 일이다.

과거를 발굴하는 사람이더 나은 미래를 설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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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참고: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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