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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동작구 사당동, 땅속에 묻힌 이야기 – 서울 문화유산 발굴이 밝혀낸 113년 전의 기록

목차

  1. 첫 삽을 뜨던 순간 – 땅 아래서 들려온 목소리

  2. 1912년 사당동의 풍경 – 논, 밭, 산, 그리고 마을

  3. 사당동을 이뤘던 사람들 – 성씨로 본 토지 소유의 흔적

  4. 낯선 이름, 프랑스인의 땅 – 제국과 교류의 그림자

  5. 문화재발굴과 지표조사, 그리고 오늘의 서울

  6. 발굴조사원이 전한 현장의 온도 – 한 삽의 무게

  7. 유물발굴 성공사례로 본 서울의 문화유산 복원

  8. 우리가 지켜야 할 이유 – 기억, 그리고 감동의 결

  9.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당신이 오늘 걷고 있는 그 길 아래, 113년 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서울 동작구 사당동. 지금은 번화한 주거지와 도로가 얽혀 있는 이곳은, 1912년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삽 한 번이 닿자 흙 아래서 나타난 흔적들. 그것은 단순한 땅이 아니라 ‘살아있던 서울’이었다.

누군가는 밭을 갈고, 누군가는 논을 지키며, 누군가는 마을을 이루던 자리.

그리고 지금, 문화재발굴조사원들이 그 위를 다시 걸으며 잊힌 시간을 되살리고 있다.


1. 첫 삽을 뜨던 순간 – 땅 아래서 들려온 목소리

1912년의 서울은 지금보다 훨씬 조용하고, 훨씬 인간의 손길이 깊게 닿아 있던 도시였다.

사당동 일대의 발굴조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오래된 지도 한 장과 몇 줄의 기록에서였다.

“700필지, 1,849,327㎡.”

숫자만 봐도 어마어마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의 숨결이 녹아 있었다.

유적발굴 현장에서 삽이 흙을 가를 때마다 들려오는 ‘딱’ 하는 소리, 그것은 단단한 돌이 아니라 과거의 신호였다.

문화재발굴조사원들은 그렇게 한 삽, 한 삽을 뜨며 과거로 내려갔다.

그들이 찾은 것은 단순한 유물발굴의 결과가 아니라, 도시의 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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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12년 사당동의 풍경 – 논, 밭, 산, 그리고 마을

당시 사당동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넓은 들판과 산이 맞닿은 곳에 논과 밭이 촘촘히 자리했다.

자료에 따르면, 논이 293필지, 1,037,201㎡로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는 단순한 농업 지역이 아니라 서울의 식량 기반을 지탱한 중심지였다는 뜻이다.

밭 또한 331필지, 484,868㎡로 광범위하게 분포했다.

이곳에서 자란 곡식은 한양 도성 안까지 실려 들어갔다.

한편, 임야 176,552㎡는 마을의 방패이자 생태의 중심이었다.

이 산자락에서 나무를 베고, 땔감을 모으며 사람들은 살아갔다.

그리고 대지는 단 33필지, 61,537㎡에 불과했다.

즉, 사당동은 주거보다 농업 중심의 생활공간이었다.

오늘날의 빽빽한 주택가와 비교하면, 그 시절의 사당동은 하늘이 더 넓고, 바람이 더 깊게 불던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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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당동을 이뤘던 사람들 – 성씨로 본 토지 소유의 흔적

사당동은 단순한 땅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땅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씨가 144필지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했다.

그 뒤를 강씨(114필지), 정씨(88필지), 김씨(76필지), 홍씨(43필지)가 이었다.

이 이름들은 단지 개인의 재산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동체의 중심이었고, 마을의 구조를 형성한 사람들이었다.

한 집안의 대지는 밭과 논으로 이어지고, 산으로 닿으며, 공동체의 경계를 만들었다.

이 토지 구조는 오늘날 도시의 구획선에도 미묘한 흔적을 남겼다.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이들 마을의 중심이 어디였는지도 점차 밝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문화재발굴의 묘미다. 단순히 유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흔적’을 찾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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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낯선 이름, 프랑스인의 땅 – 제국과 교류의 그림자

흥미롭게도, 사당동에는 외국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프랑스인이 19필지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2년이라면, 일제강점기의 초입.

서울의 외국인 토지 소유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는 단순한 투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당시 프랑스는 조선에서 외교·종교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었다.

사당동 일대의 일부 토지는 종교 단체나 외국 선교사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사당동의 토지 구조는 이미 그 시절부터 국제적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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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화재발굴과 지표조사, 그리고 오늘의 서울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는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캐내는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시의 재개발, 도로 확장, 건축 공사 속에서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과거를 지키는 마지막 방패이자, 미래를 위한 데이터 축적이다.

특히 사당동처럼 오래된 마을 구조를 가진 지역에서는,

지표조사를 통해 건물 아래 묻힌 생활층과 도로 흔적이 재확인된다.

이는 건설 과정에서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문화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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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발굴조사원이 전한 현장의 온도 – 한 삽의 무게

한 발굴조사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역사를 깨우는 일입니다.”

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너진 지층 속에서 작은 조각 하나를 찾기 위해 하루를 보낸다.

그 조각 하나가 서울의 역사를 뒤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발굴작업은 고된 체력과 세밀한 감각을 동시에 요구한다.

현장에서 그들의 손끝은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더듬는다.

그 경계 위에 우리가 서 있다.


7. 유물발굴 성공사례로 본 서울의 문화유산 복원

서울 곳곳에서는 이미 수많은 유물발굴 성공사례가 존재한다.

광화문광장 재정비 과정에서 출토된 조선시대 도로 흔적,

종로 일대의 한양도성 잔재,

그리고 신길동 유적발굴에서 드러난 선사시대 토기층까지.

이 모든 결과는 철저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덕분이다.

사당동의 조사 또한 앞으로 이러한 성과로 이어질 것이다.

한 필지의 흔적이, 한 사람의 이름이,

서울의 또 다른 시간을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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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우리가 지켜야 할 이유 – 기억, 그리고 감동의 결

사당동의 700필지는 단순한 토지 데이터가 아니다.

그 안에는 이름이 있고, 땀과 눈물이 있다.

이씨, 강씨, 정씨,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삶이 지금의 도로, 골목, 건물 속에 녹아 있다.

문화재발굴은 과거를 캐내는 일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다.

이 일에 참여하는 모든 발굴조사원과 연구원들의 손끝에서

서울의 기억은 매일 새롭게 깨어난다.

언젠가 사당동의 또 다른 삽자루 아래서

한 점의 유물이 빛을 발할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과거와 다시 연결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우리가 지키는 것은 돌이 아니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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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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