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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동작구 동작동,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

  • 2025년 9월 19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7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리포트

춘향전의 이몽룡도 건넌 나루,1912년 동작동이 숨겨온 땅의 이야기

306필지·828,645㎡. 조선 최대 남쪽 나루터였던 동재기나루 곁에서 이씨·고씨·길씨가 살아가던 마을, 그리고 그 땅을 노린 일본인과 프랑스인의 발자국까지. 오늘날 국립현충원이 된 그 땅의 100년 전 이야기를 마주한다.

306

총 필지 수

828,645

총 면적(㎡)

79

이씨 소유 필지

68

프랑스인 소유 필지

목차 · Contents

  • 시작 동작동, 1912년의 풍경을 그려보다

  • 01 논과 밭, 삶을 지탱하던 땅의 의미

  • 02 집과 터전, 대지의 기록 속에 남은 생활상

  • 03 무덤과 사사지, 죽음과 신앙의 흔적

  • 04 임야와 잡종지, 다양한 활용의 공간

  • 05 연못과 지소, 물이 머물던 자리

  • 06 동작동 사람들,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07 프랑스인 68필지의 충격적 진실

  • 08 일본인과 법인의 땅, 제국주의의 그림자

  • 09 1912년 동작동이 국립현충원이 되기까지

  • 10 문화재 발굴·지표조사로 본 동작동의 가치

  • 마무리 동작동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소설 춘향전에서 암행어사 이몽룡이 남원으로 가는 길에 건넌 그 나루, 바로 동재기나루가 있던 곳이 1912년의 동작동이었다.

조선시대 내내 한강 남쪽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나루로 꼽혔던 동재기나루(동작진). 호남과 호서 지방의 선비와 과객들이 서울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이 나루를 건너야 했다. 겸재 정선의 그림 '동작진'에는 마을 아래 강가에 근 20척의 배들이 정박한 장면이 담겨 있다. 그 나루터 바로 옆 언덕 위 마을이 바로 동작동이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동작동의 토지 기록에는 총 306필지, 828,645㎡의 데이터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 시리즈에서 처음 등장하는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일본인보다 훨씬 많은 프랑스인의 토지 68필지. 왜 이 마을에 프랑스인의 흔적이 이렇게 깊었을까.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시작하며 — 동작동, 1912년의 풍경을 그려보다

동작(銅雀)이라는 이름은 '동재기'에서 왔다. 지금의 동작대교 남단에 검붉은 구리빛(銅) 돌이 많이 분포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과천·수원·평택을 거쳐 호남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너던 교통의 요지였다. 임진왜란 때는 동작부교(銅雀浮橋)가 설치돼 군사 요충지 역할까지 했다.

1912년의 동작동은 총 306필지, 828,645㎡. 논과 밭, 집터, 무덤, 임야, 잡종지, 연못이 어우러진 마을이었다. 지금 이 땅에는 국립서울현충원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단종에게 충절을 바쳤던 사육신의 제사를 모시던 육신사(六臣祠)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땅은 역사적 의미를 품어온 공간이었다.

1912년 동작동 토지 현황 — 핵심 통계

총 필지 수306필지

총 면적828,645㎡ (약 25만 평)

밭 (전)165필지 / 302,259㎡ (36.5%)

논 (답)51필지 / 266,923㎡ (32.2%)

잡종지30필지 / 194,536㎡ (23.5%)

대지 (집터)51필지 / 44,344㎡ (5.4%)

임야6필지 / 17,163㎡

사사지1필지 / 2,033㎡

분묘지1필지 / 363㎡

지소(연못)1필지 / 1,021㎡

프랑스인 소유68필지 (!)

일본인 소유11필지

법인 소유5필지


01 논과 밭, 삶을 지탱하던 땅의 의미



1912년 동작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밭의 압도적인 비중이다. 165필지, 302,259㎡. 전체의 36.5%로 가장 넓다. 논(266,923㎡)보다 필지 수는 훨씬 많지만 면적이 비슷하다는 뜻은, 밭이 작은 규모로 촘촘하게 나뉘어 있었다는 의미다. 마을 곳곳에 개인 규모의 소규모 경작지들이 산재해 있었던 것이다.

논은 51필지, 266,923㎡로 면적으로는 두 번째지만 단위 규모가 크다. 동작동 언덕 아래 한강을 끼고 있는 저지대에 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쌀은 여전히 귀한 작물이었고, 논의 규모가 큰 것은 이 논들이 작은 개인보다 비교적 여유 있는 토지 소유자들에게 집중되어 있었음을 암시한다.

밭에서는 보리, 콩, 고구마, 배추, 무 같은 작물들이 자랐다. 가파른 관악산 기슭과 한강변 사이의 구릉지 지형에서 논보다 밭이 더 많이 분포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 밭과 논이 동작동 사람들의 밥상을 채웠고, 남는 것은 동재기나루 인근 장터에서 거래됐을 것이다.


02 집과 터전, 대지의 기록 속에 남은 생활상

집터로 기록된 대지는 51필지, 44,344㎡다. 전체 면적의 5.4%로 논과 밭에 비해 작지만, 이 51필지의 집터 위에서 동작동 사람들의 실제 생활이 펼쳐졌다. 초가집이 다닥다닥 모인 골목, 기와집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 중심부. 한강이 보이는 동작동 언덕 위의 집들에서는 나루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겸재 정선의 그림 속 동작 마을은 "서울 세가(世家)들의 별장으로 가득 차 있었던 듯 번듯한 기와집들이 즐비"했다고 전해진다. 풍수적으로도 관악산 줄기가 병풍처럼 감싸고 앞으로 한강이 흐르는 이 지형은 예로부터 명당으로 손꼽혔다. 1912년 동작동의 집터들 역시 그런 지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날 이 자리에서 문화재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조선시대 기와집의 흔적이 쏟아져 나올 가능성이 높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동작동 사람들은 매일 저녁 나루터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는 것을 바라보며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03 무덤과 사사지, 죽음과 신앙의 흔적



동작동에는 분묘지 1필지 363㎡, 사사지 1필지 2,033㎡가 기록되어 있다. 분묘지는 크기가 작지만, 그 의미는 크다. 마을 공동체가 조상을 모시던 특별한 땅이었다. 한식(寒食)과 추석이면 마을 사람들이 이 언덕을 찾아 벌초를 하고 제물을 올렸을 것이다.

사사지 2,033㎡는 작은 절이나 신앙 시설이 있던 공간이었다. 분묘지보다 면적이 훨씬 크다는 것은, 이 종교 공간이 마을 공동체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 육신사(六臣祠)가 있었던 이 지역의 역사적 성격을 감안하면, 1912년의 사사지도 단순한 절터가 아니라 마을의 정신적 중심 공간이었을 것이다. 문화재 발굴에서 사사지 흔적이 발견되면 당시 종교 활동과 공동체 의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04 임야와 잡종지, 다양한 활용의 공간

임야 6필지, 17,163㎡. 관악산 기슭에 위치한 동작동이니만큼 산림 지대가 있었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임야는 마을 사람들에게 나무와 땔감, 약초를 제공하는 생존의 창고였다. 동작동의 기울어진 지형을 감안하면, 임야는 마을 뒤편 산기슭에 넓게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잡종지는 30필지, 194,536㎡로 면적이 상당히 크다. 전체의 23.5%다. 이 광대한 잡종지는 여러 용도로 활용됐을 것이다. 나루터 인근의 물류 공간이었을 수도 있고, 장터가 섰던 빈터였을 수도 있으며, 사람들이 오가던 길과 그 주변 공간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특히 동작나루라는 교통 요충지 곁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이 잡종지는 단순한 빈 땅이 아니라 물자와 사람이 오가는 활기찬 공간이었을 것이다.


05 연못과 지소, 물이 머물던 자리

지소(연못) 1필지, 1,021㎡. 이 연못은 동작동에서 유일한 수리(水利) 시설 기록이다. 1,021㎡라면 제법 넓은 연못이다. 농업용수를 보충하는 저수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동시에 마을 사람들의 생활용수 공급처이기도 했을 것이다.

연못은 마을의 공동 자원이었다. 여름이면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농번기에는 논으로 물을 대는 수원지가 됐으며, 가뭄에는 마을 전체가 이 연못 하나에 의지했다. 오늘날 발굴조사에서 연못 흔적이 발견되면 당시 마을 구조와 생활 환경을 이해하는 핵심 자료가 된다. 1,021㎡의 이 연못 자리는 지금 어떤 땅이 되어 있을까.


06 동작동 사람들,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1912년 동작동의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을 보면, 이 마을의 구조가 명확히 드러난다.

1912년 동작동 — 성씨별 토지 소유 필지 수

이씨

79필지

김씨

24필지

고씨

18필지

길씨

16필지

강씨

14필지

임씨

14필지

이씨 79필지. 압도적인 1위다. 2위 김씨 24필지와의 차이가 3배 이상이다. 동작동은 이씨 가문이 강하게 주도하던 마을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씨 가문이 마을의 혼례와 제사, 공동체 의사 결정을 주도했을 것이다.

동시에 고씨, 길씨, 강씨, 임씨 같은 비교적 드문 성씨들이 눈에 띈다. 이는 동재기나루라는 교통 요충지 특성상, 각 지방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음을 보여준다. 나루터 마을은 특정 씨족이 독점하기보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동작동도 그런 마을이었다.


07 프랑스인 68필지의 충격적 진실

왜 동작동에 프랑스인 68필지가? — 병인박해와 절두산, 그리고 선교사들

1866년 병인박해로 수천 명의 천주교 신자가 처형됐다. 한강변과 서강 일대에서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고,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에 활발히 들어왔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선교 활동이 합법화되면서 프랑스 교단들은 한국 곳곳에 토지를 취득했다. 동작동의 68필지는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관악산 기슭의 조용하고 넓은 이 땅은 당시 선교 기지나 묘지, 수도원 부지로 매력적인 후보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동작동 토지 기록에서 가장 충격적인 숫자는 프랑스인 소유 68필지다. 일본인 11필지의 6배가 넘는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다른 어느 동네에서도 이렇게 많은 외국인 소유지는 없었다. 전체 306필지 중 22%가 넘는다.

이 68필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유력한 해석은 천주교 관련 기관의 토지다. 19세기 말 조선에 들어온 파리외방전교회(MEP) 소속 프랑스 선교사들은 서울 곳곳에 광대한 토지를 취득했다. 동작동처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언덕, 관악산 기슭의 자연환경은 수도원이나 묘지, 선교 거점으로 이상적이었다. 실제로 당시 외국 선교 단체들은 순교지 인근에 기념 시설을 세우거나 공동묘지를 조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68필지. 이 숫자 하나가 1912년 동작동이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었음을 웅변한다. 이미 이 땅은 국제적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지금도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08 일본인과 법인의 땅, 제국주의의 그림자

프랑스인 68필지에 가려져 있지만, 일본인의 11필지도 결코 가볍지 않다. 1912년은 일제 강점이 시작된 지 2년. 동작동 같은 서울 외곽의 마을에까지 일본인 소유지가 11필지나 된다는 것은, 식민지 경제 구조의 침투가 이미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법인 소유 5필지도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 법인 형태로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던 단체는 일본계 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 또는 종교 법인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 5필지 역시 식민지 경제 구조와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인 11필지와 프랑스인 68필지, 법인 5필지를 합치면 84필지. 전체의 27%가 넘는 땅이 조선인 개인이 아닌 외부 세력의 손에 있었다. 1912년 동작동 사람들이 이 현실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지, 그 무거움이 숫자를 통해 전해진다.


09 1912년 동작동이 국립현충원이 되기까지

1912년 → 2026년, 동작동의 100년 변화

1912년 논·밭·집터가 펼쳐진 동작동 일대는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됐다. 한국전쟁 이후 1953년 이 땅이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되고 1954년 착공, 1955년 국군묘지로 개장했다.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고 1996년 국립현충원, 2006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름이 바뀌며 오늘에 이른다. 1912년 이씨가 79필지를 경작하던 그 땅에 지금은 20만 명이 넘는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1912년의 동작동이 오늘날 국립서울현충원이 됐다는 사실은 단순한 역사의 우연이 아니다. 조선시대 육신사가 있던 이 땅에는 이미 '충절'의 기억이 깃들어 있었다. 겸재 정선이 그림으로 남긴 이 아름다운 지형, 관악산 능선이 병풍처럼 감싸고 한강이 앞을 흐르는 이 자리는 예부터 명당으로 손꼽혔다.

그 땅에 1912년 이씨 가문이 79필지를 경작했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68필지를 보유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6.25 전쟁의 상흔 위에 나라를 위해 스러져 간 영령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한 장소가 품어온 역사의 켜가 이렇게 깊다.


10 문화재 발굴·지표조사로 본 동작동의 가치



1912년 동작동의 토지 기록은 오늘날 이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질 때 가장 먼저 참조해야 하는 자료다. 어느 방향에 논이 있었는지, 집터는 어디에 집중되었는지, 사사지와 분묘지는 어느 위치였는지를 알면 발굴 방향을 미리 설정할 수 있다.

특히 프랑스인 68필지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만약 이 68필지가 선교 단체 소유였다면, 그 지층에서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서양식 건축 재료나 종교 관련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 근대사에서 외국 선교사들의 역할을 물질 문화 측면에서 재조명하는 중요한 발굴이 될 수 있다.

국비 지원 발굴조사 — 소규모 공사도 신청 가능

동작동처럼 역사성이 풍부한 지역에서 건축이나 토목 공사를 진행할 때는 사전 문화재 지표조사를 거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가유산청의 국비 지원 발굴조사 제도를 이용하면 소규모 공사도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에서 지역별 발굴조사 의뢰 방법을 확인하세요.


마무리 — 동작동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1912년 동작동의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이씨 가문이 79필지를 일구던 땅, 고씨와 길씨와 강씨가 나란히 살던 골목, 프랑스 선교사들이 보유한 광대한 68필지,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운 11필지. 이 모든 것이 한 마을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역사는 기록되지 않으면 잊히고, 발굴되지 않으면 사라진다. 동작동의 땅속에는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 조선시대 기와 파편, 사사지의 흔적, 나루터 주변의 생활 유물들이 언제 세상에 나올 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바로 문화재 발굴조사이자 지표조사의 역할이다.

1912년 동작동에서 나루터 쪽으로 걸어가던 이씨 가문 사람의 발자국, 그 언덕 위에서 함께 살던 고씨와 길씨 가문 이웃의 이야기. 그 발자국 위에 지금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춘향전의 이몽룡이 건넌 그 나루, 겸재 정선이 붓으로 담은 그 강변 마을. 동작동은 단순한 땅이 아니라 한국 역사의 축소판이었다.

오늘 동작역에서 내려 현충원 쪽으로 걷는다면, 잠깐 멈춰 그 땅이 품어온 수백 년의 이야기를 떠올려보길 바란다. 땅은 기억한다. 우리가 기억해줄 때까지, 끝없이 기다리며.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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