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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동작구 동작동,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

목차

1. 동작동, 1912년의 풍경을 그려보다

2. 논과 , 삶을 지탱하던 땅의 의미

3. 집과 터전, 대지의 기록 속에 남은 생활상

4. 무덤과 사사지, 죽음과 신앙의 흔적

5. 임야와 잡종지, 다양한 활용의 공간

6. 연못과 지소, 물이 머물던 자리

7. 동작동 사람들,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8. 법인과 외국인의 , 변화의 조짐

9. 일본인과 프랑스인 소유지, 제국주의의 그림자

10. 오늘날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로 동작동의 가치

11. 서울 지역 문화유산 조사와 성공 사례

12. 동작동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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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 동작동의 과거를 기록한 한 장의 문서가 있다. 1912년,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의 동작동은 306필지, 총 828,645㎡라는 꽤 넓은 면적을 가진 마을이었다. 오늘날 빽빽한 아파트 단지와 도로로 가득한 도시의 풍경을 떠올리면, 당시의 동작동은 상상하기 어려운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당시 땅의 용도와 소유 현황을 살펴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는지 생생히 알 수 있다.


당시 동작동의 땅은 논, 밭, 집터, 무덤, 임야, 잡종지, 연못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땅은 곧 사람들의 삶이었고, 가족의 터전이었으며, 때로는 권력과 외세의 그림자가 드리운 공간이기도 했다. 오늘은 1912년 동작동의 땅과 사람들의 기록을 따라가 보며,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의 의미까지 연결해보려 한다.



2. 논과 , 삶을 지탱하던 땅의 의미


1912 동작동에서 논은 51필지, 266,923㎡에 달했다. 논은 단순한 경작지가 아니라, 가족의 밥상을 책임지는 삶의 근간이었다. 물이 풍부하지 않으면 벼농사를 이어가기 힘들었기에, 논은 마을의 생명줄과도 같았다.


하지만 동작동에서 비중을 차지한 것은 밭이었다. 165필지, 302,259㎡의 밭은 채소, 곡물, 다양한 작물을 길러내는 곳이었다. 밭은 논보다 관리가 수월해 서민들이 손쉽게 경작할수 있었고, 이를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오늘날 우리가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과거 농경지 흔적을 발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삶의 터전이 땅속 깊숙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3. 집과 터전, 대지의 기록 속에 남은 생활상


동작동에는 51필지, 44,344㎡의 대지가 있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던 터전이었다. 지금처럼 고층 건물이 아니라 초가집이나 기와집이 다닥다닥 모여 있었을 것이다. 대지의 분포를 보면, 마을이 형성된 중심지가 어디였는지, 사람들의 생활 범위가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있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집터 흔적은 매우 중요한 단서다. 기와 조각, 토기, 생활도구 하나만 발견되어도 당시 생활상을 복원할 있기 때문이다. 동작동의 대지는 단순한 땅의 크기가 아니라, 안에 담긴 사람들의 일상 기록이자 생활사의 증거라 있다.



4. 무덤과 사사지, 죽음과 신앙의 흔적


동작동에는 1필지 363㎡의 분묘지가 있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조상을 모시던 공간이다. 무덤은 단순히 시신을 묻는 장소가 아니라, 가족과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며 조상을 기리는장소였다.


또한 1필지 2,033㎡의 사사지는 종교적 성격을 지닌 공간이었다. 절이나 제단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동네 주민들이 모여 기도와 의례를 올렸을 것이다. 이는 동작동이 단순히 농경지 마을을 넘어 신앙과 공동체 의식이 살아 있던 마을이었음을 보여준다. 문화재 발굴에서 사사지흔적이 발견되면 당시 종교 활동과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5. 임야와 잡종지, 다양한 활용의 공간


동작동에는 6필지, 17,163㎡의 임야가 있었다. 숲과 산은 단순한 경관이 아니라 나무, 땔감, 약초를 얻을 있는 자원 공간이었다. 특히 임야는 농사 외에도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해주민들의 생존을 지탱했다.


또한 30필지, 194,536㎡의 잡종지가 있었다. 잡종지는 규정된 용도에 속하지 않는 땅을 의미하는데, 공터나 , 혹은 다양한 임시 용도로 사용되는 땅이었을 것이다. 잡종지는 마을의 숨통 같은 공간이자 변화를 상징하는 장소였다.



6. 연못과 지소, 물이 머물던 자리


동작동에는 1필지 1,021㎡의 지소, 연못이 있었다. 이는 단순한 경관이 아니라 농업용수와생활용수를 확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못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마을 공동체의 중심 공간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발굴 조사에서 연못 흔적이 발견되면 당시 마을 구조와 생활 환경을이해하는 핵심 자료로 쓰인다.



7. 동작동 사람들,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1912 동작동의 토지 소유를 보면 흥미로운 점이 드러난다. 이씨가 79필지를 소유했고, 김씨가 24필지, 고씨가 18필지, 길씨가 16필지, 강씨와 임씨가 각각 14필지를 소유했다. 이는특정 성씨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토지 소유 현황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마을 권력 구조와 혈연적 유대를 알려주는 자료다.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도 마을 공동체의 구조를 파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8. 법인과 외국인의 , 변화의 조짐


동작동에는 5필지의 법인 소유지가 있었다. 이는 당시 이미 근대적 제도가 도입되며, 개인이아닌 단체나 법인의 명의로 땅이 관리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더욱 주목할 점은 외국인의 소유다. 일본인들은 11필지, 프랑스인들은 무려 68필지의 땅을소유하고 있었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그림자가 이미 동작동에 드리워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프랑스인 소유지는 선교 활동이나 외국인 거류지와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9. 일본인과 프랑스인 소유지, 제국주의의 그림자


일본과 프랑스인의 소유는 단순한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이 한국 사회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마을 주민들에게 위협이었고, 세대가 흘러도 남는역사적 상처였다. 오늘날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에서 외국인 소유지 흔적이 발견되면, 근대사의 굴곡과 국제 관계까지 함께 드러난다.



10. 오늘날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로 동작동의 가치


동작동의 1912 기록은 단순히 옛날 문서가 아니다. 이는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를통해 오늘날에도 살아 쉬는 역사 자료다. 지표조사는 위의 흔적과 지형을 조사하는기초 단계이며,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유물과 유적을 실제로 확인할 있다.


성공 사례로는 서울의 아파트 개발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조선시대 무덤을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공사장으로 여겨졌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당시 장례 문화와 생활상을 복원할 있었다. 이는 지표조사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이어주는 중요한 과정임을 보여준다.



11. 서울 지역 문화유산 조사와 성공 사례


서울 곳곳에서 진행되는 발굴 조사는 도시 숨은 역사를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강남 개발 당시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은 서울이 단순히 근대 이후 성장한 도시가 아니라, 수천 년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임을 증명했다.


이처럼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단순히 땅을 파는 일이 아니라, 우리 삶의 뿌리를 되찾는과정이다. 동작동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날 개발 사업이 진행된다면, 반드시 문화재 조사가 선행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과거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12. 동작동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1912 동작동의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의 , 그리고 외세의 침탈과 근대적 변화가 교차한 현장이었다. 지금 우리가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에 힘을 쏟는 이유는, 이런 역사를 단순히 박제된 과거로 두지 않고 살아 있는 교훈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다.


역사는 기록되지 않으면 잊히고, 발굴되지 않으면 사라진다. 동작동의 땅속에는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문화재 발굴 조사이자 지표조사다. 서울 숨은 역사, 동작동의 땅을 기억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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