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당신이 알던 마포구 망원동은 논과 밭, 그리고 낯선 주인들의 땅이었다!
- 2025년 6월 11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 시굴조사
지금 네가 산책하는 망원동, 100년 전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1912년 마포구 망원동 토지 기록으로 풀어낸 잃어버린 서울의 역사 —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낸 땅의 비밀
네가 지금 걷는 그 카페 골목 아래,
100년 전에는 황금빛 벼가 출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땅의 주인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목차
평범한 동네 망원동의 숨겨진 비밀
1912년 망원동, 논밭과 산의 조화로운 풍경
김씨와 최씨, 땅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땅, 그들이 남긴 흔적
단 두 필지, 국유지의 비밀은 무엇일까
망원동 땅에서 발견하는 역사의 발자취
망원동 옛 지도를 따라 걷는 시간여행
땅속에 묻힌 이야기를 캐는 사람들
망원동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아직 절반도 모르는 거다. 한강뷰 카페, 망리단길의 감성 식당들, 주말마다 돗자리를 펴는 망원한강공원. 그게 망원동의 전부인 것 같지만, 이 동네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무거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꺼내볼 거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1912년 일제 토지조사 기록을 바탕으로 서울 각 동네의 역사적 층위를 추적하는 작업을 해왔다. 망원동 기록도 그중 하나다. 이 자료를 들여다보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망원동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번 따라와봐.
1. 평범한 동네 망원동의 숨겨진 비밀
망원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아마 대부분은 한강, 카페, 감성 골목, 그리고 '요즘 핫하다'는 이미지일 거다. 실제로 망원동은 최근 몇 년 새 서울에서 가장 주목받는 동네 중 하나로 떠올랐다. 낡은 주택가가 힙한 공간으로 탈바꿈하면서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지금은 연남동·성수동과 함께 서울 핫플레이스의 3대장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런데 이 화려한 이면에는 아무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비밀이 있다. 110년 전, 이 땅이 누구의 손에 있었는지.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됐는지. 그 전환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문화재 지표조사와 토지 기록을 통해 그 진실을 하나씩 꺼내보려 한다. 읽다 보면 망원동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거다.
2. 1912년 망원동, 논밭과 산의 조화로운 풍경
1912년, 마포구 망원동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총 304개 필지, 전체 면적 1,268,937㎡에 달하는 광활한 땅이었고, 그 대부분이 논과 밭으로 채워져 있었다.
304필지
망원동 전체 필지 수
1,268,937㎡
총 면적
179필지
밭 (919,068㎡)
70필지
논 (214,695㎡)
6필지
임야 (52,856㎡)
1필지
잡종지 (57,087㎡)
숫자를 보면 실감이 난다. 밭이 179필지, 무려 919,068㎡다. 전체 망원동 면적의 72%가 넘는 땅이 밭이었다는 뜻이다. 콩이 자라고, 보리가 익고, 고추가 붉어지던 망원동. 지금 망리단길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그 자리에, 누군가의 할아버지가 땀을 흘리며 밭을 갈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논도 70필지나 됐다. 214,695㎡라는 면적은 여의도 면적의 약 4분의 3 수준이다. 한강과 인접한 망원동의 지리적 특성 덕분에 물이 풍부했고, 그 덕에 질 좋은 쌀을 생산하는 논농사가 가능했을 거다. 지금은 그 논 위에 아파트와 빌라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임야도 6필지, 52,856㎡가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땔감을 구하고, 더운 여름 그늘을 찾아 쉬어가는 소중한 공간이었을 거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단 1필지뿐이지만 57,087㎡라는 거대한 면적을 차지하는 '잡종지'가 있었다. 이 땅이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기록에 명확히 남아 있지 않지만,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는 이런 '용도 불명의 땅'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 안에 무엇이 묻혀 있을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3. 김씨와 최씨, 땅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1912년 망원동 토지 기록에는 정말 다양한 성씨들이 등장한다. 그중 압도적으로 많은 건 김씨다. 무려 64필지를 소유하며 망원동 최대 지주 자리를 차지했다. 그 뒤를 이어 최씨 41필지, 윤씨 28필지, 이씨 24필지 순이었고, 송씨·임씨·조씨 같은 성씨들도 여러 필지를 소유하며 함께 동네를 이루었다.
64필지
김씨
41필지
최씨
28필지
윤씨
24필지
이씨
이 성씨 분포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당시 망원동이 어떤 공동체였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기록이다. 김씨가 가장 많다는 건, 어쩌면 한 마을에 같은 본관을 가진 김씨 일가가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다는 뜻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같은 성씨의 사람들이 한 마을에 모여 사는 집성촌 형태가 흔했으니까.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성씨 기록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느 성씨가 어느 구역에 살았는지 알면, 그 땅에서 나오는 유물이 어느 가문과 연결되는지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집 터에서 나온 생활 도구 하나, 묘지에서 발견된 비석 조각 하나도 이런 기록과 결합하면 훨씬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마을 풍경에 갑자기 낯선 이름이 끼어든다. 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다.
4.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땅, 그들이 남긴 흔적

동양척식주식회사, 줄여서 동척. 이름만 들어도 무거워지는 이 존재가 1912년 망원동에도 등장한다. 동척이 도대체 뭔지 모른다면, 지금 딱 한 번만 기억해두면 된다.
동양척식주식회사란?
1908년 일본이 조선의 토지와 경제를 장악하기 위해 세운 국책회사다. 조선인의 땅을 헐값에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아 일본인 이민자들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했다. 1917년 말 기준으로 조선 총독부 다음으로 땅이 많은 조선 최대 지주가 됐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와 비교될 정도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수탈 기구였다.
이 동척이 1912년 망원동에도 땅을 갖고 있었다. 망원동 주민들이 대대로 일궈온 농경지가 동척의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이 땅의 비극을 담고 있다.
동척이 소유한 땅에서 일하던 조선인 소작농들은 수확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바쳐야 했다. 자기가 갈고 씨를 뿌리고 수확한 작물의 절반이 넘는 양을 고스란히 내줘야 하는 삶. 그 고통이 망원동 이 땅 어딘가에도 새겨져 있었을 거다.
실제로 동척의 수탈에 분노한 이들의 저항은 역사로 남아 있다. 독립운동가 나석주 의사는 1926년 경성의 동양척식회사 건물에 폭탄을 던졌다. 그것은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땅을 빼앗기고 삶을 빼앗긴 조선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었다. 망원동 사람들도 그 분노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땅을 잃는다는 건 단순히 재산을 잃는 게 아니었다. 그건 삶의 터전을, 정체성을, 미래를 잃는 것이었다."
5. 단 두 필지, 국유지의 비밀은 무엇일까
망원동 토지 기록에서 흥미로운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국유지로 분류된 땅이 단 2필지뿐이라는 것이다. 망원동 전체 304필지 중 겨우 두 필지가 국가 소유였다는 건, 그 반대로 말하면 나머지 302필지는 개인 또는 법인 소유였다는 의미다.
그 두 필지는 어떤 땅이었을까? 기록상으로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추론은 가능하다. 당시 국유지는 주로 관청 부지, 도로, 수리 시설, 또는 역둔토(조선 시대 관청에 딸린 땅)에서 전환된 경우가 많았다. 망원동이 한강과 접한 지역인 만큼, 수운과 관련된 관청 부지였을 가능성도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 입장에서 국유지는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땅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관청이나 공공 시설이 있던 자리라면, 그곳에서 공문서, 관청 도구, 또는 각종 행정 기록물이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단 두 필지지만, 그 두 필지가 품고 있는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다.

6. 망원동 땅에서 발견하는 역사의 발자취
문화재 지표조사라는 게 뭔지 한 번쯤 제대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냥 땅 파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전혀 다르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건설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그 땅에 매장된 문화재가 있는지 사전에 확인하는 작업이다. 사업 면적이 3만 제곱미터 이상인 건설 공사라면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표조사 결과에 따라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시굴조사, 표본조사,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단계별 작업이 진행된다.
망원동처럼 논밭이 많고, 다양한 성씨가 대대로 살아온 지역은 지표조사에서 예상치 못한 것들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조선 시대 도기 파편, 농경 도구, 심지어 마을 공동 우물의 흔적까지. 실제로 서울 각지에서 진행된 발굴 사업에서는 개발 예정지 아래에서 조선 시대 생활 흔적이 다수 발굴된 사례가 있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종로구 공평동이다. 대규모 재개발 공사 이전에 실시한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조선 시대 건물 터와 골목길, 생활 유물이 대거 발굴됐다. 그 결과 지하 1층에 유적 전시관을 만드는 것으로 개발 계획이 수정됐고, 지금은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공간이 됐다. 파괴하지 않고도 개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였다.
망원동도 마찬가지다. 지금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그 자리 아래에, 어쩌면 100년 전 망원동 주민들의 삶이 그대로 잠들어 있을 수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그 잠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
7. 망원동 옛 지도를 따라 걷는 시간여행

1912년 망원동을 직접 걷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당시의 토지 기록을 지금의 지도에 겹쳐 보면, 시간여행에 가까운 경험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지금 망원한강공원 근처는 당시 논이 가장 많이 분포했던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강에서 끌어다 쓸 수 있는 물이 풍부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망리단길이 형성된 구역은 당시 밭과 소규모 주거지가 섞여 있던 곳이었을 거다. 지금처럼 사람이 모이는 동선이 100년 전에도 그대로였다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임야가 있던 6필지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아마 그 산자락은 이미 오래전에 주택가로 바뀌었거나, 아파트 단지 아래로 사라졌을 거다. 그 숲에서 나무를 해오던 사람들은 이제 없고, 그 자리엔 아파트 주차장이 들어섰을지 모른다.
이런 상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바로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작업이다. 1912년 토지조사부를 동네 단위로 쪼개서 분석하고, 그 기록을 현재 지도와 비교함으로써 어느 지역에 어떤 역사적 층위가 있는지 파악하는 것. 그게 쌓이면 망원동이라는 동네 하나가 완전히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8. 땅속에 묻힌 이야기를 캐는 사람들

문화재 발굴조사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일할까. 단순히 유물을 찾는 기술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사명감을 가진 이들이다.
그들이 붓 하나로 흙을 조심스럽게 걷어내는 건, 그 아래 누군가의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100년 전 망원동에서 콩을 심고, 벼를 수확하고, 아이를 키우던 그 사람들의 흔적이.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흙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가 1912년 기록을 분석하는 이유도 같다. 개발이 모든 걸 덮어버리기 전에, 그 이야기를 먼저 기록해두는 것. 그게 지표조사이고, 시굴조사이고, 발굴조사다. 땅속 깊이 잠든 망원동의 기억을 깨우는 일이다.
망원동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변하고 있다. 낡은 집이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서고, 골목이 바뀐다. 그 변화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반드시 잃는다. 하지만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그 잃어버린 것들 중 일부는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아두는 가장 성실한 방법이다.
망원동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
한 번만 발 아래를 생각해줬으면 한다.
그 콘크리트 아래, 100년 전 누군가의 밭이 있었고,
그 밭을 빼앗긴 누군가의 눈물이 있었고,
그럼에도 꿋꿋이 살아낸 망원동 사람들의 숨결이 있었다.
역사는 박물관에 있지 않다.
지금 네가 걷는 이 땅이, 그 자체가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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