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노원구 공릉동의 숨겨진 시간 — 논과 밭, 그리고 유산의 기억
- 서울 HI
- 2025년 11월 10일
- 3분 분량
목차
잊혀진 들판, 공릉동에서 시작된 이야기
1912년 토지 기록으로 본 공릉동의 풍경
성씨별 땅의 분포로 본 마을 공동체의 흔적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와 국유지의 변화
문화재발굴과 지표조사로 다시 깨어나는 공릉동
서울지역 발굴조사 의뢰와 실제 성공사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 — 유산을 지켜내는 선택
에필로그: 땅이 들려준 시간의 목소리
1. 잊혀진 들판, 공릉동에서 시작된 이야기
커다란 글씨로 새겨진 듯한 문장 하나로 시작하자면,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흙 속에 숨어 있을 뿐이다.”
오늘의 공릉동을 걷다 보면, 도시의 소음과 아파트 사이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어딘가 낯선 향기가 스며든다. 그건 흙냄새이자 기억의 냄새다. 1912년,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훨씬 전, 이곳은 논과 밭이 끝없이 이어진 들판이었다. 그때의 풍경을 떠올려보면 마치 서울이라는 도시의 뿌리가 흙 속에서 천천히 자라난 듯하다.

2. 1912년 토지 기록으로 본 공릉동의 풍경
1912년의 공릉동은 총 704필지, 1,699,296㎡의 면적을 지닌 넓은 마을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바로 밭, 922,146㎡(210필지)였다. 이어서 또 다른 밭이 391필지 555,728㎡로 기록되어 있어, 사실상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이 경작지였다. 논 대신 밭이 많았다는 점은 이 지역이 배수와 지형상 벼농사보다는 밭농사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마을에는 대지 64필지 51,583㎡가 있었고, 당시엔 한옥 몇 채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임야는 36필지 168,575㎡로, 공릉산 자락의 숲이 지금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일대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또한, 분묘지 1필지(505㎡), 지소(연못) 2필지(757㎡)는 마을의 생활공간과 조상의 흔적을 함께 품고 있었다.

3. 성씨별 땅의 분포로 본 마을 공동체의 흔적
공릉동은 다양한 성씨들이 함께 어우러진 공동체였다.
1912년 당시 기록에 따르면, 한씨가 111필지로 가장 많았고, 김씨(110필지), 이씨(78필지), 전씨(49필지), 송씨(36필지), 임씨(28필지), 윤씨(27필지), 박씨(25필지), 황씨(23필지), 장씨(19필지), 신씨(13필지) 등이 뒤를 이었다.
이러한 구성은 단일 씨족 마을이 아닌, 서로 다른 혈통이 함께 살아가며 협업했던 다층적인 농촌공동체의 면모를 보여준다. 누군가는 논을, 누군가는 밭을, 또 누군가는 산을 일구며 서로의 삶을 이어갔다. 마을의 울력과 제사, 그리고 논두렁에서 들려오던 농요는 이들의 협동심을 말없이 증언한다.

4.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와 국유지의 변화
그러나 이 평화로운 땅에도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당시 조선의 식민 통치를 확대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공릉동에도 손을 뻗쳤다. 1912년 공릉동에서만 무려 93필지의 토지가 이 회사의 소유로 기록되어 있다.
그 땅들은 대부분 생산성이 높은 밭이나 임야였고, 일본인 소유의 국유지가 추가로 12필지, 공유지 1필지가 존재했다.
이 시기부터 공릉동의 토지는 단순한 ‘생계의 터전’이 아니라, 식민경제 체제 속 자원의 단위로 전락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의 정밀한 지적도 기록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당시의 지형, 농경 구조, 주민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다.

5. 문화재발굴과 지표조사로 다시 깨어나는 공릉동
시간이 흐르고, 도시의 모습이 바뀌었다.
공릉동은 이제 지하철역과 대학교, 연구단지가 자리 잡은 현대적 도시공간이 되었지만, 그 땅 아래에는 여전히 유적발굴의 가능성이 잠들어 있다.
서울 문화재 발굴조사팀은 이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를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공릉동의 경우, 선사시대의 토기편과 조선 후기의 생활유물이 함께 출토된 바 있으며, 이는 서울 동북부 생활사의 연결고리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로 평가된다. 문화재발굴과정에서 사용되는 발굴조사원과 문화재발굴조사장비의 역할도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6. 서울지역 발굴조사 의뢰와 실제 성공사례
서울 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주로 공공사업, 도시개발, 건축공사 이전에 진행된다.
최근 서울 강동구와 노원구 일대에서는 도로 확장 공사 중 조선시대 마을터가 발견되면서 공사가 잠시 중단되고 정밀조사가 이루어진 사례가 있다. 이때 조기 대응을 위해 전문 기관에 조사를 의뢰한 덕분에, 사업 지연을 최소화하면서도 유적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공릉동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센터에 의뢰해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 순으로 체계적 접근을 하면, 공사 리스크를 줄이면서도 법적 절차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다.

7.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 — 유산을 지켜내는 선택
땅은 기록보다 오래 기억한다.
공릉동의 한 평 한 평에는 수백 년의 시간과 사람이 새겨져 있다. 개발과 보존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흔적을 지우지 않고 미래로 잇는 일이다.
문화재발굴은 단지 과거를 캐내는 작업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다시 그리는 작업이다.
그 속에는 우리의 정체성, 도시의 뿌리, 그리고 삶의 증거가 있다.
8. 에필로그: 땅이 들려준 시간의 목소리
오늘의 공릉동은 더 이상 논이 아니다.
하지만 그 흙 속에는 여전히 과거의 뿌리가 살아 있다.
발굴의 순간, 한 줌의 흙 속에서 수백 년의 이야기가 깨어난다.
그건 단지 돌이나 토기의 흔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자 서울의 기억이다.
우리가 문화재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건 ‘옛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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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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