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노원구 공릉동의 숨겨진 시간 — 논과 밭, 그리고 유산의 기억
- 2025년 11월 10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6일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노원구 지역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흙 속에 숨어 있을 뿐이다 — 1912년 공릉동 704필지가 품은 다성씨 마을의 기억
오늘의 공릉동을 걷다 보면, 지하철역 출구와 대학 캠퍼스 사이로 바람이 스칠 때 낯선 향기가 스며와. 흙냄새이자 기억의 냄새야. 113년 전, 이곳에는 한씨, 김씨, 이씨, 전씨가 논두렁 너머로 서로를 불렀어. 704필지의 땅 위에서 서로 다른 성씨 11개 집안이 함께 살아가던 곳.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공릉동 지하철역을 지나칠 때마다 그 목소리가 들릴 거야.
목차
잊혀진 들판, 공릉동에서 시작된 이야기 — 프롤로그
1912년 토지 기록으로 본 공릉동의 풍경
성씨별 땅의 분포로 본 마을 공동체의 흔적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와 국유지의 변화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로 다시 깨어나는 공릉동
서울지역 발굴조사 의뢰와 실제 성공 사례
유산을 지켜내는 선택 —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
땅이 들려준 시간의 목소리 — 에필로그
프롤로그잊혀진 들판, 공릉동에서 시작된 이야기

오늘의 공릉동을 걷다 보면 도시의 소음과 아파트 사이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어딘가 낯선 향기가 스며들어. 그건 흙냄새이자 기억의 냄새야. 1912년, 지금으로부터 113년 전, 이곳은 논과 밭이 끝없이 이어진 들판이었어. 그때의 풍경을 떠올리면 서울이라는 도시의 뿌리가 흙 속에서 천천히 자라난 듯한 기분이 들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가 복원해낸 공릉동의 1912년 토지 기록은 단순한 통계 자료가 아니야. 704필지 위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름이 담긴 역사의 첫 페이지야. 그 페이지를 지금부터 한 장씩 넘겨볼게.
11912년 토지 기록으로 본 공릉동의 풍경

1912년의 공릉동은 총 704필지, 1,699,296㎡의 면적을 가진 넓은 마을이었어. 지금의 공릉동 전체를 상상해봐. 지하철역,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아파트 단지 전체가 그 들판 위에 세워진 거야. 그 광활한 면적의 절반 이상이 경작지였어.
704
총 필지 수
1,699,296
총 면적(㎡)
601
밭 필지 합계
93
동양척식 소유
지목 구분 | 필지 수 | 면적(㎡) | 비고 |
밭 (대형) | 210필지 | 922,146 | 전체의 54.3% |
밭 (소형) | 391필지 | 555,728 | 가장 많은 필지 |
대지 | 64필지 | 51,583 | 주거 공간 |
임야 | 36필지 | 168,575 | 공릉산 자락 |
분묘지 | 1필지 | 505 | 조상 무덤 |
지소(연못) | 2필지 | 757 | 마을 수원 |
경작지 비율 — 밭 중심 농경 마을의 증거
밭(대형)
922,146㎡
밭(소형)
555,728㎡
임야
168,575㎡
대지
51,583㎡
논 대신 밭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이 공릉동의 지형을 그대로 말해줘. 배수가 어렵거나 경사진 지형에서는 벼농사보다 밭농사가 훨씬 안정적이거든. 조·수수·보리·콩이 자라던 그 밭들이 지금은 대학 캠퍼스와 주택가로 덮여 있어. 그리고 지소, 즉 연못 2필지. 마을 사람들이 물을 대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이 뛰놀던 그 물가가 지금 어느 주차장 아래에 잠들어 있을 거야.
2성씨별 땅의 분포로 본 마을 공동체의 흔적

공릉동이 다른 지역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하나 있어. 단일 성씨 마을이 아니었다는 거야. 1912년 토지 기록에는 무려 11개 성씨가 등장해. 이건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데이터에서도 꽤 드문 사례야. 단일 씨족이 지배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혈통이 어우러져 협업하는 진짜 공동체였던 거야.
한씨
111필지
김씨
110필지
이씨
78필지
전씨
49필지
송씨
36필지
임씨
28필지
윤씨
27필지
박씨
25필지
황씨
23필지
장씨
19필지
신씨
13필지
한씨 111필지, 김씨 110필지. 두 성씨가 거의 엇비슷하게 최다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어. 이 두 집안이 마을의 두 축이었겠지. 그렇다고 둘이 대립했을 것 같지는 않아. 논두렁을 함께 밟고, 마을 울력에서 어깨를 맞대고, 가을 추수 때는 농요를 함께 불렀을 테니까. 이씨 78필지, 전씨 49필지, 송씨 36필지까지. 공릉동은 어느 한 집안의 마을이 아니라 여러 이름이 모여 만든 살아있는 공동체였어.
3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와 국유지의 변화
그 평화로운 공동체에도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어. 1912년 공릉동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유한 토지가 무려 93필지야. 전체 704필지의 13.2%야. 열 필지 중 하나 이상이 식민지 수탈 기관의 손에 넘어가 있었던 거야.
93필지의 의미 — 공릉동 수탈의 규모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가져간 93필지는 대부분 생산성이 높은 밭과 임야였어. 거기다 일본인 소유 국유지 12필지, 공유지 1필지까지 더하면 외부 세력이 장악한 토지가 100필지가 넘어. 그 땅에서 농사를 짓던 조선 농민들은 소작인 신세로 전락하거나 땅을 완전히 잃었어. 공릉동 한씨, 김씨, 이씨 집안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삶의 터전을 빼앗겼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
그러나 이 시기의 정밀한 지적도 기록이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문화재 발굴조사에 결정적인 자료가 돼. 당시의 지형, 농경 구조, 주민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기록이 바로 일제강점기 토지 조사 사업의 산물이거든. 상처의 기록이 역사 복원의 열쇠가 되는 역설이야.
4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로 다시 깨어나는 공릉동

시간이 흐르고 도시의 모습이 바뀌었어. 공릉동은 이제 지하철역과 대학교, 연구단지가 자리 잡은 현대적 도시공간이 됐지. 하지만 그 땅 아래에는 여전히 유적 발굴의 가능성이 잠들어 있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은 이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를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있어.
공릉동에서는 선사시대 토기편과 조선 후기 생활유물이 함께 출토된 바 있어. 이는 서울 동북부 생활사의 연결고리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로 평가받아.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연속적인 문화층이 확인된다는 건, 이 땅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의 삶터였는지를 증명하는 거야.
공릉동 문화재 발굴의 특별한 점
선사시대 유물과 조선시대 유물이 같은 지층에서 함께 나온다는 건 이례적이야. 보통은 각 시대의 층위가 분리되어 있는데, 공릉동처럼 복합 문화층이 형성된 지역은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사람이 살아온 생활 중심지였다는 걸 뜻해. 문화재 발굴조사 장비를 통해 이 층위를 정밀하게 읽어내는 작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5서울지역 발굴조사 의뢰와 실제 성공 사례
성공 사례 01 — 강동·노원구 도로 확장 공사 현장
도로 확장 공사 중 조선시대 마을터가 발견되면서 공사가 일시 중단됐어. 하지만 사전에 전문 기관에 조사를 의뢰해뒀기 때문에 정밀조사가 즉각 투입됐고, 사업 지연을 최소화하면서 유적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어. 대비 없이 공사를 시작했다면 유구가 완전히 훼손됐을 거야.
공릉동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에 의뢰해 아래 순서로 체계적으로 진행하면 공사 리스크를 줄이면서 법적 절차를 제대로 이행할 수 있어.
1
문화재 지표조사 — 부지 지표면에서 유물·유구 존재 가능성을 파악하는 가장 첫 단계
2
시굴조사 — 지표조사에서 가능성이 확인되면 트렌치를 파서 지층 구조를 확인
3
표본조사 — 대규모 구역에서 일정 비율을 표본으로 조사해 전체 상황을 파악
4
발굴조사 — 유적발굴단이 투입되어 전면 발굴 후 공식 보고서 제출
6유산을 지켜내는 선택 —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
땅은 기록보다 오래 기억해. 공릉동의 한 평 한 평에는 수백 년의 시간과 사람이 새겨져 있어. 개발과 보존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흔적을 지우지 않고 미래로 잇는 거야. 문화재 발굴은 단지 과거를 캐내는 작업이 아니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다시 그리는 작업이야.
1912년 한씨 집안이 111필지를 일구던 그 땅 위에, 지금은 우리가 살고 있어. 그 이어짐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문화재를 지키는 첫 번째 행동이야. 공릉동을 걸을 때마다, 지하철역 출구를 빠져나올 때마다, 이 땅이 한때 누군가의 밭이었다는 걸 기억하는 것. 그게 시작이야.
에필로그땅이 들려준 시간의 목소리

오늘의 공릉동은 더 이상 논이 아니야. 하지만 그 흙 속에는 여전히 과거의 뿌리가 살아 있어. 발굴의 순간, 한 줌의 흙 속에서 수백 년의 이야기가 깨어나. 그건 단지 돌이나 토기의 흔적이 아니야. 우리의 삶이자 서울의 기억이야.
우리가 문화재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단순해. 그건 '옛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야. 공릉동 11개 성씨의 이름이 토지 대장에 남아 있듯, 우리의 이름도 언젠가 누군가의 역사 기록에 남을 거야. 어떤 이름으로 남고 싶어?
704필지가 전하는 말
한씨, 김씨, 이씨, 전씨, 송씨, 임씨, 윤씨, 박씨, 황씨, 장씨, 신씨.서로 다른 이름들이 같은 땅 위에서 함께 살았어.논두렁에서 부르던 농요가 사라진 지금도그 화음은 흙 속에 새겨져 있어.발굴조사원의 붓끝이 그 화음을 깨울 때공릉동은 다시 살아나.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과거와 악수하는 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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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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