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강서구 과해동, 그 땅에 숨겨진 이야기
- 2025년 5월 7일
-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문화재 지표조사 · 문화재 발굴 기관 ·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지금 네 아파트 아래,100년 전엔 논이었다
1912년 강서구 과해동 — 3,053,174㎡의 거대한 땅, 논 2,054,888㎡와 무덤 75,408㎡. 서울에서 가장 충격적인 100년 전 기록을 문화재 발굴 기관이 꺼낸다
잠깐, 지금 강서구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이 질문에 먼저 답해보자.내 집 아래 땅이 100년 전에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는가?
강서구 과해동. 지금은 공항 인근의 주거 밀집 지역으로, 아파트 단지와 상업 시설이 가득한 동네다. 그런데 1912년 이 땅의 기록을 열어보는 순간, 모든 것이 뒤집힌다. 총 면적 3,053,174㎡. 그 중 논만 2,054,888㎡로 전체의 67%를 차지한다. 무덤이 30필지 75,408㎡에 달하고, 잡종지가 56필지 440,388㎡에 이른다. 이씨, 김씨, 장씨가 수백 필지의 땅을 나눠 가졌던 그 시절.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그 땅의 100년 전 이야기가 시작된다.
목 차
1. 프롤로그 — 3백만㎡ 캔버스 위의 시간여행
2. 문화재 지표조사가 열어준 1912년 과해동
3. 논 368필지 2,054,888㎡ — 서울 최대 규모 논농사의 기억
4. 대지 51필지 — 51채의 집, 51개의 이야기
5. 무덤 30필지 75,408㎡ — 바람이 부는 언덕의 기억
6. 임야 5,583㎡ — 마을을 지키던 작은 숲
7. 잡종지 56필지 440,388㎡ — 가능성의 땅
8. 밭 157필지 410,325㎡ — 과해동을 먹여 살린 땅
9. 성씨로 읽는 과해동 사람들
10. 문화재 지표조사, 과해동에서 왜 지금 중요한가
11. 발굴이 살려낸 이야기들 — 성공 사례
12. 에필로그 — 아파트 아래 흐르는 100년

SECTION 01
1. 프롤로그 — 3백만㎡ 캔버스 위의 시간여행
강서구 과해동. 지금 이 이름을 들으면 김포공항 인근의 주거 밀집 지역이 떠오른다. 마곡지구 개발로 변화가 빠른 강서구의 한 동네. 하지만 1912년의 기록을 열어보면, 이 동네는 서울 어느 지역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독특한 규모의 농촌 지대였다.
총 면적 3,053,174㎡. 숫자만으로는 감이 잘 오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여의도 섬 전체 면적이 약 290만㎡다. 과해동 하나의 면적이 여의도 섬보다 크다는 뜻이다. 그 광활한 땅 위에 논이 깔리고, 밭이 펼쳐지고, 무덤이 자리 잡고, 51채의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과해동 토지 기록은 이 지역이 단순한 농촌 마을을 넘어, 서울 외곽에 형성된 거대한 농경 지대였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위에 지금의 강서구가 세워졌다. 그 변화의 두께가 얼마나 두꺼운지, 그 안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를 알아가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SECTION 02
2. 문화재 지표조사가 열어준 1912년 과해동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그 역사를 읽는 작업이다. 과거 문헌, 지적도, 고지도를 교차 분석하고 지표면 흔적을 수집하여 역사적 가치를 판단한다. 이 조사가 선행되어야 시굴조사, 표본조사,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질 수 있다. 과해동처럼 면적이 광대하고 다양한 지목이 복잡하게 분포한 지역은 이 지표조사의 중요성이 더욱 높다.
논 368필지2,054,888㎡
(전체의 67%)
잡종지 56필지440,388㎡
밭 157필지410,325㎡
무덤 30필지75,408㎡
대지 51필지66,578㎡
임야 2필지5,583㎡
이 숫자들이 말해주는 첫 번째 충격은 논의 압도적 규모다. 전체 면적 3,053,174㎡ 중 2,054,888㎡가 논이라는 것은, 과해동이 서울 인근에서 손꼽히는 대규모 벼농사 지대였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충격은 무덤이 30필지 75,408㎡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대지(66,578㎡)보다 무덤이 더 넓었다. 이 땅에서 죽음이 삶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역설적 사실이, 과해동 역사의 깊이를 보여준다.

SECTION 03
3. 논 368필지 2,054,888㎡ — 서울 최대 규모 논농사의 기억
368필지, 2,054,888㎡의 논. 이 수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비교 대상이 필요하다.
2,054,888㎡, 얼마나 넓은가
서울숲 전체 면적이 약 595,000㎡다. 과해동의 논 면적은 서울숲의 3.5배다. 올림픽공원 전체 면적이 약 145만㎡인데, 과해동의 논이 그보다도 넓다. 지금 강서구에서 가장 큰 공원인 마곡 근린공원 전체를 덮고도 몇 배가 남는 규모의 논이 단 하나의 마을에 집중되어 있었다.
왜 과해동에 이렇게 광대한 논이 형성됐을까. 강서구 일대는 한강 하류의 충적 평야 지대다. 한강이 굽이치며 흘러오면서 쌓아놓은 비옥한 충적토와 풍부한 수원이 논농사에 최적의 조건을 만들었다. 조선시대부터 강서구 일대는 한양에 쌀을 공급하는 주요 농업 지대였고, 그 전통이 1912년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368개의 논 필지에서 일했던 농부들의 수를 상상해보자. 필지 하나에 최소 한 가구가 경작했다면, 368가구 이상의 사람들이 이 논들을 돌봤을 것이다. 봄의 모내기, 여름의 김매기, 가을의 수확. 그 리듬이 2,054,888㎡ 위에서 매년 반복됐다. 그리고 그 땅 위에 지금 아파트가 서 있다.
"368필지의 논. 368번의 봄이 왔고, 368번의 가을이 익었으며, 368곳에서 농부들의 땀이 흘렀다. 그 땅 위에 지금 강서구가 서 있다."
SECTION 04
4. 대지 51필지 — 51채의 집, 51개의 이야기
대지 51필지, 66,578㎡. 3,053,174㎡의 광대한 땅에서 사람이 직접 살았던 공간은 66,578㎡에 불과했다. 전체 면적의 2%다. 98%의 땅은 농지이거나 묘역이거나 산이었고, 사람이 집을 짓고 살았던 공간은 그 2%에 집중되어 있었다.
필지당 평균 면적은 약 1,305㎡, 약 395평이다. 이것은 상당히 넓은 농가 규모다. 안채와 사랑채를 갖춘 기와집이 있고, 광과 마굿간이 있고, 넓은 마당이 있고, 마당 한쪽에 텃밭이 딸린 구조가 가능한 크기다. 이 규모로 볼 때, 과해동의 51가구는 단순한 소작농이 아니라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갖춘 집안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51채의 집. 51개의 저녁 연기. 51곳의 우물 소리. 아침이면 닭이 울고, 낮이면 논에서 물소가 일하고, 저녁이면 가족이 모여 밥을 먹던 그 51개의 하루들. 그 일상들이 2%의 땅 위에서 펼쳐졌다. 지금 그 자리에는 수백 가구가 사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을 것이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대지 51필지는 온돌 구조, 우물, 부뚜막, 생활 도자기 등 당시 주거 문화의 흔적이 잠들어 있을 중요한 조사 대상이다. 특히 필지당 평균 면적이 넓다는 것은, 그 안에 여러 세대에 걸친 다양한 주거 층위가 쌓여 있을 가능성을 높인다.

SECTION 05
5. 무덤 30필지 75,408㎡ — 바람이 부는 언덕의 기억
30필지, 75,408㎡의 무덤. 집터(66,578㎡)보다 넓다. 이 사실 하나가 과해동이라는 공간의 성격을 극적으로 바꿔놓는다. 이 마을에서는 산 자가 차지한 공간보다 죽은 자가 차지한 공간이 더 컸다.
30필지라는 필지 수도 의미심장하다. 각각의 필지가 하나의 묘역 단위라면, 30개의 서로 다른 집안이 각자의 선산을 과해동 안에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또는 마을 공동 묘역이 몇 개의 큰 필지로 나뉘어 관리됐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과해동의 땅 위에서 삶과 죽음은 나란히 존재했다.
강서구 일대는 예로부터 바람이 잘 통하고 양지바른 구릉지가 많아 묘지 조성에 적합한 지형으로 여겨졌다. 한강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조성된 무덤들은 풍수지리적으로도 명당 조건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30개 필지의 묘역에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집안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문화재 발굴의 관점에서 이 30필지 묘역은 매우 높은 조사 우선순위를 가진다. 조선시대 묘역에서는 도자기류, 금속 장신구, 비석, 상석, 문인석 등 다양한 유물이 발굴된다. 특히 75,408㎡라는 규모는 단순한 소규모 묘역이 아니라, 몇 개 유력 가문의 대규모 선산들이 모인 것임을 시사한다. 이씨 157필지, 장씨 142필지를 소유했던 두 주요 가문의 선산이 이 30필지 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묘역 발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유물들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 선산에서는 분청사기·백자 제기류, 청동 향로·제기, 묘지석(墓誌石), 목관 내부의 복식류, 유리 구슬 등이 발굴됩니다. 특히 75,408㎡ 규모의 묘역에서는 조선 중기 또는 그 이전 시기의 유물이 나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과해동의 30필지 묘역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를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SECTION 06
6. 임야 5,583㎡ — 마을을 지키던 작은 숲
2필지, 5,583㎡의 임야. 3,053,174㎡에 달하는 과해동 전체에서 숲은 단 2필지, 5,583㎡에 불과했다. 전체 면적의 0.18%다. 광대한 논과 밭, 잡종지에 비해 임야가 이렇게 작다는 것은, 과해동이 이미 1912년 이전부터 상당히 개간이 진행된 평야 지대였음을 의미한다.
2필지의 작은 숲이지만, 이 임야가 마을에서 담당했던 역할은 작지 않았다. 이 지역이 한강 하류의 충적 평야 지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5,583㎡의 임야는 마을 어귀에 방풍을 위해 조성된 마을 숲이거나, 언덕 자락에 남겨진 자연 숲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그늘진 공간, 어른들이 더위를 피하던 쉼터, 약초와 나물을 캐던 생활 공간이었을 것이다.
지금 강서구 과해동 일대를 지도로 보면 녹지가 극히 드물다. 2필지 5,583㎡의 숲마저 사라진 것이다. 그 숲의 자리에 무엇이 들어섰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땅 아래에는 수백 년간 숲이 품었던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다.
SECTION 07
7. 잡종지 56필지 440,388㎡ — 가능성의 땅
56필지, 440,388㎡의 잡종지. 이것이 과해동에서 두 번째로 넓은 지목이다. 밭(410,325㎡)보다도 크다는 것이 흥미롭다.
잡종지는 특정 용도로 분류하기 어려운 땅이다. 과해동의 잡종지가 440,388㎡에 달한다는 것은, 이 지역에 용도가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광대한 미개척 공간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몇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한강 변 습지나 갈대밭처럼 농경지로 개간하기 어렵지만 버려두기도 어려운 땅. 둘째, 여러 용도로 혼용되던 공동 이용지. 셋째, 계절에 따라 침수되는 저지대 완충 지역.
강서구 일대는 한강과 가까워 홍수 범람 구역이 있었다. 그 범람 구역이 잡종지로 기록됐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렇다면, 이 440,388㎡의 잡종지 아래에는 한강변 생활사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이 퇴적되어 있을 수 있다. 한강변 어로(漁撈) 활동의 흔적, 수운 관련 시설물의 잔재, 홍수가 쓸어온 생활 유물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잡종지는 종종 뜻밖의 발견을 가져다주는 구역이다.

SECTION 08
8. 밭 157필지 410,325㎡ — 과해동을 먹여 살린 땅
157필지, 410,325㎡의 밭. 논(2,054,888㎡)에 비하면 작아 보이지만, 410,325㎡는 결코 작은 면적이 아니다. 롯데월드타워가 서 있는 잠실 일대 상업·주거 복합 단지 전체 면적과 비슷한 규모다. 그 넓이가 밭이었다.
157개의 서로 다른 밭에서 157종류의 이야기가 자랐다. 과해동이 한강 하류 충적 평야라는 지형적 특성을 감안하면, 이 밭들에서는 무, 배추, 고추 같은 채소류뿐 아니라 콩, 팥, 참깨 같은 두류와 유지작물도 재배됐을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강서구 일대는 한양 도성에 다양한 식재료를 공급하는 근교 농업 지대였다. 과해동의 밭에서 자란 작물들이 한강 수운을 통해 한양 시장으로 운반됐을 것이다.
157명의 농부가 각자의 밭을 돌보면서, 그들 사이에서 마을 공동체가 형성됐다. 씨앗을 나눠 심고, 수확한 작물을 시장에 함께 내다 팔고, 힘든 농사일을 서로 도왔을 것이다. 지금 과해동 골목을 걸으면서 그 410,325㎡의 밭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 기억이 땅속에는 남아 있다. 경작층이라는 형태로.
SECTION 09
9. 성씨로 읽는 과해동 사람들
이 광대한 땅의 주인들은 누구였을까.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의 성씨 분포는 과해동 사회의 구조를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다.
성씨 | 소유 필지 수 | 특이 사항 |
이씨(李) | 157필지 | 압도적 1위, 사실상 마을 주도 |
김씨(金) | 151필지 | 2위, 이씨와 양대 축 |
장씨(張) | 142필지 | 3위, 단일 성씨로 이례적 규모 |
박씨(朴) | 22필지 | 4위 |
홍씨(洪) | 22필지 | 4위 공동 |
변·정·백·신·조씨 | 소수 필지 | 다수 성씨 혼재 |
이씨 157필지, 김씨 151필지, 장씨 142필지. 이 세 성씨만 합산하면 450필지다. 전체 필지에서 이 세 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는 총 필지 수 기록이 있어야 정확히 알 수 있지만, 세 성씨가 100필지 이상씩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과해동이 사실상 이 세 가문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마을이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장씨 142필지가 이채롭다. 장씨는 인동 장씨, 흥덕 장씨 등 조선시대 호남·경기 지역에서 세력을 가진 성씨 집안들이 있는데, 강서구처럼 한강 하류 지역에 장씨가 142필지라는 대규모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집안이 이 지역에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장씨 가문이 한강 수운과 관련된 사업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씨와 홍씨가 각각 22필지로 공동 4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홍씨는 특히 남양 홍씨 등 조선 중기 이후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력 가문이었던 성씨로, 강서구 일대에 22필지를 보유했다는 것은 이 집안이 과해동에 일정한 기반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SECTION 10
10. 문화재 지표조사, 과해동에서 왜 지금 중요한가
강서구는 서울에서 가장 빠르게 개발이 진행된 지역 중 하나다. 마곡지구 개발이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어 지금도 진행 중이고, 김포공항과 인접한 위치 덕분에 물류와 상업 시설도 계속 들어서고 있다. 과해동 역시 이 개발의 물결 속에 놓여 있다.
그런데 3,053,174㎡의 광대한 땅, 368필지의 논, 30필지 75,408㎡의 묘역이 있었던 이 지역에서 얼마나 체계적인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특히 무덤 30필지의 위치를 현재 지도와 대조하는 작업, 잡종지 440,388㎡ 중 한강변 퇴적층이 있는 구역을 파악하는 작업, 이씨·장씨 가문의 대규모 선산 위치를 추적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2,054,888㎡의 논이 있었던 땅을 파면, 논 경작층에서 조선시대 농업 생활의 흔적이 나올 수 있다. 75,408㎡의 묘역이 있었던 자리를 파면, 조선 중기 이후의 중요 문화재가 출토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직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구역이 있다면, 그 땅을 파기 전에 먼저 읽어야 한다.
과해동·강서구 개발을 계획하고 있다면?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에서 강서구를 포함한 서울 25개 구의 1912년 토지조사 기록과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법적 절차 및 비용 정보를 무료로 확인하세요. 특히 30필지 묘역과 56필지 잡종지의 위치 추적에 관한 기초 조사 자료가 중요합니다.
SECTION 11
11. 발굴이 살려낸 이야기들 — 성공 사례
대규모 농경지와 묘역이 있었던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강서구 인근과 한강 하류 지역의 사례들이 잘 보여준다.
성공 사례 1
강서구 마곡동 — 개발 전 지표조사로 조선 농업 유구 확인
마곡지구 개발 과정에서 일부 구역에 대한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제적으로 시행됐고, 조선시대 수리 시설(보洑·수로) 관련 유구가 확인됐다. 한강 충적 평야 지대였던 마곡동의 농업 생산 시스템이 발굴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과해동과 지형 조건이 유사한 마곡동의 이 사례는 과해동 개발 시 유사한 발굴 가능성을 시사한다.
성공 사례 2
경기 김포 — 대규모 선산 발굴로 조선 중기 유물 출토
한강 하류 인근 김포 지역 택지 개발 과정에서 1912년 토지조사 기록과 현재 지도를 교차 분석한 지표조사를 통해 조선 중기 사대부 가문 선산이 확인됐다. 정밀 발굴조사 결과 16세기 분청사기 제기류와 묘지석, 청동 유물이 대량 출토됐다. 이씨·장씨 등 유력 가문이 대규모 토지를 보유했던 과해동의 30필지 묘역에서도 유사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성공 사례 3
서울 광화문 광장 — 조선 행정 중심지 유구 보존
광화문 광장 조성 공사 중 조선시대 의정부와 육조거리 유구가 발견됐다.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 구역이 역사 문헌 기록의 관청 밀집 지역과 겹친다는 사실이 미리 확인되어, 공사팀이 발굴 구역을 사전에 설정하고 공사 중단 없이 유물을 수습했다. 사전 지표조사가 역사 보존과 개발 효율을 동시에 달성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다. 과해동처럼 면적이 광대한 지역일수록 이런 사전 조사의 효과가 더욱 크게 나타난다.
이 세 사례의 공통점은 단 하나다. 파기 전에 읽었다는 것. 그 차이가 역사를 지키느냐 잃느냐를 결정했다. 3,053,174㎡의 과해동도 마찬가지다. 이미 개발된 구역은 어쩔 수 없지만, 아직 남아 있는 미개발 구역에서 지금이라도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이씨·김씨·장씨가 일궜던 그 땅의 기억 일부를 되살릴 수 있다.

SECTION 12
12. 에필로그 — 아파트 아래 흐르는 100년
강서구 과해동의 아파트 창문에서 바깥을 내다보자. 도로가 보이고, 다른 아파트가 보이고, 멀리 공항 관제탑이 보일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서울 외곽 주거지의 풍경이다.
하지만 그 창문 아래,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바닥 아래, 콘크리트 기둥과 기초가 박혀 있는 그 흙 속에 1912년의 과해동이 있다. 이씨 집안이 경작하던 논의 진흙. 장씨 집안 선산의 비석 조각. 김씨 농부가 가꾸던 밭의 고랑. 그리고 51채의 집에서 저녁마다 피어오르던 연기의 흔적.
우리는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도시는 사람이 살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땅은 변한다. 다만 변하기 전에, 그 땅이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3,053,174㎡. 368필지의 논, 157필지의 밭, 30필지의 무덤, 51채의 집. 그 숫자들 뒤에 이씨와 김씨와 장씨의 삶이 있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논을 돌보고,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 가족과 함께 앉아 불을 때던 그 삶들이. 그 삶들이 지금 강서구의 땅 아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채로, 조용히, 100년을 기다리며.
논 2,054,888㎡.무덤 75,408㎡.집 51채.
이씨, 김씨, 장씨가 일군 3백만㎡의 땅.그 위에 지금 강서구가 서 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한 번쯤 생각해보자.내 집 아래 흙 속에100년 전 누군가의 봄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그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같은 도시에서 다른 삶을 산다.이 글을 읽은 당신은,이제 아는 사람이 됐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기반 콘텐츠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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