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강동구 성내동의 숨겨진 이야기: 땅과 사람의 기록
- 2025년 5월 6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문화재 지표조사 · 문화재 발굴 기관 ·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강동구 아파트 아래,논밭이 있었다
1912년 성내동 — 1,687,445㎡의 땅, 밭 609,853㎡, 임야 325,373㎡. 이씨·김씨·유씨·민씨가 일군 그 땅의 100년 전 이야기를 문화재 발굴 기관이 꺼낸다
강동구 성내동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지금 올라가는 그 바닥 아래,100년 전엔 보리와 콩이 자라고 있었다.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강동구 성내동. 지금은 고층 아파트와 번화한 상권이 뒤섞인 서울 동부의 주거 중심지다. 그런데 1912년 이 땅의 기록을 열어보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총 450필지, 1,687,445㎡. 그 중 밭이 201필지 609,853㎡로 36%를 차지했고, 임야가 47필지 325,373㎡로 19%를 넘었다. 이씨 109필지, 김씨 100필지, 유씨 35필지, 민씨 23필지가 이 땅의 주인이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이 꺼낸 성내동의 충격적인 100년 전 기록, 지금부터 시작한다.
목 차
1. 프롤로그 — 타임머신을 타고 1912년 성내동으로
2. 문화재 지표조사가 열어준 성내동의 숫자들
3. 밭 201필지 609,853㎡ — 성내동을 먹여 살린 땅
4. 대지 30필지 — 30채의 집, 30개의 가족
5. 무덤 7필지 3,024㎡ — 조선의 흔적이 잠든 공간
6. 임야 47필지 325,373㎡ — 마을을 품은 울창한 숲
7. 성씨로 읽는 성내동 사람들
8. 민씨 23필지 — 성내동의 숨겨진 이야기
9. 지금의 강동구와 100년 전 성내동 사이
10. 문화재 지표조사, 강동구에서 왜 지금 필요한가
11. 발굴이 살려낸 이야기들 — 성공 사례
12. 에필로그 — 골목 아래 흐르는 100년

SECTION 01
1. 프롤로그 — 타임머신을 타고 1912년 성내동으로
강동구 성내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대형 마트, 지하철 5호선 성내역, 학원가, 아파트 단지. 한강 동쪽의 전형적인 서울 주거 지역 풍경이다. 성내동을 걷다 보면 이 동네가 이렇게 번화해지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1912년이라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성내동은 전혀 다른 세계다. 450필지, 1,687,445㎡. 지금의 성내동 상업지구와 아파트 단지를 모두 합쳐도 이 면적에 미치지 못할 광활한 땅이 논과 밭, 숲과 집과 무덤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땅 위에서 이씨, 김씨, 유씨, 조씨, 정씨, 민씨 집안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갔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성내동 토지 기록은 이 지역의 100년 전 풍경을 숫자로 증명한다. 그 숫자들 하나하나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을 이 글에서 함께 읽어나가 보자.
SECTION 02
2. 문화재 지표조사가 열어준 성내동의 숫자들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그 역사를 읽는 작업이다. 과거 문헌, 지적도, 고지도를 교차 분석하고 지표면 흔적을 수집하여 역사적 가치를 판단한다. 이 조사가 선행되어야 시굴조사, 표본조사,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성내동처럼 대규모 농경지와 임야, 묘역이 복잡하게 분포한 지역은 이 지표조사의 중요성이 특히 크다.
밭 201필지609,853㎡
(전체의 36%)
임야 47필지325,373㎡
(전체의 19%)
대지 30필지30,896㎡
무덤 7필지3,024㎡
이씨 109필지최다 소유
총 450필지1,687,445㎡
전체 면적 1,687,445㎡를 현재 감각으로 환산해보자. 한강공원 뚝섬지구 면적이 약 600,000㎡다. 성내동 하나의 면적이 뚝섬한강공원의 2.8배에 달한다. 그 광활한 땅의 36%가 밭이었고, 19%가 숲이었으며, 사람이 실제 거주했던 대지는 전체의 1.8%에 불과했다. 성내동은 사람이 사는 마을이기 이전에 자연과 농업의 공간이었다.

SECTION 03
3. 밭 201필지 609,853㎡ — 성내동을 먹여 살린 땅
201필지, 609,853㎡의 밭. 성내동에서 가장 넓은 지목이다. 1,687,445㎡ 전체의 36%가 밭이었다는 것은, 이 마을이 밭농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농업 공동체였음을 의미한다.
성내동이 밭 중심 마을이었던 이유가 있다. 강동구 일대는 한강 하류에 인접하지만, 성내동 자체는 지대가 비교적 높고 배수가 잘 되는 구릉 지형을 포함하고 있다. 논보다 밭에 더 적합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201개의 밭 필지에서는 보리, 콩, 조, 기장 같은 잡곡류가 주요 작물이었을 것이고, 계절에 따라 무, 배추, 고추 같은 채소류도 재배됐을 것이다.
201명의 서로 다른 농부가 각자의 밭을 돌봤다. 아침이면 괭이를 들고 나가고, 여름 炎천 아래서 김을 매고, 가을이면 수확물을 지게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반복이 성내동의 시간 감각이었다. 그 흙 속에 지금도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경작층이라는 형태로. 씨앗의 흔적, 농기구의 파편, 작물을 담았던 도기의 조각들이 609,853㎡의 땅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성내동 201개의 밭에서 자란 보리가 가족의 밥상이 됐고, 그 밥상이 마을을 지탱했다. 지금 그 자리에 아파트가 서 있지만, 땅은 기억한다."
SECTION 04
4. 대지 30필지 — 30채의 집, 30개의 가족
대지 30필지, 30,896㎡. 전체 면적 1,687,445㎡에서 1.8%에 해당하는 좁은 구역에 30채의 집이 모여 있었다. 숫자가 작아 보이지만, 이 30필지가 성내동의 실제 생활이 이루어지던 공간이었다.
필지당 평균 면적은 약 1,030㎡, 약 312평이다. 이것은 조선 말기와 근대 초기의 농가로서는 상당히 여유 있는 크기다. 안채와 사랑채, 광과 마당을 모두 갖춘 전통 한옥이 가능한 규모이고, 더 넉넉하다면 텃밭까지 딸린 구조도 가능하다. 성내동의 30가구는 아마도 소규모지만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된 농가들이었을 것이다.
30채의 집. 30곳의 아침 밥 짓는 연기. 30개의 우물, 30개의 마당, 30개의 이야기. 저녁이면 어른들이 사랑채에 모여 오늘 있었던 일을 나누고, 아이들은 마당에서 뛰어놀다 해가 지면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집으로 돌아가는 그 풍경. 30채라는 작은 숫자가, 이 마을이 서로 얼굴을 모두 아는 아주 가까운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이 대지 30필지는 온돌 구조, 우물, 부뚜막, 생활 도자기 등 당시 주거 문화의 흔적이 잠들어 있을 중요한 조사 구역이다. 특히 이씨 109필지, 김씨 100필지 등 유력 가문들의 집터는 상당한 규모의 생활 유구를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SECTION 05
5. 무덤 7필지 3,024㎡ — 조선의 흔적이 잠든 공간
7필지, 3,024㎡의 무덤. 대지(30,896㎡)의 10%에 해당하는 작은 면적이지만, 이 7개의 필지가 품고 있는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마을 어귀나 뒷산 자락에 집안 선산을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7필지라는 숫자는 성내동에 7개의 서로 다른 묘역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씨, 김씨, 유씨, 조씨 등 성내동의 주요 가문들이 각자의 선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명절이면 후손들이 선산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조상의 이야기를 나누며 가문의 유대를 다지는 것이 당시 공동체 문화의 핵심이었다.
3,024㎡라는 면적에서 어떤 유물이 잠들어 있을지를 생각하면 문화재 지표조사의 중요성이 더욱 실감난다. 조선시대 묘역에서는 분청사기, 백자, 청동 제기, 비석, 상석, 문인석 등이 발굴된다. 특히 강동구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한강 수운을 통한 도자기 유통이 활발했던 지역이기 때문에, 이 묘역에서 도자기류 부장품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성내동 7필지 무덤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이유
이씨 109필지, 김씨 100필지를 소유한 두 대가문이 성내동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7필지의 묘역 중 일부는 이들 가문의 선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규모 토지를 보유한 유력 가문의 선산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의 중요 부장품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재 이 7필지의 위치를 지도에서 추적하는 것이 성내동 문화재 지표조사의 1순위 과제입니다.

SECTION 06
6. 임야 47필지 325,373㎡ — 마을을 품은 울창한 숲
47필지, 325,373㎡의 임야. 전체 면적의 19%가 숲이었다. 대지(30,896㎡)의 열 배가 넘는 면적이 산과 숲이었다는 것은, 성내동이 지금처럼 도시화된 공간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공간이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임야 325,373㎡, 마을에서 담당했던 역할들
첫째, 생존 자원으로서의 역할. 땔감을 구하고 약초를 캐는 생계 공간이었다. 둘째, 수원(水源) 보호 기능.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마을의 용수를 공급했다. 셋째, 방풍·방재 역할. 한강 방향에서 오는 바람과 홍수를 완충하는 역할을 했다. 넷째, 문화 공간. 명절이면 산에 올라 조망하고, 여름이면 나무 그늘에서 쉬는 마을 사람들의 쉼터였다. 325,373㎡의 숲은 성내동이라는 마을을 유지하게 하는 생태적 기반이었다.
47필지에 걸쳐 분포한 임야는 아마도 성내동 북쪽과 동쪽의 야산 자락을 따라 형성됐을 것이다. 강동구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야산이 발달한 지역이다. 지금도 강동구에는 일자산, 명일근린공원 등 녹지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이 1912년 47필지 임야의 마지막 흔적일 수 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임야는 특히 주목해야 할 구역이다. 무덤이 임야 안에 조성되는 경우가 많았고, 임야 경계 부근에서 조선시대 생활 유구가 발견되는 사례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성내동의 임야 47필지 중 아직 개발되지 않은 구역이 있다면, 그 땅은 문화재 지표조사의 최우선 대상이 되어야 한다.
SECTION 07
7. 성씨로 읽는 성내동 사람들
이 모든 밭과 집, 숲과 무덤의 주인들은 누구였을까.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의 성씨 분포가 성내동 공동체의 구조를 보여준다.
성씨 | 소유 필지 수 | 특이 사항 |
이씨(李) | 109필지 | 압도적 1위 |
김씨(金) | 100필지 | 2위, 이씨와 양대 축 |
유씨(劉) | 35필지 | 3위, 이채로운 존재감 |
조씨(趙) | 27필지 | 4위 |
정씨(鄭) | 24필지 | 5위 |
민씨(閔) | 23필지 | 6위, 역사적 주목 |
나·구·서씨 등 | 소수 필지 | 다양한 성씨 공존 |
이씨 109필지, 김씨 100필지. 두 성씨를 합산하면 209필지로 전체 450필지의 46%를 넘는다. 성내동의 절반 가까운 땅이 이 두 가문의 손에 있었다는 뜻이다. 이 규모의 토지 집중은 이씨와 김씨가 단순한 농민이 아니라, 마을의 의사결정과 경제를 주도하는 유력 가문이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유씨 35필지가 3위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유씨는 강릉 유씨, 문화 유씨, 진주 유씨 등 다양한 계통이 있는데, 강동구 일대에 35필지의 땅을 보유했다는 것은 이 집안이 성내동에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씨 27필지도 주목할 만하다. 조씨는 한양 조씨, 양주 조씨 등 한강 유역에 오래전부터 기반을 가진 성씨들이 있어, 강동구 일대와의 역사적 연관을 찾아볼 여지가 있다.
SECTION 08
8. 민씨 23필지 — 성내동의 숨겨진 이야기
성내동 성씨 분포에서 특별히 더 깊이 살펴봐야 할 성씨가 있다. 민씨 23필지다.
민씨는 여흥 민씨가 대표적으로,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문이었다. 명성황후(明成皇后)가 바로 여흥 민씨였고, 민씨 외척 세력이 조선 말기 정치를 주도했던 역사적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1912년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지 불과 2년 후였는데, 이 시기에도 성내동에 민씨 23필지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은, 이 집안이 격동의 시대에도 토지 기반을 지키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성내동의 민씨 23필지가 여흥 민씨인지, 아니면 다른 계통의 민씨인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23필지의 토지를 보유한 민씨 가문이 성내동에서 일정한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가문의 역사를 추적하면 성내동이 조선 말기와 근대 초기에 어떤 정치·사회적 맥락 안에 있었는지를 더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다.
나씨, 구씨, 서씨 같은 소수 성씨들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성씨들은 주요 가문에 비해 필지 수가 적었지만, 성내동 공동체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크고 작은 가문이 함께 모여 이루는 마을이야말로, 1912년 성내동의 진짜 모습이었다.

SECTION 09
9. 지금의 강동구와 100년 전 성내동 사이
1,687,445㎡의 땅. 201필지의 밭, 47필지의 숲, 30채의 집, 7개의 무덤. 이씨와 김씨와 유씨와 민씨가 나눠 가졌던 450필지의 성내동. 그것이 지금의 강동구 성내동이 됐다.
강동구 성내동 일대는 1980년대부터 급속히 개발됐다. 한강 개발 사업과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이 맞물리면서 이 지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지하철 5호선 개통이 상권을 키웠다. 불과 40년 사이에 논밭이 아파트 숲으로 바뀐 것이다.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1912년 성내동이 품고 있던 역사적 층위를 제대로 기록하고 보존하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201필지의 밭 경작층, 47필지 임야의 역사적 흔적, 7필지 무덤의 유물. 이 모든 것이 1980년대 이후의 급속한 개발 과정에서 얼마나 보존됐는지는 알 수 없다.
SECTION 10
10. 문화재 지표조사, 강동구에서 왜 지금 필요한가
강동구는 지금도 계속 변하고 있다. 노후 아파트 단지 재건축이 진행 중이고, 신규 상업 시설이 들어서고 있으며, 도시 인프라가 지속적으로 확충되고 있다. 각각의 공사는 땅을 파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미리 파악하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다. 1912년 기록에 따르면 성내동에는 7필지의 묘역, 47필지의 임야, 201필지의 밭이 있었다. 이 지목들이 지금의 어떤 구역과 겹치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이씨·김씨 가문의 선산이 있었을 7필지 묘역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시급하다.
재건축 공사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조선시대 유구가 발견되는 일은 서울에서 드물지 않다. 공사가 중단되고 발굴조사가 시작되면 일정과 비용에 차질이 생긴다. 사전에 문화재 지표조사를 시행하면 이런 위험을 줄일 수 있고, 역사도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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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11
11. 발굴이 살려낸 이야기들 — 성공 사례
밭과 임야, 묘역이 복합적으로 분포했던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강동구 인근과 서울 내 유사 지역의 사례들이 잘 보여준다.
성공 사례 1
강동구 암사동 — 신석기 유적 발굴로 국사 교과서 바뀐 사례
강동구 암사동에서 1925년 한강 홍수 이후 신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됐고, 이후 수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토기 문화의 핵심 유적이 확인됐다. 지금 암사동 선사주거지는 국가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성내동과 같은 강동구 내에서 이런 대규모 발굴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성내동 지하에도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구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성공 사례 2
서울 송파구 — 조선시대 임야 경계부 묘역 발굴
송파구 일대 재개발 과정에서 1912년 토지조사 기록상 임야와 대지의 경계 구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선제적으로 시행했고, 조선 중기 집안 선산의 봉분과 비석 잔재가 확인됐다. 정밀 발굴조사로 17세기 백자 제기류가 수습됐으며, 공사는 해당 구역을 우회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지표조사가 공사 중단 없이 유물 보존을 가능하게 한 사례다.
성공 사례 3
경기 하남시 — 광주 이씨 선산 발굴
한강 동쪽 인접 지역인 하남시 일대 개발 과정에서 이씨 가문 선산이 확인됐다. 정밀 발굴조사 결과 16~18세기에 걸쳐 조성된 묘역에서 분청사기·백자 제기류와 묘지석 여러 기가 출토됐다. 이씨 109필지를 보유했던 성내동의 이씨 가문 선산 역시 이 수준의 발굴 가치를 가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강동구 암사동의 신석기 유적 사례는 특히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유적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나온다. 평범해 보이는 밭과 숲 아래, 논두렁 아래, 집터 아래. 성내동의 1,687,445㎡ 어딘가에서 우리가 아직 모르는 역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SECTION 12
12. 에필로그 — 골목 아래 흐르는 100년
오늘 성내동 골목을 걷는다면, 잠깐 발걸음을 멈춰보자. 어떤 건물 앞이든, 어떤 골목 어귀든. 지금 서 있는 그 자리가 100년 전에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씨 집안의 밭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씨 집안의 집터였을지도 모른다. 유씨 집안이 약초를 캐러 오르던 임야의 자락이었을지도 모른다. 민씨 집안의 선산이 있던 언덕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 도시는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1912년 성내동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을 일구고 이 땅에 묻혔다. 그들의 삶이 지금의 성내동을 만든 토대다. 아파트 기둥이 박힌 그 흙 속에 그들의 씨앗이 있고, 그들의 손길이 있고, 그들의 시간이 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이고,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발굴이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지금 이 글이다.
성내동은 오늘도 변하고 있다. 새 건물이 올라가고, 낡은 건물이 사라지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온다. 그 변화 속에서, 100년 전 이씨와 김씨와 유씨와 민씨가 남긴 흔적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채로, 기다리고 있는 그 기억들이.

밭 201개, 집 30채, 무덤 7기, 숲 47필지.
이씨가 일군 논, 김씨가 지킨 집,유씨가 올랐던 산, 민씨가 기도했던 선산.
그 모든 것이 지금 강동구 성내동 아래100년을 잠들어 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면서한 번만 생각해보자.이 건물이 서 있는 이 땅이,누군가의 봄이었고 누군가의 가을이었다는 것을.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이 도시를 더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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