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강동구 성내동의 숨겨진 이야기: 땅과 사람의 기록
- 서울 HI
- 8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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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100년도 더 지난 서울의 한 동네가 어땠을지 상상해본 적 있나? 지금은 빌딩과 아파트로 가득한 강동구 성내동이, 1912년에는 논과 밭, 그리고 소박한 집들이 펼쳐진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는 거! 그 시절, 이 땅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고, 어떤 삶을 꾸렸을까? 이 글은 1912년 성내동의 땅과 그곳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거야. 자,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떠나볼까?
목차
1912년 성내동, 어떤 모습이었을까?
논과 밭이 가득했던 농촌 마을
소박했던 집터, 그곳에 살던 사람들
무덤이 전하는 조선의 흔적
울창한 산과 임야의 비밀
성씨로 읽는 성내동의 주인들
과거를 통해 보는 오늘의 성내동

1. 1912년 성내동,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의 강동구 성내동은 번쩍이는 상점과 카페로 북적이는 도심이지만, 1912년에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어. 상상해봐. 끝없이 펼쳐진 논밭, 그 사이로 점점이 흩어진 초가집, 그리고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산. 총 450필지에 1,687,445㎡(약 51만 평!)에 달하는 이 땅은 농사와 자연, 그리고 사람들의 삶이 얽힌 공간이었지.
그 시절, 성내동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었어. 하지만 이곳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땅과 함께 숨 쉬었지. 논과 밭을 일구며, 집을 짓고, 가족을 지키며 살아갔던 그들. 과연 이 땅은 어떻게 나뉘어 있었을까? 하나씩 파헤쳐보자!
2. 논과 밭이 가득했던 농촌 마을
1912년 성내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건 바로 밭이었어. 무려 201필지에 609,853㎡(약 18만 평)이나 됐다고! 이건 성내동 전체 면적의 36% 정도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야. 당시 밭에서는 주로 보리, 콩, 조 같은 곡물을 키웠을 거야. 아침이면 농부들이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가 흙을 일구는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지 않나?
그런데 재미있는 건, 자료에 따르면 밭이 두 번 언급되는데 숫자가 조금 달라. 또 다른 기록에서는 165필지에 718,297㎡로 나와. 이건 아마도 조사 시점이나 기준이 달랐거나, 밭의 일부가 논으로 바뀌는 등의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커. 당시 성내동은 한강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 덕에 논농사도 가능했지만, 밭이 더 주를 이뤘던 걸 보면 이곳이 비교적 건조한 땅이었을지도!
이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아마 해가 뜨기 전부터 일 시작해서 해 질 때까지 땀 흘렸을 거야. 그들의 손에서 자란 곡물은 가족을 먹이고, 마을을 지탱했지. 지금 우리가 편의점에서 간편식을 사 먹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지 않나?
3. 소박했던 집터, 그곳에 살던 사람들
그럼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1912년 성내동에는 30필지, 30,896㎡(약 9,300평)에 달하는 대지가 있었어. 이건 집이 세워진 땅, 즉 주거지를 뜻해. 생각보다 적은 면적이지만, 당시 초가집이나 작은 기와집은 지금의 아파트처럼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았어. 한 필지에 한두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을 거야.
이 집들 사이로는 좁은 골목이 나 있었을 테고, 아이들은 마당에서 놀고, 어른들은 마을 우물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겠지. 30필지라는 숫자를 보면, 성내동은 그리 큰 마을은 아니었지만, 서로 얼굴을 아는 이웃들로 가득한 따뜻한 공동체였을 거야.
상상해봐. 저녁이면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된장찌개 냄새가 골목을 채우는 풍경. 지금의 성내동에서 이런 모습을 찾기란 불가능하지만, 그 시절엔 이게 일상이었던 거지!
4. 무덤이 전하는 조선의 흔적
조금 신비로운 이야기도 해볼까? 성내동에는 7필지, 3,024㎡(약 900평)에 달하는 무덤이 있었어. 이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 땅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역사와 가족의 흔적을 보여주는 거야. 조선 시대에는 선조의 무덤을 마을 근처에 두는 게 흔했어. 바람이 잘 통하고,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무덤을 만들어 조상을 기리곤 했지.
이 7개의 무덤은 아마도 마을의 유력한 가문이나 오래된 집안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무덤 옆에는 작은 제단이 있었을 테고, 명절이면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을 거야. 이 무덤들은 단순한 묘지가 아니라, 그 마을의 정체성과 가족의 뿌리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던 셈이야.
지금은 이런 무덤들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만약 성내동 어딘가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그 시절의 유물이나 흔적이 나올지도 몰라. 생각만 해도 설레지 않나?
5. 울창한 산과 임야의 비밀
성내동은 농사만 있었던 게 아니야. 47필지, 325,373㎡(약 9만 8천 평)에 달하는 임야, 즉 산과 숲이 있었어. 이건 전체 면적의 19% 정도를 차지하는 꽤 큰 비중이야. 이 임야에서는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쓰거나, 약초를 캐고, 때로는 사냥을 했을지도 몰라.
임야는 단순히 자원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었어. 마을 사람들에게는 쉼터이자, 아이들이 뛰놀며 모험을 즐기는 곳이었을 거야. 상상해봐. 여름이면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바람을 쐬고, 가을이면 단풍이 물든 산을 오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지금의 성내동에서는 상상도 못 할 풍경이지?
이 임야는 또한 마을의 경계를 지키는 자연의 방패 역할도 했을 거야. 한강 근처의 평야와 산이 어우러진 성내동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던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는 곳이었던 셈이야.
6. 성씨로 읽는 성내동의 주인들
이제 이 땅의 주인공들,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1912년 성내동에는 다양한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살았어. 그중 가장 많은 땅을 소유했던 건 이씨(109필지)와 김씨(100필지)였어. 이 두 성씨만 해도 마을의 절반 가까운 땅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야. 그 뒤로는 유씨(35필지), 조씨(27필지), 정씨(24필지), 민씨(23필지) 등이 이어졌고, 나씨, 구씨, 서씨 같은 성씨들도 제법 땅을 소유했어.
이 성씨들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야. 각 가문은 마을에서 나름의 역할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거야. 예를 들어, 이씨나 김씨 같은 큰 가문은 마을의 의사결정을 주도하거나, 농사를 이끄는 리더였을 가능성이 높아. 반면, 적은 필지를 가진 성씨들은 소작농이나 작은 집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이웃이었을지도.
재미있는 건, 이런 성씨 분포를 보면 당시 성내동이 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는 거야. 각 가문마다 자기만의 이야기와 전통이 있었을 테고, 그들이 함께 만들어간 마을은 지금의 성내동과는 전혀 다른 공동체였을 거야.
7. 과거를 통해 보는 오늘의 성내동
자, 이제 다시 2025년으로 돌아와보자. 1912년의 성내동은 논과 밭, 초가집과 무덤, 그리고 울창한 산으로 가득한 농촌 마을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고층 아파트와 번화한 상권, 그리고 끝없는 차 소리로 가득한 도심이 됐지. 이 변화는 단순히 건물이 늘어난 게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완전히 바뀐 거야.
그런데 가끔 궁금하지 않나? 지금 우리가 걷는 이 땅 아래에는, 100년 전 사람들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어딘가에는 그 시절의 도자기 조각이나, 무덤의 흔적, 심지어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남아 있을지도. 만약 우리가 시굴조사나 발굴조사를 통해 그 흔적을 찾아낸다면, 성내동의 숨겨진 이야기를 더 깊이 알 수 있지 않을까?
1912년 성내동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야. 이건 우리 땅, 우리 마을, 그리고 우리 뿌리에 대한 이야기야. 지금의 성내동을 더 사랑하고, 그곳에 깃든 역사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거지.
마무리
1912년 강동구 성내동은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었어. 그곳에는 사람들의 땀과 웃음, 그리고 삶의 흔적이 가득했지. 논과 밭에서 일하고, 초가집에서 가족을 지키고, 산과 숲에서 휴식을 취했던 그들. 그리고 그 땅을 물려받은 우리. 이 이야기를 읽으며, 너도 성내동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보는 건 어때? 어쩌면 다음번에 성내동 거리를 걸을 때, 100년 전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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