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종로구 교남동, 당신은 그 골목을 기억하나요?
- 서울 HI
- 6월 18일
- 2분 분량
[목차]
교남동, 시간의 주름 사이로 걷다
집들로 가득했던 마을, 160필지의 기억
교남동 사람들, 성씨로 본 동네 풍경
땅에 새겨진 이름들, 그들의 삶
오늘의 교남동에 전하는 한 마디
서울의 역사, 우리가 지켜야 할 이유
100년 전 종로구 교남동, 당신은 그 골목을 기억하나요?
지금의 종로구 교남동. 북촌도 아니고 서촌도 아니지만, 묘하게 정감이 가는 그 동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2년의 교남동은 어땠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현대식 골목길도, 세련된 카페도 없던 그 시절. 대신 그 자리에 놓여 있던 것은 사람의 흔적, 삶의 무게, 그리고 그 이름조차 평범했던 성씨들이었습니다.

1. 교남동, 시간의 주름 사이로 걷다
1912년의 교남동은 총 160필지, 23,024㎡의 대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겨우 그 정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숫자에는 수백 명의 숨결이 녹아 있었습니다.
거대한 아파트 한 동의 면적도 안 되는 그 땅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죠.
서로의 대문이 닫히지 않았던 시절, 아이들 웃음소리가 담 너머로 들려오던 마을. 바로 그곳이 1912년의 교남동입니다.
2. 집들로 가득했던 마을, 160필지의 기억
놀랍게도 교남동 전부가 ‘대지’, 즉 집터였습니다.
160필지 전부가 사람이 살던 터전이었다는 것. 논도, 밭도, 묘지도 없이 오직 삶만이 쌓여 있던 곳.
이건 도시 중에서도 중심이었던 ‘종로’라는 지리적 위치와 무관하지 않아요.
당시의 교남동은 지금의 느낌과는 또 다른 의미의 ‘핫플레이스’였던 셈이죠.
관청에서 일하던 관리들, 장사를 하던 상인들, 그리고 그 주변을 맴돌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살던 곳.
3. 교남동 사람들, 성씨로 본 동네 풍경
160필지 중, 김씨가 35필지, 이씨가 25필지, 박씨가 17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조선 3대 성씨’가 이 마을의 주인이었다는 사실.
누가 어디에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김씨네 집 앞 골목”이나 “이씨댁 담벼락 아래서 숨바꼭질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수두룩했겠죠.
흥미로운 건, 특정 성씨가 땅을 많이 소유했다는 건 그만큼 사회적 지위도 반영된다는 점이에요.
조용한 주택가 사이로 흐르던 그들의 삶은, 겉으론 평범해 보여도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4. 땅에 새겨진 이름들, 그들의 삶
1912년은 조선이 망하고 일본의 강점기가 시작된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교남동엔 그 흔적이 덜 남아 있었던 걸까요?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외부 세력의 땅이 아닌, 160필지 전부가 우리 이름, 우리 성씨의 사람들이 소유한 땅이었어요.
그건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그들이 이 땅을 얼마나 지켜내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일지도 모르죠.
길 하나, 대문 하나도 함부로 바꾸지 않았던 조선 사람들의 고집.
그 흔적이 지금도 교남동의 좁은 골목길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건 단순한 기분 탓만은 아닙니다.
5. 오늘의 교남동에 전하는 한 마디
지금의 교남동을 걷다 보면, 여전히 옛 모습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낡은 담벼락, 삐걱대는 나무 대문, 이름 모를 조그만 상점.
그 사이로 100년 전 김씨 할아버지나 박씨 아주머니가 걸어 나올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죠.
이 마을은 잊히지 않았고,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 눈이 너무 바빠서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6. 서울의 역사, 우리가 지켜야 할 이유
이제 서울이라는 도시는 높이와 속도로 경쟁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진짜 지켜야 할 건, 바로 이런 작은 동네의 이야기입니다.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 같은 작업은 단순히 땅을 파는 일이 아닙니다.
100년 전의 교남동처럼, 누군가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땅.
그 위에 우리는 또 다른 이야기를 쌓아가야 하기 때문이죠.
글 출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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