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서초구 내곡동, 이게 진짜 모습이라고?!
- 2025년 4월 5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5일
서울 문화유산 · 문화재 발굴조사
세종대왕이 처음 잠든 땅, 조선 태종의 왕릉이 있는 곳 — 1912년 서초구 내곡동 토지 기록과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가 밝히는 충격적 진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리서치팀 · 서초구 내곡동 지역조사 ·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시굴조사
1973년, 내곡동 땅속에서 세종대왕 영릉의 석물이 발굴됐다.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직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더 있다.
서초구 내곡동. 구룡산과 인릉산 사이 분지에 조용히 자리 잡은 이 동네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헌인릉이 있다. 조선 태종과 순조의 왕릉이 지금도 이 땅에 살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1973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내곡동 일대를 발굴조사하다 세종대왕 영릉의 석물을 발견했다. 세종대왕이 처음 잠들었던 초장지가 바로 이 땅이었던 것이다. 1912년 토지조사부에 기록된 내곡동의 373필지, 556,177㎡. 그 숫자 안에 경주김씨 집성촌의 186필지, 홍씨마을의 83필지, 그리고 왕릉을 품은 분지 마을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가 이 땅에서 무엇을 더 찾아낼 수 있을지, 지금부터 시작한다.

목 차
1. 내곡동, 안골 — 왕릉을 품은 분지 마을의 역사
2. 1912년 내곡동 토지 전체 통계 — 373필지의 구성
3. 밭 129필지, 왕릉 아래 농촌 마을의 생생한 풍경
4. 집터 60필지 — 경주김씨·홍씨 마을의 생활 공동체
5. 묘지 4필지와 잡종지 7필지 — 문화재 발굴의 핵심 타깃
6. 김씨 186필지·홍씨 83필지, 집성촌의 압도적 계보
7.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로 무엇을 찾을 수 있나
8. 실제 발굴 성공 사례와 내곡동의 무한한 가능성
01
내곡동, 안골 — 왕릉을 품은 분지 마을의 역사
내곡동의 충격적인 역사
세종대왕이 처음 잠든 땅,
태종·순조의 왕릉이 있는 곳
내곡동(內谷洞). '안골·안말'이라 불리던 이 동네가 한자로 내곡이 됐다. 구룡산과 인릉산 사이 분지에 자리 잡은 이 땅에는 조선 3대 태종과 23대 순조의 능인 헌인릉(사적 194호,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세종대왕이 1450년 승하 후 처음 안장됐던 영릉(英陵) 초장지가 바로 이 내곡동 일대다. 1469년 여주로 이장할 때 석물들을 땅에 묻어두었고, 1973년 발굴조사에서 실제로 영릉 석물들이 발견됐다. 조선시대 이 땅은 헌릉이 있어 주택이 들어설 수 없었고, 수목이 울창해 호랑이·여우가 출몰하던 신성한 왕릉 보호 구역이었다.
내곡동이라는 이름이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 동네를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 조선 왕릉 보호 구역이었다가, 세종대왕 영릉의 석물이 땅속에 묻혀 있었다가, 경주김씨 집성촌이 안골에 터를 잡은 이 땅.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내곡동의 1912년 토지 기록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왕릉 관련 의례 유구, 석물 파편, 능역 경계 구조물 등이 지표 아래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서울 내 어느 지역보다도 높기 때문이다.
현재도 내곡동에는 경주김씨 집성촌인 안골마을, 능 안쪽 마을인 능안마을, 홍씨들이 모여 사는 홍씨마을 등 전통 자연부락들이 산재해 있다. 13대째 내곡동에서 살고 있는 주민이 있을 정도로 이 동네의 역사적 연속성은 매우 깊다. 그 연속성의 뿌리가 1912년 토지 기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02
1912년 내곡동 토지 전체 통계 — 373필지의 구성
1912년 서초구 내곡동의 토지 기록을 보면 총 373필지, 556,177㎡의 면적이 공식 문서에 기재되어 있다. 지금으로 치면 약 16만 8천 평에 달하는 규모다. 앞서 살펴본 염곡동(377필지, 646,389㎡)과 필지 수는 비슷하지만 면적이 조금 작다. 구룡산과 인릉산이 사방을 에워싼 분지 지형 특성상 경작 가능한 평지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373
총 필지 수
556,177㎡
총 면적
129필지
밭 (전)
60필지
집터 (대지)
4필지
묘지 (분묘)
7필지
잡종지
지목별로 살펴보면 밭이 129필지, 284,483㎡로 전체 면적의 약 51.1%를 차지한다. 집터는 60필지, 34,178㎡. 잡종지는 7필지이지만 면적이 33,225㎡로 상당히 넓다. 묘지는 4필지, 3,573㎡다.
밭 (전)
51.1%
기타 큰 비중
집터
6.1%
묘지·기타
1.3%
내곡동 토지 구성의 가장 큰 특징은 헌인릉이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왕릉이 이 분지 안에 실재한다는 점이다. 1912년 기록에 잡혀있는 373필지는 왕릉 보호 구역 주변 농촌 마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세종대왕 영릉 초장지의 석물이 실제로 이 땅에서 발굴된 역사적 사실은, 내곡동이 서울 내에서도 가장 특별한 문화재 발굴조사 대상 지역임을 증명한다.

03
밭 129필지, 왕릉 아래 농촌 마을의 생생한 풍경
1912년 내곡동에서 밭이 129필지, 284,483㎡로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는 것은 이 동네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내곡동의 밭은 단순한 농업 용지가 아니었다. 헌인릉이라는 왕릉 인근의 경작지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무게가 다르다.
조선시대 왕릉 주변 지역은 엄격하게 관리됐다. 헌릉이 있어 주택이 들어설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처럼, 왕릉 보호 구역 안팎에서의 생활에는 여러 제약이 따랐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곡동 주민들은 129필지의 밭을 일구며 생계를 유지했다. 무, 배추, 고구마 같은 작물을 재배하며 삶을 이어갔을 이 밭들에서는 조선시대 농업 유구와 함께 왕릉 관련 생활 흔적이 복합적으로 발견될 수 있다.
이 지역의 농업 역사는 1912년 이후에도 이어졌다. 내곡동 일대는 강남이 개발되기 전까지 서울에 채소류를 공급하는 도시농업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한때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양돈·양계 마을이 있기도 했다. 이런 오랜 농업 역사는 지표 아래에 다층적인 농경 유구를 남겼을 가능성이 있다.
왕릉 보호 구역 인근의 밭 129필지에서는 일반 농촌 경작지와 다른 특수한 유구가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왕릉 관련 관리 시설, 능역 경계 구조물, 제사 관련 의례 유구가 밭 지대와 인접하여 확인될 수 있다. 실제로 1973년 내곡동 발굴조사에서 세종대왕 영릉 석물이 발견된 것이 이 가능성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04
집터 60필지 — 경주김씨·홍씨 마을의 생활 공동체

집터(대지) 60필지, 34,178㎡. 내곡동의 실제 주거 공간이다. 필지당 평균 약 570㎡, 약 172평의 집터들이 60곳에 흩어져 있었다. 이 집터 구성은 내곡동이 여러 자연부락으로 나뉜 분산형 마을 구조였음을 보여준다. 안골마을, 능안마을, 홍씨마을, 샘마을 등이 각기 다른 지점에 흩어져 있었을 것이다.
내곡동은 처음 경주김씨가 안골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이후 홍씨 집안이 들어오면서 홍씨마을이 생겼고, 두 집안이 함께 이 분지 안에서 오랜 세월을 공존해왔다. 이 집터 60필지에서 경주김씨와 홍씨 집안의 생활 유구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다면, 이는 단순한 생활사 복원을 넘어 두 집성촌 가문의 수백 년 역사를 물적 증거로 재구성하는 귀중한 성과가 될 수 있다.
조선시대 집성촌의 집터에서는 건물지, 우물, 온돌 구조물 외에도 가문과 관련된 특별한 유물이 출토되는 경우가 있다. 종가(宗家) 집터라면 제사에 사용된 제기류, 문서 관련 유물, 가보로 내려오던 도자기류가 나올 수 있다. 왕릉 인근 집성촌이라는 내곡동의 특수성은 이런 유물의 가능성을 더욱 높인다.
05
묘지 4필지와 잡종지 7필지 — 문화재 발굴의 핵심 타깃
내곡동 1912년 기록에서 묘지 4필지, 3,573㎡와 잡종지 7필지, 33,225㎡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항목이다. 이 두 지목이 내곡동 전체 토지 구성에서 가지는 의미는 단순한 면적 수치를 훨씬 뛰어넘는다.
묘지 4필지는 1912년 당시 내곡동 주민들의 분묘가 마을 인근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맥락이 있다. 내곡동은 헌인릉이라는 왕릉이 실재하는 동네다. 왕릉 인근에 형성된 마을의 분묘는 일반 농촌 마을의 분묘와 다른 성격을 가질 수 있다. 왕릉 관리인이나 능참봉과 같은 왕릉 관련 관리들의 분묘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묘에서는 일반 서민층 분묘보다 질 높은 도자기, 제기류, 관련 유물이 출토될 수 있다.
잡종지 7필지, 33,225㎡는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잡종지는 논도 밭도 집터도 아닌 다목적 용지로, 창고, 작업장, 공터, 혹은 왕릉 관련 부속 시설이 있었을 수 있다. 헌릉과 인릉 주변에는 조선시대 왕릉 관리에 필요한 다양한 시설이 있었을 것이다. 제사용 두부를 만드는 조포사 같은 부속 기관, 능을 지키는 수호 시설, 제례 준비 공간 등이 이 잡종지 구역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
내곡동의 묘지 4필지와 잡종지 7필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헌인릉이라는 역사적 맥락과 결합될 때 완전히 다른 발굴 가능성이 열린다. 단순한 마을 분묘나 빈터가 아니라, 조선 왕릉 관련 의례 시설과 관리 인력의 흔적이 이 구역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내곡동 발굴조사를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다.

06
김씨 186필지·홍씨 83필지, 집성촌의 압도적 계보
1912년 내곡동 토지 기록에서 성씨별 분포를 보면 두 집안의 압도적 존재감이 드러난다. 김씨가 186필지로 1위를 차지했고, 홍씨가 83필지로 2위를 기록했다. 이 두 성씨만으로 전체 373필지의 72.4%를 차지한다.
순위 | 성씨 | 필지 수 | 비고 |
1 | 김씨 (金) | 186필지 | 경주김씨 안골 집성촌 |
2 | 홍씨 (洪) | 83필지 | 홍씨마을 집성촌 |
합계 | 269필지 (72.4%) | 두 집안이 사실상 마을 지배 | |
김씨 186필지. 경주김씨가 처음 안골에 정착한 이래 대대로 내려온 토지가 이 숫자로 응축된 것이다. 홍씨 83필지. 강남구 세곡동 홍씨 집성촌에서 파생된 일파가 내곡동에 정착해 수백 년간 이어온 역사가 이 숫자 뒤에 있다. 두 집안을 합치면 373필지의 72.4%를 차지한다. 이는 내곡동이 단순한 혼합 농촌 마을이 아니라, 두 집성촌 가문이 함께 이끈 강력한 씨족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집성촌의 특성상 두 가문의 종가 집터 주변에서는 제사 관련 유물, 세대를 이어 사용된 도자기류, 가문 특유의 생활 방식과 연관된 유구가 집중적으로 출토될 수 있다. 염곡동의 창녕조씨 186필지 사례에서 보듯, 이렇게 특정 집안이 집중 보유한 구역은 발굴조사에서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가진다.
지금도 내곡동에는 '홍씨마을 경로당'과 '홍씨마을길'이 남아 있다. 13대째 내곡동에 살고 있는 주민도 있다. 이 살아있는 역사적 연속성은 문화재 발굴조사의 방향을 잡는 데 매우 중요한 구술 사료가 된다.

07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로 무엇을 찾을 수 있나
1912년 내곡동 기록과 헌인릉·세종대왕 영릉 초장지라는 역사적 맥락을 결합하면 발굴 방향이 매우 구체적으로 설정된다. 문화재 조사는 지표조사에서 시작해 표본조사, 시굴조사, 정밀발굴조사의 순서로 이어진다.
지표조사 단계에서는 세 구역이 최우선이다. 첫째, 묘지 4필지 구역이다. 헌인릉 관련 왕릉 관리인의 분묘가 포함될 가능성이 있어 지표면 관찰만으로도 비석 조각, 경계석, 지형 변화가 확인될 수 있다. 둘째, 잡종지 7필지, 33,225㎡ 구역이다. 조선시대 왕릉 부속 시설의 건물지 잔재가 지표면 가까이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경주김씨 집성촌 안골마을 인근 집터 구역이다. 종가 집터와 관련된 생활 유구의 지표면 흔적을 집중 관찰해야 한다.
시굴조사 단계에서는 묘지 구역과 잡종지 구역을 중심으로 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잡종지 33,225㎡라는 넓은 구역은 조선 왕릉 관련 부속 시설의 유구가 상당 부분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헌인릉 인근에서의 조사는 조선왕릉을 정식으로 발굴한 유일한 선례가 있을 만큼 이 지역의 발굴 역사적 가치가 이미 입증되어 있다.
밭 129필지 구역에서는 농업 유구와 함께 왕릉 관련 경계 시설, 제사용 작물 경작지의 흔적이 복합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 집터 60필지에서는 경주김씨와 홍씨 집안의 건물지, 우물, 온돌 구조물, 제기류가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내곡동은 단층이 아닌 다층적 문화층이 형성되어 있는 매우 풍부한 발굴 대상지다.
08
실제 발굴 성공 사례와 내곡동의 무한한 가능성
내곡동의 발굴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유사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실제 발굴조사 성공 사례들을 살펴보자.
성공 사례 01 · 내곡동 자체 — 1973년 세종대왕 영릉 석물 발굴
내곡동 발굴조사의 가장 극적인 선례는 바로 이 동네에서 나왔다. 1973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내곡동 일대를 발굴조사하다 세종대왕 영릉의 석물을 실제로 발견했다. 1469년 여주로 이장할 때 땅에 묻어둔 석물들이 500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 사례는 내곡동 땅속에 얼마나 귀중한 왕실 관련 유물이 잠들어 있을 수 있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역사적 사례다.
성공 사례 02 · 용산구 한남동 — 분묘지 기록이 이끈 제기류 출토
한남동의 1912년 기록에 포함된 분묘지 23필지를 기반으로 진행된 시굴조사에서 도자기 조각, 묘비 파편, 제기류가 실제로 출토됐다. 내곡동의 묘지 4필지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왕릉 관련 역사적 맥락이 더해져 한남동보다 훨씬 특수하고 귀중한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성공 사례 03 · 서초구 염곡동 — 인접 창녕조씨 집성촌 사례
내곡동과 같은 서초구의 염곡동은 창녕조씨 충정공파 600년 집성촌이었다. 조씨 문중이 186필지를 집중 보유한 염곡동의 사례에서 특정 가문의 집중 토지 소유가 어떻게 발굴 방향을 결정하는지가 확인됐다. 내곡동도 김씨 186필지와 홍씨 83필지라는 유사한 집성촌 구조를 가지고 있어, 염곡동 사례가 직접적인 참고 모델이 된다.
성공 사례 04 · 마포구 서교동 — 도시화 지역에서 삼국시대 토기 출토
지금 홍대 앞으로 유명한 서교동에서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건물지, 조선 전기 도자기, 삼국시대 토기까지 출토됐다. 도심 지역이라도 땅속에는 다층적 시대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음을 입증한 사례다. 내곡동은 세종대왕 영릉 초장지라는 역사적 배경과 조선 왕릉이 현존하는 특수성으로 인해 이보다 훨씬 더 특별하고 다양한 유물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사례들이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다. 내곡동은 서울 내에서도 가장 특별한 문화재 발굴조사 대상지 중 하나다. 세종대왕 영릉 초장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헌인릉, 경주김씨와 홍씨 집성촌, 그리고 왕릉 보호 구역 안팎의 복합 생활 공간.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분지 안에 집약된 내곡동의 발굴 잠재력은 서울 그 어디와도 비교하기 어렵다.
내곡동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 문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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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처음 잠든 그 땅 위로지금 우리가 걷고 있다."
내곡동을 지날 때 한 번쯤 멈춰 서서 발밑을 느껴보길 바란다. 1446년 소헌왕후가 먼저 이 땅에 안장됐고, 1450년 세종대왕이 그 옆에 합장됐다. 500년 뒤인 1973년, 그 석물들이 내곡동 땅속에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지금도 태종과 순조의 왕릉이 이 분지 안에서 숨을 쉬고 있다. 경주김씨 집성촌이 안골에 뿌리를 내린 지 수백 년, 홍씨마을이 이 왕릉 곁에서 함께한 시간도 수백 년이다. 1912년의 373필지, 556,177㎡는 그 모든 시간이 숫자로 응축된 기억이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그 기억을 땅속에서 다시 꺼내는 작업이다. 우리가 그 기억을 지키는 것이, 이 땅과 이 땅에 잠든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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