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년 전 강서구 공항동에는 비행기가 없었다?!
- 서울 HI
- 6월 22일
- 2분 분량
서울 강서구 공항동.
지금은 김포공항과 항공산업의 중심지라는 이미지가 강한 동네지만, 100여 년 전, 이곳은 놀라울 만큼 조용하고 평화로운 ‘농촌’이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1912년, 그러니까 아직 일제강점기가 본격화되기 전이던 그 해, 공항동은 604필지, 무려 226만㎡가 넘는 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의 공항동 모습을 들여다보면, 서울의 도시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우리 땅의 과거와 오늘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논과 밭, 그리고 사람들
당시 공항동은 밭이 가장 넓었습니다. 324필지, 111만㎡가 넘는 밭이 있었고, 그 다음이 논이었죠. 논은 178필지, 90만㎡ 정도. 쉽게 말해, 지금의 공항동은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활주로와 고속도로가 있는 곳이지만, 1912년엔 농민들이 벼를 심고, 보리를 키우며 살아가던 삶의 터전이었던 겁니다.
주목할 점은 대지, 즉 집이 지어진 땅은 70필지, 약 11만㎡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곡식이 먼저였던 시절. 이는 당시의 인구 밀도와 생활 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죠.
⛰️ 산과 잡종지, 잊혀진 땅들의 의미
산림, 즉 임야는 17필지에 불과했지만, 약 6만 4천㎡가량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잘 쓰지 않는 말, 잡종지. 이름만 들으면 이상한 땅 같지만, 사실 이건 창고, 길, 우물터 등으로 쓰였던 다양하고 실용적인 공간을 의미합니다. 49,861㎡나 되니, 결코 적지 않은 면적이었죠.
이 잡종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당시에도 마을을 운영하기 위한 ‘공공 공간’이 일정 부분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지금 우리가 도시계획을 할 때 ‘공공부지’를 확보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에요.
👨🌾 누가 이 땅을 소유했을까?
1912년 공항동을 구성한 성씨들을 보면 재미있는 점들이 보입니다. 김씨가 213필지로 가장 많고, 이씨가 161필지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최씨, 정씨, 박씨, 임씨 등 다양한 성씨들이 고르게 땅을 나눠 소유하고 있었죠.
이건 곧 단일한 씨족 중심의 마을이 아닌, 여러 가문이 공존하던 복합적인 농촌 공동체였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김씨와 이씨는 뚜렷한 대다수였지만, 나머지 성씨들도 고루 분포된 점은 ‘지역 중심’보다는 ‘경제적 이유나 혼인 관계’로 모여 살았을 가능성을 암시해요.
🏛️ 국유지 17필지, 그 의미는?
공항동에는 17필지의 국유지도 있었습니다. 당시로선 조선 왕조에서 일본 제국으로 넘어가던 혼란기였기 때문에, 이런 국유지는 행정적, 군사적 목적으로 관리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1939년, 이 지역은 비행장으로 바뀌게 되죠. 그러니 이 국유지가 바로 김포공항의 전신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가능합니다.
🧩 1912년의 공항동 vs 오늘의 공항동
공항동은 지금, 서울의 하늘을 여는 ‘공항 관문’이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 공간입니다. 그런데 불과 100년 전, 여긴 조용한 농촌이었고, 사람들이 땅을 일구며 살아가던 곳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발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곧 도시화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인 거죠.
과거의 밭과 논, 잡종지 위에 오늘의 활주로와 아파트, 고속도로가 놓인다는 건… 조금은 아이러니하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얼마나 큰 흐름 속에 살고 있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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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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