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 깊은 곳,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는 과연 무엇이 숨어 있을까요?
우리가 걷는 땅 아래에 조선시대가 잠들어 있다 — 시굴조사와 발굴조사, 역사의 문을 여는 두 가지 방법
목차
1부. 서울 한복판에서 세종대왕 시대 금속활자가 나온 날
2부. 발굴의 시작은 언제나 시굴조사 — 탐정이 먼저 현장을 훑는 이유
3부. 시굴조사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 좁고 긴 도랑이 만들어내는 기적
4부. 정밀발굴조사 — 탐정에서 외과의사로
5부. 시굴과 발굴의 차이, 이렇게 생각하면 쉽다
6부. 땅에서 유물이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7부. 발굴된 유물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8부. 발굴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는 방법
9부. 마무리 — 땅을 파는 일은 미래를 위한 기억이다

1부. 서울 한복판에서 세종대왕 시대 금속활자가 나온 날
2021년 가을,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도심 재개발 현장에서 발굴 중이던 고고학자들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흙 속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수를 세는 것이 의미 없어질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인사동 유적 발굴조사에서 16세기 문화층의 건물지에서 1600여 점에 이르는 금속활자가 출토됐으며, 문헌으로만 알려진 조선 전기 과학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금속유물들이 함께 발견됐다.
그것은 세종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한글 금속활자였다. 한자를 표준음에 가깝게 발음하기 위해 15세기만 사용되다 사라졌던 동국정운식 표기가 실물 활자로는 처음 발견됐으며, 다양한 크기의 활자가 다량으로 출토된 최초의 사례였다.
수백 년 동안 서울 땅속 2미터 아래에 잠들어 있던 세종 시대의 기억이, 재개발 공사 현장의 발굴 과정에서 깨어났다. 그 발견이 가능했던 것은 발굴조사가 체계적으로, 그리고 단계별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만약 발굴 절차 없이 공사가 먼저 진행됐다면, 그 활자들은 영원히 파묻혔거나 부서졌을 것이다.
이 글은 그 발굴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시굴조사와 정밀발굴조사가 어떻게 다른지를 생생하게 풀어낸다.
2부. 발굴의 시작은 언제나 시굴조사 — 탐정이 먼저 현장을 훑는 이유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형사가 사건을 수사할 때 처음부터 집 전체를 뒤집어 놓지는 않는다. 먼저 현장을 훑고, 단서를 찾고, 범위를 좁혀간다.
발굴조사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넓은 면적을 전부 파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땅에 뭔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예비 단계가 있다. 그것이 시굴조사다.
시굴조사에서는 유존지역을 부분적으로 조사하여 유적의 범위와 대략적인 성격을 파악한다. 구체적으로는 조사 대상 지역의 10퍼센트 이하 범위에서만 땅을 파서 확인하는 방식이다. 전체를 뒤집어 보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선택한 지점들을 파서 전체를 추론하는 것이다.
시굴조사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시굴조사 결과에 따라 다음 단계가 결정된다. 유물이 나오지 않으면 공사를 진행할 수 있는 조치 통보를 기다리면 되고, 유물이 확인되면 정밀발굴조사로 넘어간다. 이 단계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이후의 복잡한 절차를 피할 수 있다. 가장 빠른 경로는 시굴조사에서 깔끔하게 결론을 내는 것이다.
3부. 시굴조사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 좁고 긴 도랑이 만들어내는 기적
시굴조사의 핵심 방법은 트렌치 조사다. 너비 1에서 2미터 정도의 좁고 긴 도랑을 일정한 간격으로 파는 것이다.
왜 넓게 파지 않고 좁게 파는가. 땅속의 유물 분포를 파악하는 데는 넓이보다 단면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트렌치를 파면 지층의 단면이 드러난다. 흙의 색깔이 달라지는 층, 탄 흔적이 남은 층, 특정 물질이 섞인 층을 보면 어떤 시대의 어떤 활동이 이곳에서 있었는지를 추론할 수 있다. 유물이 출토되면 그 위치와 깊이가 어느 시대 문화층에 속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트렌치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는 이유는 유적의 분포 범위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 지점에서는 나왔는데 저 지점에서는 나오지 않았다면, 유적의 경계선이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지표투과레이더나 드론 항공 촬영 같은 도구도 활용된다. 땅을 파지 않고도 지하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어서, 실제로 파야 할 위치를 더 정확하게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4부. 정밀발굴조사 — 탐정에서 외과의사로

시굴조사에서 유물이 확인됐다. 이제 정밀발굴조사가 시작된다.
역할이 바뀐다. 시굴조사가 탐정처럼 단서를 찾는 과정이었다면, 정밀발굴조사는 외과의사처럼 정밀하게 개입하는 과정이다. 확인된 유적 분포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문화층이 있는 깊이까지 흙을 체계적으로 제거하면서 유물과 유구를 정밀하게 조사한다.
정밀발굴에서 중요한 것은 유물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는 것이다. 유물이 발견된 순간부터 수습되는 순간까지의 모든 과정이 기록된다. 어느 깊이에서 발견됐는지, 주변에 다른 유물이나 유구가 있었는지, 어느 방향으로 놓여 있었는지, 주변 흙의 색깔과 질감은 어떠했는지. 이 모든 정보가 유물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필수적인 맥락이 된다.
예를 들어, 도자기 조각 하나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어느 깊이의 어느 문화층에서 나왔는지를 알면 그 도자기가 만들어진 시대를 추정할 수 있다. 주변에 불에 탄 흔적이 있다면 화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정 방향으로 누워 있었다면 원래 어떤 용도로 사용됐는지를 추론할 수 있다. 보고서에는 유적의 자연환경과 입지, 역사적 배경, 유구 및 유물의 발굴상태, 고찰 등 발굴 과정의 모든 상황이 정리·기록된다.
5부. 시굴과 발굴의 차이, 이렇게 생각하면 쉽다
두 조사의 차이를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시굴조사는 "여기 뭔가 있나요?"라는 질문이고, 정밀발굴조사는 "여기 있는 게 뭔지 전부 알려주세요."라는 질문이다.
시굴조사는 유존지역의 10퍼센트 이하만 파고, 정밀발굴은 유존지역 전체를 파낸다. 면적 차이가 최소 10배다. 기간도 그에 비례해서 달라진다. 시굴조사는 며칠에서 몇 주, 정밀발굴은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이 걸릴 수 있다. 비용도 마찬가지다.
시굴조사가 넓고 빠르게 가능성을 탐색한다면, 정밀발굴은 좁고 깊게 실체를 규명한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이 성립하지 않는다. 시굴이 없으면 어디를 정밀하게 파야 할지 모르고, 정밀발굴이 없으면 시굴에서 확인된 유물의 실체를 알 수 없다.
가장 좋은 결과는 시굴조사에서 유물이 나오지 않아서 정밀발굴 없이 공사를 재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물이 나왔다면, 그것은 새로운 역사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기도 하다.
6부. 땅에서 유물이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정밀발굴조사가 완료되면 보존 조치 결정이 내려진다. 세 가지 방식 중 하나다.
현지보존은 유적을 원래 자리에 그대로 남기는 방식이다. 다시 흙으로 덮어서 보존하거나 외부에 노출시켜 전시하는 형태다. 인사동 발굴 현장처럼 고층 빌딩 지하에 유적을 그대로 보존하고 전시관을 만드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전보존은 유물이나 유적을 박물관이나 다른 장소로 옮겨서 보존하는 방식이다. 이전이 완료되면 해당 구역에서 공사를 계속할 수 있다.
기록보존은 발굴 결과를 보고서, 사진, 도면 등으로 철저히 기록해서 남기는 방식이다. 물리적으로 유물을 옮기거나 현지에 남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공사를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다.
어떤 조치가 내려지든, 발굴 과정에서 수습된 유물들은 국가에 귀속된다. 개인이 가져가거나 처분할 수 없다. 이것이 법이 정한 원칙이다. 땅속에 묻혀 있던 역사는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7부. 발굴된 유물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인사동에서 나온 세종 시대 금속활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서울 곳곳에서 발굴된 수많은 유물들은 어떻게 됐을까.
서울 시청 건립 과정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무기 제조기관인 군기시의 건물터와 호안석축은 발굴 현장 그대로 복원되어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조선시대 상가 거리였던 종로의 시전행랑 유구는 2004년 청진동 피맛골 일대 재개발 과정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점포 흔적으로, 복원 과정을 거쳐 현재 보존되어 있다.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서울 강동구에 위치한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암사동 유적은 한강변에 자리 잡고 있으며 20여 채의 움집터와 부속시설이 확인됐으며, 그 연대는 기원전 3천에서 4천년으로 지금부터 5천에서 6천년 전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누구나 찾아갈 수 있다.
서울 땅속 어딘가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다.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거리 아래, 우리가 사용하는 건물 지하에 수백 년의 역사가 층층이 쌓여 있다.
8부. 발굴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는 방법

발굴 현장은 외부인에게 항상 개방되어 있지는 않다. 발굴이 진행 중인 현장은 안전 문제와 유물 보호를 위해 접근이 제한된다. 하지만 발굴의 과정과 결과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가장 가까운 곳은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다. 서울 종로구 센트로폴리스 빌딩 지하 1층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층 빌딩 지하에 조선시대 골목길과 집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발굴 현장을 정교하게 보존해서 시민들이 직접 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공간이다. 무료로 운영되며 서울 역사에 관심 있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5천 년 전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이다. 움집을 복원해놓은 공간과 당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이 함께 운영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전국 발굴 현장에서 수습된 유물들을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출토 유물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또한 국가유산청은 주요 발굴 현장을 공개 발굴로 운영하는 경우가 있다. 일반 시민이 발굴 과정을 직접 참관하거나 체험할 수 있는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9부. 마무리 — 땅을 파는 일은 미래를 위한 기억이다
서울 인사동 지하 2미터에서 세종대왕 시대의 금속활자가 나온 그 순간을 떠올려보자.
수백 년 동안 그 글자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것은 발굴 현장에서 작은 붓으로 흙을 걷어내던 고고학자의 손이었다. 그 손이 멈추지 않았다면, 그 순간을 기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발굴조사라는 제도와 절차였다.
시굴조사는 그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을 탐색하는 첫 번째 문이다. 정밀발굴조사는 그 문을 열고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본격적인 여정이다. 두 조사는 서로 다른 단계이지만 하나의 목적을 향한다. 사라진 것을 되찾고, 잊혀진 것을 기억하고, 과거를 미래에게 전달하는 일.
그 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 어딘가의 땅속에서, 조용히 계속되고 있다.
당신이 오늘 걸어간 그 길 아래에도 어쩌면 누군가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그 이야기가 언젠가 빛 속으로 나오는 날을 기다리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