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구 보광동의 1912년, 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서울 HI
- 6월 2일
- 2분 분량
목차
뜻밖의 발견, 보광동의 1912년
논과 밭이 말해주는 당시 풍경
한 세기 전, 보광동 사람들의 삶의 터전
산과 무덤, 보광동이 품었던 이야기
흔적을 따라, 국유지와 동척의 그늘
오늘날의 보광동, 역사의 씨앗이 싹튼 곳
용산구 보광동의 1912년, 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누구나 한 번쯤 ’우리 동네는 옛날에 어땠을까?’라는 궁금증을 품어본 적 있을 거야.
높게 솟은 빌딩, 북적거리는 사람들, 그리고 한강의 풍경. 지금의 보광동과는 다른, 한 세기 전 이곳의 진짜 이야기를 만나볼래?

보광동은 무려 274개의 필지로 나뉘어 있었고, 총 면적이 307,627㎡나 되는 꽤나 큰 동네였어.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땐 이곳 대부분이 드넓은 밭이었다고 해. 정확히 말하자면 142필지, 무려 315,005㎡나 됐어. 그만큼 보광동 사람들은 농사짓고 먹고 사는 데 주력했던 거지.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논이 아주 적었다는 거야. 논은 단지 3필지 12,049㎡만 있었대. 대부분 밭작물을 길렀던 걸 보면, 당시 보광동의 지형이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에 더 적합했던 거겠지?
마을 중심엔 110필지의 집터가 있었어. 면적은 31,649㎡로 꽤 넓었지만, 농지에 비하면 크지 않은 편이야. 당시 사람들의 삶은 소박했을 테고, 마을 중심으로 모여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갔을 거야.
그렇다면, 누가 이 땅들을 가지고 있었을까? 바로 김씨 가문이 54필지로 가장 많았고, 이씨가 37필지, 조씨가 21필지, 박씨 16필지, 정씨가 13필지, 최씨가 10필지로 뒤를 이었지. 당시 김씨가 보광동의 중심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커. 가문의 이야기가 곧 마을의 이야기였겠지?
한편, 이 땅 위엔 조용히 누워있는 역사도 있었어. 바로 3필지 1,953㎡의 분묘지. 누군가는 여기서 삶을 마치고 땅 속에 묻혔지. 보광동에 무덤이 있었다는 건, 마을이 꽤 오래된 곳이었다는 걸 말해줘.
마을을 둘러싼 산들도 보광동의 풍경을 완성했어. 13필지 45,696㎡의 임야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곳에서 나무를 하고, 때론 쉬면서 삶의 여유를 찾았을 거야.
하지만 역사 속 보광동이 늘 평화로웠던 것만은 아니었어. 보광동엔 일본 식민지의 상징과도 같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땅이 있었거든. 이 회사가 소유한 필지는 무려 11개였어. 동척이 이 땅을 차지했다는 건 식민지 시대의 아픈 역사가 보광동에도 스며 있었다는 거지. 이와 함께 26필지는 국유지였고, 당시 정부가 관리했을 거야.
특히, 동척이 소유한 땅이 있었다는 건 보광동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는 뜻이기도 했지. 당시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상상하면, 역사의 무게가 느껴져.
세월이 흐른 지금, 보광동의 모습은 너무나 많이 달라졌어. 과거의 논과 밭은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대신했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심지가 됐지. 하지만 곳곳에선 옛 흔적이 묻어있고, 땅을 파면 그때의 삶이 드러날지 모른다는 기대가 들어.
특히 서울에선 도시 곳곳이 문화유적 조사 대상으로 주목받곤 해. 보광동 역시 앞으로 발굴조사나 표본조사를 통해 더 많은 이야기가 밝혀질 수 있을 거야. 지금은 그저 바쁜 일상을 보내는 곳일지 몰라도, 이곳의 땅속에선 1912년의 이야기가 여전히 숨 쉬고 있을지도 몰라.
역사는 언제나 현재와 이어져 있어. 네가 밟고 다니는 보광동의 길이 과거 사람들의 삶이었고, 그들의 터전이었던 거지. 이렇게 한 번씩 뒤돌아보며 역사와 마주하면, 너의 지금이 더 의미 있게 느껴질 거야.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갈, 또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보광동의 이야기가 더 소중히 기억됐으면 해.
오늘도 너의 하루를 품고 있는 보광동, 이제 조금 더 따뜻한 눈으로 이 동네를 바라봐주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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