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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구 궁동의 1912년 이야기.

  • 2025년 5월 19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9일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기초자료

지금 네가 밟고 있는 땅,


100년 전엔 누가 살았을까?

구로구 궁동 · 1912년 토지 기록으로 되살린 잊혀진 서울의 기억

아파트 한 채 가격이 수억을 훌쩍 넘는 지금의 구로구 궁동, 그 땅 아래엔 아무도 꺼내지 않은 이야기가 묻혀 있다. 1912년, 이 동네엔 논이 있었고, 밭이 있었고,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씨, 권씨, 김씨 사람들이 흙을 만지며 살았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바로 그 이야기를 땅 위로 꺼내는 일이다.


목 차

11912년 궁동, 아무도 몰랐던 그 땅의 진짜 얼굴

2논 — 328,008㎡의 황금빛 생명

3집터와 사람들 — 18,925㎡ 안에 담긴 온기

4침묵하는 땅 — 무덤과 임야가 지킨 것들

5밭 — 계절마다 색이 달랐던 188,466㎡

6궁동의 주인들 — 성씨별 토지 소유 지도

7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왜 이게 지금 중요한가

8에필로그 — 기억하는 자만이 역사를 만든다


논 112필지

328,008㎡

전체 토지의 약 61%

밭 119필지

188,466㎡

전체 토지의 약 35%

집터 17필지

18,925㎡

+ 무덤 1, 임야 1


11912년 궁동, 아무도 몰랐던 그 땅의 진짜 얼굴

서울 구로구 궁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떤 장면이 먼저 떠오르는가. 아마 회색 도로와 빼곡한 건물,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꼭 113년 전, 1912년의 이 땅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1912년 서울 전역의 토지 조사 기록을 분석해 지금은 사라진 서울의 풍경을 복원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종로구 훈정동, 효제동 등 서울 25개 자치구 전반에 걸쳐 지역별 조사 기록을 쌓아가며, 도시 개발 이전의 땅과 사람 이야기를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궁동 또한 그 조사 대상 중 하나다. 1912년 당시 궁동의 토지 기록을 살펴보면, 전체 필지 수는 논 112필지, 밭 119필지, 집터 17필지, 무덤 1필지, 임야 1필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면적으로 따지면 논이 328,008㎡, 밭이 188,466㎡, 집터가 18,925㎡, 무덤 734㎡, 임야 644㎡ 순이었다.

이 숫자들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그 필지 하나하나에 실제로 사람이 살았고, 계절을 맞았고, 밥을 지었고, 아이를 낳았다.



2논 — 328,008㎡의 황금빛 생명

1912년 궁동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건 단연 논이었다. 112필지, 총 328,008㎡. 지금의 단위로 환산하면 축구장 약 46개를 합친 규모다. 지금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광대한 면적이다.

봄이면 모내기로 분주했을 이 논들은 단순한 농토가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쌀은 곧 생명이었다. 가뭄이 들면 마을 전체가 긴장했고, 풍년이 들면 동네 어귀에서 막걸리 잔이 돌았다. 논의 물길 하나, 두렁 하나가 마을의 경계를 나누고, 이웃 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328,008㎡

188,466㎡

집터

18,925㎡

무덤·임야

1,378㎡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보면 이 논 지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오랜 세월 물이 고여 있던 논바닥에는 유기물이 축적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다.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의 목기, 도기, 씨앗 등 유기물 유물들이 논 지층에서 발견되는 사례는 전국 문화재 발굴조사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보고되어 왔다. 즉, 지금의 궁동 지하에는 단순한 흙이 아니라 시간이 켜켜이 쌓인 역사의 지층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3집터와 사람들 — 18,925㎡ 안에 담긴 온기

궁동의 집터는 17필지, 18,925㎡였다. 전체 토지 면적에 비하면 아주 작은 조각이지만, 바로 그 작은 조각 안에 마을의 실제 삶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1912년의 집은 대부분 초가지붕에 흙벽으로 이루어진 단층 구조였다. 마당엔 장독대가 줄지어 있었고, 뒤란엔 키 낮은 배나무나 감나무가 그늘을 드리웠을 것이다. 부엌 아궁이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면, 그게 곧 저녁 식사 준비의 신호였다. 이웃집과의 거리는 지금보다 훨씬 가까웠고, 그만큼 삶도 더 공동체적이었다.



문화재 발굴조사가 진행될 때 집터는 특히 중요한 조사 대상이다. 오랜 기간 사람이 거주했던 자리에는 온돌 구조의 잔해, 기와 파편, 생활 도기, 동전 등 다양한 생활 유물들이 퇴적층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서울에서 진행된 여러 시굴조사와 표본조사 결과들을 보면, 현재 도시 건물 아래 조선 시대 이전의 생활면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례가 적지 않다.

발굴 성공 사례

서울 종로구 훈정동 사사지 발굴 — 단 한 필지가 밝혀낸 도시의 역사층

seoulheritage.org의 종로구 훈정동 조사 기록에 따르면, 사사지(寺社地) 단 한 필지의 기록을 추적함으로써 해당 지역의 조선 후기 토지 이용 방식과 사찰 관련 흔적들을 역추적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토지 기록 한 장이 지표조사의 방향 전체를 바꿀 수 있다. 궁동 역시 마찬가지다.


4침묵하는 땅 — 무덤과 임야가 지킨 것들

1912년 궁동에는 무덤 1필지(734㎡)와 임야 1필지(644㎡)가 있었다. 필지 수와 면적은 작지만, 이 두 곳은 마을의 기억을 가장 오래 간직한 땅이었다.

무덤은 단순히 죽은 사람을 묻은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마을 공동체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이었고, 후손들이 계절마다 찾아가 고개를 숙이는 의례의 공간이었다. 734㎡의 무덤은 마을 어딘가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조상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나 상석이 있었겠지.

"무덤이 있다는 것은, 그곳에 살았던 사람이 있다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묘지 지형과 봉분의 배치 방식은 조선 시대 취락 구조를 파악하는 핵심 단서가 된다."

644㎡의 작은 임야는 나무가 우거진 야산이었을 것이다. 마을 아이들이 버섯을 따고 도토리를 줍던 곳, 농부들이 잠시 그늘 아래에서 쉬어가던 공간이었다. 이런 임야 지형은 문화재 지표조사 시 지표면 관찰이 상대적으로 용이해, 토기편이나 석기류 등 유물 분포를 확인하기 좋은 조사 대상이기도 하다.



5밭 — 계절마다 색이 달랐던 188,466㎡

궁동의 밭은 119필지에 달했고, 면적은 188,466㎡였다. 논 다음으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지금으로 치면 축구장 약 26개 분량의 밭이 이 동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봄에는 감자 싹이 올라오고, 여름엔 호박과 고추가 줄기를 뻗었으며, 가을엔 배추와 무가 땅을 밀어냈다. 겨울이 오기 전 갓 캐낸 고구마를 짚으로 덮어 저장하는 작업이 이 밭들 곳곳에서 벌어졌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밭의 색깔도 달라졌다. 봄의 연둣빛, 여름의 짙은 녹색, 가을의 황갈색, 겨울의 적막한 흰빛.

밭 지층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도 흥미로운 유적 출토 환경이 된다. 경작 과정에서 교란이 일어나 상층부 유물은 손상되기 쉽지만, 밭의 경작층 바로 아래에 형성된 생토층에는 훨씬 오래된 시대의 유물들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서울의 여러 발굴조사 현장에서 밭 지역 아래에서 백제 시대 주거지가 발견된 사례도 있다.



6궁동의 주인들 — 성씨별 토지 소유 지도

토지 조사 기록에는 땅의 모양뿐 아니라 그 땅을 누가 소유했는지도 담겨 있다. 1912년 궁동의 토지를 소유한 성씨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분포가 나온다.

이씨

76필지

권씨

50필지

김씨

31필지

원씨

20필지

오씨

16필지

배씨

15필지

박씨

10필지

기타

복수 성씨

이씨 76필지로 독보적 1위다. 당시 이씨는 궁동 최대 지주 집안이었다. 권씨 50필지, 김씨 31필지가 그 뒤를 이었고, 원씨 20필지, 오씨 16필지, 배씨 15필지, 박씨 10필지 등 다양한 성씨들이 마을 땅을 나눠 가지고 있었다.

이 성씨 분포는 단순한 부동산 현황이 아니다. 당시 마을의 사회적 위계, 혼인 관계, 가문 간 유대 관계를 보여주는 사회사 자료이기도 하다. 마을 어르신들이 마을 공동의 일을 결정할 때, 아마도 이씨와 권씨 집안의 어른들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역사 기록에 남지 않았지만, 토지 대장에 씌어진 성씨 하나하나가 그들이 실존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7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왜 이게 지금 중요한가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100년 전 토지 기록을 지금 왜 꺼내는 거지?' 그 이유는 명확하다. 서울은 지금도 매일 어딘가를 파고 있다. 재개발, 재건축, 신규 도로 공사, 지하철 연장 공사…. 삽이 땅에 닿는 순간, 지하의 역사 층위가 교란된다.

이 때문에 국가유산청 및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일정 규모 이상의 공사 전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를 의뢰하고, 필요시 시굴조사 혹은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절차를 요구하고 있다. 지표조사는 문헌 기록과 현장 답사를 통해 해당 지역의 역사적 중요도를 사전에 평가하는 절차다. 1912년 토지 기록과 같은 자료는 바로 이 지표조사의 핵심 기초 데이터가 된다.

궁동처럼 과거에 광범위한 농경지와 집터가 분포했던 지역은 지표조사 우선 대상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건물을 올리기 전에 땅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 먼저 물어봐야 한다.

발굴조사 절차 안내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3단계의 흐름

지표조사는 가장 첫 번째 단계로, 현장 답사와 기존 문헌 분석을 통해 유적 존재 가능성을 파악한다. 이 단계에서 유적 가능성이 확인되면 시굴조사(트렌치 굴착을 통한 확인)로 이어진다. 시굴 결과 유적이 실제로 확인되면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행된다. seoulheritage.org는 이 3단계 각각에 대한 비용·법적·행정 FAQ를 운영하며 의뢰자들의 혼란을 줄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실제로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사이트가 제공하는 구로구 지역조사 카테고리를 보면, 해당 지역의 역사적 맥락을 사전에 파악함으로써 불필요한 공사 지연을 막고 중요 유물의 훼손을 예방한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다. 건축주 입장에서도, 지표조사를 미리 의뢰해 두면 공사 중 예상치 못한 유물 발견으로 인한 공정 중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



8에필로그 — 기억하는 자만이 역사를 만든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구로구에 산다면, 혹은 어딘가 서울 땅을 걷고 있다면, 발밑을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지금 당신이 밟고 있는 아스팔트 아래엔 불과 100여 년 전 누군가가 모내기를 하던 논이 있을 수 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받치고 있는 콘크리트 아래엔 한 가족이 아침마다 밥을 지어 먹던 집터가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유물을 꺼내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름도 얼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사람들의 삶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다. 이씨 할아버지가 갈았던 논, 권씨 할머니가 김장을 담갔던 밭, 이름 모를 아이가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다녔던 마당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역사를 살아있게 만드는 힘이다.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는 건,


당신도 그 기억을 이어받을 준비가 됐다는 뜻이다.

역사는 교과서 안에만 있지 않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이 땅이 역사다. 1912년 궁동의 이씨, 권씨, 김씨 사람들은 지금도 그 흙 속에 살아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꺼내주는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손길이 오늘도 서울 어딘가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 작업에 관심을 갖고, 응원하고, 기억하는 것. 그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고도 위대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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