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구로구 고척동의 숨겨진 이야기: 땅과 사람의 역사 속으로
- 서울 HI
- 5월 2일
- 3분 분량
목차
고척동, 100년 전의 풍경
논과 밭, 고척동의 생명줄
집과 대지, 그곳에 살던 사람들
산과 잡종지, 자연과 인간의 조화
고척동을 지배한 성씨들
과거를 통해 본 미래의 고척동
1912년, 지금의 서울 구로구 고척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은 아파트와 상가가 즐비한 도시지만, 그때는 논과 밭이 펼쳐진, 사람들의 땀과 이야기가 깃든 땅이었다. 100년 전 고척동의 풍경과 그곳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삶을 따라가며, 한 조각 역사를 들여다보자. 이 글은 단순한 숫자와 데이터가 아니라, 그 땅 위에서 살아갔던 이들의 숨결을 담은 이야기다. 준비됐나? 지금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1912년 고척동으로 떠나보자!

1. 고척동, 100년 전의 풍경
1912년, 대한제국이 막을 내리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격동의 시기. 서울은 지금처럼 빌딩 숲이 아니라 논과 밭, 그리고 소박한 마을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그중 구로구 고척동은 282필지, 1,115,247㎡의 면적을 자랑하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이 숫자가 뭘 의미하냐고? 쉽게 말해, 축구장 150개 정도 크기의 땅이 고척동이었다는 거다!
이곳은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었다. 논, 밭, 집, 산, 그리고 잡종지가 어우러진, 자연과 인간이 함께 숨 쉬는 공간이었다. 고척동의 땅은 그 자체로 마을 사람들의 삶을 대변했다. 어떤 이는 논에서 벼를 키웠고, 어떤 이는 밭에서 고추와 배추를 심었다. 그리고 그 사이, 소박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의 따뜻한 풍경을 완성했다.
2. 논과 밭, 고척동의 생명줄
고척동의 심장이 어디였냐고 묻는다면, 단연 논과 밭을 꼽겠다. 1912년, 고척동에는 89필지 375,737㎡의 논이 있었다. 이 논들은 마을의 생명줄이었다. 아침이면 농부들이 허리를 숙여 모를 심고, 여름이면 푸른 벼가 바람에 흔들리며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논 375,737㎡는 대략 여의도 공원 크기 정도로, 이곳에서 생산된 쌀은 마을 사람들의 밥상을 책임졌다.
밭도 만만치 않았다. 142필지 451,512㎡의 밭은 고척동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했다. 이곳에서는 고추, 배추, 무, 콩 등 온갖 작물이 자랐다. 상상해보자. 해질녘, 밭에서 일하던 아낙네들이 수확한 채소를 바구니에 담아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 바구니 안에는 가족의 끼니뿐 아니라 마을의 웃음과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
논과 밭은 단순히 농사를 짓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의 희망이자, 땀의 결실이었다. 100년 전 고척동의 논과 밭은 지금의 우리가 잊고 지내는 ‘땅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3. 집과 대지, 그곳에 살던 사람들
고척동의 논과 밭 사이, 사람들의 삶이 깃든 공간이 있었다. 바로 26필지 38,568㎡의 대지, 즉 집터였다. 이 대지 위에는 초가집과 기와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38,568㎡는 작은 규모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당시 마을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뛰놀았고, 어른들은 마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집 하나하나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가족의 웃음과 눈물이, 그리고 마을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어떤 집은 이씨 성을 가진 가장이 지었고, 또 다른 집은 문씨 집안의 터전이었다. 이 집들은 고척동의 심장 박동처럼, 마을의 생기를 유지했다.
지금 고척동에 사는 20대, 30대라면, 이곳이 100년 전에는 초가집이 드문드문 있던 마을이었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소박한 집터 위에 지금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걸 생각하면, 고척동의 역사가 얼마나 드라마틱한지 알 수 있다.
4. 산과 잡종지, 자연과 인간의 조화
고척동은 논과 밭, 집만 있었던 게 아니다. 9필지 63,345㎡의 임야, 즉 산과 16필지 186,083㎡의 잡종지도 마을의 중요한 일부였다. 임야는 마을을 둘러싼 작은 언덕이나 숲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 땔감을 얻고, 아이들은 숲속에서 숨바꼭질을 했다.
잡종지는 논도 밭도 아닌, 다목적으로 쓰이던 땅이었다. 186,083㎡의 잡종지는 마을의 창고 같은 존재였다. 어떤 이는 이곳에서 소를 키웠고, 또 다른 이는 채소를 말리거나 농기구를 보관했다. 잡종지는 고척동의 유연함을 보여준다. 이 땅은 마을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변신하며, 그들의 삶을 뒷받침했다.
산과 잡종지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던 고척동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뒤덮인 고척동이지만, 100년 전에는 나무와 풀, 그리고 사람들의 손길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5. 고척동을 지배한 성씨들
이제 고척동의 진짜 주인공,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1912년 고척동에는 다양한 성씨들이 땅을 소유하며 마을을 이끌었다. 가장 많은 땅을 소유한 건 이씨였다. 56개 필지를 차지한 이씨 집안은 고척동의 ‘큰손’이었다. 문씨도 47개 필지로 뒤를 이었고, 윤씨(30개), 양씨(25개), 신씨(20개)가 그 뒤를 따랐다. 김씨, 정씨, 조씨, 경씨, 최씨도 각각 10개 이상의 필지를 소유하며 마을의 중심에 섰다.
이 성씨들은 단순히 땅을 소유한 지주가 아니었다. 그들은 마을의 리더이자, 이웃이었다. 이씨 집안의 가장은 논을 돌보며 마을 사람들과 쌀을 나누었을 테고, 문씨 집안의 할머니는 밭에서 키운 채소로 김치를 담갔다. 윤씨네 아이들은 양씨네 아이들과 함께 마을 골목을 뛰어다녔을 거다.
이 성씨들의 이야기는 고척동의 DNA다. 그들의 땀과 노력은 지금의 고척동을 있게 한 뿌리였다. 혹시 너도 이씨, 문씨, 윤씨 성을 가졌다면? 어쩌면 너의 조상이 100년 전 고척동에서 논을 일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6. 과거를 통해 본 미래의 고척동
1912년의 고척동은 논과 밭, 집과 산,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곳이었다. 그곳에서 이씨, 문씨, 윤씨 집안은 땅을 일구며 마을의 미래를 꿈꿨다. 100년이 지난 지금, 고척동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초가집은 아파트로, 논과 밭은 도로와 상가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땅 아래에는 여전히 100년 전 사람들의 땀과 웃음이 깃들어 있다.
고척동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이곳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연결된 공간이다. 지금 고척동에서 새로운 건물을 짓거나, 땅을 파헤치는 발굴 조사를 계획한다면, 1912년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한다. 그 땅은 단순한 흙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꿈이 쌓인 곳이기 때문이다.
마무리
1912년 고척동은 논과 밭, 집과 산, 그리고 다양한 성씨들의 이야기가 얽힌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땅을 일구며,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갔다. 지금의 고척동은 그들의 땀 위에 세워진 도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너도 고척동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네가 사는 곳, 네가 밟고 있는 땅에도 이런 이야기가 숨 쉬고 있을지 모른다.
혹시 고척동의 땅을 조사하거나, 그곳의 역사를 더 깊이 파헤치고 싶다면, 발굴 조사나 시굴 조사를 전문가에게 의뢰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고척동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장은 누가 쓸까? 어쩌면 바로 너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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