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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구로구 고척동의 숨겨진 이야기: 땅과 사람의 역사 속으로

  • 2025년 5월 2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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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밟고 있는 그 땅, 100년 전에는 누구의 삶이었을까 — 1912년 서울 고척동 문화재 지표조사 기록

지금 이 순간, 당신이 걷고 있는 서울의 어느 골목.


그 아래에는 100년 전 누군가의 눈물과 웃음이 묻혀 있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로가 깔리고, 편의점이 생기면서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


그 땅이 원래 누구의 것이었는지. 거기서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오늘, 1912년의 서울 구로구 고척동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간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당신이 사는 동네가 완전히 다르게 보일 것이다.


목 차

  • 1 고척동, 100년 전의 풍경 — 타임머신을 타고

  • 2 논과 밭, 고척동의 생명줄 — 땅이 먹여 살린 마을

  • 3 집과 대지, 그곳에 살던 사람들 — 초가집의 온기

  • 4 산과 잡종지, 자연과 인간의 조화 — 잊혀진 생태계

  • 5 고척동을 이끈 성씨들 — 마을의 주인공들

  • 6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낸 것들 — 발굴조사의 중요성

  • 7 과거를 통해 본 미래의 고척동 — 역사는 계속된다


1912년, 지금의 서울 구로구 고척동은 논과 밭이 펼쳐진 마을이었다. 총 282필지, 면적 1,115,247㎡ — 축구장 150개를 나란히 이어붙인 크기의 땅 위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계절을 따라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뒀다.

282

총 필지 수

1,115,247㎡

총 면적

89필지

논 (375,737㎡)

142필지

밭 (451,512㎡)

26필지

대지 (38,568㎡)

9필지

임야 (63,345㎡)


1. 고척동, 100년 전의 풍경 — 타임머신을 타고



1912년은 격동의 해였다. 대한제국이 막을 내리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지 불과 2년이 지난 시점. 서울 전역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흔적과 새로운 질서가 충돌하고 있었다. 그 혼란의 시대 속에서도 구로구 고척동 사람들은 여전히 봄이 오면 모내기를 하고, 가을이 오면 벼를 거뒀다. 땅은 변함이 없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논은 논이었고 밭은 밭이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지금, 고척동의 데이터는 특히 눈길을 끈다. 이 기록들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거기에는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땅을 일구던 농부들의 삶,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허리 한 번 피지 못했던 아낙네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지금의 고척동은 어떤 모습인가. 고척스카이돔이 있고, 아파트가 빼곡하며, 카페와 편의점이 골목마다 자리 잡고 있다. 100년 사이에 이 땅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갖게 됐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이 땅 아래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1912년의 기록으로 들어가 보자.


2. 논과 밭, 고척동의 생명줄 — 땅이 먹여 살린 마을



1912년 고척동 전체 면적 1,115,247㎡ 가운데 논과 밭이 차지하는 비율을 합산하면 놀라운 수치가 나온다. 논 375,737㎡에 밭 451,512㎡를 더하면 무려 827,249㎡ — 전체 면적의 74%가 넘는 땅이 농사를 위한 공간이었다. 이 수치 하나만으로도 고척동이 얼마나 철저한 농촌 마을이었는지 알 수 있다.

논 89필지, 375,737㎡. 이 숫자를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여의도공원 전체 면적이 약 230,000㎡이니, 고척동의 논만 해도 여의도공원 1.6배에 달한다. 봄이면 모를 심고, 여름이면 물을 대고, 가을이면 황금빛 벼 이삭이 바람에 흔들리던 그 풍경.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도로에 가려 상상조차 하기 어렵지만, 그 땅 아래에는 여전히 수백 년의 벼농사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밭은 논보다 훨씬 더 많았다. 142필지, 451,512㎡. 이 밭에서는 고추, 배추, 무, 콩, 참깨 등 온갖 작물이 자랐다. 상상해보자. 이른 아침,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은 밭고랑 사이로 호미를 들고 일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허리 깊이 굽혀 잡초를 뽑으면서도 옆 밭 아주머니에게 큰 소리로 안부를 전하던 그 생생한 장면이 이 숫자 속에 담겨 있다.

토지 종류

필지 수

면적 (㎡)

비율

142필지

451,512

40.5%

89필지

375,737

33.7%

잡종지

16필지

186,083

16.7%

임야

9필지

63,345

5.7%

대지

26필지

38,568

3.4%

이처럼 고척동의 농지 데이터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전문가들이 이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기획할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할 핵심 기초 자료다. 농경지 아래에는 수백 년에 걸친 생활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고, 특히 논의 경우 수분과 퇴적층이 유기물 보존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낸다.


3. 집과 대지, 그곳에 살던 사람들 — 초가집의 온기



고척동의 대지, 즉 집터는 26필지에 38,568㎡였다. 전체 면적의 3.4%에 불과하지만, 이곳이야말로 마을의 진짜 심장이었다. 이 작은 땅 위에 초가집들이 모여들고, 그 안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밥을 짓고, 아이를 재우고, 새벽을 맞이했다.

대지 26필지를 산술적으로 나누면 한 필지당 평균 약 1,484㎡ — 대략 450평 정도다. 요즘 기준으로는 꽤 넓은 집터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집 한 채와 텃밭, 헛간, 외양간이 함께 있는 공간이었다. 마당 한켠에는 장독대가 있었을 것이고, 처마 밑에는 고추가 빨갛게 말라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집의 문지방을 넘어서면, 100년의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군불 지피는 냄새, 메주 발효 냄새, 갓 씻긴 아이의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찌른다."

이 작은 집터들이 왜 중요한가. 문화재 발굴조사의 관점에서 대지는 가장 풍부한 유구가 남아 있는 공간이다. 온돌 구조, 우물 흔적, 생활 도기, 동전, 심지어 가족이 남긴 서신 조각까지 —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이 지층 속에서 우리는 100년 전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재구성할 수 있다. 실제로 서울 각 지역에서 진행된 문화재 시굴조사에서는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 초기에 해당하는 생활 유물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4. 산과 잡종지, 자연과 인간의 조화 — 잊혀진 생태계

고척동의 임야는 9필지, 63,345㎡다. 이 숫자가 처음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마을을 둘러싼 작은 언덕들, 그 언덕 위로 소나무와 참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던 풍경을. 마을 아이들이 그 숲에 들어가 도토리를 줍고, 어른들은 땔감을 모아 겨울을 준비했다.

임야는 단순한 '산'이 아니었다. 이곳은 마을 공동의 자산이었다. 나무를 함부로 베면 마을 어른들에게 크게 혼이 났고, 특정 나무 아래에서는 동제(洞祭)를 지내기도 했다. 지금은 그 산들이 대부분 개발돼 사라졌지만,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지역의 지형 변화와 식생 이력을 추적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라진 생태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잡종지 16필지, 186,083㎡는 어쩌면 가장 흥미로운 공간이다. 논도 밭도 산도 아닌, 이 다목적 토지들은 마을의 유연한 공간이었다. 소를 방목하는 목초지로, 농기구를 쌓아두는 야적장으로, 어떨 때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씨름판을 벌이는 놀이터로 쓰였다. 186,083㎡라는 넓은 면적이 바로 이 다양한 쓰임새를 가능하게 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잡종지는 종종 예상치 못한 유물이 출토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일상의 경계에 있던 땅이기 때문이다.



5. 고척동을 이끈 성씨들 — 마을의 주인공들

이제 이 땅을 실제로 일군 사람들 이야기를 해야 한다. 1912년 고척동의 토지 소유 기록을 성씨별로 정리하면, 이 마을의 사회구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성씨

소유 필지 수

마을 내 지위

이씨 (李氏)

56필지 최다

고척동 최대 지주

문씨 (文氏)

47필지

제2 유력 세력

윤씨 (尹氏)

30필지

중상위 지주

양씨 (梁氏)

25필지

중위 지주

신씨 (申氏)

20필지

중위 지주

김씨 外

10필지 이상

다수 소규모 지주

56개 필지를 소유한 이씨 가문은 고척동의 터줏대감이었다. 이들이 소유한 필지들이 논인지, 밭인지, 대지인지에 따라 당시 이씨 가문의 경제적 성격도 달라진다. 논을 많이 가진 이씨라면 쌀 생산에 집중한 부농이었을 테고, 대지를 많이 가진 이씨라면 마을 안에서 상업적 역할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문씨 가문의 47필지도 만만치 않다. 이씨와 문씨, 두 가문이 합쳐서 103필지 — 전체 282필지의 36.5%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두 집안이 고척동의 실질적 지배층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두 가문은 서로 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거나, 아니면 치열하게 경쟁하는 라이벌이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씨, 문씨, 윤씨 성을 가졌다면? 어쩌면 당신의 증조할아버지가 바로 이 고척동의 논두렁을 걸어 다니셨을지도 모른다.

문화재 발굴조사 전문가들이 이런 성씨 분포 데이터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특정 성씨가 밀집된 지역은 종종 씨족 공동묘지나 재실(齋室), 서당 터가 함께 존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한다면, 이씨와 문씨 관련 구조물 흔적을 탐색하는 것이 중요한 조사 포인트가 될 수 있다.


6.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낸 것들 — 발굴조사의 중요성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건설이나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에 해당 지역의 역사적·고고학적 가치를 사전에 평가하는 조사다. 땅을 실제로 파기 전에 문헌 조사, 현장 답사, 항공사진 분석 등을 통해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먼저 따져보는 것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서울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지표조사의 기초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다. 100년 전 지도를 현재의 지적도와 겹쳐보면, 어떤 땅이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지, 어떤 곳에서 유적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지를 사전에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 문화재 지표조사의 핵심 방법론이다.

실제 성공 사례 — 서울 지역 문화재 발굴조사

종로구 인사동 일대에서 진행된 지표조사와 후속 발굴조사에서는 조선시대 백자 가마 흔적과 생활 유물이 대거 출토됐다. 당초 단순한 상업지구로 알려진 이 지역이 조선시대 도자기 생산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문화재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척동처럼 1912년 자료에서 농경지와 대지가 광범위하게 기록된 지역은 조선 후기 농촌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문화재 시굴조사는 지표조사 이후 실시하는 소규모 발굴로, 실제로 트렌치(조사 구덩이)를 파서 지층을 확인하는 단계다. 고척동의 경우, 1912년 기록에서 논으로 분류된 89필지 지역은 퇴적층 분석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논 아래에는 수백 년에 걸친 유기물과 유물이 혐기성 환경 덕분에 비교적 잘 보존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을 찾고 있다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를 참고하라. 이 기관은 서울 25개 구 전역의 지역 조사 데이터를 무료로 공개하고 있으며, 발굴조사 비용, 법적 절차, 공사 일정 조율에 관한 FAQ도 상세히 제공하고 있다.


7. 과거를 통해 본 미래의 고척동 — 역사는 계속된다



1912년의 고척동과 2025년의 고척동. 두 풍경은 너무나 달라서 같은 땅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이 변화를 그냥 지켜봐도 되는 걸까? 아니면 그 땅 아래에 묻힌 역사를 꺼내어 기억해야 할까?

역사학자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진부하게 들릴 수 있지만, 문화재 발굴조사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매일 현실로 느껴진다. 땅을 파다가 200년 된 옹기 조각 하나가 나왔을 때, 그 파편 속에서 한 가족의 삶 전체가 재구성되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고척동에 새로운 개발이 계획된다면,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1912년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은 오랜 농경 역사를 지닌 곳이며, 이씨, 문씨, 윤씨 등 유력 성씨들의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역에서 사전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없이 무작정 굴착기를 들이밀면, 우리는 영원히 복구할 수 없는 역사의 파편들을 잃게 된다.

문화재 지표조사 기관에 의뢰하는 절차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해당 지역의 위치와 면적, 개발 계획을 담당 기관에 알리면, 전문가들이 현장 답사와 문헌 조사를 병행해 조사 필요 여부를 판단해준다. 이 과정이 번거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100년 뒤 우리의 후손들이 지금 우리가 살았던 땅의 이야기를 알 수 있으려면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

1912년, 고척동의 논두렁을 걷던 어느 농부는 자신이 일구는 이 땅이 100년 후에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 땅이 소중하다는 것을.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이 흙 한 줌이 자신의 전부라는 것을.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도 마찬가지다. 100년 후의 누군가가 2025년의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싶어 할 때, 우리가 남긴 기록과 보존된 문화재가 그 답을 줄 것이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래서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시간의 다리다.


고척동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이 다음 장을 쓰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이 사는 동네의 땅도, 분명 이런 이야기를 품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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