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이런 곳이 있었어?
- 2025년 5월 9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문화재 지표조사 · 문화재 발굴 기관 ·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청량리역 아래연못이 있었다
1912년 청량리동 — 연못 33,583㎡, 사사지 3,752㎡, 밭 137,726㎡. 지하철이 달리는 그 땅 아래 숨어있는 100년 전의 충격적인 기억
지금 청량리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당신.그 플랫폼 아래, 100년 전에는연못이 출렁이고 있었다.믿겠는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지금은 수도권 광역 교통의 핵심 허브이자 대형 백화점과 전통시장이 공존하는 번화가다. 하지만 1912년, 이 땅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달랐다. 논과 밭이 전체 면적의 60%를 넘었고, 무덤 4필지가 마을을 조용히 지켰으며, 연못 2필지가 무려 33,583㎡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폐사된 절터인 사사지가 3,752㎡에 걸쳐 역사의 흔적을 품고 있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이 꺼낸 청량리동의 100년 전 기록, 지금 시작한다.
목 차
프롤로그 — 교통의 중심지에 숨겨진 다른 세계
문화재 지표조사가 열어준 1912년의 청량리동
논 30,750㎡와 밭 137,726㎡ — 농업 왕국의 기록
대지 89필지 — 청량리동 사람들의 집
무덤 24,578㎡ — 죽음과 기억이 공존하던 공간
사사지 3,752㎡ — 폐사된 절터가 품은 비밀
연못 33,583㎡ — 사라진 수면의 기억
잡종지 89㎡ — 가장 작고 가장 흥미로운 땅
성씨로 읽는 청량리동 사람들
문화재 지표조사, 청량리에서 지금 왜 중요한가
발굴이 살려낸 이야기들 — 성공 사례
에필로그 — 기차가 지나는 자리에 남은 기억

SECTION 01
1. 프롤로그 — 교통의 중심지에 숨겨진 다른 세계
청량리동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청량리역이다. KTX, 수도권 전철, 경춘선, 강릉선이 교차하는 이 역은 서울 동북부의 관문이자 수도권 전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다. 역 주변으로는 롯데백화점, 청량리 청과물시장, 경동시장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주말이면 서울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생기기 110년 전, 이 땅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기차도 없었고, 백화점도 없었고, 신호등도 없었다. 대신 논과 밭이 지평선까지 펼쳐졌고, 연못이 하늘을 담고 있었으며, 오래된 절터가 역사를 품고 있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청량리동 토지 기록은 총 면적 280,953㎡에 걸쳐 9가지 지목으로 구성된 복잡하고 흥미로운 구조를 보여준다. 특히 연못과 사사지의 존재는 서울 내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점으로, 청량리동만의 독특한 역사적 층위를 증명한다.
SECTION 02
2. 문화재 지표조사가 열어준 1912년의 청량리동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그 역사를 읽는 과정이다. 과거 문헌, 지적도, 고지도를 교차 분석하고 지표면 흔적을 수집해 역사적 가치를 판단한다. 이 조사가 선행되어야 시굴조사, 표본조사,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청량리동처럼 연못과 사사지가 기록된 지역은 이 지표조사에서 특별히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받는다.
논 14필지30,750㎡
밭 93필지137,726㎡
대지 89필지50,472㎡
무덤 4필지24,578㎡
연못 2필지33,583㎡
사사지 1필지3,752㎡
이 숫자들을 한 번에 훑어보면 청량리동의 성격이 바로 드러난다. 밭이 93필지 137,726㎡로 압도적 1위다. 전체 면적 280,953㎡의 절반 가까이가 밭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연못이 무덤보다 크고, 무덤이 대지보다 절반 수준이며, 사사지라는 특수 지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 동네를 단순한 농촌 마을 이상으로 만든다. 각각의 숫자 뒤에 전혀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다.

SECTION 03
3. 논 30,750㎡와 밭 137,726㎡ — 농업 왕국의 기록
논과 밭을 합산하면 168,476㎡. 전체 면적의 60%가 농지였다. 청량리동이 얼마나 철저한 농업 마을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논 14필지, 30,750㎡. 청량리동 일대는 중랑천이 가까이 흐르는 저지대를 포함하고 있어 벼농사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중랑천의 물을 끌어들인 논들이 봄이면 초록으로, 가을이면 황금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지금 청량리역 플랫폼에 서 있는 자리 인근에 그 논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밭은 93필지, 137,726㎡로 규모가 훨씬 크다. 93개의 서로 다른 밭 필지에서 각각 다른 작물이 자랐을 것이다. 동대문구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서울 도심에 채소를 공급하는 근교 농업 지대로 이름이 높았다. 청량리동의 밭에서 자란 배추, 무, 고추가 경동시장의 전신이 되는 장터를 통해 서울 곳곳으로 팔려나갔을 것이다. 지금 경동시장이 여전히 채소와 약재 시장으로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 100년 전 농업 전통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경동시장에서 파는 배추 한 포기. 100년 전 이 자리 밭에서 자란 배추와 같은 땅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청량리동의 농업 DNA는 지금도 살아있다."
SECTION 04
4. 대지 89필지 — 청량리동 사람들의 집
대지 89필지, 50,472㎡. 청량리동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89개의 필지에 걸쳐 집들이 자리했다는 것은, 이 마을이 단순한 소규모 집성촌이 아니라 꽤 규모 있는 주거 공동체였음을 의미한다.
필지당 평균 면적은 약 567㎡, 약 172평이다. 이것은 마당과 채마밭을 갖춘 넉넉한 조선 후기 농가 규모에 해당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된 기와집이거나, 넓은 마당을 둘러싼 초가집이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지금의 빽빽한 아파트 단지와는 전혀 다른 여유로운 주거 환경이었다.
89채의 집에서 펼쳐진 89개의 삶. 아침마다 밭으로 나가는 농부, 서당에서 글을 읽는 아이, 시장에 내다 팔 채소를 추리는 어머니, 마루에 앉아 연못을 바라보는 노인. 그 모든 장면이 이 50,472㎡ 위에서 동시에 펼쳐졌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이 대지 89필지는 온돌 구조, 우물, 부뚜막, 생활 도자기 등 당시 주거 문화의 흔적이 잠들어 있는 주요 조사 대상이다.
SECTION 05
5. 무덤 24,578㎡ — 죽음과 기억이 공존하던 공간
4필지, 24,578㎡의 무덤. 대지(50,472㎡)의 절반에 달하는 면적이 묘역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처음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마을 구조를 이해하면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조선시대에는 마을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 마을 인근의 야산이나 언덕에 무덤을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은 생활권 안에서 공존했고, 이것이 당시 공동체 문화의 기본 구조였다. 4필지 24,578㎡는 마을 전체가 함께 쓰는 공동 묘역이었거나, 두세 개 주요 집안의 선산이 모인 것일 수 있다.
김씨(39필지), 이씨(18필지), 최씨(10필지)가 청량리동의 주요 성씨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무덤들 중 상당수가 이들 집안의 선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선산에는 도자기류, 금속 장신구, 비석 등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 함께 묻히는 경우가 많다. 청량리동의 4필지 묘역이 현재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문화재 지표조사가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항이다.

SECTION 06
6. 사사지 3,752㎡ — 폐사된 절터가 품은 비밀
청량리동에서 가장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지목이 바로 사사지(寺社地)다. 1필지, 3,752㎡. 사사지란 절이 폐사되어 비어 있는 자리, 즉 옛 사찰의 터를 의미한다. 이 땅이 1912년 기록에 사사지로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이전 어느 시점에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뜻이다.
청량리(淸凉里)라는 지명 자체가 이미 불교와 연관이 있다. 청량(淸凉)은 불교 용어로 번뇌를 씻어내는 맑고 서늘한 경지를 의미하며, 한국 각지에 청량사, 청량봉, 청량대 같은 불교 관련 지명이 남아 있다. 청량리라는 이름이 이 지역에 있었던 사찰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3,752㎡의 폐사지에는 무엇이 묻혀 있을까. 사찰 터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불상, 범종 파편, 기와, 청동 제기, 불경 등 다양하다. 그리고 특히 조선 전기나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찰이었다면, 그 문화재적 가치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높다. 지금 이 3,752㎡가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화재 지표조사의 최우선 대상임은 분명하다.
사사지(폐사지)에서 발굴될 수 있는 유물들
사찰 터 발굴에서는 기와류(막새기와, 수키와 등), 불상 및 불구류, 청동 제기, 도자기류, 건축 부재가 주로 발견됩니다. 경우에 따라 고려나 조선 전기의 금속 문화재가 나오기도 합니다. 청량리동의 사사지 3,752㎡는 특히 청량이라는 지명이 불교와 연관됐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정밀 발굴조사가 이루어질 경우 주요 불교 문화재가 출토될 가능성이 있는 지역입니다.
SECTION 07
7. 연못 33,583㎡ — 사라진 수면의 기억
이 글에서 가장 감각적으로 충격적인 데이터를 마주해야 할 시간이다. 연못 2필지, 33,583㎡. 면적만 놓고 보면 논(30,750㎡)보다 크고, 대지(50,472㎡)의 66%에 달한다. 무덤(24,578㎡)보다도 더 넓은 것이 연못이었다.
지금의 청량리 일대에서 연못을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1912년 이 땅에는 33,583㎡의 수면이 하늘을 담고 있었다. 아침이면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여름이면 연꽃이 피고, 겨울이면 얼음이 얼던 그 연못.
청량리 연못 33,583㎡, 이 규모가 얼마나 큰가
33,583㎡는 서울 중구 소재 남산공원 내 백범광장(약 10,000㎡)의 세 배가 넘는 크기다. 마을 한가운데 이렇게 큰 연못이 있었다는 것은, 이 연못이 청량리동 사람들의 생활과 생태 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의미한다. 관개용 저수지로 쓰였을 가능성, 마을 사람들의 빨래터와 낚시터로 이용됐을 가능성, 그리고 절과 연관된 연지(蓮池)였을 가능성까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특히 사사지(폐사지)가 같은 마을에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연못이 절과 연관된 연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국 전통 사찰에는 부정을 씻고 정화를 상징하는 연못이 경내나 경내 인근에 조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청량사(가칭)의 연지가 사찰이 폐사된 이후에도 남아 1912년까지 연못으로 기록된 것일 수 있다.
이 연못이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경성 도시화 과정에서 매립됐을 것이고, 지금은 그 수면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하지만 연못 바닥에는 수백 년간 쌓인 퇴적층이 있고, 그 안에 당시의 생활 흔적, 식물 화분, 동물 뼈, 도기 파편 등이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연못의 위치를 현재 지도와 대조하는 것이 청량리동 문화재 지표조사의 핵심 과제 중 하나다.

SECTION 08
8. 잡종지 89㎡ — 가장 작고 가장 흥미로운 땅
단 1필지, 89㎡. 청량리동의 모든 지목 중 가장 작은 면적이 바로 잡종지다. 33,583㎡의 연못, 137,726㎡의 밭과 비교하면 거의 점 하나 수준이다. 그런데 이 89㎡가 오히려 가장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잡종지는 특정 용도로 분류하기 어려운 땅이다. 작은 창고, 마을 공동 우물가, 대장간, 임시 장터, 아이들의 놀이터, 마을 회의 장소. 이 89㎡짜리 작은 땅이 마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을에서 오직 하나뿐인 이 잡종지가 그것 자체로 특별한 존재였음은 분명하다.
89㎡는 지금 기준으로 약 27평이다. 작은 편의점 하나 들어설 공간. 하지만 1912년 청량리동에서 이 공간은 그 마을 안에서 유일한 '이름 없는 땅'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이 땅을 가장 자유롭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누구의 밭도, 누구의 집도, 누구의 무덤도 아닌 그 작은 공간.
SECTION 09
9. 성씨로 읽는 청량리동 사람들
논과 밭, 연못과 절터 위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의 성씨 분포는 청량리동 공동체의 구조를 보여주는 창이다.
성씨 | 소유 필지 수 | 특이 사항 |
김씨(金) | 39필지 | 압도적 1위, 사실상 마을 중심 |
이씨(李) | 18필지 | 2위, 조선 왕성(王姓)과 같은 성 |
최씨(崔) | 10필지 | 3위 |
김씨 39필지. 이 수치는 청량리동 전체에서 김씨 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음을 의미한다. 단순히 흔한 성씨라서가 아니라, 39필지가 논과 밭, 대지에 걸쳐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면, 이 가문이 청량리동의 경제적, 사회적 중심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씨 18필지도 주목된다. 조선시대 내내 이씨는 왕조의 성씨로서 특별한 지위를 가졌다. 서울 인근에 거주하는 이씨 가문 중 일부는 왕실과 직간접적 연관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청량리동의 이씨 18필지가 어떤 계통의 이씨인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이 가문의 역사를 추적하면 청량리동의 사회 구조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최씨 10필지는 규모면에서 세 번째지만, 10필지라는 수치는 이 가문이 마을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씨, 이씨, 최씨 세 성씨의 소유 필지를 합산하면 67필지로, 이 세 집안이 청량리동의 사실상 3대 주요 가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SECTION 10
10. 문화재 지표조사, 청량리에서 지금 왜 중요한가
청량리동은 지금도 서울에서 가장 빠르게 변하는 지역 중 하나다. 2000년대 이후 청량리역 주변 재개발이 대규모로 진행됐고, 롯데캐슬을 비롯한 고층 주거 단지와 상업 시설들이 들어섰다. 앞으로도 이 지역의 개발은 계속될 전망이다.
그런데 이 개발 과정에서 사사지 3,752㎡의 위치가 어디인지, 연못 33,583㎡가 매립된 자리가 어디인지, 무덤 24,578㎡가 이장됐는지 훼손됐는지를 체계적으로 확인한 작업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제적으로 이루어졌다면 폐사지의 불교 문화재, 연못 퇴적층의 역사 유물, 묘역의 부장품들이 보존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청량리동에서 추가 개발이 진행될 때, 그리고 인근 지역에서 공사가 계획될 때, 문화재 지표조사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특히 1912년 기록상 사사지와 연못이 있던 구역과 겹치는 개발 부지는 즉시 정밀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청량리동 인근 개발을 계획하고 있다면?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에서 동대문구를 포함한 서울 25개 구의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을 확인하고,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법적 절차와 비용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사사지나 연못이 있었던 구역은 발굴조사 노트와 법적 FAQ를 반드시 먼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SECTION 11
11. 발굴이 살려낸 이야기들 — 성공 사례
사사지와 연못처럼 특수한 지목이 있는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유사 지역의 사례들이 잘 보여준다.
성공 사례 1
경기 용인 — 폐사지에서 고려시대 불상 발굴
경기도 용인 일대 주택지 개발 과정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해당 부지가 고려시대 폐사지일 가능성이 확인됐다. 정밀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 금동불상 파편과 청자 제기류가 출토됐고, 현재 용인시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개발 전 지표조사가 없었다면 고려의 불교 유산이 영구적으로 사라질 뻔했다.
성공 사례 2
서울 성동구 — 매립된 연못에서 조선 생활 유물 발굴
성동구 일대 재개발 공사 중 과거 연못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구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시행한 결과, 연못 퇴적층에서 조선 후기 생활 토기, 목제 생활용품, 동물 뼈 등이 다량 발견됐다. 매립된 연못 바닥이 무산소 환경을 유지했기 때문에 유기물 유물까지 보존된 것이다. 사전 지표조사가 이 발굴을 가능하게 했다.
성공 사례 3
서울 종로구 — 광화문 육조거리 유구 보존
광화문 광장 조성 공사 중 조선시대 의정부와 육조거리 유구가 발견됐다.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 구역이 고문헌 기록의 관청 밀집 지역과 겹친다는 사실이 미리 파악됐고, 공사팀은 발굴 구역을 사전 설정해 유물을 온전히 수습했다. 현재 광화문 광장 지하에 조선의 행정 중심지가 보존되어 있다. 조사와 보존이 함께 이루어진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다.
청량리동의 사사지와 연못은 이 사례들과 비교해도 결코 가치가 낮지 않다. 오히려 서울 도심부에서 사사지와 대형 연못이 동시에 기록된 지역은 드물다는 점에서, 청량리동은 문화재 발굴의 관점에서 매우 높은 잠재적 가치를 가진 곳이라 할 수 있다.

SECTION 12
12. 에필로그 — 기차가 지나는 자리에 남은 기억
오늘도 청량리역에서는 수많은 기차가 떠나고 도착한다. KTX가 강릉으로 달려가고, 지하철이 서울 곳곳으로 사람을 실어 나른다. 플랫폼에 서면 엄청난 속도와 소음이 느껴진다. 이 땅이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멀리 변해왔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바로 여기다.
하지만 그 기차 바퀴 아래, 플랫폼 콘크리트 아래, 지하 터널 아래. 어딘가에 1912년의 청량리동이 잠들어 있다. 연못이 하늘을 담던 그 수면의 자리. 폐사지 위에서 바람이 불던 그 공터. 김씨 할아버지가 벼를 심던 논의 흙. 최씨 아이가 연못가에서 잠자리를 쫓던 그 오후.
우리는 그 위에 서울을 지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도시는 변해야 하고, 사람들의 삶을 더 편리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만 그 변화의 과정에서, 땅 아래에 잠든 기억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이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기억을 지키려는 가장 실질적인 노력이다. 기차가 달리는 그 땅 아래에서, 100년 전 청량리동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몫이다.
연못 위에 기차역이 생겼다.절터 위에 백화점이 들어섰다.밭 위에 아스팔트가 깔렸다.
그런데도 땅은 기억한다.김씨가 심은 벼를.이씨가 건진 연꽃을.최씨가 기도하던 절의 종소리를.
청량리역을 지날 때,잠깐만 멈춰 서보자.그 발 아래에서,100년 전 목소리들이아직도 들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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