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랑구 상봉동의 숨은 땅을 열어보니: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가 밝혀낸 잊힌 시간들
- 서울 HI
- 11월 21일
- 4분 분량
목차
잊힌 땅이 말을 걸어온 순간
1912년 상봉동의 실체: 논·밭·대지가 말해주는 풍경
사람들의 이름이 남긴 흔적: 이씨·황씨·최씨의 땅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남긴 그림자, 그리고 마을의 저항
지금 왜 상봉동의 1912년을 발굴하는가
문화재발굴의 실제 현장: 시굴조사·지표조사·표본조사가 움직일 때
유물발굴작업과 발굴조사원의 하루: 땅 속의 이야기를 건져 올리는 사람들
상봉동에서 가능했던 성공 사례 한 편
당신이 꼭 알았으면 하는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의 가치
읽는 이를 위한 마지막 장면
1장 잊힌 땅이 말을 걸어온 순간
“이 땅이 처음 열렸을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솟아올랐다.”
상봉동의 오래된 지적도 위에 현재 지도를 겹쳐보는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서울의 빽빽한 아파트 숲 속 어디엔가, 1912년의 상봉동이 여전히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아무도 관심 주지 않았던 논과 밭의 경계선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고, 지금의 도로를 비켜가며 기묘하게 이어지는 선은 백 년 전 누군가의 삶, 숨결, 소유와 갈등을 말없이 품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마치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치며 “그때의 상봉동 이야기를 들어볼래요?”라고 속삭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2장 1912년 상봉동의 실체: 논·밭·대지가 말해주는 풍경
1912년 상봉동의 땅을 다시 펼쳐보니, 가장 먼저 시야를 가득 메운 건 예상보다 훨씬 광활한 논이었다. 무려 201필지, 654,918㎡. 지금의 상봉역 일대를 지나가며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채 밟고 있던 땅 아래에는 백 년 전 농부들의 땀, 모내기의 규칙적인 파문, 비에 흠뻑 젖어도 무너지지 않던 논둑의 질감이 고스란히 숨어 있었다.
그 뒤로는 밭이 191필지, 259,660㎡. 이곳의 밭은 단순한 생산지를 넘어서 당시 사람들의 계절을 기록한 달력이었다. 봄에는 씨 뿌리고 여름에는 김을 매고 가을이면 수확하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밭을 가르는 경계가 비교적 곧게 나 있는 것은 결국 그만큼 공동체의 규칙이 잘 잡혀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대지는 73필지 45,907㎡. 이곳이 사람들이 실제로 살던 자리다. 작은 초가집들이 나란히 서 있었을 것이고, 그 앞에 놓인 항아리마다 장맛이 달랐을 것이다.
임야는 8필지 48,231㎡. 분묘지는 5필지 2,343㎡. 어느 집안의 조상들이 묻혀 있었고, 매년 제삿날이 되면 상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곳을 오갔을 것이다.
그리고 작은 연못, 지소가 단 한 필지 56㎡. 이 작은 물웅덩이가 가뭄철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주었을 것이다.

3장 사람들의 이름이 남긴 흔적: 이씨·황씨·최씨의 땅
그 시대의 땅을 보면, 땅의 경계선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게 있다. 바로 성씨다.
상봉동에는 이씨가 63필지, 황씨가 53필지, 최씨가 46필지, 김씨가 37필지, 박씨가 30필지… 각 성씨는 이 지역에서 하나의 작은 세계였다.
토지 소유 현황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가족의 규모, 마을 내 영향력, 결혼을 통한 가문의 연결,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뿌리를 내린 공동체의 모습을 말해준다.
4장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남긴 그림자, 그리고 마을의 저항
1912년 상봉동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토지가 17필지나 있었다.
이토록 적지 않은 수의 필지가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 침탈 흔적이라는 사실은 지금 다시 보면 더 무겁다.
하지만 마을 소유의 토지가 3필지 존재했다는 사실은 작은 저항의 흔적처럼 느껴진다.
그 당시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땅을 지킨다는 것은 곧 삶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5장 지금 왜 상봉동의 1912년을 발굴하는가
한 세기가 흘렀는데, 왜 지금 다시 이 땅을 들여다보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땅은 절대 잊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땅을 열어 역사를 다시 불러내는 과정이 바로 문화재발굴이다.
도시 개발이 빨라질수록, 그 속에서 잊힌 시간을 꺼내는 일은 더욱 중요해진다. 문화재발굴과정은 단순히 삽을 들고 유적을 파는 일이 아니다. 과거라는 이름의 거대한 책을 천천히 펼치는 작업이다.
6장 문화재발굴의 실제 현장: 시굴조사·지표조사·표본조사가 움직일 때
현재 서울의 발굴 현장에서 가장 먼저 진행되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다.
지표조사는 말 그대로 땅의 표면을 훑으며 과거의 흔적이 있는지를 탐색한다.
그다음 시굴조사, 좁은 면적을 먼저 파서 유물발굴 가능성을 확인하는 절차가 이어진다.
필요하면 표본조사, 더 깊고 정밀한 탐사가 들어간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발굴조사, 즉 유적발굴단이 본격적으로 땅을 여는 단계가 된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문화재발굴조사장비들이다.
토양을 밀리미터 단위로 긁어내는 도구, 층위를 기록하는 장비, 유물발굴작업을 위한 미세 도구들까지.
발굴조사원들은 이 장비를 능숙하게 다루며 땅 속 숨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7장 유물발굴작업과 발굴조사원의 하루: 땅 속의 이야기를 건져 올리는 사람들
발굴조사원들은 흔히 ‘과거의 번역가’라고 불린다.
땅은 항상 말을 하지만, 그 말을 읽어내는 사람은 따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하루는 단순히 삽질로 시작하지 않는다.
어떤 층위에서 흙의 색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떤 위치에서 조그마한 토기 조각이 나왔는지, 그 조각이 어떤 시대의 흔적인지…
모든 것이 기록되고, 사진으로 남겨지고, 데이터로 정리된다.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1912년 상봉동의 모습은 영원히 땅 속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8장 상봉동에서 가능했던 성공 사례 한 편
몇 해 전 상봉동 특정 구역에서 한 유물발굴작업이 진행된 적이 있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어 보였고, 단순한 정지 작업으로 끝날 것 같았다.
그런데 지표조사 도중 아주 작은 기와 조각 하나가 나왔고, 그 조각이 단서가 되어 시굴조사를 통해 조선 후기 주거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결국 발굴조사까지 이어졌고, 그 자리에서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던 기와, 토기, 생활 구덩이 흔적 등이 확인되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작은 조각이 하나의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순간이었다.

9장 당신이 꼭 알았으면 하는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의 가치
서울은 오래된 도시가 아니다.
그런데도 서울의 땅을 들여다보면 놀라울 만큼 깊다.
도시의 변화 속도가 빨라질수록 발굴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왜냐하면 빠른 변화 속에서 사라지는 과거를 붙잡아두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문화재발굴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였는지, 지금 누구인지, 앞으로 누구일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10장 읽는 이를 위한 마지막 장면
지금 당신이 걷는 길 아래에도
아무도 모르던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
그 이야기를 깨우는 사람들이 있고,
그 깨움의 순간을 지켜보는 당신이 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는 결국 사람을 위한 일이고,
역사를 지키고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그 마음 속에도 작은 발굴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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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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