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당주동,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문화재 발굴의 의미
- 서울 HI
- 2025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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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4월 21일
1912년 당주동에 프랑스인이 살았다 — 세 나라가 한 골목에 공존하던 서울
김씨 37필지·이씨 26필지의 마을에 일본인 4필지·중국인 1필지·프랑스인 1필지. 이 동네가 지금 이 땅 아래에 품고 있는 세 개의 문화권 이야기 —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당주동의 시간
목차
1. 서울 한복판, 1912년 당주동의 첫인상
2. 171필지 37,570㎡, 땅이 품은 기록
3. 국유지 단 1필지의 의미
4. 김씨·이씨·박씨·최씨의 마을 권력 지도
5. 일본인·중국인·프랑스인 — 세 나라가 한 골목에
6.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주는 생활상
7. 공평동·광화문 발굴 성공 사례
8. 당주동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교훈
도렴동에 미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면, 바로 옆 당주동에는 프랑스인이 있었다. 일본인 4필지, 중국인 1필지, 프랑스인 1필지. 1912년 종로 한복판에서 조선인과 세 나라의 외국인이 같은 골목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주동이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당시 서울이 얼마나 복잡한 국제적 공간이었는지를 보여준다.
171필지, 37,570㎡. 이 안에 김씨와 이씨의 기와집, 일본 상인의 창고, 중국 무역상의 거점, 그리고 프랑스인의 흔적이 함께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는지, 지금부터 들어가 보자.

1. 서울 한복판, 1912년 당주동의 첫인상
당주동. 지금은 광화문 인근의 조용한 골목으로 알려져 있지만, 1912년에는 전혀 다른 에너지가 흐르던 공간이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골목마다 장사꾼과 아이들의 소리가 오가고, 한쪽에서는 한국어가, 다른 한쪽에서는 일본어와 중국어와 어쩌면 프랑스어까지 들려왔을 그 골목.
땅은 말이 없지만, 그 속에 기록된 흔적은 책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1912년 당주동의 토지 기록이 바로 그 증거다. 이 기록을 읽는 것 자체가 사실상 문헌 지표조사의 한 과정이다. 누가 어디에 살았는지, 어떤 나라 사람들이 이 동네에 발을 들여놓았는지를 알면, 그 아래에 어떤 유물이 잠들어 있을지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171필지 37,570㎡, 땅이 품은 기록
1912년 당주동은 171필지, 37,570㎡의 땅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약 11,360평 규모다. 같은 종로구에서 살펴본 돈의동(27,781㎡)이나 도렴동(24,568㎡)보다 면적이 넓다. 그만큼 더 많은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171필지
총 필지 수
37,570㎡
총 면적 (약 1만 1천 평)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준
171필지 중 대부분은 개인 소유 대지였다. 골목을 따라 기와집들이 이어지고, 상점과 주택이 뒤섞이고, 저녁이면 각자의 부엌에서 각자의 언어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그 풍경이 이 숫자 안에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 구역은 조선 후기 주거 유구, 상업 활동 흔적, 그리고 다국적 생활 유물이 함께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 복합 조사 구역이다.
3. 국유지 단 1필지의 의미
당주동 171필지 중 국유지는 단 1필지였다. 나머지는 전부 개인 소유. 이 '단 1필지'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 당주동은 국가 행정의 직접 관리 영역이 최소화된, 개인들이 직접 만들어가는 동네였다는 뜻이다. 관청이나 군사 시설 중심이 아닌, 상업과 주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민간 중심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문화재 발굴 시 이 국유지 1필지 구역은 행정 관련 유구나 도로 구조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주목 구역이다. 나머지 170필지는 민간 생활의 흔적을 담은 주거·상업 유물이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

4. 김씨·이씨·박씨·최씨의 마을 권력 지도
조선인 소유자들의 성씨 분포를 보면 당주동의 사회 구조가 드러난다. 김씨가 37필지로 1위, 이씨가 26필지로 2위, 박씨와 최씨가 각각 11필지로 공동 3위였다.
순위 | 성씨 | 필지 수 | 비율 |
1위 | 김씨 | 37필지 | |
2위 | 이씨 | 26필지 | |
공동 3위 | 박씨 | 11필지 | |
공동 3위 | 최씨 | 11필지 |
김씨 37필지, 이씨 26필지. 두 성씨 합산 63필지로 전체의 약 37%를 차지한다. 앞서 살펴본 도렴동과 마찬가지로 도심 상업 지역의 특성상 단일 가문 독점이 아닌, 다양한 성씨들이 고르게 공존하는 구조였다. 박씨와 최씨가 같은 11필지로 공동 3위라는 점도 흥미롭다. 두 가문이 이 동네에서 비슷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주동에서도 이씨보다 김씨가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도렴동과 당주동 두 동네 모두 광화문 인근의 상업·행정 중심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 지역에서 김씨 가문이 이씨보다 더 강한 토지 기반을 가졌다는 패턴이 반복된다.
5. 일본인·중국인·프랑스인 — 세 나라가 한 골목에
이 글의 핵심이다. 1912년 당주동에는 일본인 4필지, 중국인 1필지, 그리고 프랑스인 1필지가 있었다. 세 개의 다른 나라, 세 개의 다른 언어, 세 개의 다른 문화권이 당주동 171필지 안에서 조선인과 함께 공존했다.
🇰🇷
165필지
조선인 소유
🇯🇵
4필지
일본인 소유
🇨🇳
1필지
중국인 소유
🇫🇷
1필지
프랑스인 소유
프랑스인 1필지가 가장 눈길을 끈다. 1912년 조선에서 프랑스인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특별한 맥락을 가진다. 당시 한반도에 있던 프랑스인은 대부분 천주교 선교사였다. 종로 인근은 조선 말기부터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던 지역으로, 이 프랑스인 소유 1필지가 천주교 관련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프랑스인 소유 1필지는 당주동 역사의 독보적인 특징이다. 이 구역에서는 문화재 발굴 시 서양식 건축 자재, 종교적 의례 관련 유물, 혹은 서양과 조선의 생활 문화가 혼재된 흔적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서울 어느 동네에서도 프랑스식 유물과 조선식 유물이 같은 지층에서 나올 가능성은 매우 드물다.
중국인 1필지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전통적 무역 관계를 배경으로 한 상업 거점이었을 것이다. 일본인 4필지는 앞서 다른 동네들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식민지 초기 경제 침투의 흔적이다. 이 네 개 나라의 흔적이 한 동네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이 당주동을 서울에서 가장 독특한 발굴 대상지 중 하나로 만든다.

6.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주는 생활상
1912년 당주동의 토지 기록을 읽는 것 자체가 문헌 지표조사의 한 과정이다. 땅의 소유자와 그 분포를 파악하면 그 땅 위에 살았던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상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발굴 전략이 세워진다.
당주동은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서울에서 가장 흥미로운 구역 중 하나다. 조선식 주거 유구와 상업 흔적, 일본식 근대 건축 구조물, 중국계 생활 도기, 그리고 어쩌면 천주교 관련 유물까지 같은 지층에서 함께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다층적 발굴 가능성은 서울에서도 극히 드문 경우다.
당주동은 조선인·일본인·중국인·프랑스인의 생활 흔적이 같은 땅에 공존할 가능성이 있는 서울 최고 수준의 다문화 발굴 대상지다. 네 가지 문화권의 유물이 한 구역에서 함께 출토된다면, 그것은 서울 도시사 연구의 획기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
7. 공평동·광화문 발굴 성공 사례
당주동 인근에서 진행된 발굴 성공 사례들이 이미 그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종로구 공평동에서는 조선 시대 상업 활동의 흔적이 발굴됐고, 기와·도자기·생활 도구들이 전시를 통해 시민들에게 공개됐다. 지금 공평동 지하에는 그 발굴 현장이 박물관 형태로 보존되어 관광 명소가 됐다.
광화문 인근에서는 근대기 건물의 기초가 드러나, 서울이 어떻게 전통과 근대를 동시에 품으며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됐다. 전통 건축 유구와 근대 건축 기초가 같은 지층에서 발견된 이 사례는 당주동의 발굴 가능성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공평동 지하 박물관 사례처럼, 발굴 성과가 그대로 시민들이 볼 수 있는 역사 공간이 될 때 그 지역의 문화적 가치는 폭발적으로 높아진다. 당주동에서 같은 방식의 발굴과 보존이 이루어진다면, 서울 최초의 다국적 문화 발굴 전시 공간이 탄생할 수 있다.

8. 당주동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교훈
당주동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품고 있던 이야기, 너희는 잘 듣고 있니?"
김씨와 이씨가 함께 지켜낸 터전, 일본인이 침투하기 시작한 4필지, 중국 무역상의 거점, 그리고 프랑스 선교사의 흔적. 이 네 개의 이야기가 171필지 안에서 뒤섞이던 1912년의 당주동. 발굴 조사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유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웃음과 눈물, 그리고 도시가 걸어온 발자취를 다시 만나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고민하지만, 서울은 그 답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 공평동 지하 박물관처럼, 발굴이 끝나도 그 역사는 사라지지 않고 시민들의 일상 안에 살아남는다. 당주동도 그런 공간이 될 수 있다.

오늘 당주동 골목 어딘가를 걷게 된다면, 발아래 땅을 한 번 느껴봐 줬으면 한다. 김씨 가문의 상점이었을 수도 있고, 프랑스 선교사가 묵었던 집이었을 수도 있다. 중국 무역상이 짐을 쌓아두던 창고 자리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기억이 지금도 이 땅 아래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1912년의 당주동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다. 내가 품고 있던 이야기, 너희는 잘 듣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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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기와집 옆, 프랑스 선교사의 필지가 있었던 동네
171필지, 37,570㎡. 김씨 37필지·이씨 26필지의 마을에 일본인 4필지·중국인 1필지·프랑스인 1필지. 서울 어느 동네에서도 찾기 힘든 네 개 문화권의 흔적이 한 땅 안에 잠들어 있는 당주동.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가장 조용한 약속이다.
당주동 인근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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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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