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은평구 신사동의 진짜 모습을 아시나요?
- 2025년 5월 16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기초자료 · 은평구
지금 네가 걷는 그 골목,
100년 전엔 논이었고 수탈의 땅이었다
1912년 은평구 신사동 — 298필지, 534,742㎡가 품은 농경과 식민의 기억
아파트 단지 사이로 카페가 들어서고, 주말이면 사람들로 북적이는 지금의 은평구 신사동. 그런데 딱 113년 전 이 땅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23필지나 움켜쥐고 있었다는 사실, 알고 있었나.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이런 이야기를 땅 위로 꺼낸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끝까지 읽으면 신사동이 완전히 다르게 보일 거야.
목 차
1534,742㎡의 땅이 말하는 것 — 신사동 1912년 전체 지도
2논 82필지 — 283,687㎡의 생명줄
3밭 161필지 — 계절을 담은 215,607㎡
4집터 52필지 — 32,142㎡의 따뜻한 울타리
5무덤 3필지 — 3,305㎡가 간직한 침묵
6국유지 15필지와 식민지의 그림자
7동양척식주식회사 — 23필지의 충격
8신사동을 지킨 성씨들 — 김씨부터 윤씨까지
9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이 땅에 왜 필요한가
10에필로그 — 기억이 살아있는 한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298필지
총 534,742㎡
1912년 신사동 전체
농경지 243필지
논+밭 499,294㎡
전체의 약 93%
수탈 23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 국유지 15필지
1534,742㎡의 땅이 말하는 것 — 신사동 1912년 전체 지도
지금 신사동을 걸으면 오래된 골목과 새 건물이 뒤섞인 풍경이 펼쳐진다. 누군가에겐 그냥 동네지만, 1912년의 토지 기록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298필지, 총 534,742㎡. 지금 기준으로 축구장 약 75개를 이어붙인 면적이다. 그 드넓은 땅 위에 논이 있었고, 밭이 있었고, 집이 있었고, 그리고 식민지 기업의 발길이 닿아 있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자치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분석해 도시 개발 이전의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은평구 지역조사 카테고리를 보면 진관외동, 진관동, 신사동 등 은평구 주요 동네들의 기초 자료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 기록들은 단순한 역사 연구를 넘어,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의 핵심 기초 데이터로 활용된다.

2논 82필지 — 283,687㎡의 생명줄
1912년 신사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토지 유형 중 하나는 바로 논이다. 82필지, 283,687㎡. 지금 기준으로 환산하면 축구장 약 40개 면적이다. 지금 그 자리에 주택과 도로가 들어서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광대한 규모다.
봄이면 이 논에 물이 들어차고, 농부들이 허리를 굽히며 모를 심었다. 여름엔 벼가 푸르게 자라고, 가을엔 황금빛 이삭이 바람에 출렁였다. 그 단순한 반복 속에 한 가족의 1년치 밥이 담겨 있었다. 수확이 적은 해에는 마을 전체가 긴장했고, 풍년이 들면 막걸리가 돌았다.
논
283,687㎡ · 82필지
밭
215,607㎡ · 161필지
집터
32,142㎡ · 52필지
무덤
3,305㎡ · 3필지
국유지·기타
국유지 15·척식 23필지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논은 굉장히 중요한 조사 환경이다. 오랜 세월 물이 고여 있던 논바닥은 산소가 차단되어 유기물 보존에 유리한 혐기성 환경을 만든다. 전국 문화재 발굴조사 현장에서 논 지층 아래에서 고려나 조선 시대 목기, 씨앗, 도기 등이 온전한 상태로 발견된 사례가 반복적으로 보고되어 왔다. 신사동의 이 논 지대 역시 지하에 예상보다 훨씬 풍부한 역사 층위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3밭 161필지 — 계절을 담은 215,607㎡
신사동에서 필지 수 기준으로 가장 많았던 토지 유형은 밭이다. 무려 161필지, 215,607㎡. 논보다 필지 수는 두 배 가까이 많았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조금씩 나눠 가진 땅이었다는 뜻이다.
봄에는 감자와 파 싹이 올라오고, 여름엔 고추와 호박이 덩굴을 뻗었으며, 가을엔 배추와 무가 땅을 밀어냈다. 겨울이 오기 전 캐낸 고구마를 짚으로 싸서 저장하는 풍경이 이 밭들 곳곳에서 펼쳐졌을 것이다. 같은 땅이라도 계절마다 완전히 다른 색을 띠었다. 연두, 짙은 녹색, 황갈색, 그리고 흰 눈 덮인 적막함.

발굴조사 현장에서 밭 지역은 독특한 유적 환경을 만들어낸다. 경작 과정에서 상층부 유물은 교란되기 쉽지만, 경작층 바로 아래 생토층에는 더 오래된 시대의 유물들이 오히려 온전히 보존된 경우가 많다. 서울 일대에서는 겉으로는 평범한 밭이었던 곳 아래에서 백제 시대 주거지나 통일신라 시대 유물이 발견된 사례도 있다. 신사동의 161필지 밭 역시 제대로 된 문화재 지표조사 없이 무작정 삽을 꽂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집터 52필지 — 32,142㎡의 따뜻한 울타리
신사동의 집터는 52필지, 32,142㎡였다. 전체 토지에 비하면 좁은 면적이지만, 바로 그 좁은 땅 안에 마을의 모든 온기가 모여 있었다.
1912년의 집은 초가지붕에 흙벽이 기본이었다. 마당엔 장독대가 줄지어 있었고, 우물 주변에서 아이들이 놀았다. 저녁이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냄새가 골목을 채웠다. 이웃집 담장은 낮았고, 서로의 목소리가 담 너머로 들렸다. 지금의 방음벽 아파트와는 전혀 다른, 삶이 훤히 보이는 동네였다.
집터 52필지 하나하나에는 반드시 가족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있었고, 할머니가 있었고, 이름도 기록에 남지 않은 아이들이 있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집터는 핵심 조사 대상이다. 오랜 기간 사람이 거주한 자리에는 온돌 구조의 잔해, 기와 파편, 생활 도기, 동전 등 다양한 유물들이 퇴적층을 형성한다. 서울의 여러 시굴조사 사례를 보면 현재 건물 아래에 조선 시대 혹은 그 이전의 생활면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5무덤 3필지 — 3,305㎡가 간직한 침묵
신사동에는 무덤이 3필지, 3,305㎡ 있었다. 앞서 살펴본 궁동의 무덤 1필지 734㎡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그만큼 이 동네엔 오래 뿌리내린 가문들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덤은 죽음의 공간이기 이전에, 기억의 공간이다. 조상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앞에서 후손들이 제를 올렸고, 그 의례 속에서 마을의 이야기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졌다. 3,305㎡의 무덤 땅은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었다.
"묘지의 위치와 봉분의 배치 방식은 조선 시대 취락 구조를 파악하는 핵심 단서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묘역 분포를 확인하는 것은 마을의 역사적 중심축을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6국유지 15필지와 식민지의 그림자
1912년 신사동에는 15필지의 국유지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군사용지, 도로, 하천 같은 공공 목적의 땅이었다. 하지만 1912년이라는 시점을 잊으면 안 된다. 이 해는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지 꼭 2년째 되는 해였다.
국유지라는 이름표 뒤에는 식민지 행정 체계가 깔려 있었다. 조선 왕실의 궁방전이나 공공 토지들이 일본 통치 기구의 손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국유지라는 명목의 땅들이 조선인의 손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역사 맥락 노트
1910년 조선 병합 이후 일제는 대대적인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했다. 1912~1918년에 걸쳐 시행된 이 조사는 명목상 '근대적 토지 소유권 확립'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왕실 토지와 마을 공유지의 상당 부분을 국유지로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 신사동의 국유지 15필지도 이 맥락 안에 있다.
7동양척식주식회사 — 23필지의 충격
신사동에서 가장 충격적인 기록은 바로 이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이 동네에서만 23필지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본 제국이 설립한 식민지 수탈 기구였다. 표면적으로는 농업 개발 회사였지만, 실제로는 조선 각지의 농토를 헐값에 사들이고, 조선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회사의 전국 총 소유 토지는 최대 수십만 헥타르에 달했다.
신사동 동양척식주식회사 23필지의 의미
이 23필지는 단순히 외국 회사가 땅을 가진 게 아니다. 그 땅에서 살던 조선인 농민들이 소작료를 내며 자신의 땅을 잃어가던 과정의 기록이다. 신사동 역시 식민 수탈의 직접적 영향권 안에 있었음을, 토지 대장 한 장이 증명하고 있다.

8신사동을 지킨 성씨들 — 김씨부터 윤씨까지
식민지 기업의 그림자 아래에서도 신사동 땅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 1912년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을 보면, 김씨가 82필지로 압도적 1위였다. 이어 장씨 36필지, 이씨 35필지, 박씨 17필지, 천씨 12필지, 윤씨 10필지 순이었다.
김씨
82필지
장씨
36필지
이씨
35필지
박씨
17필지
천씨
12필지
윤씨
10필지
기타
복수 성씨
동척
23필지
김씨 가문이 82필지를 가졌다는 건, 이들이 신사동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었다는 의미다. 마을의 주요 결정, 명절 제사, 공동 농사 등의 일이 이 성씨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특히 촌락 공동체에서는 같은 성씨끼리 모여 살며 문중 단위로 땅을 관리하는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들 성씨들이 소유한 땅 바로 옆 필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참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조선 사람들이 자기 땅을 지키며 살아가는 동안, 그 옆에서 식민지 기업이 조용히 토지를 잠식해가고 있었다.

9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이 땅에 왜 필요한가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제 핵심 질문을 던질 차례다. 이 오래된 기록들이 지금, 2025년 서울에서 왜 중요한가.
은평구는 지금도 재개발과 재건축이 진행 중인 지역이다. 뉴타운 사업으로 오래된 저층 주거지가 철거되고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 그 삽이 땅에 닿는 순간, 1912년의 논바닥이 교란된다. 김씨 집안 어른이 살았던 집터가 사라진다. 어쩌면 그 아래에 백제 시대 주거지가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삽을 꽂기 전에 그 땅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를 먼저 묻는 행위다. 그리고 그 물음의 재료가 바로 1912년 같은 토지 기록들이다.
지표조사 활용 사례
은평구 진관외동 — 땅의 기록이 발굴조사로 이어진 과정
seoulheritage.org 은평구 지역조사에 따르면, 진관외동의 경우 1912년 토지 기록 분석이 선행된 덕분에 해당 지역 시굴조사 시 조사 범위와 중점 지층을 효율적으로 설정할 수 있었다. 문헌 기록과 현장 조사가 맞물릴 때 발굴조사의 정확도와 효율이 함께 높아진다는 좋은 선례다.
건축주나 시공사 입장에서도 문화재 지표조사는 리스크 관리의 핵심이다. 공사 중 유물이 발견되면 공정 전체가 멈춘다. 수개월의 지연, 추가 비용, 행정 절차가 겹친다. 반면 사전에 지표조사를 의뢰하고 시굴조사까지 진행해 두면, 공사 일정을 예측 가능하게 관리할 수 있다. seoulheritage.org에서는 발굴조사 비용·예산 FAQ와 공사 일정 FAQ를 별도로 운영하며 이런 실무 질문에 답하고 있다.

10에필로그 — 기억이 살아있는 한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당신이 신사동을 걸을 때, 어쩌면 발밑에 1912년 김씨 집안이 가꾸던 밭이 있을지 모른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그 땅 아래에, 장씨 어르신이 모를 심던 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딘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땅 옆에서 자기 밭을 지키며 살아가던 이름 모를 농부가 있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모른다. 얼굴도 모른다. 하지만 1912년 토지 대장에 적힌 성씨 두 글자, 필지 번호 하나가 그들이 분명히 살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바로 그 증명의 행위를 이어가는 일이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
1912년 신사동의 이야기는 은평구 한 동네의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이 어떤 역사의 무게를 품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논을 갈았던 손, 밥을 지었던 손, 수탈에 맞서 땅을 지키려 했던 손. 그 손들이 만진 흙이 지금도 이 도시 아래에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손들을 다시 기억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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