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용산구 한남동, 그 땅이 품은 비밀 — 100년 전 토지의 얼굴을 복원하다
문화재 지표조사서울 문화유산 발굴
1912년 한남동의 비밀— 빌딩 숲 아래 잠든 서울의 역사,문화재 지표조사로 꺼내다
"750필지, 704,009㎡. 숫자로 기록된 한남동에는 논과 밭과 무덤이 있었고, 그 위에 오늘의 서울이 세워졌다. 100년 전 땅의 기억이 지금의 문화재 발굴 현장을 설계한다."
출처: seoulheritage.org키워드: 문화재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 서울문화재발굴기관
목 차
사라진 한남동의 시간 — 1912년으로 돌아가다
750필지가 보여주는 땅의 풍경 — 논과 밭, 강변 마을의 기록
371채의 집이 있었다 — 대지로 본 한남동의 생활상
분묘지와 사사지 — 조상과 신앙을 품은 공간의 흔적
산과 잡종지, 그리고 그 사이의 삶
김씨, 이씨, 박씨 — 한남동 토지 소유 구조의 비밀
국유지·동척·미국인 소유지 — 식민시대의 그림자
문화재 지표조사로 다시 보는 한남동의 역사
지표조사에서 발굴조사까지 — 현대 서울 개발과 과거의 복원
성공적인 문화유산 보존 전략 — 한남동 사례가 주는 교훈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서울의 땅 이야기
지금 당신이 서 있는 한남동 그 땅 아래, 100년 전 누군가의 논이 있었고 무덤이 있었으며 작은 사찰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고급 빌라와 외국 대사관, 세련된 레스토랑이 줄지어 선 오늘의 한남동을 걷다 보면 이 땅이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1912년의 한남동은 한강을 끼고 너른 밭이 펼쳐진 강변 마을이었고, 산기슭엔 무덤과 사찰이 조용히 자리했으며, 좁은 골목마다 토담집과 기와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딱 하나다. 100년 전 그 땅의 기록이 지금 서울에서 벌어지는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아는 사람만이 땅 아래 무엇이 있을지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측이 맞아떨어졌을 때, 개발과 보존이 함께 이기는 기적이 일어난다.

SECTION 01사라진 한남동의 시간 — 1912년으로 돌아가다
1912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된 지 꼭 2년이 지난 해다. 일본은 조선의 땅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전국 토지조사사업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오늘날 문화재 발굴 연구자들에게 가장 귀한 1차 자료가 된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용산구 한남동은 총 750필지, 704,009㎡ 규모의 마을이었다.
지금의 한남동이 서울에서 가장 비싼 주거지 중 하나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1912년의 이 숫자는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도로도, 아파트도, 상업 건물도 없던 그 시절의 한남동은 남쪽으로 한강을 끼고 농사가 번성하던 마을이었다. 물길을 따라 논과 밭이 펼쳐졌고, 산기슭에는 분묘와 사찰 부지가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자료는 단순한 옛날 통계가 아니다. 지금 한남동 어딘가에서 개발이 진행될 때, 땅 아래 무엇이 남아 있을지를 예측하는 가장 정밀한 지도다.
"1912년의 토지 구획은 한강변 마을 구조를 복원하는 핵심 단서로 작용한다. 문화재 발굴조사나 지표조사에서 이 시기의 기록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 seoulheritage.org
SECTION 02750필지가 보여주는 땅의 풍경 — 논과 밭, 강변 마을의 기록
750필지라는 숫자를 처음 들으면 그냥 크다는 느낌만 온다. 하지만 이 숫자를 각 토지 종류별로 쪼개서 보는 순간, 1912년 한남동의 풍경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750필지전체 필지
704,009㎡
337필지밭
550,481㎡
371필지대지(주거지)
96,423㎡
23필지분묘지
18,958㎡
7필지논
26,304㎡
10필지국유지
도로·공공
이 숫자들을 한 장의 그림으로 합치면 이런 모습이 나온다. 한남동의 토지 대부분은 밭이었다. 337필지에 550,481㎡로, 전체 면적의 절반을 훌쩍 넘긴다. 논은 7필지 26,304㎡로 상대적으로 작았는데, 이는 한강과 연결된 저지대 일부에 형성된 소규모 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371필지의 집터가 촘촘하게 얽혀 있었다.
문화재 지표조사 전문가들이 이 숫자를 보고 가장 먼저 주목하는 건 밭의 비중이다. 넓게 경작된 밭 구역의 경계선은 오늘날 발굴 현장에서 토양층 분석을 통해 다시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밭두렁의 경계, 농사 흔적이 남은 토양층, 농경 도구 파편 등이 나오는 지점이 바로 이 기록과 겹치는 구역이다. 즉, 1912년의 지도가 지금의 발굴조사 설계도가 된다는 뜻이다.

SECTION 03371채의 집이 있었다 — 대지로 본 한남동의 생활상
371필지, 96,423㎡의 대지. 이 수치는 한남동이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이미 1912년에도 이곳은 꽤 밀집된 생활 공동체였다.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이 뒤섞인 집들이 골목마다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른들이 물을 길어 나르던 일상이 펼쳐졌을 것이다.
이 대지 기록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매우 직접적인 단서로 쓰인다. 집터가 밀집된 구역에서는 생활 유구가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경향이 있다. 기와 조각, 토기 파편, 생활 도구, 우물 흔적, 아궁이와 온돌 구조 같은 것들이 바로 이런 대지 밀집 구역에서 나온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 구역을 우선 후보지로 잡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대의 한남동 개발 현장에서 기와 조각이나 생활 도구가 발견되는 이유는 우연이 아니다. 371필지의 집터가 밀집했던 바로 그 자리 위에 지금의 건물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땅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SECTION 04분묘지와 사사지 — 조상과 신앙을 품은 공간의 흔적
1912년 한남동에는 23필지, 18,958㎡의 분묘지가 있었다. 그리고 1필지, 347㎡의 사사지(사찰 터)도 확인된다. 이 두 가지 수치는 단순한 토지 분류가 아니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가장 예민하게 다루어야 하는, 그리고 가장 의미 있는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 도심 개발 과정에서 흔히 마주치는 '분묘 유존지역' 문제는 바로 이 1910년대 기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굴조사나 표본조사를 진행하다 조선 후기 도자기 파편, 묘비 조각, 제기류가 출토될 때, 그 흔적은 23필지의 분묘지 중 어딘가와 연결된다. 단 1필지의 사사지 역시 마찬가지다. 불과 347㎡의 작은 사찰 터라도, 그 안에는 기와 파편, 불구(佛具), 소형 석재 조각 같은 유물이 압축되어 있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문화재 지표조사의 역할이 빛난다. 발굴 전에 이 분묘지와 사사지의 위치를 1912년 자료와 현재 지형 정보로 교차 분석하면, 조사의 효율이 극적으로 올라간다. 어디를 집중적으로 파야 하는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기 지표조사에 투자해야 하는 핵심 이유 중 하나다.

SECTION 05산과 잡종지, 그리고 그 사이의 삶
1912년 한남동에는 2필지, 4,932㎡의 임야가 있었다. 그리고 7필지, 3,692㎡의 잡종지도 기록되어 있다. 임야는 지형적으로 경작이 어려운 구릉이나 산자락이었을 것이고, 잡종지는 주거나 농업 외의 다양한 용도로 쓰이던 공용 공간이었다. 시장터, 공동 우물터, 빈터, 임시 창고 같은 곳들이 여기에 해당했을 것이다.
이 잡종지들이 훗날 어떻게 변모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골목, 도로, 공공시설 부지로 전환되면서 도시의 기반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전환 과정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잡종지처럼 소유 변천이 많고 용도가 자주 바뀐 땅은 지표 유구가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동시에 변화의 경계선에 잔존 포켓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다. 오래된 우물이나 배수로, 공동 창고의 흔적이 의외의 지점에서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SECTION 06김씨, 이씨, 박씨 — 한남동 토지 소유 구조의 비밀
땅에는 주인의 이름이 새겨진다. 1912년 한남동에서 가장 많은 땅을 소유한 성씨는 김씨로 149필지였고, 이씨가 148필지로 바짝 뒤를 이었다. 그 다음으로 박씨 83필지, 유씨 56필지, 임씨 48필지 순이었다. 몇몇 대성씨가 이 동네 토지의 상당 부분을 나눠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성씨별 소유 구조가 문화재 발굴에서 왜 중요한가. 한 가문이 연속으로 소유하고 대물림한 필지들은 개발의 손길이 상대적으로 덜 닿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가 농사를 짓고, 아들이 집을 고치고, 손자가 거기서 태어났다면, 그 땅 아래에는 수대에 걸친 생활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토지의 소유자가 바뀌는 시점에 따라 문화적 층위, 즉 문화층의 변화가 발생하기 때문에, 소유 변천 이력을 추적하는 것은 시굴조사의 트렌치 배치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마을 공동 소유지 4필지도 눈여겨봐야 한다. 효창동의 사례에서도 마찬가지였듯,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관리하던 땅에는 공동체의 의례 공간, 우물, 창고 같은 집단 생활 유산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SECTION 07국유지·동척·미국인 소유지 — 식민시대의 그림자
1912년은 일본의 토지조사령이 시행된 직후였다. 그 압력 아래 한남동의 땅 구조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국유지 10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 20필지, 미국인 소유지 5필지, 법인 1필지, 마을 소유지 4필지가 당시 기록에 남아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줄여서 동척(東拓)의 등장은 이 동네가 이미 식민지 경제 침투의 전선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동척은 조선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해 설립된 일본의 국책회사였고, 그 소유지가 20필지나 한남동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이 일대가 얼마나 이른 시기에 일본의 통제 하에 들어갔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인 소유지 5필지의 존재는 더욱 흥미롭다. 당시 한남동이 이미 외교와 종교를 이유로 한 외국인의 정착 공간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국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토지 구조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독특한 조사 설계를 요구한다. 동척 소유지와 국유지 주변에는 근대 건축 잔해나 토목 요소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고, 외국인 소유지 주변에는 당시 외국에서 들어온 건축 방식이나 생활 물품이 발견될 가능성도 있다. 지표조사는 이런 복합적인 역사 지형을 정밀하게 읽어내는 과정이다.

SECTION 08문화재 지표조사로 다시 보는 한남동의 역사
오늘날 한남동 일대는 재개발과 신축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이다. 고급 주거 단지와 상업 시설이 들어서고, 낡은 건물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며 새로운 서울의 얼굴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그 공사 현장의 바닥 아래에 1912년의 기억이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기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재와 공존시키는 첫 번째 단계다. 지표조사는 단순히 삽을 들고 땅을 파는 행위가 아니다. 1912년의 토지 자료, 고지도, 항공사진, GIS 공간 정보를 겹쳐 이 땅이 어떤 역사 층위를 갖고 있는지를 먼저 읽는 과정이다. 어디가 옛 마을이고, 어디가 경작지였으며, 어디에 분묘가 있었는지를 파악한 뒤에야 어느 지점을 집중적으로 시굴해야 하는지가 결정된다.
이 과정에서 토양층, 유물의 산포, 도로 흔적이 함께 확인되면서 한남동의 역사적 경계가 복원된다. 그리고 그 복원 결과가 발굴조사의 범위를 결정하고, 나아가 개발 사업의 설계를 조정하는 근거가 된다. 지표조사를 제대로 하면 뒤에 오는 모든 과정이 효율적으로 돌아간다. 지표조사를 생략하면 공사 도중에 예상치 못한 유구가 나와 모든 것을 멈춰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SECTION 09지표조사에서 발굴조사까지 — 현대 서울 개발과 과거의 복원
서울의 문화유산 발굴조사는 단순한 과거 보존 행위가 아니다. 현재의 도시계획이 역사적 연속성을 끊지 않고 이어지도록 만드는 다리다. 한남동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지역에서는 개발 전에 반드시 표본조사, 시굴조사,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유구나 생활 유물이 확인되면 정식 발굴조사로 전환되고, 서울의 문화 지형도가 한 층 더 정밀해진다.
법령에 따르면 표본조사는 조사 대상 면적의 2% 이내, 시굴조사는 10% 이내에서 이루어진다. 좁고 길게 트렌치를 배치해 실제 매장 문화재의 존재와 보존 상태를 확인하고, 토양 단면의 층위 변화를 기록하며, 지표 자료가 나오면 추가 조사로 범위를 넓혀간다. 이 과정이 충실할수록, 이후의 발굴조사에서 낭비되는 시간과 비용이 줄어들고 보존 결정의 정확성이 높아진다.
1
지표조사: 문헌·고지도·GIS 분석 + 현장 보행으로 잠재 유구 구역을 특정한다.
2
표본조사: 면적의 2% 이내에서 트렌치를 배치해 매장문화재 존재 여부를 확인한다.
3
시굴조사: 면적의 10% 이내에서 보존 상태와 유구 범위를 파악한다.
4
발굴조사: 국가유산청 허가 후 전면적으로 유구를 드러내고 학술·보존 대안을 제시한다.
5
보고서 제출: 결과를 관할 지자체를 통해 국가유산청에 보고하고, 공사 시행 또는 보존 결정이 내려진다.

SECTION 10성공적인 문화유산 보존 전략 — 한남동 사례가 주는 교훈
2000년대 중반 한남동 개발 현장 — 역사와 도시가 함께 이긴 사례
2000년대 중반, 한남동 일대에서 진행된 한 개발 사업 현장에서 의미 있는 일이 있었다. 발굴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토기와 주거지 흔적이 출토된 것이다. 처음에는 당황한 사업자들도 있었다. 일정이 늦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퍼졌다. 그러나 사전에 충실하게 진행된 지표조사 덕분에 발굴 범위가 빠르게 특정되었고, 조사는 예상보다 짧은 시간 안에 마무리되었다. 사업계획은 미세하게 조정되었지만, 발견된 유구는 부지 안의 공원과 역사 해설 공간으로 통합되었다. 이 현장은 역사와 개발이 공존하는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받았고, 주변 부지의 가치까지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초기 지표조사에 투자한 비용이 결국 전체 프로젝트를 살렸다는 게 이 사례의 핵심이다.
이 사례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발굴조사는 개발을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도시의 가치를 높이는 필수 과정이다. 문화재 발굴 기관을 처음부터 파트너로 삼고 지표조사를 설계 단계에 포함시킨 사업자는 결과적으로 더 빠르게, 더 높은 브랜드 가치를 가진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SECTION 11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서울의 땅 이야기
한남동의 토지 기록은 단순히 오래된 수치가 아니다. 그 안에는 조상들의 삶, 공동체의 흔적, 그리고 도시의 뿌리가 함께 깃들어 있다. 750필지의 숫자 하나하나에는 이름이 있었고, 이름 뒤에는 사람이 있었으며, 사람의 뒤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오늘 한남동의 어느 골목을 걷다가 공사 가림막을 마주쳤다면, 잠깐 그 너머를 상상해보라. 그 땅 어딘가에 1912년의 밭두렁이 있을 수 있고, 무명의 누군가가 묻힌 분묘가 있을 수 있으며, 한 가문이 몇 대를 이어 일구던 집터가 있을 수 있다.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는 일이 문화재 지표조사이고, 시굴조사이며, 발굴조사다. 그리고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문화재 발굴 기관을 선택하는 것이 이 땅의 미래를 결정한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지금도 변하고 있다. 더 높아지고, 더 넓어지고, 더 빠르게 달라진다. 하지만 도시가 깊어지려면, 즉 진짜 품격을 갖추려면, 그 땅 아래 잠든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한다. 개발보다 먼저 역사를 읽는 사람이, 결국 더 오래 가는 것을 만든다.

100년 뒤, 누군가가 오늘의 기록을 꺼내 들 것이다.그때 그들이 읽는 숫자 안에우리가 이 땅의 기억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가 담겨 있을 것이다.그 기록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지금 여기서, 당신과 내가 함께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의 부지 아래 잠든 이야기를가장 먼저 듣는 사람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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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참고: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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