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용산구 한남동, 그 땅이 품은 비밀 — 100년 전 토지의 얼굴을 복원하다
- 서울 HI
- 10월 8일
- 3분 분량
목차
사라진 한남동의 시간, 1912년으로 돌아가다
논과 밭, 한강을 끼고 숨 쉬던 땅의 기록
371채의 집이 있었다 — 대지로 본 한남동의 생활상
분묘지와 사사지, 한남동의 조상과 신앙을 품은 공간
산과 잡종지, 그리고 그 사이의 삶
한남동의 주인들 — 김씨, 이씨, 박씨가 지배한 토지 구조
국유지·동척·미국인 소유지까지, 식민시대의 그림자
문화재지표조사로 다시 보는 한남동의 역사
현대 서울 개발 속, 과거를 복원하는 발굴조사의 의미
한남동 발굴 사례로 본 성공적인 문화유산 보존 전략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서울의 땅 이야기

1912년의 한남동, 지금의 빌딩 숲 아래에는 또 다른 도시가 잠들어 있다.
지금은 고급 주택가와 외국 대사관이 자리한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하지만 1912년으로 시간을 되돌려보면, 이곳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강을 끼고 펼쳐진 너른 들판, 소규모 마을과 논밭, 그리고 조용히 자리한 무덤들. 이 평범해 보이는 땅이 100년이 지난 오늘날,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의 핵심 지역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서울의 중심이라 불리는 이곳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1912년의 토지조사 자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 사라진 한남동의 시간, 1912년으로 돌아가다
1912년, 용산구 한남동은 총 750필지 704,009㎡ 규모의 마을이었다. 지금처럼 도로와 아파트가 아닌, 논과 밭, 그리고 작은 집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은 전형적인 농촌형 마을이었다.
당시 한남동은 남쪽으로 한강을 끼고 있어 물길을 따라 농사가 번성했으며, 산기슭에는 무덤과 사찰 부지가 조용히 펼쳐져 있었다.
이 시기의 자료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문화재 발굴조사나 지표조사에서 “1910년대의 토지 구획”은 한강변 마을 구조를 복원하는 핵심 단서로 작용한다.
2. 논과 밭, 한강을 끼고 숨 쉬던 땅의 기록
1912년 당시 한남동에는 7필지, 26,304㎡의 논이 있었다. 규모로 보면 많지 않지만, 이는 한강과 연결된 저지대에 형성된 소규모 논이었다.
반면, 밭은 337필지, 550,481㎡로 전체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즉, 한남동의 주된 토지 이용은 밭농사였다.
지표조사에서 이러한 농지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확인된다. 서울 도심 발굴 중, 토양층의 구분을 통해 밭두렁의 경계선과 농경 흔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단순히 땅의 이용 형태를 넘어, 100년 전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복원하는 귀중한 단서다.
3. 371채의 집이 있었다 — 대지로 본 한남동의 생활상
당시 기록에 따르면 371필지, 96,423㎡의 대지, 즉 주거지가 존재했다.
이는 한남동이 단순한 농촌이 아니라, 이미 마을 형태로 발전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의 한남동이 외국 대사관과 고급 빌라로 이루어졌다면, 당시의 한남동은 토담집과 기와집이 뒤섞인 평범한 생활터전이었다.
지표조사에서 당시의 기와조각이나 생활 도구가 발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4. 분묘지와 사사지, 한남동의 조상과 신앙을 품은 공간
1912년 한남동에는 23필지, 18,958㎡의 분묘지가 있었다.
또한 1필지, 347㎡의 사사지(사찰 터)도 확인된다.
이 자료는 단순한 토지용도가 아니다. 서울 도심 개발 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분묘 유존지역’은, 바로 이런 1910년대의 기록과 맞닿아 있다.
문화재 시굴조사나 표본조사에서 실제로 도자기 조각, 묘비 파편, 제기류가 출토되는 경우, 그 뿌리는 바로 이 시기 묘지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5. 산과 잡종지, 그리고 그 사이의 삶
1912년의 한남동에는 2필지, 4,932㎡의 임야가 있었다.
그 외에도 7필지, 3,692㎡의 잡종지가 확인된다. 잡종지는 말 그대로 주거나 농업 외의 용도로 쓰인 땅으로, 공용터·시장·빈터 등이 포함된다.
이 잡종지들은 훗날 도로, 골목, 그리고 공공시설 부지로 전환되며 도시의 기반이 되었다.
6. 한남동의 주인들 — 김씨, 이씨, 박씨가 지배한 토지 구조
한남동의 땅 주인 중 가장 많은 성씨는 김씨(149필지)와 이씨(148필지)였다.
그 뒤로 박씨(83필지), 유씨(56필지), 임씨(48필지) 등이 이어진다.
이는 지역 내 토지 소유 구조가 몇몇 대가문 중심의 토지제도였음을 보여준다.
이 정보는 문화유산 지표조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토지의 소유자가 바뀌는 시점에 따라, 문화적 층위(문화층)의 변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7. 국유지·동척·미국인 소유지까지, 식민시대의 그림자
1912년은 일본의 토지조사령이 시행된 직후였다.
이 시기 한남동에는 국유지 10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 20필지, 미국인 소유지 5필지, 법인 1필지, 마을 소유지 4필지가 존재했다.
이는 이미 한남동이 국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동척(東拓)의 등장은 식민지 경제 침투의 전형적 사례로, 이후 용산 일대가 일본군 병참기지와 철도 중심지로 변모하는 기반이 되었다.
8. 문화재지표조사로 다시 보는 한남동의 역사
오늘날 한남동 일대는 재개발과 건축이 활발하다.
그러나 문화재지표조사를 통해 우리는 땅 속에 남은 옛 지형과 생활 흔적을 되살려낼 수 있다.
지표조사는 단순히 땅을 파보는 일이 아니다.
1912년의 자료와 비교 분석함으로써, 어디가 옛 마을이고 어디가 경작지였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토양층, 유물, 도로 흔적이 함께 확인되어 한남동의 역사적 경계를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9. 현대 서울 개발 속, 과거를 복원하는 발굴조사의 의미
서울의 문화유산 발굴조사는 단순한 보존이 아니라, 현재의 도시계획과 역사적 연속성을 잇는 일이다.
한남동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지역에서는 개발 전에 반드시 표본조사, 시굴조사, 지표조사가 선행된다.
이 과정에서 유구(遺構)나 생활유물이 확인되면 정식 발굴로 전환되어, 서울의 문화지형도를 더욱 정밀하게 만든다.
10. 한남동 발굴 사례로 본 성공적인 문화유산 보존 전략
실제 사례로, 2000년대 중반 한남동 일대의 개발 사업 중 문화재 발굴을 통해 조선 후기 토기와 주거지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이 발견은 당시 사업계획을 수정하게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역사와 개발이 공존하는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받았다.
이처럼 발굴조사는 개발을 지연시키는 절차가 아니라, 도시의 가치를 높이는 필수 과정이다.
11.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서울의 땅 이야기
한남동의 토지 기록은 단순히 오래된 수치가 아니다.
그 속에는 조상들의 삶, 공동체의 흔적, 그리고 도시의 뿌리가 함께 깃들어 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서울의 거리 한가운데에도,
100년 전 누군가의 논이 있었고, 밭이 있었으며, 작은 사찰이 있었다.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는 바로 그 기억을 되살려주는 시간의 열쇠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