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용산구 청파동2가, 땅과 사람들의 숨은 이야기
- 서울 HI
- 9월 27일
- 4분 분량
목차
서론: 1912년 청파동2가를 다시 바라보다
집과 대지: 96필지의 삶의 공간
잡종지와 밭: 도시와 농촌이 공존한 흔적
국유지 39필지, 국가와 제국의 의도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김씨와 마을 공동체의 모습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토지 수탈의 구조
미국인과 일본인의 땅: 외국인의 흔적과 식민지 현실
법인 소유 토지: 근대화의 시작과 사회 구조 변화
청파동2가 사례에서 보는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의 필요성
결론: 오늘을 비추는 청파동2가의 역사

서론: 1912년 청파동2가를 다시 바라보다
1912년, 서울 용산구 청파동2가는 단순한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132필지, 총면적 97,742㎡라는 구체적인 수치는 단순한 기록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면, 한국 근대사의 축소판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집과 밭, 잡종지, 국유지, 그리고 외국인과 일본인이 차지한 땅까지. 청파동2가는 당시 한국인들의 삶과, 식민지라는 굴곡진 현실, 근대화의 물결이 동시에 얽힌 공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역사를 책 속에서만 배우지만, 사실 역사는 ‘땅 위에 새겨진 흔적’ 속에 살아 있습니다. 집터 하나, 밭 한 조각에도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었고, 그 삶은 지금의 우리에게로 이어집니다. 그렇기에 1912년 청파동2가를 다시 살펴보는 일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길을 여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집과 대지: 96필지의 삶의 공간
1912년 청파동2가에는 96필지, 57,253㎡의 대지가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들이 들어서 있었고, 각 가정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대지는 단순히 건물이 세워지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대문을 열면 마당이 있고, 우물가에서 이웃과 마주하며 안부를 묻고,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어놀던 풍경이 그려집니다. 이 대지들은 용산이 군사적, 교통적 중심지로 변모하는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생활을 담아내는 중요한 기반이었습니다.
오늘날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발견되는 기와 조각이나 생활 도구들은 이런 일상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물건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증거입니다.
잡종지와 밭: 도시와 농촌이 공존한 흔적
당시 청파동2가에는 3필지, 800㎡의 잡종지가 있었습니다. 잡종지는 집도 밭도 아닌 애매한 공간으로, 공터나 공동체의 공유지, 혹은 임시 창고 용도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잡종지야말로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 얼마나 다채로웠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33필지, 39,689㎡에 달하는 넓은 밭이 존재했습니다. 오늘날 서울 중심부인 용산에 ‘밭’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당시 청파동이 단순한 도심이 아니라 농업적 성격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밭에서는 채소, 곡물 등이 재배되었을 것이고, 이는 마을 사람들의 먹거리를 책임졌습니다.
즉, 청파동은 도시와 농촌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이었고, 이는 근대화 과정 속에서도 오랫동안 남아 있던 한국적 생활 방식의 단면이었습니다.
국유지 39필지, 국가와 제국의 의도
청파동2가에는 39필지의 국유지가 있었습니다. 이는 결코 작은 비중이 아닙니다. 국유지의 존재는 국가가 토지를 관리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며, 동시에 식민지 통치가 본격화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합니다.
특히 용산은 일본군이 주둔하던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따라서 이 국유지 상당수는 군사적 목적이나 행정적 필요에 의해 확보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청파동2가의 공간 구조가 단순히 생활 공간을 넘어, 식민지 권력이 작동하던 장소였음을 보여줍니다.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김씨와 마을 공동체의 모습
당시 청파동2가에서 가장 많은 땅을 소유한 성씨는 김씨로, 20필지의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씨 가문은 단순한 토지 소유자라기보다, 마을 공동체 내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진 중심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외에도 여러 성씨들이 청파동에 살며,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마을에서의 관계는 단순한 친척이나 이웃을 넘어, 생활을 함께 꾸려가는 협력 관계였고, 그 중심에 토지 소유 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은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땅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알면, 그 시대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 생활 방식, 경제 구조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토지 수탈의 구조
청파동2가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9필지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동척은 일본 제국이 조선에서 토지를 수탈하기 위해 설립한 대표적 회사였습니다. 그들이 청파동2가에까지 손을 뻗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식민지 경제 구조 속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동척 소유의 토지는 단순한 땅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이 어떻게 우리의 삶 속 깊이 파고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미국인과 일본인의 땅: 외국인의 흔적과 식민지 현실
1912년 청파동2가에는 미국인이 소유한 3필지의 땅이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서울에 활동하던 선교사나 무역 관련 인물들의 흔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일본인 소유의 땅은 16필지에 달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용산 일대를 군사적·상업적 요충지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진출했습니다. 이는 훗날 용산이 일본군 관련 주요 지역으로 발전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즉, 청파동2가는 이미 국제적 이해관계와 식민지 현실이 얽힌 장소였던 것입니다.
법인 소유 토지: 근대화의 시작과 사회 구조 변화
법인 소유의 토지도 2필지 있었습니다. 이는 근대 사회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전통 사회에서는 개인이나 가문이 토지를 소유했지만,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회사나 단체가 토지를 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소유권 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근대적 자본주의 체제로 이동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청파동2가 역시 그 흐름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청파동2가 사례에서 보는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의 필요성
이처럼 1912년 청파동2가의 토지 구조와 소유 현황은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문화재 발굴조사, 지표조사, 시굴조사를 해야 하는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땅을 조사하면 단순히 유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땅 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드러납니다. 집터, 밭, 잡종지, 국유지 모두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연결되어 있고, 이를 조사하고 기록하는 것이 바로 문화재 발굴의 핵심입니다.
서울의 재개발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질 때마다 과거의 흔적이 드러나고, 이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는 기회가 됩니다. 청파동2가의 사례는 그러한 조사 작업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예시입니다.
결론: 오늘을 비추는 청파동2가의 역사
1912년 청파동2가는 단순한 작은 동네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가 응축된 공간이었습니다. 김씨 가문을 비롯한 토지 소유자들의 삶, 일본과 미국인 소유의 땅,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탈, 국유지와 법인 소유지까지. 이 작은 마을에는 한국 근대사의 모든 단면이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청파동을 걷다 보면 이런 흔적은 잘 보이지 않지만,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를 통해 하나하나 밝혀지는 순간, 역사는 다시 살아납니다.
청파동2가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잊지 말고, 땅 속에 묻힌 이야기를 계속해서 발굴해야 합니다.
해시태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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