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용산구 청파동2가, 땅과 사람들의 숨은 이야기
최종 수정일: 5월 7일
문화재 지표조사서울 문화유산 발굴
한국 근대사의 축소판,1912년 청파동2가— 문화재 지표조사로 깨우는 용산의 민낯
"132필지, 97,742㎡. 국유지 39필지, 동척 9필지, 미국인 3필지, 일본인 16필지. 이 작은 동네 하나에 한국 근대사의 모든 단면이 압축되어 있었다."
출처: seoulheritage.org키워드: 문화재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 서울문화재발굴기관
목 차
1912년 청파동2가를 다시 바라보다 — 왜 이 기록이 지금도 중요한가
132필지가 그리는 풍경 — 전체 규모와 구성
96필지의 집터 — 골목과 마당, 삶의 온기
밭과 잡종지 — 도시와 농촌이 공존한 흔적
국유지 39필지 — 국가와 제국의 의도
김씨와 마을 공동체 — 성씨별 토지 소유 구조
동양척식주식회사 9필지 — 수탈의 구조가 새긴 흔적
미국인 3필지와 일본인 16필지 — 외국인 소유의 두 얼굴
법인 소유 2필지 — 근대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1912년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주는 단서들
서울 발굴 성공 사례 — 역사가 살아나는 순간
오늘을 비추는 청파동2가의 역사 — 맺음말
132필지짜리 작은 동네 하나에, 한국인과 일본인과 미국인과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모두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것이 1912년 서울 용산구 청파동2가의 실제 모습이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토지조사사업의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실이다. 단 132필지, 97,742㎡의 동네 안에 한국 근대사의 모든 갈등과 충돌, 변화와 침략이 응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이 지금도 청파동2가의 땅 아래 잠들어 있다.
이 기록을 지금 꺼내드는 이유는 분명하다. 오늘 청파동2가에서 개발이 이루어질 때, 그 땅 아래 무엇이 있는지를 가장 정확하게 예측하는 지도가 바로 이 1912년 자료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발굴조사는 이 기록에서 시작된다.

SECTION 011912년 청파동2가를 다시 바라보다 — 왜 이 기록이 지금도 중요한가
역사는 책 속에만 있지 않다. 사실 더 많은 역사는 땅 위에, 정확히는 땅속에 새겨져 있다. 집터 하나, 밭 한 조각, 우물 흔적 하나에도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고, 그 삶은 지금의 우리에게로 이어진다. 1912년 청파동2가를 다시 살펴보는 일이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청파동2가는 지금 용산구의 평범한 주거 지역으로 보이지만, 1912년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이 동네가 얼마나 복잡한 역사의 교차로였는지가 드러난다. 한국인 가문과 일본인, 미국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총독부의 국유지가 한 동네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이 구조가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가장 복합적이고 흥미로운 발굴 결과를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
"1912년 청파동2가는 단순한 작은 동네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가 응축된 공간이었다. 이 작은 마을에는 한국 근대사의 모든 단면이 담겨 있었다." — seoulheritage.org
SECTION 02132필지가 그리는 풍경 — 전체 규모와 구성
1912년 청파동2가는 총 132필지, 97,742㎡의 규모였다. 앞서 살펴본 양평동(467필지)이나 한남동(750필지)에 비하면 작은 동네지만, 소유 구조의 복잡성은 어느 동네보다 두드러진다. 대지, 밭, 잡종지, 국유지가 골고루 섞여 있고, 소유자는 한국인부터 일본인, 미국인, 법인, 동양척식주식회사까지 다양하다.
132필지전체 필지
97,742㎡
96필지대지(집터)
57,253㎡
33필지밭
39,689㎡
39필지국유지
식민 통치 거점
16필지일본인 소유
군사·상업 진출
9필지동척 소유
토지 수탈
이 숫자들을 소유자별로 합산하면 청파동2가의 권력 구조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132필지 중 국유지 39필지, 일본인 16필지, 동척 9필지를 합치면 64필지가 조선 사람 개인의 통제 밖에 있었다. 전체의 48%, 거의 절반이다. 이것이 1912년 청파동2가의 민낯이다.
SECTION 0396필지의 집터 — 골목과 마당, 삶의 온기
96필지, 57,253㎡의 대지. 132필지 중 72%가 집터였다. 숫자만 보면 청파동2가는 압도적으로 주거 중심의 마을이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었을 것이다. 대문을 열면 작은 마당이 있고, 우물가에서 이웃과 마주치며 안부를 나누고, 저녁이면 각 집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던 풍경.
이 96필지의 집터는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살펴야 할 구역이다. 기와 조각, 토기와 도자기 파편, 온돌과 아궁이 구조, 우물 흔적, 소형 저장 구덩이 같은 생활 유구가 이 구역에서 집중적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96필지라는 높은 집터 밀도는 여러 성씨의 생활 방식이 혼재하는 복합 층위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다.
SECTION 04밭과 잡종지 — 도시와 농촌이 공존한 흔적
33필지, 39,689㎡의 밭. 지금의 서울 용산 한복판에 밭이 있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1912년의 청파동2가가 얼마나 지금과 달랐는지를 실감하는 것이다. 봄에는 채소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자란 작물 사이로 잡초를 매고, 가을에는 수확을 거두던 그 밭들이 지금은 도로와 건물 아래 잠들어 있다.
잡종지는 3필지, 800㎡로 규모는 작다. 하지만 이 잡종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청파동2가의 공간이 단순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거도 농업도 아닌 이 과도기적 공간에는 공터, 임시 창고, 마을 공유 공간 같은 것들이 자리했을 것이다. 잡종지는 변화를 예고하는 땅이다. 이후 도로나 상업 시설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생긴 근대 흔적이 이 구역에서 나올 수 있다.
밭과 집터의 경계선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조사 기준이다. 이 경계 구간에서 농업 도구와 생활 유구가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많고, 탄화된 씨앗과 기와 조각이 같은 층위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청파동2가의 33필지 밭과 96필지 집터가 만나는 경계선이 시굴조사 트렌치 배치의 첫 번째 기준이 된다.

SECTION 05국유지 39필지 — 국가와 제국의 의도
39
132필지 중 39필지가 국유지였다. 전체의 29.5%, 거의 3분의 1이 국가 소유였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한 공공 부지 비율이 아니다. 1912년의 국유지는 총독부가 직접 관리하던 식민 통치의 물리적 기반이었다. 용산이 일본군 병참기지와 철도 중심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청파동2가의 국유지 39필지는 그 확장의 전초 기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국유지 39필지가 어디에 분포했는지를 고지도와 GIS 분석으로 재구성하면, 식민지 통치 시기의 공간 구조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군사 시설, 행정 건물, 도로 예정지 등으로 활용된 이 필지들에서는 근대 건축의 기초 유구, 도로 관련 구조물, 공공 인프라의 잔해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일본군 관련 시설과 연결된 구역에서는 일제강점기 특유의 건축 방식이 지층에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SECTION 06김씨와 마을 공동체 — 성씨별 토지 소유 구조
국유지와 외국인 소유지를 제외하고 남은 한국인 소유 토지에서 가장 많은 필지를 보유한 성씨는 김씨로 20필지였다. 청파동2가 내 한국인 소유 토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 수치는, 김씨 가문이 이 마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마을의 의사결정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마을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마을 공유지도 기록에 남아 있다.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이용하던 이 땅은 마을회관이나 공동 제의 공간, 함께 경작하던 공유 농지였을 것이다. 이 공유 공간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마을 전체의 집단 생활 유구가 집중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구역이기 때문이다. 우물, 공동 창고, 제단 흔적 같은 것들이 이 구역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한국인 공동체의 토지가 전체 132필지 중 얼마나 되는지를 계산해 보면 씁쓸한 현실이 드러난다. 국유지 39필지, 일본인 16필지, 동척 9필지, 미국인 3필지, 법인 2필지를 빼고 나면 한국인 개인 소유는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이것이 1912년 청파동2가의 냉혹한 민낯이었다.
SECTION 07동양척식주식회사 9필지 — 수탈의 구조가 새긴 흔적
역사적 맥락 —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이란?
1908년 일본 제국이 조선 토지 수탈을 위해 설립한 국책회사다. 조선 전역에서 토지를 매입하거나 강제 취득해 일본인 농업 이민자에게 재분배하거나 개발 목적으로 활용했다. 청파동2가에 동척 소유 9필지가 있었다는 것은, 이 동네가 단순한 주거 마을을 넘어 식민지 경제 수탈의 구조 속에 깊이 편입되어 있었음을 증명한다. 앞서 살펴본 청파동3가(5필지)보다도 더 많은 동척 소유지가 이 작은 동네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동척이 소유한 9필지는 어디에 위치했을까. 보통 동척은 수익성이 높거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의 토지를 선호했다. 용산 일대가 군사적·교통적 요충지였던 만큼, 청파동2가의 동척 소유지는 이 전략적 가치가 높은 구역에 집중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지도와 GIS 분석으로 이 9필지의 위치를 특정하면, 일제강점기 건축 잔해와 근대 토목 요소의 흔적이 나올 구역이 드러난다.

SECTION 08미국인 3필지와 일본인 16필지 — 외국인 소유의 두 얼굴
청파동2가에는 두 종류의 외국인 소유지가 존재했다.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가지였다.
일본인 소유 — 16필지
군사·상업적 목적이 강했다. 용산은 일본군의 병참 거점이었고, 일본인들은 이 지역을 전략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토지를 적극 매입했다. 132필지 중 12%에 달하는 이 수치는 청파동2가가 일본인의 영향력 아래 얼마나 빠르게 편입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인 소유 — 3필지
종교적 목적의 가능성이 높다. 당시 서울 일대의 미국인 소유지는 대부분 선교사나 기독교 관련 단체와 연결된 경우가 많았다. 용산 일대에는 실제로 외국인 선교 활동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고, 이 3필지도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종류의 외국인 소유지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서로 다른 유구를 남길 가능성이 있다. 일본인 소유 구역에서는 근대 일본식 건축 방식의 기초, 군사 관련 구조물 잔해가 나올 수 있다. 미국인 소유 구역에서는 서양식 건축 기초나 기독교 관련 유물이 확인될 수 있다. 132필지 안에 이토록 다양한 문화적 층위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 청파동2가 발굴을 가장 복합적으로 만드는 요소다.
SECTION 09법인 소유 2필지 — 근대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법인 소유 토지 2필지. 숫자는 작지만 의미는 크다. 전통 사회에서 토지는 개인이나 가문이 소유했다. 그런데 법인, 즉 회사나 단체가 토지를 소유하는 방식은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였다. 교회, 학교, 또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하던 근대적 단체가 이 2필지의 주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청파동2가가 단순한 전통 마을이 아니라, 근대적 변화가 이미 스며들고 있던 공간이었음을 이 2필지가 증명한다. 전통적 씨족 공동체와 식민지 경제 구조, 그리고 근대적 법인 조직이 한 동네 안에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법인 소유 필지 구역에서는 당시 근대 기관이 사용하던 서양식 건축 방식이나 특수 용도 시설의 흔적이 지층에 남아 있을 수 있다.
SECTION 101912년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주는 단서들
청파동2가처럼 소유 구조가 복잡한 동네일수록 지표조사 설계가 더 정밀해야 한다. 각 소유 구역마다 전혀 다른 유구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복잡성을 정리하면 이렇다.
1
대지 96필지 — 생활 유구 핵심 구역
기와 조각, 토기와 도자기 파편, 온돌·아궁이 구조, 우물 흔적이 집중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집터와 밭의 경계선이 시굴조사 트렌치 배치의 첫 번째 기준이 된다.
2
국유지 39필지 — 근대 인프라·군사 유구
총독부 행정 시설의 기초 유구, 군사 관련 구조물 잔해, 도로 관련 구조물이 나올 수 있다. 조선 전통 유구 위에 근대 시설이 겹쳐진 복합 층위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3
동척 소유 9필지 — 식민지 경제 유구
동척 운영 시설의 기초 잔해, 일본식 건축 방식의 흔적이 확인될 수 있다. 전략적 위치에 집중된 동척 소유지에서는 근대 상업·농업 관련 유구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4
일본인 소유 16필지 — 일제 건축 층위
일본식 건축 기초, 군사·상업 시설 잔해가 나올 수 있다. 한국 전통 건축과 일본 근대 건축이 인접한 경계선에서 층위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다.
5
미국인 3필지 — 서양식 건축·종교 유구
서양식 건축 기초, 기독교 관련 유물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 당시 선교사 활동과 연결된 독특한 유구가 나올 수 있는 구역이다.

SECTION 11서울 발굴 성공 사례 — 역사가 살아나는 순간
용산 일대 재개발 현장 — 기와 조각 하나가 역사를 바꾸다
서울 용산 인근의 한 재개발 현장에서 공사 중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지표조사를 통해 그것이 조선 후기 건물터의 일부임이 확인되었고, 추가 시굴조사를 통해 생활 유구 전체가 드러났다. 이 발견은 해당 구역을 역사 보존 공간으로 지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현장은 역사 해설 공간으로 통합되었다. 초기 지표조사에 투자한 비용이 공사 중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고, 도시의 역사를 자산으로 전환시킨 사례다.
용산구 근대 유산 발굴 — 철도관사와 근대 생활의 흔적
용산 일대에서는 이미 지상에도 철도관사 골목, 근대 병원 흔적 같은 유산이 남아 있다. 이 지역의 지하 발굴에서는 일제강점기 건축 기초, 근대 생활 도구, 외국인 거류 관련 유물이 확인된 바 있다. 청파동2가처럼 국유지와 일본인 소유지, 미국인 소유지가 복합적으로 얽힌 동네에서는 이런 복합 층위 발굴이 서울 근대사를 가장 입체적으로 복원하는 기회가 된다.
SECTION 12오늘을 비추는 청파동2가의 역사 — 맺음말
132필지, 97,742㎡. 이 숫자 안에는 김씨 가문이 이웃과 골목을 나누며 살았던 96필지의 집터가 있었고, 채소를 키우며 살아간 33필지의 밭이 있었으며, 총독부가 장악한 39필지의 국유지가 있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9필지와 일본인의 16필지, 미국인의 3필지가 얽혀 있었다.
한 동네 안에서 조선의 마을 공동체와 식민지 경제 구조, 근대 자본주의의 징후, 그리고 국제적 이해관계가 동시에 충돌하고 공존하던 공간. 그것이 1912년 청파동2가였다. 지금 우리가 이 기록을 다시 꺼내드는 이유는 그 충돌과 공존의 흔적이 아직도 땅속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잠든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깨우는 일이다. 기와 조각 하나, 토기 파편 하나가 100년 전 청파동2가의 어느 가정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에게 이어진다. 역사는 책 속에만 있지 않다. 땅속에, 우리 발밑에 살아 있다.

132필지의 땅 위에서김씨 가문은 골목을 쓸었고동척은 장부에 숫자를 더했으며미국인 선교사는 기도했고일본군은 땅을 재었다.그 모든 이야기가지금도 청파동2가의 땅속에 잠들어 있다.그 잠든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그것이 문화재 지표조사가 우리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땅속에 잠든 역사를 깨우는 사람이도시의 진짜 이야기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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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참고: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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