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영등포구 신길동, 땅과 사람들의 이야기
- 서울 HI
- 9월 26일
- 3분 분량
목차
1912년 신길동의 전체 모습과 시대적 배경
논과 밭, 농경지에서 이어진 삶
집과 대지, 작은 공간에서 살아간 사람들
무덤과 사사지, 신앙과 조상 숭배의 흔적
임야와 잡종지, 마을의 또 다른 자원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과 공동체 질서
국유지와 마을 소유지의 의미
일본인의 토지 소유, 식민지 시대의 그림자
신길동에서 읽는 서울의 도시화 과정
문화재 조사와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점

1912년, 영등포구 신길동은 448필지 1,573,045㎡. 이 숫자는 단순한 토지 면적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삶과 서울의 변화를 담은 생생한 기록입니다.
100여 년 전 신길동은 오늘날의 빽빽한 아파트 단지나 도로 위에 자동차가 끊이지 않는 도심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논과 밭이 마을의 주인공이었던 전형적인 농촌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땅과 함께 호흡하며 살았습니다.
이제 그 기록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 1912년 신길동의 전체 모습과 시대적 배경
1912년은 조선이 이미 일본에 병합된 지 2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그 무렵 일본은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 땅의 크기와 소유 현황을 정리했습니다. 신길동의 기록도 바로 이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총 448필지, 면적 1,573,045㎡. 이를 평수로 바꾸면 약 47만 평, 오늘날 신길동 전체 면적의 일부와 맞먹는 규모입니다.
주요한 특징은 농업 중심의 토지 이용입니다. 전체 면적의 86%가 논과 밭이었고, 나머지는 집, 무덤, 임야, 잡종지 등으로 채워졌습니다.
즉, 신길동은 당시 서울과 가까운 지역이었지만 여전히 농촌적 성격이 짙었던 것입니다.
2. 논과 밭, 농경지에서 이어진 삶
신길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농경지였습니다.
논: 173필지 854,585㎡
밭: 200필지 504,306㎡
당시 농업은 여전히 사람과 가축의 힘에 의존했습니다. 논에서는 쌀을 재배했고, 밭에서는 보리, 콩, 조, 채소 같은 잡곡류와 먹거리를 길렀습니다.
농사일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를 이어주는 핵심이었습니다. 모내기철에는 온 마을이 함께 논에 들어갔고, 추수철에는 서로 품앗이를 하며 벼를 거두었습니다.
논이 차지하는 면적이 밭보다 넓었다는 사실은 쌀이 이미 주민들의 주식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쌀은 귀한 곡식이었기에 일부는 세금이나 소작료로 일본인 지주에게 넘어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3. 집과 대지, 작은 공간에서 살아간 사람들
1912년 신길동에 집이 지어진 대지는 25필지, 43,454㎡에 불과했습니다.
전체 면적의 3%도 되지 않는 이 땅 위에 당시 주민들이 살았습니다. 지금의 신길동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적은 규모입니다.
이 집들은 대부분 초가집이나 기와집이었을 것이고, 대문 앞에는 장독대와 작은 텃밭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뛰놀고, 어른들은 집 앞에서 농기구를 손질했습니다.
이처럼 농지와 대비되는 작은 대지 위에서 주민들은 소박하지만 끈끈한 공동체적 삶을 살았습니다.
4. 무덤과 사사지, 신앙과 조상 숭배의 흔적
신길동에는 무덤(분묘지)이 1필지, 1,018㎡ 있었고, 사사지가 1필지, 409㎡ 있었습니다.
무덤은 단순한 땅이 아니라 조상을 기리는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당시 마을에서는 음력 명절마다 제사를 지내고, 후손들이 모여 조상 앞에서 절을 올리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졌습니다.
또한 사사지가 있었다는 점은 불교가 이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줍니다. 작은 사찰이 있었거나, 절터가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신길동 주민들의 삶은 농업과 신앙, 조상 숭배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5. 임야와 잡종지, 마을의 또 다른 자원
임야는 36필지, 144,965㎡에 달했습니다.
이 임야는 땔감을 구하거나 산나물을 채취하는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 꼭 필요한 장작과 숯은 모두 산에서 얻었습니다.
잡종지는 12필지, 24,304㎡였는데, 이는 길, 하천 주변, 공터 등 농업 외 용도의 땅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장터를 열거나 아이들이 뛰놀던 공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6.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과 공동체 질서
1912년 신길동의 땅을 누가 소유했는지를 보면, 마을의 구조를 알 수 있습니다.
이씨: 163필지
김씨: 51필지
정씨: 43필지
임씨: 32필지
한씨: 14필지
최씨: 12필지
박씨: 11필지
유씨: 11필지
빈씨: 10필지
이씨가 가장 많은 땅을 소유했으며, 김씨와 정씨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는 신길동이 특정 씨족 중심의 마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씨족 마을에서는 혼례, 제사, 농사까지 공동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혈연적 유대감이 강했습니다. 지금의 아파트 생활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사회 질서였던 셈입니다.
7. 국유지와 마을 소유지의 의미
신길동에는 국유지가 5필지, 마을 소유지가 1필지 있었습니다.
국유지는 관청이나 일본 총독부가 관리하던 땅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세금을 걷거나 행정적 용도로 활용되었을 것입니다.
마을 소유지는 주민 공동체가 함께 이용하던 공유지였습니다. 아마 마을회관 터, 공동 우물, 혹은 제사를 지내던 마을 제단 같은 공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8. 일본인의 토지 소유, 식민지 시대의 그림자
1912년 신길동에는 일본인 소유의 땅이 5필지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작은 숫자지만, 이는 당시 식민지 체제 속에서 일본인들의 토지 침탈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 일본인 지주들은 점차 토지를 늘려갔고, 조선인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해 갔습니다.
신길동도 이런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민들의 삶은 점차 그들의 땅에서 땀 흘려 농사짓고, 소출을 나눠 바치는 구조로 변해갔습니다.
9. 신길동에서 읽는 서울의 도시화 과정
1912년의 신길동은 농촌 마을이었지만, 오늘날은 서울의 대표적인 주거지역으로 완전히 변모했습니다.
논과 밭은 사라지고 아파트 단지와 도로가 들어섰습니다. 임야와 잡종지는 사라졌고, 대신 초고층 빌딩과 상가가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이 변화의 뿌리를 이해하려면, 바로 1912년 같은 기록이 필요합니다. 도시화 이전 신길동이 어떤 마을이었는지 알 때, 지금의 신길동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 문화재 조사와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점
오늘날 이런 자료는 문화재 지표 조사나 발굴 조사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됩니다.
지표 조사란 개발 예정지의 문화유산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고, 발굴 조사는 실제 땅을 파서 과거 흔적을 찾아내는 작업입니다.
신길동 같은 지역은 이미 도시화되었지만, 곳곳에 과거 마을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작은 무덤터, 절터, 오래된 우물 하나도 당시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발만이 아니라, 이런 역사적 흔적을 지키고 기록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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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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