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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영등포구 도림동 토지 이용 현황과 그 의미

  • 2025년 9월 21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7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리포트

신도림역 그 땅 아래에,100년 전 도림동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108필지·4,825,948㎡. 서울 근대화의 최전선이었던 도림동, 1912년 기록이 말해주는 논과 밭, 무덤, 그리고 최초의 철도용지 이야기.

1,108

총 필지 수

4,825,948

총 면적(㎡)

796

논·밭 필지 합계

1

철도용지 필지


목차 · Contents

  • 시작 도림동, 1912년의 풍경을 열다

  • 01 논이 차지한 비중과 당시의 농업 기반

  • 02 집과 대지, 마을의 형성과 주거 공간

  • 03 무덤이 보여주는 삶과 죽음의 흔적

  • 04 산과 임야, 자연이 남긴 영역

  • 05 잡종지, 다양한 활용의 가능성

  • 06 밭의 규모와 생활 경제의 중심

  • 07 철도용지, 근대화의 상징적 흔적

  • 08 도림동 토지 구조가 가진 역사적 가치

  • 09 오늘날 문화재 조사와 발굴의 중요성


지금 신도림역 2호선 환승 게이트를 통과하는 당신, 그 발 아래 어딘가에는 100년 전 허리를 굽혀 모를 심던 농부의 흙길이 잠들어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오늘날 서울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오가는 환승역 중 하나인 신도림역 일대, 그리고 영등포역을 끼고 있는 도림동 일대는 불과 한 세기 전에는 광활한 논과 밭, 야트막한 임야,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조상을 모시던 분묘지가 펼쳐진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도림(道林). 길과 숲이 어우러진 이름처럼, 그 시절의 도림동에는 정말로 길과 나무가 함께 숨을 쉬고 있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 자료를 바탕으로 1912년 도림동의 토지 기록을 들여다보면, 총 1,108필지 4,825,948㎡라는 거대한 숫자가 등장한다. 이 숫자는 단순한 면적이 아니다. 당시 도림동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살고, 죽고, 믿음을 지켰는지를 담은 생생한 기록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기록 안에는 근대 한국을 바꿔놓은 경인선 철도의 흔적까지 숨어 있다. 이제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시작하며 — 도림동, 1912년의 풍경을 열다

도림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지금은 도림천 주변의 빽빽한 주거 지역, 혹은 구로디지털단지로 연결되는 교통 요충지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1912년의 도림동은 전혀 달랐다. 구한말까지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 도야미리(道也味里) 혹은 원지목리로 불리던 이 땅은, 1914년에야 도림리로 정리됐고 1936년에 경성부로 편입됐다. 즉 1912년은 도림동이 아직 경기도의 한 농촌 마을이었던 시절의 기록이다.

이 시절 도림동 서쪽으로는 경인선 철도가 지나고 있었다. 1899년 우리나라 최초로 개통된 경인선은 도림동 인근에 영등포역을 두고 있었고, 이 철도의 존재가 도림동의 운명을 결정짓는 씨앗이 됐다. 하지만 1912년 기록 속 도림동은 아직 그 변화의 직전에 서 있는 마을이었다. 논과 밭이 마을의 주인공이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계절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고 있었다.

1912년 도림동 토지 현황 — 핵심 통계

총 필지 수1,108필지

총 면적4,825,948㎡ (약 146만 평)

논 (답)390필지 / 1,587,279㎡ (32.9%)

밭 (전)406필지 / 1,444,829㎡ (29.9%)

잡종지159필지 / 1,368,432㎡ (28.4%)

임야77필지 / 309,353㎡ (6.4%)

대지 (집터)72필지 / 97,990㎡ (2.0%)

분묘지3필지 / 2,082㎡

철도용지1필지 / 15,980㎡


01 논이 차지한 비중과 당시의 농업 기반



390필지, 1,587,279㎡의 논. 도림동 전체 면적의 32.9%를 차지하는 이 논들이 말해주는 것은 명확하다. 당시 도림동 경제의 핵심은 쌀이었다. 봄에 모를 심고 여름을 넘기고 가을에 벼를 거두는 사이클이 마을 전체의 리듬을 만들었다.

논은 단순한 쌀 생산지가 아니었다. 공동체의 생활 리듬과 직결된 공간이었다. 모내기철에는 온 마을이 논으로 나와 품앗이를 했고, 추수가 끝나면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여 한 해의 수고를 나눴다. 도림동의 논이 이렇게 넓었다는 사실은, 이 마을이 상당히 큰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1,587,279㎡의 논에서 나온 쌀은 마을 사람들의 주식을 채우고도 남아 영등포 인근 시장에 내다 팔았을 것이다.

1912년 도림동 — 토지 용도별 면적 비율

논 (답)32.9%

밭 (전)29.9%

잡종지28.4%

임야6.4%

대지 (집터)2.0%

철도용지 외0.4%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발견되는 옛 농경지의 흔적, 즉 논두렁의 방향이나 수로의 자취는 당시 도림동의 공간 구조를 복원하는 핵심 단서가 된다. 1,587,279㎡라는 논의 크기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발굴조사에서 어느 방향으로 삽을 꽂아야 과거를 만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좌표다.


02 집과 대지, 마을의 형성과 주거 공간

72필지, 97,990㎡의 대지. 전체 면적의 겨우 2%다. 이 작은 비율이 말해주는 것이 있다. 도림동 사람들은 넓은 논밭 속에 아주 작은 터전을 마련해 모여 살았다. 집의 수는 적었지만, 그 집들이 품은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 72필지의 집터 위에는 초가와 기와집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대문을 열면 마당이 나오고, 마당 한편에는 장독대가 있었으며, 봄이면 텃밭에 채소 씨앗을 뿌렸다. 마을 어귀에는 정자나무가 한 그루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름 저녁에는 그 나무 아래에 평상을 놓고 이웃들이 모여 더위를 식혔다. 아이들은 골목에서 뛰어놀았고, 어른들은 논일을 마치고 돌아와 막걸리 한 잔을 기울였다.

"72필지의 집터. 그 숫자 안에는 단순히 벽과 지붕이 아니라, 도림동 사람들이 살아낸 하루하루의 모든 장면이 들어 있다."

시굴조사와 표본조사를 통해 확인되는 옛 가옥의 터는 마을 구조를 밝히는 결정적 단서다. 기와 파편, 아궁이 자리, 우물 흔적 하나가 당시 도림동의 생활을 복원하는 실마리가 된다.


03 무덤이 보여주는 삶과 죽음의 흔적



3필지, 2,082㎡의 분묘지. 숫자는 작지만 이 땅이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분묘지는 마을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조상들을 기리는 공간이었다. 유교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절, 무덤은 살아있는 자와 떠난 자가 계속 이어지는 장소였다.

음력 설과 추석이면 도림동 사람들은 이 분묘지를 찾았다. 벌초를 하고, 제물을 차리고, 조상 앞에 절을 올렸다. 그 과정 속에서 가족의 결속이 다져지고, 마을 공동체 의식이 깊어졌다. 2,082㎡라는 작은 면적 안에, 도림동의 여러 세대가 함께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분묘지 곁을 지나던 아이들은 언젠가 자신도 이 땅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아직은 알지 못한 채 뛰어다녔을 것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과정에서 종종 발견되는 묘지 유구는 단순한 유적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의례를 통해 공동체를 유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04 산과 임야, 자연이 남긴 영역

77필지, 309,353㎡의 임야. 도림동 면적의 6.4%를 차지하는 이 산림 지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원 창고였다. 겨울 난방에 필요한 장작과 숯이 모두 이 임야에서 나왔다. 봄에는 진달래와 쑥을 뜯었고, 여름에는 그늘 아래서 더위를 식혔으며, 가을에는 도토리와 버섯을 채취해 겨울을 준비했다.

임야는 마을 사람들의 생활 자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경계의 공간이기도 했다. 마을과 마을을 나누는 자연적 경계선이 되었고, 농경지와 달리 개인 소유가 아닌 마을 공동의 자원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도림천이 흐르는 지역 특성상, 임야는 수해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완충지 역할도 했을 것이다.

오늘날 이 임야의 자리에는 도로와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지표조사를 통해 토양의 층위를 분석하면, 한때 이 땅이 숲이었다는 흔적이 여전히 발견될 수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는 바로 그런 보이지 않는 역사를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05 잡종지, 다양한 활용의 가능성

159필지, 1,368,432㎡의 잡종지. 논이나 밭도 아니고, 집터나 산도 아닌 이 땅은 도림동 전체 면적의 무려 28.4%를 차지한다. 세 번째로 큰 비중이다. 과연 이 광대한 잡종지는 어떤 공간이었을까.

잡종지는 특정 용도로 분류되지 않은 다목적 공간이었다. 마을 안 크고 작은 길들, 하천 주변의 완충지, 공터와 빈 땅이 모두 여기에 포함됐다. 오일장이 섰던 자리, 마을 사람들이 모여 씨름판을 벌이던 빈터, 명절에 줄다리기를 하던 공간이 잡종지에 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공원이나 광장, 도로가 맡고 있는 역할을 이 잡종지가 했다고 보면 된다.

특히 도림동처럼 경인선과 가까운 지역에서는 잡종지가 역 주변의 물류 공간이나 상거래 부지로 서서히 변모했을 가능성도 있다. 잡종지는 방치된 땅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전환의 공간이었다.


06 밭의 규모와 생활 경제의 중심



406필지, 1,444,829㎡의 밭. 필지 수로는 도림동에서 가장 많고, 면적으로도 논에 이어 두 번째다. 논이 쌀을 생산하는 주력 경제 기반이었다면, 밭은 도림동 사람들의 식탁을 다채롭게 채우는 생활 경제의 핵심이었다.

벼, 보리, 콩, 팥, 고구마, 무, 배추, 고추. 계절마다 다른 작물이 이 밭을 채웠다. 논에서 나온 쌀이 양반가의 밥상에 올라갈 때, 밭에서 나온 잡곡과 채소가 대다수 농민들의 배를 실질적으로 채웠다. 남는 채소는 소금에 절이거나 햇볕에 말려 겨울 내내 먹을 저장 식품을 만들었다. 이것이 1912년 도림동 사람들의 진짜 일상이었다.

발굴조사에서 발견되는 곡물 저장용 항아리 파편, 씨앗 흔적이 남은 지층은 바로 이 406필지 밭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복원하는 단서가 된다.


07 철도용지, 근대화의 상징적 흔적

경인선(京仁線) — 한반도 최초의 철도, 1899년 개통

1896년 미국인 모스에게 부설권이 특허된 경인선은 1899년 9월 노량진~인천 구간을 최초 개통하고, 1900년 7월 경성~인천 전 구간이 완통됐다. 영등포역을 지나던 이 철도는 도림동 바로 옆을 관통했고, 1905년 경부선 개통 이후 그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경인선은 단순한 교통 수단이 아니라, 서울 남서부 도시화의 방아쇠였다.

단 1필지, 15,980㎡의 철도용지. 1,108필지 중 단 하나다. 하지만 이 한 필지의 의미는 나머지 1,107필지를 합친 것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철도용지가 바로 도림동의 운명을 가른 변수였기 때문이다.

1912년 당시 도림동 옆을 지나던 경인선은 1899년에 개통된 한국 최초의 철도였다. 영등포역을 중심으로 철도가 지나자 이 일대는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물자와 사람의 이동이 빨라졌고, 도심과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1912년에는 철도용지가 겨우 1필지였지만, 이후 수십 년간 도림동 일대는 공장과 창고, 상업 시설이 들어서며 빠르게 도시화됐다.

1936년 도림동이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변화는 더욱 가속됐다. 1946년 도림동과 사옥동(현 문래동)으로 분리되고, 이후에도 신길동, 문래동, 대림동 등에 일부가 편입되면서 지금의 도림동은 원래 면적의 일부만 남게 됐다. 1912년의 철도용지 한 필지가 그 모든 변화의 씨앗이었다.


08 도림동 토지 구조가 가진 역사적 가치

1912년 도림동의 토지 기록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논과 밭이 전체의 62%를 넘게 차지하는 농경 중심의 마을, 그 한켠에 잡종지가 28%로 넓게 펼쳐져 있고, 임야가 자연의 영역을 지키고 있으며, 72필지의 작은 집터 위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철도용지가 단 한 필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은 농촌에서 도시로, 전통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순간을 포착한 기록이다. 도림동은 아직 농촌이었지만, 이미 근대화의 파도가 발끝까지 밀려와 있었다. 이 긴장감이 바로 1912년 도림동 토지 구조의 역사적 가치다.


09 오늘날 문화재 조사와 발굴의 중요성



1912년 도림동의 토지 기록은 단순히 과거의 숫자가 아니다. 오늘날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활용되는 살아있는 자료다. 도로 하나, 건물 하나를 짓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지는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는 바로 이런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어느 지점에 무엇이 묻혀 있을지를 예측하는 과정이다.

특히 도림동처럼 논과 밭, 임야, 주거지, 철도용지가 복합적으로 분포했던 지역은 발굴조사 결과도 풍부하다. 한 지점에서 농경 도구와 생활 유물, 그리고 근대 철도 시설의 흔적이 같은 층위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것은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는 역사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발굴조사 의뢰 및 지표조사 안내

도림동처럼 역사적으로 다층적인 지역에서 건축이나 토목 공사를 진행할 때는 사전 문화재 지표조사가 법적으로 의무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규모 공사의 경우 국가유산청의 국비 지원 발굴 제도를 활용하면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국가유산청 민원포털이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를 통해 관련 정보를 확인해보세요.

서울 도심 곳곳에서는 공사 현장에서 조선시대 생활 유적이 발견되어 역사를 다시 쓴 사례가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예상치 못한 유적이 드러나면 개발 계획이 수정되기도 한다. 불편함이 아니라, 더 풍요로운 역사를 가진 도시를 만드는 과정이다. 1912년 도림동의 기록은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펼쳐볼 지도가 된다.

1912년 도림동의 논에서 모를 심던 사람들, 밭에서 씨앗을 뿌리던 사람들, 분묘지 앞에서 절을 올리던 사람들. 그들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들이 일군 땅은 지금 우리 발 아래에 있다.

그리고 그 땅 한켠에 놓인 철도용지 한 필지가 도림동을 농촌에서 도시로 바꿔놓은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그 여정 위에 서 있다.

오늘 도림동 골목을 걷거나 신도림역 환승 통로를 지날 때, 잠깐 멈춰서 발 아래 땅을 한번 생각해보자. 그 땅은 100년 전 사람들의 숨결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이 기억해줄 때 비로소, 그 숨결은 사라지지 않는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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