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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영등포구 당산동, 땅 속의 시간들을 파헤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

1912년 어느 봄날, 영등포구 당산동의 들판 사이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사람들 발길은 논길 위에, 논두렁 위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오고 갔다. 밭을 갈고, 집터를 정리하고, 논물을 댈 물꼬를 틀던 손길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지금의 아파트와 도로, 상가 빌딩 아래, 그때의 땅 모습이 어떻게 잠들어 있을까?


그해 당산동의 전체 면적은 1,647,243㎡, 필지 수는 367필지였다. 겨우 한 동네였지만 땅 용도도, 사람이 살던 방식도 다양했다. 지표조사나 발굴조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기록 하나하나가 ‘어디를 파볼까’, ‘무엇을 기대할까’에 대한 단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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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당산동을 보면, 밭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잡종지, 산지, 주택용 대지, 사사(묘지) 등이 그 나머지를 이루고 있었다. 밭이 321필지, 약 1,507,748㎡로 전체의 절반 넘게 차지했고, 잡종지는 3필지 54,476㎡, 산(임야)은 2필지 12,376㎡, 집 대지(주거용)은 39필지 71,682㎡, 사사지(묘지)는 2필지 958㎡였다. 이렇게 땅의 용도 분포가 복합적이라는 건 유적 가능성이 다양하다는 뜻이다. 농업 생활 흔적, 주거 구조, 공동 묘지, 산림 이용, 또는 수목, 나무와 관련된 공간 등이 혼재해 있었던 셈이다.


주거지(집 대지)가 39필지 있다는 건, 당산동에도 이미 사람들이 집을 지어 거주하던 소규모 거주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다. 이 집 대지 주변에서 주춧돌, 기와 조각, 생활도구 파편 등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대지의 경계, 마을길, 물길, 공동 우물이 어디 있었는지는 문헌기록만으로는 어렵지만, 토지 대장이나 고지도, 그리고 지표조사를 통해 유력한 후보 지점을 좁힐 수 있다.


또한 잡종지와 산지, 밭 등이 주거지와 가까이 섞여 있다는 것은 생활공간과 농업·임업공간이 혼재된 풍경을 뜻한다. 지금 개발되기 직전의 지역들을 보면 이런 혼합용도가 많은데, 이런 곳에서는 발굴조사에서 ‘밭이었던 층’(농사용 도구, 농기구, 밭의 배수로나 물길) → ‘주거지 터’ → 또 다른 변화층 등이 겹겹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사사지(2필지 958㎡)가 있다는 것은 매장 또는 무덤 관련 유물이 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묘지 자체가 보호되어야 할 문화재 유적일 수도 있고, 묘지 주인이 어떤 성씨인가, 어떤 방식으로 무덤을 만들었는가도 탐구할 만한 요소다.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도 매우 흥미롭다. 김씨가 85필지, 이씨 42필지, 문씨 32필지, 오씨 23필지, 조씨 17, 박씨 16, 정·최씨 각각 12, 장씨 10… 일본인은 25필지 소유. 국유지 36필지, 마을 소유 1필지. 이런 구조는 단순히 누가 큰 땅주인이었는가 뿐 아니라, 사회적 위계, 주민 구성, 경제력, 그리고 식민지 초기 토지 정책의 영향 등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시기라 일본인이 일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토지 취득, 권력 관계, 거주와 행정의 변화 가능성 등을 암시한다. 일본인 소유 필지 주변을 조사하면, 건물 구조, 축조 방법, 건축 자재 등에서 조선 전통 가옥과 다른 점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문화재 문화층에서는 의미 있는 차이를 드러낼 수 있다.


성씨별 필지 수가 많은 김씨가 대지나 밭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주거지 대지의 배치가 어떻게 되었는지 등을 지표조사하면서 고지도 및 옛 토지대장 자료와 비교하면 당시 당산동의 마을 구조, 골목길, 물길, 집의 배치 등이 어느 정도 복원 가능하다.




“왜 이 기록이 중요하냐면”, 지표조사 또는 시굴조사(시험 발굴) 단계에서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정보가 바로 이런 토지 용도, 필지 분포, 소유자 정보다. 왜냐하면:


  • 발굴 위치 선정: 연구자들은 “집 대지가 있었다면 주춧돌 터, 담장, 마루판, 기와 조각 등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우선 순위 조사지를 확보한다.

  • 문화층 예측: 밭 → 농사용품 층, 주거지 → 생활 유물 층, 사사지 → 매장 유물 층 등이 층위별로 층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 보존가치 판단: 국유지, 마을 소유지, 일본인 소유지 등 공적 소유 또는 행정적 기록이 잘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은 보존 가능성이나 조사 승인 가능성 면에서 유리하다.

  • 사람 삶 복원: 누가 살았고 어떤 삶을 살았고, 마을 공동체가 어땠는지를 복원하는 데 이런 토지 + 성씨 자료는 필수적이다.





성공 사례를 하나 들어볼게.


공평구역 제15·16지구 나지역 유적 발굴조사라는 사례야. 이 조사는 서울 인사동 일대에서 진행되었고, 조선 전기부터 근대까지의 여러 문화층이 확인되었었고, 특히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주전 등의 금속 유물이 출토된 바 있어.

이 조사를 통해서 단순히 유물이 드러난 것뿐 아니라, 필지 경계, 옛 도로, 공동우물, 담장석렬, 배수로 등이 발견됨으로써 당시 마을이나 관청·상업 공간·주거 공간 등이 어떻게 배치되었는가를 복원할 수 있었어.


또 풍납동 토성과 주변 발굴 사례도 있어. 송파구의 풍납동에서는 백제시대 유구 및 토기류가 많이 나왔고, 특히 주거지, 목조 우물, 환호(防禦시설) 같은 구조물들이 확인됨으로써 옛 한성 백제 시기부터 사람이 어떻게 이 땅을 이용했는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당산동 쪽으로 상상해보면, 1912년의 당산동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사가 의미 있고 가능성이 높을 거야:


  • 밭이 많았던 지역 → 농경 관련 유물, 농기구, 밭 배수로, 논두렁 흔적

  • 주거지 대지가 있던 필지 주변 → 주춧돌, 기와, 가옥 폐허층, 지층 변화

  • 사사지 주변 → 무덤 구조, 지석(묘비), 무덤 장례 물품

  • 잡종지 / 산지 경계 주변 → 식생 변화, 토양 변화, 지형 흔적, 나무 묘목의 뿌리층 및 산림 이용 증거

  • 일본인 소유지 및 국유지, 마을 소유지 주변 → 건축 양식 차이, 재료 차이, 토지 이용 방식 차이





지표조사 또는 시굴조사를 의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


  • 옛 지도 및 토지 대장: 고지도, 토지대장(1912년 이전 또는 그 무렵의 것) 확보

  • 지목(땅의 용도): 밭, 임야, 주거지, 잡종지, 사사지 등으로 분류된 정보

  • 소유자 정보: 성씨, 개인 혹은 기관, 일본인 소유 여부, 국유지 등

  • 필지 크기, 경계 정보: 면적, 필지 수, 위치 관계

  • 현장 조사 가능성: 재개발 예정지인가, 아직 건물이 없는 빈 땅인가, 지하 시설 공사가 예정되어 있는가 등





마무리하면서 강조할 것:


당산동은 지금은 여러 변화가 있었겠지만, 1912년의 토지 기록은 그 밑그림이다. 그 밑그림 위에서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땅 속에 잠든 ‘사라진 길’, ‘작은 집’, ‘논·밭 사이길’, ‘공동 묘지’ 같은 것들이 복원될 수 있다.


서울의 문화유산 발굴조사 시스템이 최근 활발해졌고, 지자체도 개발 전에 매장문화재 조사와 보존 방안 마련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기록이 있는 당산동 같은 지역은 이런 조사 요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높아.




성공적인 동요 시키는 문장 하나:


“한 뼘만 땅만 파도, 당신의 발밑에 100년이 숨 쉬고 있다” 라는 걸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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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재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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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굴조사 의뢰

표본조사 정보


서울 문화유적 조사

당산동 발굴조사

매장문화재 보호

토지 대장 기록

역사 유물 발굴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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