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영등포구 당산동, 땅 속의 시간들을 파헤치다
- 2025년 9월 15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7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리포트
한 뼘만 땅만 파도,당신 발밑에 100년이 숨 쉬고 있다
367필지·1,647,243㎡. 지금의 아파트와 영등포구청 아래, 1912년 당산동은 밭이 91%를 차지하는 드넓은 농촌 마을이었다. 김씨 85필지의 이야기부터 일본인 25필지의 그림자까지, 땅이 기억하는 것들을 되살린다.
367
총 필지 수
1,647,243
총 면적(㎡)
321
밭 필지 수
25
일본인 소유 필지
목차 · Contents
시작 시간을 거슬러, 1912년 당산동으로 떠나다
01 밭이 91% — 당산동은 거대한 농경지였다
02 집터 39필지, 마을 공동체의 흔적
03 사사지와 임야, 죽음·신앙·자연의 공간
04 잡종지, 마을의 숨통이었던 땅
05 성씨별 토지 소유 — 김씨 85필지의 세상
06 국유지 36필지의 의미 — 국가 권력의 지형도
07 일본인 25필지 — 식민지 경제 구조의 침투
08 발굴조사로 당산동을 파보면 무엇이 나올까
09 서울 성공 사례 — 청진동과 풍납동이 가르쳐준 것
10 문화재 지표조사, 어떻게 의뢰하나
마무리 땅이 기억하는 것들
1912년 어느 봄날, 당산동 들판에 햇살이 내려앉았다. 논두렁 위에서 농부가 물꼬를 트는 소리, 밭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가는 발소리.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아파트 아래에 그 소리들이 잠들어 있다.
오늘날 당산동은 지하철 2호선 당산역, 영등포구청, 한강성심병원이 자리한 도시의 핵심 구역이다. 2호선과 9호선이 교차하고, 양화대교를 통해 마포구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 그런데 1912년의 당산동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 당산리·선유리라 불리던 이 땅은, 밭과 논두렁이 지평선까지 펼쳐진 농촌 마을이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당산동의 토지 기록에는 총 367필지, 1,647,243㎡라는 거대한 숫자가 담겨 있다. 이 광활한 땅의 91%가 밭이었다. 지금부터 그 땅을 한 층씩 파헤쳐보자.

시작하며 — 시간을 거슬러, 1912년 당산동으로 떠나다
1912년의 당산동은 아직 서울이 아니었다.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 당산리로 불리던 이 땅이 1917년 시흥군 영등포면, 1936년에야 경성부로 편입됐다. 즉 1912년의 기록은 서울 편입 이전, 순수한 경기도 농촌 마을의 마지막 풍경을 담고 있다.
당시 당산동의 총 면적은 1,647,243㎡. 평수로 환산하면 약 49만 8천 평, 축구장 약 230개를 합친 규모다. 이 광활한 땅이 어떻게 쓰이고 있었는지, 누가 소유하고 있었는지를 보면 1912년 당산동 사람들의 삶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1912년 당산동 토지 현황 — 핵심 통계
총 필지 수367필지
총 면적1,647,243㎡ (약 49.8만 평)
밭 (전)321필지 / 1,507,748㎡ (91.5%)
대지 (집터)39필지 / 71,682㎡ (4.4%)
잡종지3필지 / 54,476㎡ (3.3%)
임야2필지 / 12,376㎡
사사지 (묘지)2필지 / 958㎡
국유지36필지
마을 소유지1필지
일본인 소유25필지
01 밭이 91% — 당산동은 거대한 농경지였다
1912년 당산동 — 토지 용도별 면적 비율 시각화
밭 91.5%
집 4.4%
잡종지 3.3%
밭 321필지대지 39필지잡종지 3필지기타
321필지, 1,507,748㎡의 밭. 전체의 91.5%. 이 숫자는 당산동이 얼마나 철저한 농경 마을이었는지를 단번에 보여준다. 지금 당산역 주변 아파트와 상가가 빽빽한 풍경을 떠올리면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장면이지만, 1912년의 당산동은 밭이 전부였다.
321필지 밭에서 무엇이 자랐을까
조선 후기부터 경인선 개통(1899년) 이전까지 당산동 일대는 한강 남쪽 영등포 권역의 주요 농경지였다. 보리, 콩, 조, 고구마, 배추, 무. 계절마다 다른 작물이 이 광대한 밭을 가득 채웠다. 특히 한강과 가까운 입지 덕분에 토양이 비옥했고, 가뭄에도 물 걱정이 적었다. 321필지의 밭에서 거둔 작물은 마을 사람들의 식탁을 채우고, 남는 것은 인근 영등포 장터에 나갔다.
321필지에서 일하던 농부들의 손은 쉬지 않았다. 봄에는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는 김을 매고, 가을에는 수확하고, 겨울에는 땅을 정비했다. 이 반복적인 노동의 리듬이 당산동이라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오늘날 이 밭들은 모두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아래 사라졌지만, 지층 속 어딘가에는 농기구의 흔적, 밭의 배수로, 논두렁의 자취가 남아 있을 것이다.
02 집터 39필지, 마을 공동체의 흔적

집터로 기록된 대지는 39필지, 71,682㎡다. 전체 면적의 4.4%에 불과하지만, 이 39필지 위에서 당산동 사람들의 실제 생활이 펼쳐졌다. 광활한 밭 한가운데 39채의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밭과 밭 사이 작은 언덕이나 높은 지대에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을 것이다.
39필지의 집터는 마을의 중심부를 형성했다. 여기서 아이들이 자라고, 노인들이 마당에 앉아 햇볕을 쬐었으며, 저녁이면 아궁이 연기가 마을 전체를 감쌌다. 김씨 가문 사람들이 이웃한 필지에 집을 세우고, 이씨와 문씨 가문 사람들과 골목을 사이에 두고 살았을 것이다.
오늘날 당산동의 집터 흔적을 찾으려면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필수다. 주춧돌, 기와 조각, 아궁이 자리, 공동 우물의 흔적이 이 39필지의 위치를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대지의 경계와 마을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토지 대장과 고지도, 지표조사를 종합해야 복원이 가능하다.
03 사사지와 임야, 죽음·신앙·자연의 공간

사사지 2필지 958㎡. 임야 2필지 12,376㎡. 이 두 종류의 땅은 당산동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사사지에는 마을 공동 묘지 또는 특정 가문의 무덤이 있었다. 2필지 958㎡는 비교적 작은 규모지만, 이 땅에는 당산동을 살다 간 여러 세대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 묘비의 비문, 부장품의 종류, 무덤 방식이 모두 당시 사람들의 삶과 죽음 인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이런 매장 유구가 발견되면 묘지 주인이 어느 성씨인지, 어떤 장례 문화를 가졌는지까지 탐구할 수 있다.
임야 2필지 12,376㎡는 마을 사람들이 땔감을 구하고 약초를 채취하며 계절마다 찾아들던 산림 공간이었다. 광대한 밭 속에 자리한 이 작은 숲은, 마을에 그늘과 쉬어가는 공간을 제공했다. 발굴조사에서 임야 주변을 살피면 당시 수목 이용의 흔적, 토양의 변화, 식생의 층위가 드러난다.
04 잡종지, 마을의 숨통이었던 땅
잡종지 3필지, 54,476㎡. 이 숫자가 주목을 받아야 한다. 54,476㎡라면 축구장 약 7개 반 크기다. 필지 수는 겨우 3개지만 면적이 크다는 것은, 이 세 필지가 매우 넓게 펼쳐진 다목적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잡종지란 특정 농업이나 주거 용도에 속하지 않는 다양한 쓰임새의 땅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공터, 오일장이 서는 터, 길과 길 사이의 여백, 물이 고이거나 흐르던 저지대 등이 해당한다. 광활한 밭 속에 54,476㎡의 잡종지가 있었다는 것은, 당산동에 마을 공동체가 함께 사용하는 넓은 공간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한강과 가까운 당산동의 지형을 고려하면, 이 잡종지 일부는 홍수나 범람 시 물이 머무는 저지대였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한강 수운과 연결된 물자 집산지였을 수도 있다. 잡종지는 지표조사에서 토양의 변화와 지형 흔적을 통해 과거 용도를 추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05 성씨별 토지 소유 — 김씨 85필지의 세상
1912년 당산동의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은 마을의 사회 구조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1912년 당산동 — 성씨별 토지 소유 필지 수
김씨
85필지
이씨
42필지
문씨
32필지
오씨
23필지
조씨
17필지
박씨
16필지
정씨
12필지
최씨
12필지
장씨
10필지
김씨가 85필지로 압도적인 1위다. 2위 이씨(42필지)의 두 배, 3위 문씨(32필지)의 거의 세 배다. 당산동은 김씨 가문이 강하게 주도하는 마을이었다. 김씨 가문이 마을의 혼례, 제사, 공동체 의사 결정을 이끌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목록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문씨 32필지와 오씨 23필지다. 다른 시리즈 동네들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성씨들이 당산동에서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당산동이 특정 씨족의 완전한 집성촌이 아니라 다양한 성씨가 공존하던 혼합 마을이었음을 보여준다. 밭 마을 특성상 이웃 마을에서 소작을 위해 들어온 사람들이 다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85필지를 가진 김씨 가문이 당산동의 밭 경작과 마을 운영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을지 상상해보라. 고지도와 토지 대장을 활용한 지표조사에서 성씨별 필지의 위치를 파악하면, 마을 구조·골목길·집의 배치를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다.
06 국유지 36필지의 의미 — 국가 권력의 지형도
국유지가 36필지. 전체 367필지 중 9.8%다. 이 숫자는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마을들 중 가장 높은 국유지 비율 중 하나다. 왜 당산동에 이렇게 많은 국유지가 있었을까.
몇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한강 연안이라는 지형적 특성상 제방·수리 시설 관련 국유지가 많았을 수 있다. 둘째, 당시 영등포 일대는 공업 지대로의 전환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총독부가 미래 공장 부지나 철도 관련 시설을 위해 땅을 미리 확보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이후 당산동 일대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기도 했고, 철도청 영등포공작소가 들어서기도 했다. 36필지의 국유지는 그 변화의 씨앗이었다.
"국유지는 단순한 국가 소유지가 아니라, 이 땅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 것인지를 예고하는 지표였다. 1912년 당산동의 36필지 국유지는 훗날 군부대가, 철도 시설이, 영등포구청이 들어서는 자리의 예고편이었다."
07 일본인 25필지 — 식민지 경제 구조의 침투
일본인 25필지가 말하는 것 — 1912년 당산동의 불균형
1912년 당산동에서 일본인이 소유한 25필지는 전체의 6.8%다. 수치만 보면 크지 않지만, 토지 소유를 통한 권력의 의미를 생각하면 다르다. 전체 성씨 중 9위인 장씨(10필지)보다 일본인(25필지)이 더 많은 땅을 가졌다. 1912년은 강점 2년째. 아직 대규모 수탈이 본격화되기 전이었지만, 일본인들은 이미 당산동 같은 넓은 밭 마을에까지 손을 뻗고 있었다. 이 25필지는 이후 더 빠르게 늘어났을 것이다.
일본인 소유 25필지와 국유지 36필지를 합치면 61필지, 전체의 16.6%가 조선인 개인이 아닌 세력의 손에 있었다. 거기에 마을 소유지 1필지를 더하면, 약 62필지가 사적 조선인 소유가 아닌 땅이었다. 6명 중 1명꼴로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농사를 짓거나 살았다는 뜻이다.
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일본인 소유 필지를 조사하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건물의 축조 방식, 사용된 건축 자재, 배치 구조가 조선 전통 가옥과 다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가 문화층에서 확인되면, 식민지 시대 건축 문화와 생활 방식의 변화를 물질적으로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08 발굴조사로 당산동을 파보면 무엇이 나올까

당산동 발굴조사 — 지역별 기대 유물 예측
밭 지역
농기구(쟁기·낫·호미 파편), 밭 배수로 흔적, 논두렁 경계, 씨앗 흔적이 남은 토양 층위
집터 주변
기와 조각, 주춧돌 자리, 아궁이 흔적, 생활 도자기 파편, 우물 터, 담장 석렬
사사지 주변
무덤 구조물, 비석 파편, 부장 도자기, 제기류, 인골 흔적
잡종지
식생 변화 흔적, 물길 자취, 토양 변화, 공터 이용 흔적
일본인 소유지
일본식 건축 자재(근대 기와·벽돌), 전통 가옥과 다른 배치 구조, 문화층의 시대적 차이
당산동처럼 밭이 91%를 차지했던 지역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된다면, 가장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밭 층위다. 농경지는 수백 년간 사람의 손이 닿은 문화층이 켜켜이 쌓여 있다. 밭이었던 층에서는 농사 도구의 파편, 밭의 배수로나 물길, 씨앗이나 식물 잔해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09 서울 성공 사례 — 청진동과 풍납동이 가르쳐준 것
서울에서는 이미 여러 발굴 성공 사례가 있었다. 공평구역 청진동 발굴에서는 조선 전기부터 근대까지의 문화층이 확인됐고, 특히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와 일성정시의 같은 귀중한 금속 유물이 출토됐다. 이 조사를 통해 필지 경계, 옛 도로, 공동 우물, 담장석렬, 배수로가 드러나면서 당시 마을 구조 전체를 복원할 수 있었다.
풍납동 토성 발굴에서는 백제시대 주거지, 목조 우물, 방어 시설 등이 확인되면서 한성 백제 시기부터 이 땅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만들어졌다. 두 사례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다. 발굴은 파괴가 아니라 재발견이라는 것이다.
당산동도 마찬가지다. 1912년의 321필지 밭 아래에는 그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 한강 남안 영등포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당산동의 땅속에서 우리가 아직 모르는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10 문화재 지표조사, 어떻게 의뢰하나

지표조사·발굴조사 의뢰 전 준비할 것들
① 옛 지도 및 토지 대장 확보 — 1912년 전후의 고지도와 토지 대장을 수집한다. 지목(밭·임야·주거지·잡종지·사사지), 소유자 성씨, 필지 크기와 위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다. ② 현장 조사 가능성 확인 — 재개발 예정지인지, 아직 건물이 없는 빈 땅인지, 지하 공사가 예정되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한다. ③ 관할 기관 문의 — 국가유산청 민원포털 또는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를 통해 조사 의뢰 절차와 국비 지원 가능 여부를 확인한다. 소규모 공사는 국비 지원 발굴 제도를 활용하면 비용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당산동처럼 국유지 36필지가 기록된 지역은 이런 조사 요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높다. 공적 소유 또는 행정적 기록이 잘 남아 있는 곳은 보존 승인이나 조사 허가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 관심이 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다.
"한 뼘만 땅만 파도,당신의 발밑에 100년이 숨 쉬고 있다"
마무리 — 땅이 기억하는 것들
1912년 당산동의 땅은 단순한 수치 이상의 이야기다. 삶과 죽음, 공동체와 개인,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그 위에 쌓여 있다. 321필지의 밭에서 손을 더럽히며 일하던 농부들, 39필지의 집터에서 웃고 울던 가족들, 사사지 앞에서 조상에게 절을 올리던 후손들. 그리고 그 위로 조용히 드리워진 일본인 25필지의 그림자.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이야기를 꺼내주는 도구다. 도로 하나, 건물 하나를 짓기 전에 잠시 멈추고 이 땅이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 그것이 우리가 문화재 조사에 힘을 쏟아야 하는 이유다.

1912년 당산동의 밭에서 씨앗을 뿌리던 그 손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손들이 일군 땅은 지금도 당신의 발 아래에 있다.
321필지의 밭, 39필지의 집터, 85필지를 거느린 김씨 가문의 기억. 그것들이 콘크리트 아래 잠들어 있다가 발굴조사의 삽 끝에 다시 세상으로 나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오늘 당산역에서 내려 걷는다면, 잠깐 발을 멈추고 발 아래를 한번 바라봐 주길 바란다. 100년이 숨 쉬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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