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성수2가, 그 땅에 숨겨진 이야기들
- 서울 HI
- 6일 전
- 3분 분량
목차
성수2가, 100년 전의 풍경
집, 무덤, 산, 밭: 성수2가의 지형도
그 땅을 지킨 사람들: 성씨별 땅 소유 이야기
왜 지금도 이 이야기가 중요할까?
과거와 현재, 성수2가를 잇는 다리

1912년 성수2가, 그 땅에 숨겨진 이야기들
100년 전, 서울 성수2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지금은 트렌디한 카페와 힙한 공장이 즐비한 성수동. 하지만 1912년,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논과 밭이 펼쳐진 들판, 그 사이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집들, 그리고 조용히 잠든 무덤들. 그 땅 위를 밟으며 살아간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어떤 삶을 꾸렸을까?
이 글은 1912년 성동구 성수2가의 기록을 바탕으로, 그 시절의 풍경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히 되살려본다. 준비됐나?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 성수2가로 떠나보자!
1. 성수2가, 100년 전의 풍경
1912년, 지금의 성수2가는 면적이 무려 2,171,732㎡에 달하는 광활한 땅이었다.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넓은 땅이 있었다니, 상상이 가나? 이곳은 지금처럼 고층 빌딩이나 세련된 거리가 아닌,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논과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로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산이 자리 잡고, 그 언덕 아래엔 무덤들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땅을 일구며, 가족을 지키며, 세대를 이어가며 살아갔다.
그 시절 성수2가는 단순한 마을이 아니었다. 그곳은 삶의 터전이자, 역사의 기록이었다. 지금 우리가 걷는 이 땅 아래, 100년 전 사람들의 땀과 꿈이 스며있다.
2. 집, 무덤, 산, 밭: 성수2가의 지형도
그럼, 1912년 성수2가의 구체적인 풍경을 하나씩 들여다보자. 이 땅은 단순한 흙덩어리가 아니었다. 각각의 용도로 나뉜 필지들은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집: 6필지, 18,000㎡
성수2가에는 집이 있던 대지가 6필지, 18,000㎡에 달했다. 숫자로 보면 작아 보이지만, 이건 그 시절 기준으로 꽤 큰 규모다. 집이라고 해봤자 지금처럼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 초가집이나 기와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집들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아침이면 문을 열고 나와 논밭으로 향하는 농부들, 저녁이면 마당에 모여 밥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가족들. 그들의 일상은 단순했지만, 그 안엔 따뜻한 삶의 온기가 있었다.
무덤: 5필지, 55,749㎡
놀랍게도, 성수2가에는 5필지, 55,749㎡에 달하는 무덤이 있었다. 이건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그 마을의 역사와 조상들의 흔적이었다. 무덤은 대개 마을 외곽이나 언덕에 자리 잡았을 거다.
이 무덤들은 누군가의 부모, 조부모, 혹은 더 먼 조상들의 안식처였다. 매년 제사를 지내며 그들을 기렸을 후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무덤들은 단순한 흙무더기가 아니라, 가족의 사랑과 존경이 담긴 공간이었다.
산: 3필지, 101,345㎡
성수2가에는 3필지, 101,345㎡의 임야, 즉 산이 있었다. 이 산은 마을의 배경이자,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자원이었다.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땔감을 구하고, 때로는 약초를 캐러 다녔을 거다.
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터전이자, 아이들이 뛰놀던 놀이터였을지도 모른다. 산속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새들의 지저귐. 그 소리는 100년 전 성수2가의 일상적인 배경음악이었을 거다.
밭: 312필지, 1,996,637㎡
가장 압도적인 숫자는 바로 312필지, 1,996,637㎡에 달하는 밭이다. 성수2가의 거의 대부분이 농경지였던 셈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쌀, 보리, 콩 같은 작물을 키웠다.
밭은 단순한 농지가 아니었다. 그건 생존의 기반이자, 마을의 미래였다. 땀 흘려 일군 작물로 가족을 먹이고, 남는 걸 팔아 생계를 꾸렸다. 이 밭에서 흘린 땀방울 하나하나가 오늘의 성수동을 있게 한 토대가 됐다.
3. 그 땅을 지킨 사람들: 성씨별 땅 소유 이야기
이제, 그 땅 위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1912년 성수2가에는 다양한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땅을 소유하며 삶을 꾸렸다. 그들의 이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이 땅의 주인공이었다.
이씨: 16필지
가장 많은 필지를 소유한 건 이씨였다. 무려 16필지를 차지하며, 성수2가의 큰손(?)으로 자리 잡았다. 이씨 집안은 아마 마을에서 꽤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을 거다. 논밭을 일구고, 집을 짓고, 무덤을 관리하며 마을의 중심 역할을 했을지도.
김씨: 9필지
다음은 김씨로, 9필지를 소유했다. 김씨 집안도 만만치 않은 규모로 땅을 관리했다. 아마 이씨와 김씨는 마을에서 서로 경쟁하며, 때로는 협력하며 살아갔을 거다.
손씨, 연씨, 윤씨,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
손씨(6필지), 연씨(4필지), 윤씨(3필지), 신씨(2필지), 그리고 노씨, 오씨, 조씨(각 1필지)까지. 다양한 성씨들이 성수2가의 땅을 나눠 가졌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터전에서 땀 흘리며, 가족을 위해, 마을을 위해 살았다.
이 성씨들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다. 그들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세대를 이어가며 성수2가의 역사를 썼다. 그들의 후손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이 땅의 기억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4. 왜 지금도 이 이야기가 중요할까?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아마 성수동의 트렌디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그 거리를 걸으며 이 글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밑을 생각해본 적 있나? 그 땅 아래, 100년 전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성수2가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건 우리의 뿌리이자,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삶의 토대다. 이 땅에서 땀 흘린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성수동이 있을 수 있었다.
더구나, 이 기록은 지금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수동에서 새로운 건물을 짓거나 개발을 하려면, 과거의 무덤이나 유적을 조사해야 한다. 발굴조사나 시굴조사는 단순한 공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지키는 일이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5. 과거와 현재, 성수2가를 잇는 다리
100년 전 성수2가는 논과 밭, 집과 무덤, 산과 사람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그곳에서 이씨, 김씨, 손씨 같은 사람들은 땅을 일구며 꿈을 키웠다. 그리고 지금, 그 땅 위에는 세련된 카페와 공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는 단절된 게 아니다. 우리가 성수동의 거리를 걷고, 그곳에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 때, 100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이 글을 읽으며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었나? 성수2가의 옛이야기가 궁금해졌다면, 다음엔 그 거리를 걸으며 한 번 상상해보자. 발밑에 스며든 그들의 땀과 꿈을. 그리고 그 땅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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