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성동구 성수2가, 그 땅에 숨겨진 이야기들
- 2025년 4월 25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4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문화재 발굴문화재 지표조사성수동 역사서울 문화유산
지금 당신이 마시는 그 커피 한 잔 아래에, 100년 전 사람들의 삶이 잠들어 있다 — 1912년 성수2가의 땅 이야기
이 글을 읽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성수동 카페 어딘가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면, 잠깐 발 아래를 상상해보세요.
그 바닥 아래에, 100년 전 누군가가 씨앗을 심고, 무덤을 지키고, 자식을 키웠다면요?
그 이야기를 지금 시작합니다.
목차
1.1912년, 성수2가로 가는 타임머신
2.숫자로 읽는 성수2가의 지형 — 집·무덤·산·밭의 기록
3.그 땅의 주인공들 — 성씨별 소유 이야기
4.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왜 이 기록이 지금도 살아있나
5.성공 사례 — 땅을 파니 시간이 나왔다
6.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 — 우리가 이 이야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1. 1912년, 성수2가로 가는 타임머신
지금 성수동은 서울에서 가장 힙한 동네 중 하나입니다. 폐공장이 감각적인 갤러리로 바뀌고, 낡은 골목에는 세련된 카페들이 줄지어 들어섰죠. 주말이면 SNS 인증샷을 찍으려는 MZ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세련된 거리의 발밑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으신가요?
1912년, 지금의 성수2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콘크리트도 없고, 카페도 없고, 갤러리도 없었습니다. 그저 드넓은 논과 밭, 작은 집들, 조용히 잠든 무덤들, 그리고 그 사이를 묵묵히 걸어 다니던 사람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 seoulheritage.org는 바로 이 1912년의 기록을 하나씩 꺼내어 정리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가 되는 이 역사 기록들은,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건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고, 오늘의 서울을 있게 한 뿌리입니다.
자, 이제 함께 1912년 성수2가로 떠나봅시다. 타임머신의 문이 열립니다.
2,171,732
총 면적 (㎡)
326
총 필지 수
312
밭 필지 수
100년+
기록의 시간

2. 숫자로 읽는 성수2가의 지형 — 집·무덤·산·밭의 기록
1912년 성수2가는 총 2,171,732㎡라는 어마어마한 면적을 자랑했습니다. 지금의 성수동 어디에서도 이 넓이를 체감하기는 어렵겠지만, 당시 이 땅은 각각의 쓰임에 따라 꼼꼼히 나뉘어 기록되었습니다. 그 기록 안에는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집 — 6필지, 18,000㎡
성수2가에는 집이 있던 대지가 6필지, 면적으로는 18,000㎡에 달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적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에는 초가집과 기와집이 그 넓이를 채우며 마을의 온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아침이면 문을 열고 논밭으로 나서던 농부들, 저녁이면 마당에서 밥을 나누던 가족들. 그 소박한 집들 안에서 세대를 이어가는 삶이 조용히 흘러갔습니다.
무덤 — 5필지, 55,749㎡
놀랍게도 성수2가에는 5필지, 무려 55,749㎡에 달하는 묘지가 있었습니다. 집보다 훨씬 넓은 면적이 무덤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장례 문화를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을 외곽과 언덕 아래에 자리 잡은 이 무덤들은 단순한 흙무더기가 아니었습니다. 해마다 제사를 올리고, 조상을 기리며, 가문의 역사를 이어가던 공간이었습니다.
산 — 3필지, 101,345㎡
성수2가에는 3필지, 101,345㎡의 임야가 있었습니다. 이 산은 마을 사람들의 생존을 지탱하는 자원 창고였습니다.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땔감을 구하고, 약초를 캐러 다녔습니다. 아이들이 뛰놀던 놀이터였을 수도 있고, 마을을 지키는 든든한 배경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산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100년 전 성수2가의 일상적인 배경음악이었겠지요.
밭 — 312필지, 1,996,637㎡
가장 압도적인 숫자는 역시 밭입니다. 312필지, 1,996,637㎡. 성수2가 전체 면적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농경지입니다. 이 밭에서 쌀과 보리, 콩 같은 작물이 자랐고, 그 수확이 마을 사람들의 한 해를 먹여 살렸습니다. 흙을 갈아엎던 쟁기 소리, 씨앗을 심던 거친 손, 수확의 기쁨을 나누던 이웃들의 웃음소리. 그 밭은 단순한 농지가 아니라, 오늘의 성수동이 존재할 수 있었던 삶의 토대였습니다.
성수2가 1912년 토지 구성 요약
밭 312필지 (1,996,637㎡) · 산 3필지 (101,345㎡) · 무덤 5필지 (55,749㎡) · 집 6필지 (18,000㎡)
총 326필지 · 합계 약 2,171,732㎡

3. 그 땅의 주인공들 — 성씨별 소유 이야기
땅은 그냥 땅이 아닙니다. 그 땅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습니다. 1912년 성수2가의 토지 기록을 들여다보면, 다양한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이 땅을 나눠 갖고 살아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은 필지를 소유했던 건 이씨 집안이었습니다. 무려 16필지를 차지하며 성수2가의 큰 축을 이루고 있었죠. 그 다음으로 김씨가 9필지를 소유하며 마을의 또 다른 중심을 이루었고, 손씨(6필지), 연씨(4필지), 윤씨(3필지), 신씨(2필지), 그리고 노씨·오씨·조씨(각 1필지)까지. 서로 다른 성씨를 가진 이들이 한 마을에서 땅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이 이름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이씨 어르신은 아침마다 제일 먼저 밭으로 나섰을지도 모르고, 김씨네 아이들은 손씨네 아이들과 뛰어놀았을지도 모릅니다. 윤씨 할머니는 이웃집에 떡을 돌렸을 수 있고, 연씨 집안은 마을의 제사를 함께 주관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씨가 다르고 필지가 달라도, 그들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을 밟으며 함께 살았습니다.
그들의 후손은 지금 어딘가에서 이 땅의 기억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수동의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바로 당신이, 어쩌면 그 후손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4.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왜 이 기록이 지금도 살아있나
1912년의 토지 기록이 왜 지금 중요할까요? 그저 오래된 문서 하나일 뿐인데, 왜 seoulheritage.org 같은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이렇게 공들여 정리하고 있는 걸까요? 그 이유는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중요합니다.
서울에서 새로운 건물을 짓거나 지하철을 파거나 도로를 낼 때, 반드시 먼저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지표조사란 해당 부지의 지표면을 살피고, 과거의 유물이나 유구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그 결과에 따라 시굴조사, 표본조사, 그리고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1912년의 토지 기록은 결정적인 단서가 됩니다. 그 땅이 무덤이었는지, 농경지였는지, 아니면 집터였는지를 미리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부장품이 묻혀있을 가능성이 있고, 집터 아래에는 당시 생활용품이나 건물의 기초석이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이 정보가 없다면 문화재 발굴 기관은 말 그대로 눈을 감고 땅을 파는 셈입니다.
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역사 지적 데이터를 하나씩 정리하며, 향후 문화재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제공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데이터는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앞으로 서울의 땅속에서 무엇이 나올 수 있는지를 예측하게 해주는 살아있는 지도입니다.
문화재 조사 단계 안내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본발굴조사
지표조사: 땅 표면에서 유물·유구 흔적 관찰 및 기록.
시굴조사: 소규모 굴착으로 지층과 유물 유무 확인.
표본조사: 일정 구역을 대상으로 유물 분포 파악.
본발굴조사: 전면 발굴로 유적 전체를 기록·보존.

5. 성공 사례 — 땅을 파니 시간이 나왔다
말로만 들으면 와닿지 않을 수 있으니, 실제 사례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서울 곳곳에서는 이미 문화재 발굴조사를 통해 놀라운 결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공 사례 1 — 마포 서교동
트렌디한 홍대 인근 서교동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하자, 지하에서 조선시대 건물지와 전기 도자기, 심지어 삼국시대 토기가 출토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도시 골목이었지만, 땅속에는 수백 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1912년 토지 기록을 토대로 지표조사를 선행한 덕분에 발굴 방향을 정확히 잡을 수 있었습니다.
성공 사례 2 — 구로구 구로동
구로동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는 1920년대 지목 기록과 비교 분석하는 과정에서 연못과 창고 유구가 드러났습니다. 개발 사업자와 지자체, 그리고 문화재 발굴 기관이 협력하여 그 흔적을 보존하고, 공원 조성 시 유구를 공공 예술 작품으로 활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과거의 연못이 지금의 공원 속에서 다시 숨을 쉬게 된 것입니다.
성공 사례 3 — 종로구 행촌동
행촌동 재개발 과정에서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단계별로 진행한 결과, 조선시대 주거 유구가 연속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사례는 세 단계 조사를 착실히 밟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모범으로 지금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역사 기록을 먼저 검토하고,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충분히 거친 뒤 발굴에 착수했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이 모든 성공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삽을 들기 전에, 기록을 먼저 들여다봤다는 것입니다. 1912년의 토지 기록, 지표조사의 결과, 시굴조사의 데이터. 이것들이 하나씩 쌓일 때, 비로소 땅속의 시간이 안전하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6.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 — 우리가 이 이야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100년 전 성수2가의 이씨, 김씨, 손씨는 그 땅에서 무엇을 꿈꿨을까요? 아마 자식들이 더 잘살기를 바랐을 겁니다. 더 넓은 밭을 갖고 싶었을 테고, 더 든든한 집을 짓고 싶었을 겁니다. 그들의 꿈은 단순했지만, 그 꿈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서울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성수동을 걷는 우리는 그들의 꿈 위에 서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이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트렌디한 카페 하나를 볼 때도, 그 아래에 100년 전 밭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 공간이 조금 더 깊고 입체적으로 느껴지지 않나요?
문화재 발굴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는 단순히 옛날 물건을 찾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건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일이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를 가늠하는 일입니다. 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의 기록을 하나씩 꺼내어 세상에 내놓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성수2가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땅속 어딘가에는 아직 꺼내지 못한 시간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다음에 성수동 거리를 걸을 때, 발밑을 한 번 상상해보세요. 그 상상이, 어쩌면 우리 모두를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지도 모릅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위에 무엇을 짓든,
아래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는 파고, 기록하고, 기억한다.
이 글이 도움이 되셨나요?서울 성수동의 역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seoulheritage.org를 방문해보세요.서울 25개 구의 1912년 역사 기록을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발굴조사 더 알아보기 ↗ 지표조사 신청 방법 ↗
성수동역사 서울문화유산 문화재발굴 문화재지표조사 발굴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성수2가 서울역사 1912년서울 seoulheritage 문화유산보존 성동구문화유산 도시발굴 서울지표조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