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동작구 대방동, 땅이 말해주는 역사와 사람들의 삶
- 2025년 9월 25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7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리포트
지금 당신이 대방역에서 내린 그 자리,100년 전엔 황금빛 논이었다
683필지·207만㎡. 1912년 동작구 대방동이 품고 있던 숫자 뒤에는, 이름 없는 농부들의 삶과 공동체가 숨어 있었다.
683
총 필지 수
2,073,024
총 면적(㎡)
88%
농경지 비율
17
일본인 소유 필지
목차 · Contents
서론 땅의 기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01 1912년 대방동의 전체 규모와 의미
02 논과 밭, 농업 중심의 생활상
03 집과 마을의 풍경, 그리고 사람들
04 무덤과 사사지, 기억과 신앙의 자리
05 임야와 산, 자연과 공존한 흔적
06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마을 공동체의 구조
07 국유지와 일본인의 토지 소유, 시대의 그림자
08 오늘날 문화재 조사와 발굴의 중요성
09 성공 사례와 현장 이야기
결론 땅에 새겨진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우리가 무심히 밟고 지나는 이 땅이, 사실 수백 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숨결과 역사를 켜켜이 품고 있다면 어떨까.
당신이 오늘 대방역에서 내려 카페를 찾아 걷는 그 골목길. 불과 100여 년 전에는 이른 새벽 안개 속에서 농부들이 삽을 들고 논으로 나가던 흙길이었다. 지금은 아파트 외벽에 가려진 하늘 아래, 그 시절의 이야기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 글은 1912년 동작구 대방동의 토지 기록을 따라 그 답을 찾아가는 시간 여행이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수집하고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683필지 2,073,024㎡라는 숫자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단순한 역사 공부가 아니다. 이 기록이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왜 중요한지를 가장 생생하게 설명해주는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으면, 매일 걷는 그 거리가 완전히 다르게 보일 것이다.

서론 — 땅의 기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 단순한 흙덩이가 아니다. 그 위에는 수백 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땀과 꿈, 그리고 역사의 흔적이 쌓여 있다. 1912년 동작구 대방동의 토지 기록을 들여다보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도심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농경 사회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논과 밭, 집터와 무덤, 산과 사사지까지. 이 기록들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 곳곳에서는 문화재 발굴 기관의 조사원들이 삽을 들고 그 흔적을 찾아 땅을 파고 있다. 1912년의 기록은 그 발굴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되어준다.
01 1912년 대방동의 전체 규모와 의미
1912년은 일본의 조선 강점이 본격화된 지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일본 총독부는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 땅의 면적과 소유 현황을 낱낱이 정리해 나갔다. 표면상으로는 근대적 지적 제도를 구축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식민 지배를 위한 토지 장악의 첫 단계였다. 대방동의 기록 역시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
당시 대방동은 총 683필지, 약 2,073,024㎡의 면적을 자랑했다. 이를 평수로 환산하면 약 62만 7천 평, 축구장 약 290개를 합쳐놓은 규모다. 지금의 대방동이 촘촘히 들어선 아파트와 도로, 상가로 가득 찬 것을 생각하면 그 시절의 광경이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그 광활한 땅의 대부분이 논과 밭이었다.
1912년 대방동 토지 현황 — 핵심 통계
총 필지 수683필지
총 면적2,073,024㎡ (약 62.7만 평)
논 (답)304필지 / 1,170,762㎡ (56.5%)
밭 (전)318필지 / 674,436㎡ (32.5%)
대지 (집터)32필지 / 65,676㎡ (3.2%)
임야25필지 / 136,582㎡ (6.6%)
분묘지3필지 / 25,005㎡ (1.2%)
사사지1필지 / 561㎡
국유지3필지
일본인 소유17필지
땅의 배분과 용도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활방식, 경제구조, 사회질서가 한 번에 보인다. 논과 밭이 전체의 89%에 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1912년 대방동이 얼마나 철저한 농경 마을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제 그 땅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100년 전 대방동을 되살려보자.
02 논과 밭, 농업 중심의 생활상

논이 304필지에 1,170,762㎡, 밭이 318필지에 674,436㎡. 두 숫자를 합치면 전체 면적의 89%를 넘는다. 이 논밭이 만들어낸 대방동의 풍경을 상상해보라. 봄이면 논에 물이 들어차고 개구리 소리가 가득했을 것이다. 여름 모내기철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무릎까지 흙탕물에 잠긴 채 줄을 맞춰 모를 심었고, 가을이면 황금빛 벼이삭이 바람에 출렁였다.
논이 차지하는 면적이 밭보다 훨씬 넓었다는 사실은 쌀 생산이 이미 대방동 농업의 핵심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쌀은 귀한 작물이었다. 많은 양이 지주에게 소작료로 납부되었고, 실제로 농민들의 밥상에 오른 것은 밭에서 기른 보리, 조, 콩, 고구마 같은 잡곡류가 더 많았다. 그것이 1912년 대방동 농촌의 현실이었다.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 과정에서 발굴되는 옛 농경지의 흔적들은 바로 이런 역사를 구체적으로 복원하는 데 핵심적인 자료가 된다. 논두렁의 방향, 농수로의 위치, 밭이랑의 흔적 하나하나가 당시 마을 구조를 되살리는 단서다.
03 집과 마을의 풍경, 그리고 사람들
1912년 대방동에서 집이 지어진 대지는 32필지, 65,676㎡였다. 전체 면적의 3.2%에 불과하다. 지금의 대방동이 빼곡한 건물들로 채워진 것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실로 극적이다. 이 작은 집터 위에서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상상하면,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가 느껴진다.
집들은 대부분 황토벽에 짚이엉을 얹은 초가였을 것이다. 마당에는 장독대가 있었고, 집 한쪽에는 텃밭이 작게 딸려 있었다. 아이들은 흙마당을 뛰어다녔고, 저녁이면 아궁이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마을 전체가 밥 짓는 냄새로 가득 찼다. 이웃집과 담장을 맞대고 살면서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지금은 좀처럼 보기 힘든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32필지라는 숫자가 품고 있는 것은 단순한 주거 면적이 아니다. 그 안에는 결혼식과 장례식, 아이의 첫 울음소리와 노인의 마지막 숨소리가 모두 들어 있다."
시굴조사와 표본조사를 통해 확인되는 옛 가옥의 터는 당시 마을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밝히는 핵심 단서다. 아궁이 자리, 기와 조각, 생활 도구의 파편 하나도 당시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귀중한 증거가 된다.
04 무덤과 사사지, 기억과 신앙의 자리

3필지 25,005㎡의 분묘지와 1필지 561㎡의 사사지. 수치만 보면 대방동 전체에서 작은 비율이지만, 이 두 공간이 담고 있는 의미는 어느 논밭보다도 깊고 넓다. 무덤과 절터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신앙, 그리고 공동체의 정신적 중심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조선 사회에서 조상의 무덤은 살아있는 후손들과 끊임없이 교감하는 공간이었다. 음력 명절마다 가족들이 산에 올라 벌초를 하고, 제물을 차려 차례를 지냈다. 그 과정을 통해 혈연의 결속이 다져지고, 마을 공동체 의식이 깊어졌다. 지금도 추석이면 고향을 찾아가는 한국인의 문화적 DNA는 1912년 대방동의 그 분묘지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사지, 즉 절터가 기록에 등장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조선 시대 내내 억압받았지만 민간 신앙으로 깊이 뿌리를 내렸던 불교의 흔적이다. 마을 사람들이 농사의 풍년을 빌고, 아픈 가족의 쾌유를 기원하며 찾아들었을 공간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과정에서 종종 발견되는 묘지와 신앙 유적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05 임야와 산, 자연과 공존한 흔적
25필지 136,582㎡의 임야는 지금의 공원이나 뒷산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겨울을 버티게 해주는 생존 창고였다. 모든 난방과 취사에 필요한 장작과 숯이 이 산에서 나왔다. 봄에는 산나물을 뜯어 반찬을 만들고, 가을에는 도토리와 버섯을 채취해 겨울 식량을 비축했다.
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였고, 마을을 외부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의 공간이기도 했다. 동작구 일대는 한강을 끼고 있어 물길이 농업에 유리했지만, 동시에 외적의 침입에 취약한 지형이기도 했다. 뒷산의 임야는 마을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전감을 주는 울타리였다. 오늘날 발굴조사에서 드러나는 옛 산성이나 임도의 흔적은 바로 그 당시의 생활환경을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06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마을 공동체의 구조

1912년 대방동에서 누가 얼마나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면, 마을의 사회 구조가 또렷이 드러난다. 성씨별 소유 현황이 마을의 권력 지형도였다.
1912년 대방동 — 성씨별 토지 소유 필지 수
이씨
154필지
김씨
93필지
임씨
66필지
한씨
46필지
정씨
34필지
조씨
27필지
이씨가 154필지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는 대방동이 이씨 집성촌이었거나, 이씨 문중이 오랜 세월 마을을 이끌어왔음을 보여준다. 씨족 마을에서 땅은 곧 권력이었다. 가장 넓은 땅을 가진 집안이 혼례와 제사, 마을 의사 결정까지 주도했다.
하지만 이 구조는 억압의 수단이기도 했고, 동시에 보호의 네트워크이기도 했다. 이씨 가문이 주도한다 해도, 김씨 임씨 한씨 가문들도 나름의 필지를 보유하며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성씨가 달라도 같은 마을에서 수백 년을 함께 살아온 이들에게는 공유된 기억과 의례가 있었고, 그것이 마을을 하나로 묶었다. 오늘날 아파트 단지에서 이웃의 이름조차 모른 채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얼마나 다른가.
07 국유지와 일본인의 토지 소유, 시대의 그림자
3필지의 국유지가 있었지만, 더 눈에 띄는 것은 일본인의 토지 소유였다. 일본인이 17필지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식민지 시대의 그림자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683필지 중 17필지라면 약 2.5%, 수치로는 작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시작이었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소유 관계가 법적으로 정리되자, 일본인 지주들은 그 구조를 역으로 활용했다. 법적 절차를 이용하거나 헐값에 매입하는 방식으로 조선 땅을 조금씩 잠식해 나갔다. 조선인 농민들은 자신의 땅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벼를 거둬도, 수확물의 절반 이상을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1912년 대방동의 17필지는 그 비극적 변화의 조용한 예고였다.
이후 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나타나는 근대기 유물과 건축물은 단순한 생활 흔적을 넘어 그 억압과 변화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의 기초, 변형된 농경지의 흔적, 사라진 마을 제단의 자리. 이 모든 것이 발굴을 통해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한다.
08 오늘날 문화재 조사와 발굴의 중요성

1912년 대방동의 토지 기록은 단순히 옛날 땅의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왜 지금 이 순간에도 꼭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가장 직접적인 근거다. 우리가 아파트와 도로를 건설하기 전에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유는 그 땅 속에 잠들어 있는 역사의 파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문화재 지표조사란 개발 예정지에서 공사가 시작되기 전, 그 지역에 문화재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과정이다. 전문가들이 1912년 토지 대장 같은 역사 문헌을 검토하고, 현장을 걸으며 지표면에 드러나는 유물의 흔적이나 지형의 특성을 살핀다. 지표조사에서 문화재 존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면, 시굴조사와 표본조사를 거쳐 실제로 땅 일부를 파서 유구와 유물의 존재 여부를 확인한다. 이 모든 과정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문화재 발굴 기관이다.
알아두면 유용한 정보 — 국비 지원 발굴조사
소규모 건축·개발 사업을 진행할 경우 국가유산청의 국비 지원 제도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대지 면적 792㎡ 이하 단독주택이나 2,644㎡ 이하 농·어업 시설 등이 지원 대상입니다. 국가유산청 민원포털 또는 국가유산 진흥원을 통해 신청할 수 있으며, 발굴의 필요성과 예상 비용을 구체적으로 작성할수록 승인 확률이 높아집니다.
발굴조사 의뢰는 개인이나 사업자 누구나 할 수 있다. 특정 부지에 건물을 짓거나 토목 공사를 진행하기 전에, 해당 지역의 역사적 가능성이 걱정된다면 전문 기관에 문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역사를 지키는 일이 국가나 전문가만의 몫이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09 성공 사례와 현장 이야기
서울 지역에서는 실제로 공사 현장에서 문화재 발굴이 이루어져 단순한 땅이 역사적 가치로 바뀐 사례가 여럿 있다. 광화문 광장 조성 사업 당시 시굴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의금부 관련 건물 터와 배수로 유구가 확인됐다. 충분한 사전 조사 덕분에 해당 유구를 기록으로 남기고 일부는 현지 보존이 가능했다. 만약 조사 없이 바로 공사에 들어갔다면, 조선 시대 수백 년의 흔적은 포클레인 한 번에 사라졌을 것이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서울의 한 주택 재개발 현장에서 지표조사 결과 조선시대 주거지 흔적이 확인됐다. 이를 바탕으로 정밀 발굴조사가 진행됐고, 온전한 형태의 기와집 기초와 생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업 방향이 일부 수정되면서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동네의 뿌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발굴은 불편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열쇠였다.
대방동도 다르지 않다. 1912년 기록에 남은 25,005㎡의 분묘지, 561㎡의 사사지, 32필지의 집터는 어딘가에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기억은 땅 속에서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결론 — 땅에 새겨진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1912년 동작구 대방동의 땅은 683필지와 2,073,024㎡라는 숫자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그 숫자 속에는 논에서 허리를 굽히던 농부의 땀방울, 마당을 뛰어다니던 아이의 웃음, 명절이면 조상 앞에 절을 올리던 후손들의 정성,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쓸쓸한 그림자까지 모두 담겨 있다.
오늘날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는 단순히 과거를 캐내는 작업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뿌리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고,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선택이다. 대방동의 땅이 우리에게 말해주듯,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의 한 장을 써 내려가고 있다.
1912년 대방동의 논에서 모를 심던 그 손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손들이 일군 땅은 지금도 당신의 발 아래에 있다.
그 땅을 기억해주는 것. 이름 없이 살다 간 사람들의 삶을 기록으로 불러내는 것. 그것이 문화재 발굴조사의 진짜 의미이고, 우리가 역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진짜 이유다.
오늘 대방동 어딘가를 걷게 된다면, 잠깐 발을 멈추고 발 아래 땅을 한번 바라봐 주길 바란다. 그 땅이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아주 오래된,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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