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동작구 대방동, 땅이 말해주는 역사와 사람들의 삶
- 서울 HI
- 9월 25일
- 3분 분량
목차
서론 – 땅의 기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1912년 대방동의 전체 규모와 의미
논과 밭, 농업 중심의 생활상
집과 마을의 풍경, 그리고 사람들
무덤과 사사지, 기억과 신앙의 자리
임야와 산, 자연과 공존한 흔적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마을 공동체의 구조
국유지와 일본인의 토지 소유, 시대의 그림자
오늘날 문화재 조사와 발굴의 중요성
성공 사례와 현장 이야기
결론 – 땅에 새겨진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서론 – 땅의 기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 단순한 흙덩이가 아니다.
그 위에는 수백 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땀과 꿈, 그리고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1912년 동작구 대방동의 토지대장을 펼쳐보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도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농경 사회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논과 밭, 집터와 무덤, 산과 사사지까지. 이 기록들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1912년 대방동의 전체 규모와 의미
1912년 대방동은 683필지, 약 2,073,024㎡라는 거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의 아파트 숲과 도로가 들어선 자리에 당시에는 농토와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땅의 배분과 용도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활방식, 경제구조, 사회질서까지 읽어낼 수 있다.
논과 밭, 농업 중심의 생활상
대방동의 절반 이상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땅이었다. 논이 304필지 1,170,762㎡, 밭이 318필지 674,436㎡로 기록된다. 이는 당시 대방동 주민들의 삶이 농사에 의존했음을 잘 보여준다. 논은 마을 경제의 핵심이었고, 밭은 자급자족을 위한 채소와 곡식을 길러내는 터전이었다. 오늘날 지표조사를 통해 발굴되는 옛 농경지의 흔적은 당시 땅의 활용을 구체적으로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집과 마을의 풍경, 그리고 사람들
집터로 기록된 대지는 32필지, 65,676㎡였다. 규모만 보아도 당시 마을은 소규모 공동체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이 작은 집터 위에서 사람들은 농사일을 나누며 살았고, 아이들은 흙길을 뛰어다녔으며, 저녁이면 아궁이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시굴조사와 표본조사를 통해 확인되는 옛 가옥터는 마을의 구조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다.
무덤과 사사지, 기억과 신앙의 자리
3필지 25,005㎡의 분묘지와 1필지 561㎡의 사사지는 당시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신앙을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보여준다. 조상들의 무덤은 후손들에게 땅과 혈통의 정체성을 이어주는 상징적 장소였다. 사사지는 종교적 의례와 공동체적 믿음이 살아 숨 쉬던 공간이었다. 문화재 발굴조사 과정에서 종종 발견되는 묘지와 신앙 유적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한다.
임야와 산, 자연과 공존한 흔적
25필지 136,582㎡의 임야는 마을 사람들에게 땔감과 먹거리를 제공한 공간이었다. 산은 단순히 자연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였고, 때로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의 의미도 지녔다. 오늘날 발굴 조사에서 드러나는 산성이나 옛 임도는 당시 생활환경을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마을 공동체의 구조
토지대장은 성씨별 소유 현황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씨가 154필지, 김씨가 93필지, 임씨가 66필지, 한씨가 46필지, 정씨가 34필지, 조씨가 27필지 등 다양한 성씨가 땅을 나누어 소유했다. 이는 곧 혈연과 촌락 공동체가 땅을 중심으로 결속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을마다 주도적인 성씨가 있었고, 이들이 공동체의 질서를 이끌어갔다.
국유지와 일본인의 토지 소유, 시대의 그림자
3필지의 국유지가 있었지만, 더 눈에 띄는 것은 일본인의 토지 소유였다. 일본인들이 17필지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식민지 시대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이후 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나타나는 근대기 유물과 건축물은 단순한 생활 흔적을 넘어, 억압과 변화의 역사를 담고 있다.
오늘날 문화재 조사와 발굴의 중요성
이처럼 1912년 대방동의 토지 기록은 단순히 옛날 땅의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살아 있는 자료다. 우리가 아파트나 도로 공사를 하기 전 반드시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를 거치는 이유는 그 속에 묻혀 있는 역사의 파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성공 사례와 현장 이야기
서울 지역에서는 공사 현장에서 문화재 발굴이 이루어져, 단순한 땅이 역사적 가치로 바뀐 사례가 많다. 예를 들어 한 개발 부지에서 조선시대 주거지가 발견되면서 사업 방향이 바뀌고, 지역의 정체성을 되살린 경우가 있다. 발굴은 불편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열쇠다.
결론 – 땅에 새겨진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1912년 동작구 대방동의 땅은 수치와 필지로 기록되었지만, 그 속에는 농부의 땀방울, 아이들의 웃음, 조상을 기리는 정성, 그리고 시대의 그림자까지 모두 담겨 있다. 오늘날 문화재 발굴과 조사는 단순히 과거를 캐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뿌리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대방동의 땅이 우리에게 말해주듯,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의 한 장을 쓰고 있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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